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에라스도는 고린도 성의 재무장관 treasurer이었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이 로마서 기록)
고고학 자료에, 에라스도가 고린도 성의 재무장관인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재무장관을 하려면,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약1:10절에도 "부한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야고보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서도 부자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약1:10
앞서 4:13~17에서 보았듯이, 성도들 가운데 도시를 이동하며 장사하는 상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엔 가난했으나, 나중에 부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 그렇지만 본문이 말하는 부자는, 교회 바깥의 ‘세상 부자’라고 봅니다.
왜냐면 5:6절 때문입니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의인’은 곧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된 자들입니다.
그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부자가.. 같은 교인이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약2:6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여기에 나오는 ‘부자’도, 부자 교인이 아니라, 세상 부자를 뜻합니다.
즉 회당(2:2)에서 만나는 부자입니다.
당시에 부자가 가난한 동족이나, 동족 크리스천들을 압제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본문 5:6절에는 법정에 끌고 가는 것보다 한 술 더 떠서
‘의인(성도)을 정죄하고 죽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문제는, 왜 야고보가 교회 바깥에,
교인도 아닌 ‘부자들’에 대해서, 굳이 설교할 필요가 있느냐? .. 는 거죠.
어차피 자기 설교를, 그들 부자들은 듣지도 않을 텐데요.
그리고 1:1에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이것은 ‘일반인 12지파’가 아니고, ‘교인 12지파’를 뜻합니다.
그래서 본문 5:1~6의 부자들은, ‘교인들 가운데 부자들’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교회 밖 세상 부자들’에 대해 설교한 것은,
-구약 선지자들이 종종 세상 부자, 관원, 종교권력들에 대해 ‘선지자적 메시지’를 선포했으며
-‘부자들이 너희를 압제하지만, 너희 성도들은 그 속에서 인내하라 (1:3~4)
그들을 인해 불평하지 말라, 그들은 속히 망할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주는 거죠. 5:1~6
그러니 본문 약5장의 부자를 ‘교회 밖 세상 부자’로 보는 것입니다.
또 경계가 모호한 양다리 걸친 자도 있겠죠.
그 다음 구절 5:7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그러니 야고보 사도의 포커스는 일차적으로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 부자가 득세하여, 성도들을 재판에 넘기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더라도,
‘길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5:7, 1:2~4,
그 다음에 부차적으로, 세상 부자들의 회개과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도 목적하겠죠.
▲그럼 당시에, 참고로 세상 부자들이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로마제국 사회에서 시민들의 부는, 주로 상업과 농업을 통해서 형성되었습니다. 상업은.. 상인들이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것이었고 농업은.. 땅을 많이 가진 대지주들이, 소작농들의 수고를 통해 부를 얻는 구조였습니다.
로마제국의 대한 여러 문헌들이, 주로 도시의 모습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제국 전체가 도시화 되었다고 사람들이 착각하기 쉽습니다만
그러나 로마제국의 도시화는 10% 정도만 이루어졌고 나머지 90% 는 여전히 농업중심의 사회였고, 봉건사회 였습니다.
봉건사회의 불의함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대지주, 즉 소수의 귀족들이, 수많은 소작농들, 실제로는 노예화된 이들을 착취함으로써 *농노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그런 구조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바로 이 사람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5:1~6절은, 바로 그런 봉건사회의 대지주들에게 주어지는 교훈입니다.
앞부분에 나오는 이 상인들(4:13~17)은, 믿는 그리스도인들로 해석이 됩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부자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상인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땅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약5장에 나오는 대지주들의 대해서는 '부자들이여!' 라고 부르면서 심한 책망을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착취로 인하여, 당시에 가난한 소작농들이 더 심한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또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당시에 사회속에서 노예신분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착취는, 곧 교회에 대한 핍밥과 착취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들에게는 어떤 권면이나 교훈보다는 책망과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는 '그 속에서 참고 인내하라'고 교훈하는 것이죠.
◑적용 / 본문은 이들에게 세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재물은 쌓기만 하면 결국 녹슬어버린다>는 경고입니다.
약5:1~3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주1)
'썩고 녹슨 재물'이란, 과도하게 축적하여 생산적으로 쓰임 받지 못하는 재물입니다.
그런 재물은 결국 불처럼 그의 삶을 삼켜버린다는 겁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섰을 때, 정죄와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부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부유함의 근원이시며, 욥을 축복하신 것처럼 경건하게 그 부의 관리자가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부를 쌓기만 하는, 그래서 그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부자가 되는 것은 반대하십니다. 부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것이죠.
선하게 쓰면 얼마든지 좋은데, 부를 쌓기만 하고 쓰지를 않으니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를 쌓고, 모으고, 축적하는 재미, 그것을 자랑하는 재미도 대단히 크고 매력적이니까요.
다만 그것을 어떤 태도로 축적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욥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31:24~25, 28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이것이 욥의 신앙이엇죠. 그는 부자였지만 이러한 신앙고백이 있었다는 겁니다.
딤전6:17~19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교회에 이 말씀을 실천하는 많은 성도님들이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매달 우리가 어려운 이웃이나 또 사회적 참여를 위한 헌금을 할 때,
우리 성도들이 정말 마음을 다해 헌금 하시고 또 교회를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구제 기관들을 돕고 헌신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볼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중에 지난 3월 9일 천국환송예배를 드린 고 장응복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평생 의사로 살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구두쇠처럼 아끼며 살고, 여행을 다닌 적이 없으십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모은 모든 재산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하고 천국으로 가셨으며,
그 사실이 자기 생전에는 절대 알려지지 않는 조건으로, 거액을 장학금으로 기증하셨다고 합니다.
금과 은은 사실 그 금속의 성질만으로 볼 때는 녹슬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들 역시 영원불변한 것은 아님을 나타내고자 할 때에 "녹슨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2~3
마6:19~21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늘에 쌓지 않은, 즉 선한 일을 위해 쓰지 않고 땅에만 쌓아 둔 보물에는 반드시 "좀과 동록"이 붙게 될 것이며, 심판 날에는 "그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눅16:9절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세'는 사람이 재물이 없어질 때 자기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해 주실 ‘친구’를,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제자들 지금 있는 재물로써 사귀어 두어야 할 시기입니다.
아직까지 그때가 오지 않았을 때, 아직 이 세상의 재물이 효력이 있을 때에 우리는 그것으로 선한 일에 투자하여 저 하늘 창고에 '영원히 녹슬지 않는 재물'로 쌓아 둘 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한 잘 알려진 예화가 있습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어서, 물 없이 하루 이틀을 버티며 방황하다가, 이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폐허가 된 마을을 발견하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거기로 뛰어가서 물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사람들이 발견해서 가지고 나온 것은 사람들이 떠나며 황급히 버리고 간 보석이나 돈주머니였지,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가져다 줄 물은 없었고, 그들이 발견한 보석이나 돈주머니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다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이렇게 된다는 얘기지요...
▲2. 정당한 품삯을 지불하지 않은 불의한 부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개입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5:4~5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당시에 농업 봉건사회에서, 마땅히 지불을 해야 될 임금 조차 지불하지 않는 악한 지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축적한 재물로 그들은 사치하고 방종하며, 심판의 날에 '살찐 양'으로 준비되어져 갔던 것입니다. :5
오늘날에도 최저임금 문제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그리고 중소기업이나 농장에서 일을 했지만, 임금이 서너 달씩 체불되다가
그 사업체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몇 달치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외국노동자의 경우도 있습니다.
고용주들의 입장은 '사업이 손해가 나서, 임금으로 줄 돈이 없어서 (부도 나서) 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훈훈하고 따듯한 고용주도 있습니다.
'나 한 사람 힘써서, 우리 직원 가족들 다 먹여살린다'는 각오를 가진 사업가입니다. 크리스천이 사업을 하면, 그저 돈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 우리 직원들 먹여살린다는 각오로 하면, 최저임금 문제나, 임금체불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에 백랍으로 만든 화장품이 대유행했었습니다. (백랍 : 백색의 납가루, 수은 성분)
그것은 피부색을 하얗게 해 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었지만 또한 피부를 상하고 썩어 들어가게 하는 효과 또한 아주 좋았던(?)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그처럼 백랍 화장품이 사실은 자기 얼굴을 스스로 망치는 독인 줄도 모르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하여 그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것을 날마다 새하얗게 발랐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가진 부를, 마치 화장품처럼 자기를 아름답게 치장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영혼을 치명적으로 병들게 해서,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할 것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런 경고를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해 줘야 됩니다.
렘17: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자고새는, 자기가 낳지 않는 알을 품는 버릇이 있는데, 거기에 빗대어 말씀하신 거죠.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는 등 부당한 수단으로 부를 얻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억울한 부르짖음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회를 심판하신 것을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3. 세 번째가 가장 심각한 상태이죠. 의로운 사람을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5: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의인은 '예수 믿어 의롭게 된 자' 곧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자가, 성도들을 정죄하고 죽일 수 있었을까요?
당시 고대는 제정일치사회 였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치권력이 곧 종교권력이었고, 종교권력이 곧 정치권력이었죠.
지금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인데,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출교자' 처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에서 보듯,
또한 사울이 권세를 얻어서 다메섹까지 성도들을 붙잡으러 간 경우에서 보듯,
출교자 처분이 내려진 사람들은, 거의 '범죄자, 반역자'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였고, 실질적 통치권자인 로마당국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어느 정도 자치 권력을 주면서, 그들의 자치권을 용인하고 있었죠.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죄가 없는 성도들을, 법적인 울타리를 이용해서 노예화 하는 거죠.
여기서 '살인'은, 직접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법정 살인, 사법 살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법을 이중 잣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실제적으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노예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부자들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고, 야고보 사도가 이것을 알고, 이들에 대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부자"들은, 부정한 수단으로,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가까이 재촉하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런 환경가운데서도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1:2~4, 5:7
△'노블리스 오블리주'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일컫는 말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타이타닉을 설계한 사람이 원래는 승객들이 다 탈만큼의 구명정을 달아야 되지만 그것이 미적 감각을 훼손한다고 생각해서, 승객의 절반만 태울 수 있는 수의 구명보트를 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타이타닉 호를 가라앉힐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미끈한 부자 청년이, 여주인공의 약혼남입니다. 그때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더 나은 반수 the better half 는 살아남겠네!’ 타이타닉 호에 승선한 승객을 사회계급을 따라서 둘로 나눈다고 했을 때 자신은 ‘더 나은 반쪽’에 속한다는 말이고, '더 나은 반쪽'은 구명선을 타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입니다. 그 사람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을 떠나서 이런 말을 들을 때, 얄미운 마음이 들고, 분노를 자극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사가 영화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 당시 영국의 계급사회의 횡포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청년이 ‘더 나은 반수는 살아남겠네’ 라고 말한 게 아니고 반대로 ‘더 나은 반수가 죽어야지’ 라고 말했더라면 *노블리스 오블리주
역사상 대대로 후대에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더 나은 반쪽’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남아야 된다고 생각했으니...
정말 최악의 인격의 소유자가 되고 만 셈이죠.
만약 그가, 자기는 고상한 사람이어서
남을 살리고 자기가 죽어야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멋있는 삶의 자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타이타닉 호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겐하임 씨입니다. 뉴욕에 구겐하임 박물관을 세운 구겐하임은, 부자요 일등석의 VIP였지만 구명보트를 타고 살아남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양보하고, 배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다만 브랜디 한잔을 갖다 달라고 주문하고, 브랜디를 마시면서 배와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세상에 ‘더 나은 반쪽’이 만약 있다면, 구겐하임은 정말로 더 나은 반쪽의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바로 그런 부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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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여러분 재물은 쌓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잘 쓰는 것입니다. 재물은 잘 활용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하는 것이지 재물은 쌓아 놓는 게 아니에요.
오늘 야고보서 말씀은, 재물을 쌓아두면 녹이 나고 썩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 만고불변의 진리 입니다. 여러 교회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왜 분쟁이 일어날까요? 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그렇게 서로 싸우고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왜 압류가 들어오고 할까요?
거의 100% 재산 때문이에요. 장로교는 노회가 교회재산을 관리한다고 해도, 실제 명의는 대부분 개교회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 재산이 많은 수록 그 싸움은 끝날 줄 몰라요. 여러분 그렇게 소송을 하고 재판을 하고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요. 법무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요.
그런데 그만큼의 돈을 지불하고도, 소송을 할 만큼 재산이 큰 거예요. 그 싸움을 끝까지 하는 거예요. 그래서라도 교회에 재물을 쌓아두면 안 돼죠...
가난한 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녀들이 똘똘 뭉칩니다. 그런데 부잣집에 아버지가 들어가시면, 자녀들이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돼죠. 온갖 소송을 불사합니다. 왜요? 재물이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재물은 쌓아 놓는 게 아니에요. 죽기 전에 잘 활용하셔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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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오늘 말씀과 성경전체에서는 부의 축적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의 축적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본의 축적을 교회에서 복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막스 베버라는 독일의 사회과학자가 이 문제를 가지고 연구를 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이 서구에 집중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자본을 축적하는 자본주의가 그렇게 발달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연구해 본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는 것은, 예정 되어 있어야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정 되었는지 아니 되었는지 불안한 것입니다. 내가 예정되었다는 징표를, 자기 직업에 충실 하는 것이, 구원의 징표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직업 소명설이 나온 것입니다.
자기 직업에 충실하여 자본을 축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신이 주신 사명에 충실함으로 주어진 도덕적 성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칼빈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도 고정된 신분제도들이 무너지면서 상공인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하나의 정당한 논리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자본이 힘이 되는 것을 알았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자본이 많은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표이며 축복이라는 근거를 가지게 되니, 얼마든지 자본을 축적하여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자본주의의 발달에 칼빈의 사상이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상인 신흥자본자들이 칼빈을 지지하면서 일어섰고, 개신교는 네덜란드에서 힘을 얻게 되었고, 어쩌면 가톨릭의 고사 위기에서 구해진 것이죠.
이제 교회에서 특히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무엇을 하나님의 축복의 기준으로 보겠습니까?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가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위대한 종교개혁자요 신학자인 칼빈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누가 반박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문제는 사람들마다 부자 되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문제이지만 그러한 마음에 불을 지르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