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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5:12~20 고난 중에 배도 말고 기도하라
LNCK
2022. 9. 1. 08:33
◈고난 중에 배도 말고 기도하라 약5:12~20 여러설교정리 야고보서 설교모음
◑5:12절 '배도의 맹세'를 하지 말라
약5: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본 단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큰 암초가 하나 서두 12절에 버티고 있는데,
이 구절을 전후 문맥과 어떻게 연결해서 이해할 것인가? .. 미궁에 빠집니다.
본 12절은, 직전 단락 과도 흐름이 맞지 않고,
다음 단락과도 문맥이 일관적으로 전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마치 물과 기름같이 전혀 섞이지 않고, 어울리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무엇보다도"라고 말하면서, 이 구절이 중대 주제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맹세하지 말라”은 12절 말씀을, 얼렁뚱땅 건너뛸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 맹세가 그저 '오는 생일 때 네게 시계 선물할게' 같은, 시시한 명세가 아닌 것입니다.
▲이 구절을 올바로 본래 의미대로 해석하려면, 시대적 배경에 대한 상상력을 좀 동원하게 됩니다.
-야고보서의 배경은 행8:1절의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핍박입니다. 저작 연대는 AD40~45년 경입니다.
이때는 핍박의 범위도 유대와 소아시아 등 “국지적”이었고,
핍박의 주체도 ‘예루살렘의 유대교, 유대 권력’으로 봅니다. *유대교 사두개인, 바리새인, 헤롯당 등
-그런데 히브리서의 배경은, 야고보서와 똑같은 ‘핍박 상황’이지만,
국지적이 아니라, 로마 제국으로 그 핍박의 범위가 광범위해 집니다.
핍박의 주체도 ‘로마 정권, 네로 황제’가 됩니다. 히브리서의 저작 연대는 AD60~65년 경입니다. 주1)
그러니 야고보서 시대에 시작된 핍박이,
20년 사이에, 즉 야고보서가 쓰여지고, 히브리서가 쓰여지는 사이에
로마제국 전체로 퍼져나가고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AD64 로마 화재가 있었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본문 약5:12절의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이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맹세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거죠.
배도의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배도 라는 말은 안 나옵니다만)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1) 야고보서의 배경이, 환란이나 핍박 상황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신앙이 성숙하라’가 야고보서의 주제입니다.
그 고난의 원인은 신앙적 핍박, 유대교 출교입니다.
그럼 그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간단합니다. 유대교 회당에 다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직업과 집과 토지도 되찾고, 투옥이나 죽음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자료에 의하면
유대교 회당에서는 ‘공개 맹세’를 시켰다고 합니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자신은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겠다는 ‘공개 맹세’이죠.
야고보는, 그런 배도의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즉 네가 믿는 신앙을.. 그대로 진솔하게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맹세'를 하지 말라는 거죠.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입술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맹세를 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맹세, 야고보서의 맹세가 헬라어로 똑같은 '옴누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마 26:72 주2)
야고보서는 ‘그런 (배도의)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당시 상황에서, 배도 말고, 뭐가 그리 크게 중대하게 맹세할 꺼리가 있었기에,
야고보가, 야고보서의 마지막 당부로, 본서에 기록했겠습니까?
2) 약 20년 뒤에 씌어진 히브리서의 주제도 ‘배교하지 말라’인데,
더 자세히 말하면 ‘배교의 맹세를 하지 말라’입니다.
야고보서는 히브리서보다 20년 앞서 쓰여졌지만,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렇게 12절을 '배도의 맹세를 하지 말라'로 풀면, 본문의 다음 구절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배도의 맹세하는 대신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13a
13b절은 '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즐거운'이란 단어가, 유쑤메오인데, 같은 단어가 행27:22에 '안심'으로 쓰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행27:22
그러면 본문 13b절은 '(유대교 핍박으로)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안심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 지니라' ... 이렇게 문맥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5:12~13절이요.
3) ‘형제들아’로 연결되는 구절만 따로 떼서 보겠습니다.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여기서 '원망'은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함 grief 이라고 해석했습니다)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배도의)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5: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일차적으로 배도하는 자들을 돌아서게 하라는 것입니다)
위 구절들을 ‘환란과 배도’라는 실로 꿰어보십시오. 다 꿰어집니다.
일일이 설명 안 해도, 조금만 곰곰이 묵상해 보시면 다 이해될 것입니다. *배교, 배도 관련글
◑5:13~18절, 기도의 교훈
여기 매 구절마다 빠짐없이 '기도'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세 분야를 기도하라는데요.
▲5:13절, 신앙의 핍박으로 인한 환란 중에 기도하라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3
위 구절에서 '즐거워'는 '안심'으로 바꾸는 것이, 문맥에 더욱 자연스럽다고 위에서 설명했죠.
기도하지 않으면, 고난에 굴복하게 되고,
기도할 때,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되므로.. 고난 중에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본서의 서두에
1:2~4에서는 '고난 중에 인내하라' 로 시작했다가
5:13에서는 '고난 중에 기도하라'로 마치고 있습니다.
▲5:14~16절, 병든 자는 기도하라
이 단락은 많이 설교가 되어지는 구절이죠.
▲5:17~18 보통 사람 엘리야의 기도를 본 받으라
그래서 실제로 보통 사람 야고보 사도도 나중에 '낙타 무릎'이 되고,
그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마룻바닥이 움푹 패일 정도로 기도하는.. 엘리야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되었죠.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가서 하룻밤을 자는데
부모님 집이 좁답니다.
그래서 따로 잘 방이 없어서 부엌에 요를 깔고 자는데
새벽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까
자기 어머님이 새벽에 거실에 나와서 새벽기도를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님도 목사님인데, 그 아들이
‘아, 우리 어머니의 영적인 능력의 비결이 저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님께 신학도 있고, 영력도 있는 비결이 바로 저것이구나!
반대로 나는 신학만 있고, 영력이 없는 이유가 바로 저것이구나!
이렇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펀 글)
◑5:19~20절. 미혹된 자를 돌아서게 하라
이 구절은, 위에서 설명했지만 "배도한 자들을 돌아서게 하라"는 것이
그 1차적인 뜻입니다. 불신자 전도가 아니라요.
야고보서의 당시 상황과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2차적으로 불신자 전도도 될 수 있겠죠.
◑절별 해석 ...............................................................................................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야고보는 본절에서 '고난'과 '기도'를 연결시켜 설명함으로 앞절에서 교훈한 헛된 맹세를 하는 자가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함과 동시에
고난 가운데서는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소망하며 기도해야 함을 권면한다(빌 4:12,13).
'기도할 것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스도'는 현재 능동태 (진행) 시제로
계속 기도할 것을 나타내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처했을 때 불신자들의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차원의 행동원리를 가져야 함을 시사한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고난 당할 때에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즐거워할 때에는 방종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야고보는 즐거워하는 자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드려야 함을 권면한다.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병든 자'의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연약한 자 곧 연약한 믿음이나 양심을 소유한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롬 6:19, 14:1, 고전 8:9-12)
2) 혹자는 신체적으로 질병에 걸린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신체적으로 질병에 걸린 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교회의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교회의 '장로들'은 '감독'이나 '목사'와 동일한 명칭으로
(행 15:6,22, 20:17, 21:18, 빌 1:1, 딛 1:5,7, 벧전 5:1-4) 교회의 대표를 의미한다.
병든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해서 같이 기도해야 하며,
교회 지도자들은 병든 자를 방문하여 위로하며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한다(살전 5:14).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기름을 바르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이프산테스'는 분사로서 문자적으로 '기름으로 문지르다'를 의미한다.
이렇게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사회에서의 공통적인 풍습으로서
의식적인 수단이라기 보다는 의술적인 수단에 가깝다(사 1:6, 눅 10:34)
한편 '기도할지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쿠사스도산'은 헬라어 본문에서 주동사에 해당되는 것으로
본문의 강조점이 '알레이프산테스'(기름을 바르다)보다는 '프로슈크사스도산'에 있음을 시사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병자를 방문하여 치유의 방편으로 의술을 사용함과 동시에
병자의 나음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본절의 '기도'에는 '믿음의'라는 수식어구가 붙어 있는데
이는 병든 자를 치유하는 신유의 기적이 '믿음'을 요구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비록 '기름'을 바르는 의학적인 치유 행위를 무시할 수 없다 할지라도
여기에는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 기도는 믿음으로 하여야 한다(1:6, 마 9:22, 막 9:29).
한편 '구원하시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세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신체적인 질병에서의 구원, 곧 질병의 치유를 가리킨다고 본다.
2) 혹자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본다.
3) 혹자는 위의 두 견해를 모두 반영한 것으로 해석한다.
세 가지 견해 중 첫 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마 9:21, 막 6:56).
왜냐하면 '주께서 일으키리라'는 진술은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이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해성사의 근거라기보다는
도리어 개신교의 만인제사장설의 근거가 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본문의 '의인'은 절대적으로 죄가 없는 의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가 많이 있어도 참되게 하나님께 회개하여 용서받은 자를 나타낸다(롬 3:10).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본문은 엘리야의 수많은 역사 가운데서 비를 멈췄다가 오게 한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야고보는 엘리야의 기도가 자연의 현상까지 변동시킨 사실을 드러내어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사실을 예증한다(왕상17, 18장).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엘리야도 다른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나타낸다(왕상 17:11, 19:3, 행 10:26)
이는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로서 초능력적인 자질을 소유하여 비를 그치고 내리게 하는
역사를 행한 것이 아님을 시사함과 동시에
평범한 사람과 동일하게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적 존재인 것을 부각시켜
죄를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은 의인은 엘리야와 같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미혹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네데'는 '헤매다'라는(마 18:12) 의미의
'플라나오'에서 유래한 말로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적 형태와 당시의 정황을 잘 묘사해 준다.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도 유대교나, 이방의 신비 종교 혹은 이교 철학으로
되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처럼 구원의 길에서 떠나 방황하는 형제 자매들을
사랑으로 서로 권면하여 다시 돌아와 복음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한다(요일 2:26).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
주1) 그 외 초대교회의 핍박 중 성경에 나오는 핍박은
행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여기서는 '기독교-신앙문제'가 아니라, 유대인 민족에 대한 박해라서, 성격이 다르죠.
그리고 그 범위도 '로마 도시'에 국한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기서 폭동을 일으켰다 해서 취해진 추방이었죠.
주2)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가장 중책을 맡은 공동체의 두 핵심 인물,
제자 중의 제자, A급 두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두 제자의 배반 사건을 바라보면서
특별히 교회 지도자들이 깊이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가장 핵심 위치에서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그들은 교회 안에서 살며, 교회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교회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봉사하는 듯 보이지만,
많은 경우 예수님과 가장 먼 사람으로 전락할 위험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지속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거듭 본질에로 회귀하지 않으면,
자신의 직책이 희생과 봉사, 섬김과 죽음의 자리임을 거듭 자각하지 않게 될 때
언제 베드로와 가룟 유다처럼 배반자가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다른 무엇에 앞서서 십자가를 지는 자리이고,
끝까지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는 자리임을 망각하는 순간
그 지도자는 또 다른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베드로의 배반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쓴잔을 거부했기에,
베드로는 그 뒤로 입으로만 수제자였지, 몸은 배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마16:22~23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입으로는 어떤 충성도 다 합니다. 그 어떤 맹세도 다짐도 다 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뿌리치고 도망갈 가능성,
예수님을 배신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남들이 봤을 때는 그럴듯한 신자, 잘나가는 목회자,
괜찮은 주의 종으로 보이고 인정받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우리의 시선이 멀어지는 그 순간
언제고 주님으로부터 등 돌릴 가능성, 주님을 배반할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