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이요. 우리가 믿음으로 체험하는 구원이요.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나라를, 이 땅에서 현실 속에서 체험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복음이 왜 능력 인지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롬4~5장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그것은 우리를 값 없이 의롭다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선물해 주심으로써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칭의> 로서의 구원을 말씀했습니다.
롬6장에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함께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도 또한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와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죽음으로써 이긴다..는 것입니다.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 DNA 속에 깊이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으로 죄와 싸워 이기려고 하는 그 자체가 또 다른 죄를 만들어 낸다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받는 이 체험, 그것이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겁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구원입니다.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구원입니다.
▲이제 본문 롬7장에 이르러서는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율법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리하면, 로마서 5장에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하죠.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 "하나님의 의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
이것이 6장으로 넘어와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
그리고 7장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우리"
이것이 롬5~7장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표현입니다. 이 세 가지 표현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이기에 그 같은 사건에서, 그 믿음으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산 자"가 되었습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 우리는 "의의 종,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동일한 사건안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도 죽은 자"가 되었죠.. 왜냐하면 그 율법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고 또 우리의 죄성을 확인하고, 또 그 죄가 율법을 이용하여 우리를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는데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됨으로서 "율법에 대해서도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죠. 이 세 가지의 진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중요한 말씀은 7:4절이 되겠습니다.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해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됐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에게 속해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됨으로써.. 이것은 이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속해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게 된다...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이, 이제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죠.
그것은 마치 '죄에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 죄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거나, 아니면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그런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종'에서 벗어남으로인해, 이제 '의의 종,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그래서 '너희 자신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고,
또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권면이 있는 것처럼
'율법에 죽은 자'가 된 것이, 이제는 어떤 법도 생각하지 않고, 무법으로 살아가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여 하나님께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되고 이제 새로운 방식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 곧 무엇입니까?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롬7장이, 바로 율법을 중심으로 우리가 체험한 십자가의 구원을 설명합니다. 왜 율법이 (7장) 한 장에 걸쳐서, 우리의 구원이 율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해야만 할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두 가지의 잘못된 방향으로 늘 흐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지고, 그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잘못된 율법주의로 흐르기도 하고,
-또 하나는 무슨 법이 필요하느냐? 우리 스스로가 법이고, 내가 생각한 것이 기준이다.. 라고 생각하는.. 객관적인 이 법 자체를 거부하는 율법폐기주의, 이 양 극단에 사람들은 늘 속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 쪽은 바리새주의 같은 율법주의에 빠지고 -다른 한쪽은 방종과 방임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모습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구원을 받은 성도들도, 믿음 생활을 하면서 양극단에 늘 빠져서
한쪽으로는 바리새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한쪽으로는 방임에 빠지기도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죠.
▲그래서 7:1절에 보면 '율법을 아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라고 하죠. 또 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이런 걸 봐서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초점을 두어서 설명하지만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해당이 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유대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죠.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오늘 이 시대 까지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에 포함된 내용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은 너무나 놀랍고 탁월합니다. 그 당대의 전 세계 어느 나라 민족에 그런 율법이 있는지 한번 역사적으로 조사해 보십시오 그 시대에, 그 년도에.. 어떤 시대에 이런 율법을 가진 민족이 있었는가요? (유대 말고는 없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여행하는 민족이 '우리가 힘든 광야를 겪고 있지만, 법이 중요하니까 우리가 법부터 만듭시다. 그래서 광야를 지나는 그들이, 우리는 먹을 것이 없고 힘들게 지나더라도 법을 먼저 만들어야 우리가 선진 민족이 아닙니까?'
그래서 공청회를 열고, 법제위원회를 만들고, 국회 같은 걸 만들어서 법을 토론하고, 법을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죠.
그 당대에 이런 법이 주어진 건, 계시로 주어진 것이죠. 당대에 어떤 나라와 민족도, 법적인 사고를 통해서, 그런 법전을 만든 민족이 없어요. 그런 흔적들은 있지만.. 뭐 함무라비 법전이나, 다른 나라에 그런 법전들이 있다고 해도 모세의 율법과 대비해보면 비교가 되지 않는 겁니다.
이런 탁월한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주는 거죠.
그 법 안에는 시민법도 있고, 제사법도 있고, 여러 의식과 절기 법도 있지만 그래서 그 시대의 문화에만 맞는 것도 있지만, 도덕법은 오늘 이 시대에도 적용되는 탁월한 법입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법, 거기서 613개의 계명으로 더 확대되고 더 생활 속에 실천할 수 있는 그러한 신명기에 나타난 법 조항들을 보면 탁월한..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보여주는 율법입니다.
왜 이러한 율법을 하나님이 주셨을까요? 그 율법을 받은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만일 '저는 성경에 나오는 율법을 보지도 못했고,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롬2장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는 그 율법의 기능을 하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요, 도덕개념이죠.
그리고 율법을 읽지 못하는 나라와 민족, 지금도 나라의 형태가 없고, 법의 체계에 지배받지 않는 부족공동체를 이루는 그런 민족에 가 봐도 그 부족 나름대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규범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율법의 기능을 하는 거죠.
'사람은 이래야 된다. 우리 민족은 이래야 된다. 이것이 옳은 것이다' 고 규정하는 규범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이 전혀 없는 민족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옳고 그름(도덕률)이 존재하는 것이며, 옳고 그름을 규정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거죠.
▲사람들은 인간 스스로 옳고 그름을 규정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고, 내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리다.. 라고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거죠.
또는 오늘 이 시대는 바로 옳고 그름조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는 그런 잘못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도덕적 상대주의
그러므로 이런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구약 속에 나타난 율법이든, 개인의 양심이건, 혹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도덕적인 규범이든 간에 그런 기능은 살아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이제 '그 모든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차원의 법을 따라.. 다른 원리로.. 다른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거죠.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아래 말씀입니다.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는 율법으로 인한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속에서 작용해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7:6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옭아매던 것에 대해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문자에 의한 해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으므로 문자에 의한 해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고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게 되었다... 라고 대조하죠.
'문자에 의한 해묵은 것' → 그것이 이제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변화되었다.. 는 거죠. 이 '문자에 의한 해묵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문자란, 여러가지 조문을 통해 사람들이 구체화해서 법으로 여기는 그런 것들.. 그것을 왜 '해묵은 것'이라고 말할까요? 법이 필요 없다는 것일까요? 아니죠.
그러한 법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그러한 법을 지킴으로써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도리어 사람들은 그러한 문자로 되어있는 법조문을 이용해서 자신의 죄를 더 합리화하고, 그리고 자신이 의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해묵은 것' 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렇게 해석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 십계명을 예로 들어보면
거기에 보면 하라/ 하지 말라 가 있죠. 거기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이 있잖아요.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 라는 그 개명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그 문자를 어떻게 해석합니까? 자신의 책임은 최대한 줄입니다. minimize 시켜요. 그래서 누군가를 자기가 직접 생명을 끊는 일을 물리적으로 하지 않았으면 나는 살인하지 않았다.. 라고 주장하죠.
누군가를 비방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거짓 댓글로 사람들을 몰아세우면서도 '내가 저 사람을 실제로 죽게 하지 않았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살인하지 않았어요. 그냥 저는 그냥 미워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사회로부터 받는 미움, 냉대, 거짓 모함.. 이런 것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지라도.. '내가 저 사람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라고 주장하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살인하지 말라 하는 법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다'
예수님은 그 문자의 법을 해석할 때, 그 이면에 성령의 법으로 우리 영혼이 책임을 최대화 maximize 시킨 거에요.
'누구든지 살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요인만 가지고 있어도 살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에서 벗어나,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됨으로써 성령의 법에 따라 사는 것이 더 어려워졌습니까/ 더 쉬워졌습니까?
더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어렵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더 강화된 거죠. 이제는 탐심만 품어도 간음한 것이요, 미움만 가져도 살인한 것이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더 쉬운 것은 무엇입니까? 조문을 다 몰라도, 성령을 따라 살기만 하면.. 법을 어기지 않게 됐으니, 얼마나 쉬운겁니까?
그러니까 성령가운데 살면 쉬운 거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어려운 거에요.
조문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간다고 할 때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어떻게 하면 이 최소화하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은 어떻게 하면 늘일까(최대화)를 생각하죠.
예를 들면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씀이 레19장에 이미 나와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그 내용을 보면, 이웃에 대한 사랑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항상 우리의 죄성은 '하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안 할 수 있을까를 연구해 내고 '하지 말라'는 것은, 그 가운데서 어떻게든 하려는 걸 만들어 내요.
그러면 이제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떻게 합니까? '미워하지 않았으면 사랑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축소하고 축소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너희를 사랑하는 이만 사랑하면 누가 못하겠느냐? 너희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그것이 진짜 '사랑하라'는 법에 순종한 거에요.
그런데 문자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주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거에요.
그래서 신명기 율법에 보면, 그 율법의 이면에는 너무나 기가 막히는.. 그냥 우리 일상생활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펼쳐 놓으셨어요.
구약의 율법이지만, 그 안에는 정말 사랑의 법, 성령의 법이 들어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길을 가다가, 어느 소나 양이 길을 잃고 있었다면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 당연한 얘기죠. 맞습니다.
그런데 '그 소나 양이 바로 원수에게 속한 것이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게 신명기의 나오죠. 그 양에 붙어 있는 표시를 보니까, 나의 철천지 원수에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CCTV도 없고.. 그럴 때 어떻게 반응하겠느냐? '원수의 소유일지라도 주인에게 찾아줘라!' 이게 사랑이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면, 원수의 양을 어떻게 할까요? 은근히 툭 치고 지나가고 싶지 않을까요?
'그래도 나는 뭐.. 내가 원수의 양을 몰래 잡아먹지 않았으면, 사랑한게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라는 명령은, 어떻게든 안 하려고 그러고 하지 말라는 명령은,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이런 인간의 속성!
그러므로 문자로 되어 있는 것(율법)은 얼마든지 우리가 그렇게 이용할 수 있다는 거에요. *율법의 오용, 남용
그래서 율법은 해묵은 것이다.. 이렇게 표현한 거에요. '(율법은) 능력이 없다. 아무런 효과가 없다'
여러분 세상에 법조문이 많아지면 세상이 행복해질까요? 정반대 아닐까요? 우리가 읽어야 되고, 알아야될 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사실 불행한 삶이에요. 행복하지 않은 사회 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회는, 사람들이 법조문을 보지 않고, 고소고발이 없는 사회가 아닐까요? 다툼이 없는 사회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게 되었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종으로 산다는 뜻이에요.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처럼 이제는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을 따라 살게 되었다는 거죠.
◑이제 율법에 대해 죽은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결혼관계를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결혼관계는 살아있는 동안에만 구속력이 있었어 죽음으로 결혼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이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됨으로서, 우리가 죽은 자가 됨으로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도 그 구속력에서 벗어났다는 거에요.
예전에는 율법이, 우리의 남편처럼, 우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거에요. 왜 결혼관계를 비유로 듭니까? 깊은 연합을 설명하기 위해서에요.
부부가 서로 연합되어 있듯이, 죄와 우리는 연합 되어 있었고 율법과 연합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죄에 대에 죽은 자가 됨으로써, 연결되어서, 율법에 대하여도 죽은 자가 되었다는 거죠.
예전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처벌이 두려워서 행했지만 이제는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고, 존귀케 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인생이 되었다는 겁니다.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자유케 되었고 벗어났다'는 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규칙을 잘 지키면, 내가 의로워지고 -또 어떤 사람은 규칙 자체가 필요 없고, 자기가 그냥 왕이 되어 마음대로 살아가는.. 그런 양 극단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7:7~13절은, 율법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아니 율법자체가 필요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고쳐주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1. 첫번째 질문은 율법이 죄입니까? 라는 질문을 7절에서 던지죠.
7:7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에 비춰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다, 도리어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목적을 수행했다는 겁니다.
본문에서 율법의 세 가지의 목적을 나타냅니다.
1) 첫째로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정의해 줍니다. '탐내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라는 법이 없었다면 탐내고, 살인과, 간음이라는 것을 죄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거죠.
2) 두 번째는 율법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드러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것을 '석회 속에 물을 부었을 때 열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했어요.
물이 부어지기 전까지는 석회 안에 열이 있다는 것이 나타나지 않죠. 물을 붓게 되면 그때 열이 나타나죠. 물이 열을 만든 게 아니라 석회 안에 포함돼 있던 열이, 물이 가해짐으로써 나타나는 거죠.
여기서 '물을 붓는 게 율법과 같다'는 겁니다. 석회는 인간의 마음 상태이고, 열은 죄가 되는 거죠.
이렇게 인간의 타락한 영혼이, 얼마나 죄 가운데 있는지를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것을 정의하지도 못하고, 드러나지도 않았다는 거죠.
3) 세 번째는 율법이 죄를, 증폭시키거나 선동한다는 거죠. 금지 명령이 주어졌을 때, 인간의 영혼속에는 삐딱함이 있어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주었을 때 왜 그것을 따 먹었을까요? 그 금지 명령을 듣고 인간은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우리가 왜 저거를 먹지 못합니까? 왜 우리가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그 명령에 우리가 따라야 합니까?'
아니 먹지 말라는 것은 딱 한 가지고, 나머지는 무한대의 자유인데 선악과 한 가지만 금지 하셨죠. 에덴동산에서 열 가지를 금지 하셨습니까? No
단 한 가지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신 거에요. 수없이 많은 좋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을 먹었을까요? 배고파서도 아니고, 왜 그랬을까요?
'왜 우리가 먹지 말라는 명령에 따라야 하느냐?' 이러한 삐딱함이 사단으로부터 들어온 거에요.
그래서 우리말의 그런 말이 있죠. '하지 말라 그러면 더 한다' 이게 정말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하지 말라 그러면 더 해요. 그걸 더 하고 싶어져요.
미국에서, 해안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호텔을 신축했는데 그 호텔은 바로 창문만 열면, 발코니 바깥이 바로 바다이에요.
그래서 호텔을 지은 주인이 염려가 된거에요. '사람들이 여기서 전부 바다낚시를 하면.. 그러면 위험해 질 텐데..'
그래서 호텔 객실 창문마다 경고문을 붙였어요. '발코니에서 절대 낚시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이제 그 호텔에 손님들이, 전부 낚싯대를 밖으로 내고 낚시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주인은 깜짝 놀란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그래서 경고문을 싹 치워봤어요. 그랬더니 거의 낚시하는 사람이 없더라는 거에요.
어떤 글을 보니까, 교장 선생님이 '여러분, 폭죽놀이 하지 마십시오' 학생들은 폭죽이 뭔지도 몰랐고, 보지도 못했는데 '폭죽놀이 하지 마십시오. 큰일 납니다' 그러니까 호기심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우연히 학교에서 마치고 집에 가던 중에 친구가 폭죽이라는 걸 갖고 있는 것을 안 거에요. '왜 폭죽 놀이를 하지 말라고 했을까?' 그러고 폭죽놀이를 하다가 다친 거에요.
어쩌면 그 말을 안 들었으면, 호기심을 안 가졌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사회가 뭐 법으로 계도를 하거나 또 주의를 주는 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죠. 인간의 죄성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꼭 하고 싶은 충동이 우리 안에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롬7:8 '그러나 죄가 계명으로 인해 기회를 타서 내 안에 각종 탐심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죄가 계명으로 기회를 타서...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거죠. 하라는 것은 꼭 하기 싫은 거죠. 그러므로 죄가 기회를 탄거에요.
그러면 율법이 죄냐? 죄는 아니에요. 율법은 선한 거죠. 하라는 걸 함으로써 우리는 축복을 누리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축복을 누리는 건데
인간의 죄성은, 이러한 계명조차도 이용하여, 더 큰 죄를 짓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율법이 필요 없는가요? 아니죠. 왜냐면 죄를 정의 해주고, 죄를 깨닫게 해주고, 우리가 죄인임을 절실히 깨닫는 것이.. 이러한 율법을 통해서 이기 때문이죠.
▲2. 두 번째 질문은 같은 맥락에서 '선한 것, 곧 율법이 죽음을 가져다 주었는가?' 아니다 라는 거죠. :13
7:13 '그러면 선한 것이 내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죄가 죄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그 선한 것으로 내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계명으로 인해 죄가 더욱 죄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가 죽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죄가 더욱 죄 되게 하기 위해서, 때로 그 율법으로 인해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은 곧 동전의 앞뒷면처럼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었다.. 는 거죠.
죄가 있는 한, 율법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왜요? 이 죄라는 실체를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한 거에요.
또 이 죄를 깨닫게 하는 양심의 기능, 도덕의 개념을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거죠. 이 도덕의 개념은 뭡니까? 마땅히 그래야 된다는 거에요. 이것이 옳다는 거에요.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은 다 본능이 옳은 거에요. 근데 본능을 따라 사는 거지,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다른 어떤 생물도 비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막에만 사는 동물이 '나는 왜 사막에 태어나서, 이렇게 사막에서, 메마른 지역에서 살아야 하느냐?' 하며 통탄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비교할 수 있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가?' 라는 그러한 양심의 깨우침, 도덕의 뉘우침, 그리고 율법앞에서 받는 정죄함... 이것을 느끼게 되는거죠.
하나님은 인간 안에 있는 죄를 드러내시고, 그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율법을 주신 것이고
그 율법은 제 기능을 한 것이고, 이제 율법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는 성령의 법을 따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살게 되었다는 거죠.
▲정리해보면, 롬6장 (지난주) 말씀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우리가 죄 죽은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연합하여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
이제 롬7 장에서는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우리가 새 생명가운데 살게 된 것, 그것은 뭡니까? 7장의 설명으로는 "영의 새로운 것, 성령을 따라 살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8장에 보면 이것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설명하죠. 여기서 생명은 롬6장에서 가져온 것이고 성령은 롬7장에서 가져온 거에요.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그래서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삽니다. 율법 그 자체로는,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어요. 죄성만 드러날 뿐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이제 생명과 성령의 법을 따라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오늘 핵심 구절을 읽고 설교를 맺도록 하겠습니다. 롬7:4절과 6절입니다.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해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됐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에게 속해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7:6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옭아매던 것에 대해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문자에 의한 해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이제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됨으로, 율법에서 벗어나 이제는 율법을 보지 않아도 성령을 따라 살면 율법 그 이상을 행하고 있는 거에요.
율법 조문만 보면 타락한 우리의 심성과 죄성으로는 하라는 거는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건 꼭 하려고 하고..
또 하라고 한 것도 비슷하게 흉내만 내고 어떻게 하면 안 하게 만들어 버렸던.. 이러한 율법의 (무능함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이제는 성령을 따라 살면 하라고 하는 것은 그 이상을 하게 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정말 그 근원조차도 하지 않는 율법이 지향하던 그것을.. 성령을 따라 살면 다 행하게 되었다... 그것이 '열매 맺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열매 맺는 삶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고,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이 사실을, 우리가 체험하게 하옵소서!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율법의 종이 아니라, 성령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이제는 하나님을 위한 열매 맺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놀라운 진리를 우리가 깊이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으니 그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되게 하심으로써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문자의 해묵은 것으로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합리화하고 또한 죄가 없는 사람처럼 포장하고 또한 불순종을 순종처럼 포장했던 우리의 모든 완악함을 씻어버리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는 열매 맺는 인생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어 성령의 법을 따라 새로운 방식, 새로운 원리, 새로운 능력을 따라 승리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