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수14:12에 보면, 가나안 정복 때 헤브론은 거인 아낙 족속이 살고, 성도 크고 견고한데,
모든 지파가 그곳을 점령하기를 꺼려 했을 때 (힘든 일은 서로에게 미루고 안 맡으려고 한 거죠),
유다 지파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고 나아가서 결국 그 땅을 차지합니다.
유다 지파가, 그저 장자 지파가 된 게 아니라는 거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자원해서 앞장 서서 하다보니, 실질적으로 장자 지파가 된 것입니다. (물론 예언이 있었지만요)
이런 전통은, 조상 유다 때부터 생긴 것이었습니다.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간 11아들이, 베냐민이 붙잡혀서 큰 위기에 처했을 때,
유다가 두 번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 나서서, (한 번은 집에서, 한 번은 요셉 앞에서)
자신의 희생과 죽음을 각오하고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서 실질적인 '장자'가 되겠습니까?
위험한 일, 어려운 일, 힘든 일, 희생을 요구하는 일에
늘 자원해서 선봉에 나서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어처구니 없게 '서열'을 따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임직 순서대로의 '서열'로 뭐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처럼, 가장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에 앞장 섬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장자'로 인정받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노블리스 오블리주인 거죠.
▲히말라야 등정의 교훈 (펀 글) 히말라야 등정에서 가장 힘든 두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일단 산자락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본격적인 등정을 시작하는데,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고 7,400미터 지점에 마지막 캠프를 친다고 한다.
베이스캠프부터 마지막캠프까지 올라오는 과정에서 굉장히 힘든 일들이 많다.
각 산악인 개인적으로 본인이 감당해야할 체력적 소모와 육신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등반대가 같이 올라가니까, 공동으로 함께 지고 올라가야 할 짐도 많다.
그래서 이런 고봉 등반대 중에서 가장 힘든 역할을 하는 사람이.. 두 사람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은, 가장 선두에 서서 눈길을 개척하는 사람이요, 눈이 엄청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선두에 서는 사람은, 눈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선두에 서는 사람은, 10미터만 가도 탈진하기 일쑤라고 한다.
또 다른 힘든 한 사람은, 등정대가 함께 져야 할 짐들.. 예를 들면 로프, 장비, 텐트, 식량 같은 것들을, 자원해서 열심히 자기 등에 지는 사람이다.
반대로 가급적 공동의 짐을 적게 지려고.. 짐지기를 회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등반대원 중에서, 가장 힘든 두 역할을.. 기꺼이 희생해서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가장 힘든 두 역할을..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 나가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피해 나가는 사람은, 가급적 자기 짐만 지고서, 선두에 서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이다. 선두에 서서 길 개척하는 것, 공동의 짐을 지는 것 - 둘 다 회피하는 것이다.
그렇게 꾀를 부리는 이유는, 8천 미터라는 험산 고봉을 등정하려면, 자기 체력을 미리미리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마지막 등정 때, 대원들이 탈진해서 도중에 이탈해도, 자기는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 때를 대비해서 자기 자신의 힘을 평소에 아껴둔다는 것이다.
그런데 8천미터를 올라가면... 달라진다. 7,400미터 지점에서 마지막 캠프를 치고, 이제 정상 정복만을 남겨 두었을 때, 모두가 잠을 자고, 다음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데, (낮에 출발하면 얼음이 녹아서 위험하기도 하고, 밤 늦게 돌아오면 캄캄해서 위험하기도 하다)
그날 새벽에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고 한다.
대열에 앞장서지 않았던 사람들, 또는 자기 짐만 지고 온 사람들은 즉, 자기 체력을 소모시키지 않고, 남겨두었던 사람들은 그 다음날 새벽에 고소 적응에 문제가 생겨서... 즉 고소 적응이 되지 않아서 힘들어 한다는 것이다.
두통이 나고, 속이 미식거리니까.. 결국은 정상정복 등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마지막 베이스캠프에 머무르거나, 일찍 하산해야 한다.
그러나 앞장서서 자기 힘을 모두 다 소진해 버린 사람, 또는 공동의 짐을 짊어짐을 통해서 기진맥진 했던 사람들은, 하룻밤을 자고 나서, 마지막 가장 중요한 정상 등정의 날에, 고소 적응이 잘 되더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고생하면서 고소 적응을 잘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 8천 미터 이상을 올라가는 사람은 그 고지를 밟을 수 있는 사람은, 뒤에서 꾀부린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탈진할 정도로, 자기를 다 소진시킨 사람이라는 것이다. 꾀를 부려서, 자기 힘을 평소에 비축해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신앙공동체 생활도 마찬가지다. 행여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 짐이 남들에게 지어진 짐보다 많다고 생각될 때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인줄 아시고 감사하시기 바란다.
나 한 사람이 내 짐을 지기도 버거운데 남의 짐까지 어떻게 지겠느냐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 등정에서 주인공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중에, 공동체가 져야 할 짐을 더 지게 하신 분들도 계신다. 그런 분들은, 내일/마지막 등정 날, 이제 영광의 고지위에 올라서실 것이다. 편하게 요령을 피운 사람과는.. 엄연한 차이가 날 것이다.
◑2. 천국의 모형을 보여주는 진의 대형
12지파는,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3지파씩 이를 테면 열 십자 모양으로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 모양이 묘하게도, 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성의 12문과 비슷합니다.
동서남북 각 방향에 각각 3개씩 있다는 거죠.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계21:13
사도요한이 본 환상과, 민2장에 나오는 진의 대형이 그 모습이 비슷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가 만든 성막의 모든 식양은, 천국의 모형이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8:5
그러므로 광야 백성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나누어 진을 칠 때,
그들은 천국의 거주지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모세가 일러 주었겠지요.
그저 어떤 군사적 목적으로 그렇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골고루 나누기 위해서, 교통 질서 유지 차원에서 그렇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모습이 이럴 것이다' .. 를 머리에 그리면서, 진을 배치한 것이고,
실제로 만약 오늘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된다면,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사면에
동서남북으로 우리가 흩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도 '장막'이란 표현을 쓴 것입니다.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몸)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인들이 자기 몸을 가꾸며 화장하는 그 시간에
지옥에서 울부짖는 함성과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요.
우리는 그렇게 무너질 이 장막 집(몸)을 가꾸는 데는 엄청난 열심을 내면서도
그 화장하는 시간만큼도, 천국과 영생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세상에 살되, 너무 이 세상에 몰입해서 살지 말고, 천국을 늘 염두에 두고 살라고
하나님은 진을 칠 때조차도, 천국의 모형으로 진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나는, 천국의 영원한 집을 매일 단 1분이라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3.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 이스라엘 !? (말씀대로 행하기도 했고, 못하기도 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10:11 *개역
2: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1:1절부터 이런 표현이 반복해서 나오고,
본문 2:1절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민1~21장은 대부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언이 빠진 11, 12, 14, 16, 20, 21장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패역한 모습을 다루고 있어서 대조됩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한 게 아니라,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범죄했다는 뜻이지요.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1:54과 2:34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1:5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 (2:34)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였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이스라엘 백성 안에 질서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질서가 생깁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게 될 때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 내면 세계와 우리의 삶 전체가 질서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난장판과 같았던 우리 내면의 세계가 비로소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을 가지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는 교회가 될 때
교회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인간의 지혜가 그 질서를 만들지 못합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고 있는지 자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의 여정에 있었다면,
우리는 하늘 가는 천로역정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오늘 교회의 모습은, 사실상 광야 교회로 대변되는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자리가 광야이건 가나안이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순종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만들어갔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가 바로 이것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온갖 지혜가 이런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때 교회는 세상의 시장바닥과 같이 소란하고 복잡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생활은 .. <말씀 훈련>을 받는 곳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
민수기의 히브리 성경 제목은 "광야에서"입니다.
민수기 1:1절이 ‘베 미드바르’로 시작하죠. ‘In the wilderness’
광야에 나가 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거기에는 횡하니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아주 적합한 곳이라고들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들도 거의 없습니다.
나무들은, 강가나 오아시스 근처에서만 자라고,
강도 대부분은 우기 때나 형성되고, 건기 때는 바짝 메말라 있습니다. 매우 황량하고 메마른 곳입니다.
그런 “광야”에도 장점이 있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보통 출애굽기~신명기를 구원의 여정으로 해석합니다.
출애굽을 통해 .. 세례를 받고 마귀의 통치에서 벗어난 신자들이
시내산에서 약 1년 체류하면서, 광야 생활의 준비과정을 거친 후에 주1) ‘준비의 내용’
이제 민수기를 통해 .. 광야에서 훈련을 받게 되는데요
참고로, 로마서는.. 신자가 처음에 구원 얻는 ‘칭의’의 도리를 주로 강조한 반면
야고보서는.. 칭의 얻은 신자가 거치는 단계인 ‘온전, 영적 성숙’을 강조했습니다.
비슷하게 출애굽해서 세례 받은 광야교회는
민수기를 통해 장장 40년 광야생활을 거치면서, 믿음의 연단, 훈련, 영적 성숙을 받게 되는데요..
혹자는 예수님의 요단강 수세 후, 40일 광야에서 금식을, 여기에 대입하기도 합니다.
구약 백성(1세대)들은 40년 광야생활에서 결국 그 훈련과 성숙에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신자들의 대표로서, 40일의 금식과 유혹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이죠.
백성의 대표로 마귀를 이기시고, 승리를 가져오시기 위함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의 목적이
‘말씀 훈련’에 있었다고..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