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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6:1~11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다

LNCK 2022. 8. 25. 11:06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다 (로마서 6:1-11)│2022.08.21(일) - YouTube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다       롬6:1~11          2022.08.21.녹취


우리는 로마서 말씀을 통해서, 파스칼이 고백한 것처럼     주1) 파스칼의 고백
왜 복음이 불가항력적인 것인지, 
바울이 고백한 대로 왜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깨닫고 체험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에게는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롬1:1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왜 온 세상의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변화를 주는 복음인지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불의한 인간을,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써" 우리가 누린다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는 바로 그 모습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진정한 은혜를 보지도 못했고, 체험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더 마음대로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오해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죄만이 아니라,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다 용서되었다면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느냐? ... 라는 오해와 우려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알고 
사도 바울은 롬6:1절에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오직 믿음으로만 외롭게 되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여 진다'는 이 롬5:24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럼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6:1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요, 오류이다'는 것이죠. 

이러한 오류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성화 구원'이라는 중간 단계를 빼버리고 
'칭의 구원'에서 '영화 구원'으로 막바로 넘어가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인 거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의롭다 하시는 '칭의 구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죄를 짓는 데에서도 구원하시는, 

즉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성화 구원'까지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칭의 구원', '성화 구원', '영화 구원'을 
과거-현재-미래의 시제 별로 구분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로마서는 이러한 구조로, 우리에게 구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죠. 
구원은 받은 것이며, 또한 이루어가는 것이며, 또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과거에 받은 구원이 있고 *칭의 구원
현재 이루어져가는 구원이 있고  *성화 구원 
미래에 완성될 구원이 있습니다.  *영화 구원

그러나 이 모든 구원이 
바로 우리의 노력과 능력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죄를 용서받게 하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칭의 구원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화 구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 믿음은 

바로 죄를 이기게 하는 믿음이며, 

또한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 일어난 연속적인 변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결과들, 

우리에게 일어난 이 변화,
이 중요한 정체성의 변화를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롬6장부터 바로 그러한 변화된 정체성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6:2절에 바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하이라이트입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될 중요한 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을, 롬6장에 들어와서는 
'죄에 대해 죽은 우리'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6장 이하의 로마서의 말씀들은 
바로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변화를 경험하는가? .. 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 죽은 우리' 라는 이 말을 
우리 머릿속에, 우리 마음깊이 인식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죄에 죽은 우리' 라는 표현이 바로 
칭의 구원이, 성화 구원, 영화 구원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5장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 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날 때부터, 우리 모두는 그 죄를 유전으로 받았고 
또한 우리의 대표로 범죄한 아담의 그 죄의 영향력 아래,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담과 함께 죄 가운데 죽은 자들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같은 내용을 엡2장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 영원을 상실한 단절, 모든 축복을 잃어버린 상태를.. 죽음이라고 말하죠. 

원래 우리는 '아담과 함께 죄 가운데 죽은 자들' 이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과 구분 요.
이것은, 죄를 짓지 않을래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 
죄의 유전 가운데, 죄가운데 태어났기에 
우리가 아무리 잘 하고 있어도,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마치 가지가 잘려진 나무 가지처럼 
그리고 가지가 잘린 꽃송이처럼 
뿌리에서 단절된 가지는, 잠시 꽃이 피지만 
곧 죽은 꽃과 갖고, 죽은 가지와 마찬가지인 거죠.

이처럼 근본적인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존재는, 곧 죽은 자이죠. 
그렇게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우리는 죄 가운데 죽은 자들 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그 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되었다" -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난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럼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이 표현이, 의미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죄의 소욕이 더 이상 없어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또한 죄가 점점점 우리 안에 소멸되어 간다는 뜻도 아니고 
-우리가 자기 죄에 되어야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나의 옛사람이 죽음으로써 
(법적으로) 더 이상 내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것, 
죄가 우리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는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성화로 가는) 상태가 되었다.' 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죠. 

 

    성 어거스틴은 '죄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 네 단계로 설명했습니다. 

    1)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는 상태는, 죄가 없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였죠. 
    그때 죄를 지었죠.
   

    2) 이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죄가운데 태어남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 심지어 선한 행위를 해도 그 속에 죄가 있어요. 

    착한 일을 했을 때 누가 안 알아주면 섭섭하죠.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화가 날 수 있어요. 

    우리의 의조차도 더러운 옷과 같은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가운데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을 때 
    죄의 권세,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가 된거에요. 
    이것이 <성화 구원>의 단계입니다. 

    4) 마지막 <영화 구원>에서는 
    이제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에요. 
    왜냐면 죄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4단계의 상태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2)의 단계에서 3)의 단계로 옮겨오게 되었다는 거죠. 

<아담과 함께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들>이 되었다..는 말씀이에요. 

이제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은혜의 지배 아래, 그리스도의 의의 지배 아래 
그리스도의 생명의 지배 아래 존재하게 되었다.. 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됨으로.. 입니다. 

어떻게 연합 합니까? 
믿음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3개의 문장이 하나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6:8~10절,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 이게 선언적인, 먼저 중요한 말씀이에요. 
3~7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2절,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것을 역순으로 지금 6장에서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 → 3~7절 → 8~10절순으로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를 먼저 설명하고  *2절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3~7절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8~10절
이런 논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셨고  *8~10절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함께 죽은 자가 되었고  *3~7절
-결국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 라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죠.  *2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명확하게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하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데, 왜 죽으신 건가요?
   무엇을 위해 죽으셨는가요?' 라고 여러분에게 물어본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1) 첫째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위하여 죽으셨을 때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런 표현을 성경에서 사용합니다. 

고전15:3, 벧전3:18절을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죠.

그러므로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무슨 의미입니까?' 라고 물어온다면 
'예수님은 나의 죄, 너희 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라고 대답하시면 됩니다.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죄를 멸하기 위하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의가 주어지는 거에요.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게 되어 
우리를 의롭다 하시게 된 거죠. 

2)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죽으신 죽음' 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 라는 표현도 쓰는 겁니다. 롬6:10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할 때는    위1)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을 강조하고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위2) 
단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의 능력을 공급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십자가의 죽음의 효과를 
우리에게 2갈래로 나누어 설명한다는 거죠. 

넓은 의미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 하시게 되었고 
-죄에 대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게 되었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 있습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이 애매모호하면 안 돼요. 
두리뭉실하게 믿다 보면, 두리뭉실하게 살게 돼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명확하게 우리의 개념으로도 정립을 해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때, 정확한 복음을 깨달으면 정확한 삶이 나타나고 
능력 있는 삶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그 예수님과 함께 죽었을 때 
우리에게는 죄에 대하여 죽은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그랬다고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참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에게는 죄가 공격하였죠. 사단이 유혹하였죠. 

마4장의 광야의 시험처럼, 그것은 그 순간에만 예수님을 공격했던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공격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그 길에도 사단은 공격했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죄와 시험을 이기셨죠.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 모든 죄와 시험을 이길 능력이 없어요. 

왜냐면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가운데 죽은 자들 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지만 
우리가 죄를 이길 능력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음에 효과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죄에 대하여 죽은 죽음인 것은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신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시기 전에 예수님의 생명은 
참 인간의 생명이기 때문에, 한시적 생명인 겁니다.   주2)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하신 생명은 
영원한 생명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 생명을 나눠 줄 수 있는 생명이 되셨다는 거에요. 

그리고 더 이상 죄가 공격할 수 없고, 죄의 시험을 받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되셨기에 
우리에게 그 생명을 주신다는 거에요. 
그게 '죄에 대해 죽으셨다' 라는 의미에요.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 죽으신 그 생명으로 부활하셨기에 
그 생명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때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 생명이,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겁니다. 

이제 보다 상세하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는 이 변화를 
세 가지 다른 표현으로 설명함으로써,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죄에 대하여 죽은 자'란, 곧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기서 '세례'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우리 머릿속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물세례'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세례'라는 말에는, 보다 넓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요. 
'세례'는 '밥티조'인데, (영어 baptize는 헬라어를 음역한 것이죠)

이 말에 뜻은 '물에 푹 잠그다' 라는 뜻이에요.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죠. 장사됐다는 뜻이에요. 
옛 사람의 죽음을 선언하는 거죠. 

그런데 물세례는, 예식적인, 의식적인 거죠. 
입술에 고백이 있고, 또 함께 동의를 하지만 
실제 세례가 의미하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의식적이고, 세례 받아야 되겠다는 의무감으로 받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그런 형식적 세례를 뛰어넘는, 보다 근본적인 세례를 의미합니다. 

    6:3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세례를 받았다' 라고 할 때 
    이 '연합' 라는 단어의 헬라어 전치사는 '에이스'인데, 영어로는 into 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라는 단어가 실제로는 전치사 라는 거죠.    
    그래서 ESV 성경은 baptized into Christ로 번역하기도 했어요. (보통은 baptized with the Christ)

    'baptized into the Christ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간다'
    또 'baptized into His death 그 분의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세례'라는 거죠.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그것을 의미로 해석해서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연합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연합'이란 번역을 했지만 
실제 의미적으로는 '그분 속으로 들어간다' 입니다. 

이것은 롬5장에서 말씀한대로 
아담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세례는, 어떤 예식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세례, 성령에 의해 우리의 존재가 
아담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옮겨지는 실제 사건을 의미하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의 세례를 받은 사건' 
과거에 아담의 몸에서, 죄의 지배를 받는 이 상태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은혜가 통치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 되었다... 

형식적인 세례가 아니라, 실제 마음의 할례로, 성령의 세례로, 성령의 인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안에서 부여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속하게 되는 실재reality'를 체험하게 된다는 거에요. 

 

◑둘째로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죄에 대하여 옛 사람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6:5~7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가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옛 사람이 심판 받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를 주실 때, 눈감아 주시는 용서가 아닙니다. 
모르는척 해 주시는 사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요. 
우리의 옛 사람을 대신한 심판이기에 
우리의 옛 사람이 심판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가, 참혹한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 옛사람은,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옛 사람이 받은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죄 가운데 존재하던 옛 사람이 
심판 받아 죽었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자라나서, 그 새 생명이 새 몸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성화의) 변화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옛 사람을 제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옛 사람과 싸우라, 옛 사람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라, 
옛 사람을 스스로의 힘으로 탈피하라 ... 그런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옛 사람을 제거하려 하면 할수록, 옛 사람은 더 강해집니다. 
자기 의로 더 가득하게 되죠.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무엇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옛 사람이 심판 받은 것과 
같은 사건이라'는 걸 믿으라는 거에요. 
그 믿음이 능력을 발휘한다는 거죠. 

이 진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말씀이 갈2:20절의 말씀이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I have been crucified, I am crucified)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었다' 라고 말하지 않고 
'못 박혔다니' 라고 할 때, 
사실은 이 시제를 '못 박혀있다' 라고 해야돼요. 

원문에 의하면 시제가, '못 박혀있다. 못 박힌 채로 존재한다' 그런 의미죠. 
(I have been crucified, I am crucified)                              *현재 완료 수동태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옛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 
그 상태로 계속해서 존재한다. 죽은 자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가 육체 가운데, 지금 몸으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다... 
이것은 새 생명가운데 살고 있다.. 라는 의미죠.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현재 믿음 안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거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힌 자입니까? 

    미국에서 1940~50년대에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던 에이든 토저 목사님께서 
    성지 순례를 함께 갔던 이야기 입니다. 

    그 분이 동료 목회자와 함께 성지를 순례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골고다 언덕, 바로 거기로 올라가는 길에는
    그 길 주위가 시장바닥과 같이, 여러 기념품 가게들이 많습니다. 

    다른 일행들은 그 주변을 돌아보다가 천천히 올라갔는데 
    토저 목사님은 모든 신경을 끊고, 그 골고다로 바로 올라가셨어요. 

    그래서 다른 일행보다 20~30분 먼저 그 곳에 도착하게 되었어요. 
    무릎 꿇고 기도 하고 있는 중에, 이제 다른 일행들이 도착해서, 토저 목사님에게 물어봤습니다. 

 

    '토저 목사, 언제 여기에 올라왔어요?' 
    토저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나는 여기에 2천 년 전에 올라왔지요!' 

    이것은 단지 유머가 아니었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곳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때 나의 옛 사람이 함께 못 박혔고, 
    현재 나는 못 박힌 채로 존재한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성지순례로 그곳에 가게 되면,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2천 년 전에, 여기서 예수님께서 못 박히실 때, 나도 못 박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그런 악인들의 모습으로도 그곳에 있었지만 

또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존재로,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나의 옛사람이 죽음으로써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때 주일학교 다닐 때,

    이 로마서 본문으로 설교하던 어느 원로 목사님의 설교 예화가 기억닙니다. 
    수십 년 전에 그 당시 우리나라 병원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때죠. 

    그 목사님이 병원심방을 하고 나오는데, 복도에서 뭔가 걸려서 넘어지신거에요. 
    딱 보니까 사람이 누워있는 거에요. 

    목사님은 깜짝 놀라서 '죄송합니다. 다친 데 없으신가요?' 라고 말하는 순간 
    아무 반응이 없어서 보니까, 죽은 시신이었던 거에요. 

    그때 그 목사님은 그런 일을 경험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떠올리신 거예요. 
    '죽은 자가 자유케 되는 것이다' (아무 반응이 없다는 뜻)

    옛 사람이 죽었다면,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는 것이며 
    죄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게 되며 
    죄를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음으로써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 

 

◑세번째 의미로,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게 된 것이다. 

6:8~10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예수님이 죄에 대해 죽은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분으로 지금도 존재하십니다. 

그 체험을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신다는 겁니다. 
이 체험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구덩이에서 올라올 수 없습니다. 
산사태가 나고 지진이 나서, 깊은 구덩이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구원합니까? 

그 구덩이 주변에 둘러서서 '여러분, 힘내세요. 노력해 보세요. 
저쪽으로 올라오면 될 것 같은데, 저쪽을 올라가 보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이렇게 아무리 응원을 하고 외쳐봐야, 구덩이 속에 빠진 사람은 올라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밧줄을 자기의 몸에 두르고 그 구덩이 속에 내려갑니다. 
밧줄을 몸에 두르고, 자신의 그 구덩이 속에 내려가서 
그 절망의 구덩이 밑바닥에 내려가서, 그 사람과 자신의 몸을 함께 묶어서 
위에서 끌어올린다면, 그가 구원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죄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실 때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노력해 봐, 애써 봐!' 말만 하신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죄가운데 있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생명의 능력을 공급해 주셨다는 거에요.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믿는 것인데 
믿음이란, 그 구덩이속에 내려오신 분과 자신을 묶는 거죠. 
그것이 믿음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이, 내려온 자가 있을 때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같이 갑니까?' 하면 할 수 없는 거에요. 

그러나 구덩이 속으로 밧줄을 타고 내려온 사람과 
자신의 몸을 묶는 것 (연합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는 거죠. 
그럴 때 우리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 생명을, 옛 사람이 죽었음을 믿는 자에게는 
부활의 새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에 

이제 우리 안에는 새 생명이 존재하기에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된 것,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길로 걷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거에요. 

이것이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 '여기라' recon  *레기조마이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라' .. 이 말은, 사실을 사실로 간주하라는 겁니다.  *로기조마이 recon    주3)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영역에 절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진리는 
우리 가운데 진짜 의식화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거에요. 
사실을 사실로 인정할 수 있도록 '여겨야' 된다는 거죠. 

 

    사람들의 문제는,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여기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오래 전에 하목사님이 살아계실 때 
    부교육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그 식탁에서 주어지는 그런 조언들이 많았죠. 

    어느 날 식사 하는데 어느 부교역자 한 분이 푸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영어도 잘 못하고요...' 그러면서 푸념을 했습니다.

    하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슬퍼하지 마, 사실이잖아!'
    다 함께 밥을 먹다가 모두가 확 깨어 났죠. 

    우리가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자신이 스스로 불행하게 여겨지고, 열등감에 빠지는 거에요. 

그런데 정반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사실을 
사실로 여기지 않을 때도 불행해지는 겁니다.

815 광복이 주어졌을 때,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가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는 민족이 아니라는 선언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순사가 나타나면 두려워하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을 사실로 여기지 못하는 거죠.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더 이상 이 대륙에는 없다고 선언되었음에도 
여전히 노예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노예를 부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일정 기간 존재했지 않습니까. '여기지' 못하는 거죠. 
사실을 사실로 '여기지' 못하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기라' 
그것도 믿음으로 여기는 겁니다. 

날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여기게 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에게 이 로기조마이(여기라) 해야 되는 것은 뭡니까, 
즉 로고스화 해야 되는 것은 뭡니까?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다. 나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다. 
그리스도 함께 나의 옛사람은 죽었다. 
내 안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있다.' 

이렇게 날마다 자신에게 진실을 진실로 여기게 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럴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복음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오직 믿음으로 은혜를 누리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가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 놀라운 구원의 체험을 날마다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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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복음이란 여러분들에게 어떤 것입니까? 
요즘 유행하는 '한 줄 표현'으로 말한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복음이란 내게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표현했죠. 

파스칼의 고백의 일부를 읽어보면 이와 같습니다. 
'내게 복음이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정욕으로 가득차고 
교만과 질투와 악의와 미움과 자기 의로 가득한 나에게 
모든 수모를 당해야 마땅한 나에게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성령님의 중생케 하심, 거룩케 하심은 
내가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복음이다. 

나는 왜 (영혼이) 죽은 인생들이 
불가항력적인 복음의 반응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복음은 내게 불가항력적인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파스칼의 고백입니다. 

주2)   

예수님도 늙어가셨어요. 예수님이 이렇게 늙어가셨다는 표현이 나오죠. 
바리새인들과 싸울 때 '예수님이 실제 나이보다 더 늙어보셨다'는 표현이 나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할 때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던 자다' 라고 하셨죠. 
그때 바리새인들이 격앙하면서 '당신을 보니까 50도 안 돼 보이는데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니 말이 안 된다' 라는 거죠. 요8:57

그때 예수님의 나이가 삼십대 초반이었어요. 
근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오십대로 봤어요. 

여러분이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인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십 수년 이상 더 늙어보였습니다. 

예수님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청년 때가 있었고, 나이 들어 보였죠. 
삼십대 초반의 예수님을 오십 처럼 보았다는 거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그 십자가와 부활 이전의 생명은 한시적 생명이요. 
우리가 같은 육체적 생명이라는 거죠. 

 

 

주3)   

    '여기라' 라는 단어는 헬라어는 '로고스' 라는 단어
    만물을 움직이는 절대 이성을 가리키는 헬라철학의 중심이 되는 사상, 

    태초에 하나님 말씀이 계시니라.. 요1장 말씀도 로고스이죠.
    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로기조마이'
    그것은 '당신 안에 개념으로 확실히 자리잡도록 하라'는 뜻이에요. 

    세상에 거짓된 이념들은, 이데올로기는, 
    단편적인 사실을 가지고 전체로 확대하여 사람들을 끌어갈 때 
    그것을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일리는 있지만 진리는 아닌 거에요. 

    어느 면에서는 맞지만, 맞지 않는 부분도 맞는데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수많은 이데올로기 들이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유물론의 이데올로기, 거짓된 성장주의도 이데올로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