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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6:22~27 광야에서 복 주시는 하나님

LNCK 2022. 8. 29. 07:57

◈광야에서 복 주시는 하나님           민6:22~27            2017.02.05.출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했듯이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삶도 광야 생활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본향을 가기까지 나그네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옛 가수는 “적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고 노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광야 같은 인생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격려하시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 혼자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대제사장인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시는 축도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론의 축도라고 해서 이것이 아론의 간구나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축복하시겠다는 일종의 선포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구약학을 전공한 목사님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축도하는 분도 계십니다.

 

▲이 축도는 세 줄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히브리 시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단어의 수만 놓고 보면 첫째 줄은 세 단어,

둘째 줄은 다섯 단어,

마지막 세 번째 줄은 일곱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첫째 줄에서 셋째 줄로 갈수록 축복의 내용이 점진적으로 강화되고 있습니다.

 

총 단어 수는 15개인데,

여기서 3번 반복된 하나님의 성호를 제외하면 12개 단어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12개 단어를 통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축복하고 계신다는

엄청난 함축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시 한 편으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모두 축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1. 축복의 원천은 누구신가?

 

축복은 누구로부터 옵니까? 성도는 모두 축복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 축복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면 복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성도는 축복의 원천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쾌합니다.

 

축복의 원천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데 다른 이름을 가진 신이 아니고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하나님이 바로 축복의 원천이십니다.

 

짧은 축도 가운데 한 번만 나와도 알 수 있는 것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해 놓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축복의 원천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는 강조형으로, 영어로 ‘I myself’입니다.

나 자신이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나 아론이 하나님을 향해 백성들을 축복해 주시도록 간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요청에 의한 축복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계획하시고 실제로 복을 베풀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축복하기 원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이 땅에서 먼저 요구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늘에서 복이 내려오기 때문에,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복 받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 충만 받고, 생명의 부활을 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알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역사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복까지 내려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복은 누가 받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복 주시면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사람들은 축복의 원천을 이 세상에서 찾고자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축복의 원천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면, 물질이 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돈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칼부림이 일어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이 복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헬스장에 가서 아침 먹고 운동하고 점심 먹고 운동하고 저녁 먹고 운동하면서

건강한 육체를 만들어 보려고 엄청나게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무리하게 운동하다가 오히려 높아진 혈압 때문에 건강을 잃는 경우도 많습니다.

건강한 삶을 사는 것도 행복의 궁극적인 원천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을 넘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 때까지만 사는 것입니다.

 

성공한 삶을 살면 복을 누리리라고 생각하지만,

성공만 추구하고 살다가 잡혀가서 고생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물질, 건강, 성공 등 현세적인 것들이 이 시대의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상들이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궁극적인 “원천”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것보다 부유한 것이 좋습니다. 병든 것보다 건강한 것이 좋습니다.

실패하는 것보다 성공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축복의 “도구”에 불과할 뿐,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원천은 오직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축도를 했지만, 그 역시 축복의 원천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성들로 우상숭배를 조장했던 우상숭배자 아닙니까?

 

그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우상숭배하게 했습니다.

아주 어리석은 지도자요,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아론도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지 축복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 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 받기 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2. 축복의 내용은 무엇인가?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 아론의 축도 속에는 구체적인 세 가지 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물질 공급의 축복입니다. 24절 전반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복을 준다’는 히브리 동사가 ‘바라크’입니다.

 

일반적으로 바라크복을 베푼다는 의미지만,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릎을 꿇으면 복이 온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동사가

바로 바라크입니다.

 

여기 복을 주신다는 동사가 바라크입니다.

그러니까 복을 받고 싶으면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으면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바라크’가 말하는 복은

①양식, 피난처, 집, 가족, 친구, 직장, 휴가, 안전 등

가시적이고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44편 12~15절에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로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물론 성도는 영적인 복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하지만, 물질적인 복도 간구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복 구하는 것을 차원이 낮은 기도라고 생각하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에는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기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②둘째, 보호하시는 축복입니다. 24절 후반에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내 광야는 그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위험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굶어 죽을 위기, 목 말라 죽을 위기, 야생동물에게 물려 죽을 위기, 이방 민족들의 위험 등

온갖 공포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양식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필요합니다.

 

21세기 세계 역시 시내 광야와 같이 위험한 광야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광야와 같습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트럼프가 연설하기를

“미국 사회의 기득권층과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미국 사회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백성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전 세계를 상대로 돈을 벌고자 합니다. 이들에게 사람 몇 명 죽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트럼프는 이런 기득권자들과 싸우겠다고 연설했습니다.

 

세상이 광야와 같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한 시의 경계심도 늦출 수 없는 위험한 광야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이런 광야를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모두 함께 지나가야 합니다. 길을 잃기도 할 것이고, 타는 목마름이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순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약속입니까?

 

③셋째, 하나님 “임재”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축복입니다.

25~26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이것은 왕들이 구사하는 언어입니다. 말단은 아무리 웃어봐야 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얼굴빛을 비춰주시면

그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호의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사람을 앞으로 잘 되게 해 주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43:5절에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형들에게 “당신들은 정탐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에게 “우리는 정탐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시고

1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잃어버렸고, 막내가 있다”고 항변했습니다.

 

요셉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형제 중 시므온을 결박하고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너희가 정탐하러 온 것으로 간주하여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나주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총리 요셉이 ‘자기 얼굴을 보인다’는 것은 그들에게 유익을 주고 복을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물질적인 공급이나 보호하심보다 얼굴빛을 비춰주겠다는 복이 더욱 큰 복입니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시고 그 사람을 향해 웃으신다면

그 사람의 삶에는 행복과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춰서 40일이나 하나님과 함께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수건을 덮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축복은 엄청난 복입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과 영광을 주시는 축복입니다.

 

요즘 슬픈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집에 가도 불만, 직장에 나가도 불만,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불만이 가득해서

누구든지 걸리기만 하면 시비를 걸어 보겠다는 얼굴을 갖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사람들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살아갑니다.

인상을 쓰거나 불만 가득한 인상을 갖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얼굴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론은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공급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3. 축복의 방식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축복하실 때 “전체적으로” 복 주시지만,

동시에 “개인적으로” 복 주십니다.

 

본문 민6:23절에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기 ‘이스라엘 자손’은 집합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24~26절에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여기는 모두 축복의 대상 ‘네게’가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복 주심과 동시에 각 개인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너무 외로운 마음을 갖고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외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옛날 한국 가요는 참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의 곡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먹고 살만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절절한 외로움이나 고독함을 담은 노래들을 듣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참 유명한 애가(哀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외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자녀 된 우리 모두를 개인적으로 복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성도들을 “계속해서” 복 주십니다.

24절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 한 번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인생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성도들을 “영광스럽게” 만드시는 복을 주십니다.

25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어두운 세상이 환히 밝아지듯이

하나님이 성도를 복 주시면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업신여김을 받을 존재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의 자녀를 업신여기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놓으셨고, 우리를 면류관의 보석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을 살다가 죽으면 그 영광을 완전히 보게 될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게 되고,

다시 아프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성도들을 “은혜스럽게” 복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죄성과 노예근성이 가득합니다.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우상숭배하고, 지도자 모세를 때려죽이려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늘 불평불만을 토로합니다.

한 마디로 복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인들입니다. 심지어 축도하고 있는 아론조차도 우상숭배를 조장하던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축복할 것은 그만두고 복 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빨리 꼬리를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복 주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인데도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단어로 ‘은혜’라고 합니다.

 

25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복 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 나는 복 안 받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은 존재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성도들을 확실하게 복 주십니다.

27절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아닙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하나님께 복을 주시도록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친히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혹시 복을 주실 지도 모르고 주지 않으실 지도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또한 확실하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자격이 없어도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까지 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겠다고 하시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결론

 

아론이 축도하고 있는 시내산 현장을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서 한 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시내산에는 아직도 우레와 번개가 있고, 나팔소리와 연기가 자욱합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신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거룩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죄성과 연약함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놓은 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광야입니다.

이들은 광야를 행진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백성들이 어떻게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물질적인 공급을 받으며/ 보호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셔서

가나안 땅까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민수기 6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제사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복을 베푸니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백성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죄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에게 복을 주십니다.

 

엡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헛된 예언들에 귀 기울이지 마시고 가장 확실한 예언인 성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셔서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며,

성도들에게 복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에게 복을 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복을 받는다!”는 사실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인생의 길이 광야와 같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찾고 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받고 누리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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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평가할 때 여러 가지로 평가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신분을 가지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지위를 가지고, 또 물질을 가지고 평가하기도 하고

학력으로도 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사이는 또 외모로 평가를 많이 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학점으로 인해 평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사람을 여러 가지로 이렇게 나누어서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사람을 여러 가지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보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느냐, 하나님의 성령이 같이 하느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냐, 하나님의 영이 떠났느냐?>

모든 것을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으니까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느냐, 안 하느냐

이것이 성경이 결정적인 우리 인간을 보는 하나님의 눈이요, 하나님의 평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제아무리 약하고 신분이 낮고,

학력이 부족하고, 외모가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경제적으로 채우는 것도 어렵지 않고,

옷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고, 지위를 높이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는 아무것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오히려 이런 세상적인,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 다 C학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들을 인류 역사에 또한 영원히

위대한 인물들로 다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 여기에 우리 인간의 가치와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잘 되고

하나님이 떠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있어도, 인간의 문제는 영적으로 치료가 가능한 것이지

육적인 치료는 극히 부분적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모든 문제는 영적인 문제요, 영적으로 터치할 때,

영적으로 이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인간의 문제는 완전히 말끔히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축복을 받아야 하느냐? 영적인 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우리가 하는 이유도,

 

십년, 이십년 신앙생활 해도, 별로 복 받은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영적인 축복이 참 된 축복이고, 영적인 은혜가 가장 영원한 은혜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