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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4:13~17 흩어진 상인 성도들에게 주는 권면

LNCK 2022. 8. 29. 14:47

◈흩어진 상인 성도들에게 주는 권면        약4:13~17       여러 설교 정리

 

◑본문의 배경

 

야고보서가 쓰여진 목적이 뭐냐면 
흩어진 12지파, 바로 디아스포라가 지금 박해를 피해서 피난을 가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데,   
그 피난민을 포함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영적 성숙, 온전"에 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칭의를 얻은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성도들이 믿음의 성숙=성화=온전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2:22등

 

그래서 야고보는, 성숙/성화/온전에 관한 여러 교훈을 주고 있는데

본문 4:13~17절은, 특별히 '상인들에게 주는 교훈' 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상인들' 즉 비즈니스 하는 분들에게 주는 교훈이 많지 않습니다만,

본문에 특별히 '상인들'을 거론한 것은, 그만큼 수신자들 중에 상인이 많았다는 겁니다.

왜 흩어진 성도들 가운데 특별히 상인이 많았을까요? 이유는 자명합니다.

 

여러분, 고향의 집과 토지를 버리고 피난 온 사람들은, 상업 밖에 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625때 피난 내려온 이북 성도들도, 서울의 남대문시장과 부산의 국제시장 등

각지에서 상업을 시작해서, 비즈니스를 일으켰고 곧 사업에 성공해서,

그분들이 얼마 후에는, 교회의 주축이 되는 일꾼들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40년 전 즈음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세대들도, 미국에서 가졌던 직업이

그로서리(채소가게), 옷 가게 등 소규모 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자본금을 마련한 사람들은, 세탁소, 편의점 등으로 갈아탔습니다.

 

지금 본문의 주인공 '상업하는 자들'은

처음에 이렇게 피난 와서 아주 맨주먹으로 좌판(밴딩)부터 시작해서, 일어 선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업이 규모가 커져서,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다니면서

상업이나 무역의 규모를 확대해 나갔을 것입니다.

 

과거에도 '실크로드'라는 무역로도 있었고,

'카라반'이라는 대상(무리지어 다니는 장사꾼들)들이 있었는데,

그런 문화나 환경의 영향으로,

새롭게 기독교인이 된 이들 가운데도,

이렇게 도시를 옮겨다니며 상업을 하던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3

본문은 그런 신자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물론 '상인 신자'들이 일차 대상이지만, 나머지 성도들에게도 역시 필요한 교훈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고려할 점은,

4장부터 야고보서의 분위기나 흐름이 확 바뀌고 있습니다.

 

1~3장은, 주로 신앙적인 권면이었죠.

-환란 가운데서 인내하라      1:1~15 

-경건하게 살아라                  1:16~27

-가난한 신자도 믿음이 좋다   2:1~13

-행하는 믿음을 가져라           2:14~26

-말에 실수가 없어야 온전하다 3:1~12

-참 지혜는 화평을 추구한다    3:13~18

 

이렇게 주로 개인적으로 성숙한 신앙, 온전한 신앙에 대해 설교했지요.

근데 4:1절부터는 분위기가 바뀝니다. 5:6절까지요. 

(5:7절부터 끝절까지는 다시 이전 분위기로 되돌아 갑니다)

 

그래서 4:1~5:6절까지는, 야고보 사도의 어투가 단호해지고, 강경해지고

"교회 안에 들어온 세속적 신앙에 대한 바로 잡는 내용, 그래서 교회를 지키는 내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4:1~10절은, 교회 안에 생기는 싸움과 다툼에 대해서

-4:11~12절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지 말라

-4:13~17절은, 상업에만 너무 올인하지 말라

-5:1~6절은, 부자들에 대한 경고.. 입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세속주의가 교회에 몰려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방인들이 교회로 물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새국면 입니다.

 

이방인 새신자들이 들어오면, 자기들이 과거에 가졌던 문화, 행동양식을 같이 갖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은 원래 문화가 서로 맞지 않은 면도 있지만,

새신자들은 대거 세속 문화, 이방 문화를 갖고 교회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존 유대인 신자들 역시, 마치 출애굽 백성이 가나안 이방 문화에 동화된 과거 역사처럼,

지금 난민으로 새로운 세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쉽게 그곳 이방 문화에 노출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 새신자들, 유대인 신자들이 모두, 세속주의의 물결 앞에 놓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싸움, 다툼이 일어났고, 비방과 판단이 있었고, 물질주의가 침입했습니다.

 

그 세속주의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서,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낼 것인가?

그렇지 못하고 그 물결에 타협되어서, 교회가 세속화 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런 도전에 직면해서, 야고보 사도는, 본문 4:1~5:6절 사이에서, 다소 어조를 강경하게 높이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표현들을 살펴봅시다.

'간음한 여인들아' 4:4  - 이건 강력한 책망이죠!  
'네가 율법의 재판관이냐?'  4:11~12  - 이 말도 엄한 표현이죠, '네가 하나님이냐?' 하는 소리입니다.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 4:16 - 쉽게 말해서, 말에 허세를 빼라는 것입니다. 허세 부리지 말라는 거죠.

'부자에 대한 경고'  5:1~6 - 6절 모두가 거의 '저주와 욕'에 가깝습니다. 마23장을 떠올리게 하는 '독설'입니다.

 

이렇게 야고보 사도가, 강경한 어조로 톤을 바꾼 이유가 뭘까요?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교회가, 세속주의의 물결의 침입을, 그만큼 직면하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4:1~5:6절에서는 ‘내 형제들아’ 라는 친근한 표현의 말을 잘 쓰지도 않아요.

4:11절에 딱 한 번 썼습니다.

 

그 대신에 야고보는

-'너희'라는 말을 주로 쓰고 있으며,

-'들으라'는 말도 쓰고 있어요.

 원래 주제가 전환될 때는 '내 형제들아~'로 나가야 되는데,

 그 타이밍에 '들으라'를 대신해서 쓰고 있죠.  *4:13절과 5:1절에서

 

‘내 형제들아’는 친절한 어조라면  
‘들으라’는 약간 명령조의 강경한 어투입니다. 

 

초대교회에 훅 하고 밀고 들어오는 '세속주의의 물결'

그것 때문에 혹시라도 교회가 조금씩 잠식되어 허물어져 나갈까봐

야고보는 다소 경고의 어투로, 지금 본 서신서의 후반부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4:1~5:6

 

-그래서 '신앙의 인내, 성숙, 온전'이 야고보서의 1주제 였다면   *1~3장

-'세상 동화, 세속주의를 물리치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2주제가 되겠습니다.  *4~5:6절



◑적용

 

상인 또는 직장인으로서 살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그 시대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네 가지 권면으로 정리 될 수 있습니다. 

▲1. <내일의 모든 일을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내일의 모든 일을 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자만이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주권을, 
자기 미래의 계획에 포함시키지 않는 불신앙이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틀림없이 잠언 27:1절을 인용했을 것입니다.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이렇게 미래의 불확실성 인정하고, 또 미래의 불확실성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국내 어느 저명한 목사님이 목회자 세미나에서, 이런 개인적인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학에는 크게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가 있습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사람의 선택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신학입니다. 
침례교, 성결교, 감리교가 대체로 이 신학을 인정합니다. 

반대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강조합니다. 장로교가 정통 칼빈주의입니다. 
목사님은 원래 알미니안주의를 신봉하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본인의 인생을 돌아보니까, 
칼빈주의가 더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본인이 계획한 대로 된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본인이 계획한대로 된 것이 아니더라. 
결국은 사람의 의지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대로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생의 노년에 칼빈주의가 더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렘10:23절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제(김영O 목사)가 미국의 대학교 1학년 학생 때,

불어 교수님이 하셨던 얘기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한번은 학기말 시험이 끝났는데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는고 하니 
학기말이 되면 부탁을 하려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점을 좀 높여달라는 부탁. 그리고 뭐라고 사정하느냐면 
‘제가 대학원에 가야되는데 이 학점 가지고는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학점을 좀 높여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사정을 한다는 거죠.

이런 학생들에 대해서 이 교수님은 아주 강력한 의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너무 많은 젊은이들이 인생의 청사진을 미리 다 만들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대학에서 뭘 전공할 거고, 그 다음에는 어느 대학원에 진학할 거고, 
그리고 어느 직장에 들어갈 거고, 그리고 심지어 누구와 결혼해서 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미리 정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런 식으로 미리 정해 놓으려는 사람들을 보면 

이 교수님 말씀은, ‘자기가 일부러라도 C학점을 줘서 그 계획을 틀어버리고 싶다’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정말로 분명한 인생의 철학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그분에게 저의 미래의 계획을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런 학생이었기 때문에. 
저도 미리 인생을 정해놓고 그것을 따라가려는 야심만만한 학생이었습니다. 

다행히 불어 점수를 높여 달라고 찾아간 적은 없지만 
저도 학부에서 성적을 잘 받아야 좋은 대학원에 갈 것이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잘해야 좋은 직장에 취직할 것이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 할 것이고... 

이런 식으로 아마도 제 주변에 
‘성공’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저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제가 나중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으니, 
이 소식을 처음 들은 어느 권사님의 첫 마디대로 놀랄 노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의 제 삶은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가장 예측하지 못한 것은 제가 한국에 돌아오는 것, 
한국에서 목회를 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것, 

아마 20년 전에 누가 저보고 
‘너는 앞으로 한국에 가서 살거야!’라고 말했다면 
저는 그를 보고 정신 나갔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제가 이렇게 정신 나간 것처럼 
한국에 와서 여러분을 만나서 목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저의 경험에 대해서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저는 이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대체로 저의 인생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왔고, 좋은 일이 일어났고 
저는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출처-

 

▲2. 두 번째 교훈은 시간은 빨리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고, 인생이 빨리 늙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영원 속에서 인생을 바라보며, 
너무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몇 년 전에 저를 완전히 압도했던 사건들이
지금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제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 같았던 갈등도
이제는 아무 쓸데가 없고 힘을 기울일 가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겨우 몇 주 전에 제 잠을 빼앗아 갔던 내적인 동요가
이제는 과거에나 존재했던 낯선 감정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감탄하며 읽었던 책들이
이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몇 시간 전에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생각들도
이제는 힘을 잃어버렸고, 다른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통찰로부터 배우기가 왜 이토록 힘든 겁니까?
왜 저는 줄곧 ‘긴박감과 위기의식’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겁니까?
 
왜 저는 당신이 영원한 분이심을,
당신의 나라가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당신에게는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을 (왜 저는) 보지 못합니까?
 
오, 주님, 당신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영원하고,
시간의 걱정, 두려움, 염려, 근심들을 없애 주시기 위해
그 사랑으로 저를 초대하셨습니다.
당신은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할 때,
시간에 좇기는 삶이 아니라,
하루가 천 년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시간의 강박관념이 아니라, 임재 속으로 들어감이 중요합니다.
 
시간의 제한을 받는 모든 것들은,
당신이 제가 거하기 원하시는 그 장소(영원)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을 때에야
진정한 의미를 드러낼 것입니다.
 

▲3. 세 번째 교훈은 <허탄한 자랑이, 사업의 목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무슨 자랑입니까? 13절의 자랑입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상인으로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업의 목적이
허탄한 자랑을 한다, 허탄한이란 '공허한, 텅 빈 empty'이란 뜻도 있습니다. 

 

텅빈 자랑을 하면서, 자기 교만한 마음을 만족시키려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 악한 것이라는 겁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대로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허세, 허영 
혹은 허탄한, 또 교만한 자랑을 만족시키기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는데, 
이런 사업은 결코 형통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자기 허탄한 마음, 교만한 마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만족시키려는 일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수 없죠. 
만약 있다면, 하나님이 그 자기 계획을 이루어 주지 않도록 하시는 개입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독이 되고, 또 그에게 엄청난 재앙이 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 사업이든지, 공공의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보금자리가 생기고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쓰임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일2:16절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타락한 욕구를 세 가지를 정리했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입니다. 

앞의 두 가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을 잘 극복하였다 할지라도 
이생의 자랑 으로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만한 욕구,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그런 욕망 가운데 빠져들면 
어떠한 사업을 하든지, 그것으로 인해 망할 수 있다는 겁니다.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마십시다!
20여 년 전 IMF가 터지기 전 사람들은 벌써 그때에 
세계의 오토 메이커들이 장차 다섯 개로 재편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미국의 빅3가 없어질 줄은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섯 개로 재편된다면 미국과 독일과 일본 오토 메이커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마는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GM이나 포드는 정부가 지원해주지 않으면    *2009년경 설교
당장 오늘이라도 파산할 수 있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누가 이것을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누가 이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그런 일들이 많아요. 
철의 장막이 서방세계의 군사력에 의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고,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철의 장막이 무너질 것을 예측한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철의 장막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래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업이나 경제 관계로..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니까요! :14

 

▲허탄한 자기 자랑으로 나라를 망친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다'고 말한, 아주 교만한 인물입니다.

계9:11절에 '파괴자'라는 뜻의 '아볼루온'이 나오는데, 나폴레옹의 이름 뜻이 바로 불어로 '파괴자'죠. 

 

그가 프랑스 나라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것이, 바로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아먹은 것입니다.

미국의 조지아 주 아래에 루이지애나가 있는데, 거기는 아직도 불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조상이 프랑스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거죠.

 

루이지애나의 역사와 관련된 왕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1세라고 말합니다. 그는 시골사람으로서 출세를 했습니다.

아내 잘 만나서 프랑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영국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미국에게 프랑스의 땅을 헐값에 팔아먹었습니다.

1803년 토마스 제퍼슨 때인데, 1제곱킬로 당 7달러의 헐값에 미국에 팔았고

당시 미국은 영토를 두 배 가까이 늘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루이지애나 주가 크지만, 옛날에는 미시시피강을 양쪽으로 끼고 있는

대한민국의 50배도 넘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단돈 1500만불에 미국에 팔아먹은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입니다. 요즘 시세로 200억이랍니다.

 

만약에 프랑스가 그 땅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지금쯤 프랑스는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이 지배하는 바람에 프랑스라는 나라는 결국 어마어마한 땅을 미국에 팔아먹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1512년에 러시아를 침공했습니다. 이유는 러시아가 프랑스를 대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말렸습니다. “사람이 자기 길을 예비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사람이 계획해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의 이 원정을 막으신다” 고 했을 때

 

나폴레옹은 이런 교만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길을 계획하고 내가 나의 길을 인도하고 내가 나의 문제를 처리한다.”

“I propose as well as dispose” 이런 교만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 갔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어떻습니까? 겨울이라서 큰 눈을 맞습니다.

추우니까 동상에 걸렸습니다. 전쟁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러시아에서 다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하고 나폴레옹은 그 후 3년 뒤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가 되어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맙시다. 

나폴레옹은 사업가가 사업을 늘이듯이,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늘이려고 하다가 실패했고,

이미 가지고 있던 땅(루이지애나)마저, 판단 미숙으로 헐값에 팔아넘겨서,

프랑스 나라의 미래를 망치는 주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4. 네 번째 교훈, <선이 무엇인지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가 교훈하고 있는 이 상인으로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뒤에 5장에 나오는, 불의를 행하는 부자들처럼 
다른 사람을 탈취하거나 하는.. 그런 범죄를 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가 본 것은, 미래가 마치 자신의 손 안에 있는 것처럼 교만한 모습, 
또 허탄한 자랑, 자기 허영을 만족시키려 하는 그런 모습을 지적하는 거죠. 

그러나 사회에 기준으로, 사회법으로 보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사람들은 여깁니다.
그저 사업도 잘 되고, 돈도 잘 벌고, 일도 잘 하면 좋은 것이다.. 라고 그렇게 여기죠.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보다 엄격한 죄의 기준을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행할 수 있음에도 행하지 않는 것'

그런데 여기 야고보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내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양심에 거리낀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만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라는 것을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는 20%의 사람이 80%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80%의 사람은 20%의 일 밖에 안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을 행할 줄 알지만 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선을 행할 줄 알면 선을 행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행하며 사는 것이 
안개 같은 인생을 사는 참된 지혜인 것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 선을 행하며 산다'고 할 때, 

본문의 '선'을, 하나님이 내게 시키신 일이라고 해석할 때,

그것은 우리의 직업적 소명이 됩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과 (소명)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욕망)
 
우리의 수많은 욕망들은 우리 눈을 가리워,
참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참된 행동이란 소명을 완수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일할 때나 여행할 때,
책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혹은 가난한 사람을 돌볼 때,
아니면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거나,
돋보이지 않는 평범한 일을 수행할 때나,
그 외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할 때
 
언제든지 우리는 “나는 무엇을 가장 하고 싶어 하는가?”가 아니라 (욕망)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소명)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소명에 순종하여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명을 거부하여 그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소명에 따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명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뜻(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하면 (소명)
우리가 하는 일중에 상당 부분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소명적 일이 아니라 욕망적 일이라는 뜻.
 
우리가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일은 (소명)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과로하고 지치고 탈진해 가며 하는 행동들은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소명이라도 탈진하기까지 하는 것은 과욕 또는 욕망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탈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기만 바라십니다.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못된 행동을 함으로써 범하는 죄가 있고, 
마땅히 행할 선을 행하지 않으므로 범하는 죄가 있다는 것이죠. 

또 성령을 따라 하지 않는 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도 행하지 않는 죄.. 
그 기준이 보다 깊어지는 거죠. 
  
과거의 율법 앞에 죄인이었던 우리들 만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죠. 

선이 무엇인지를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