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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장, 민수기는 우리의 거울이요 경계입니다

LNCK 2022. 9. 5. 11:19

◈민수기는 우리의 거울이요 경계입니다         민2장     여러 설교 정리      민수기설교모음

 

본문 민2장은 <진 편성 및 행진 순서>에 관한 여호와의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성경을 읽을 때, 본문 민2장은 그냥 5초만에 한 번 스캔하고 통과해서 지나갔습니다.

혹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본문 민2장이 필요했을런지 모르나,

오늘날 한국인인 내게는 거의 상관 없는 본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민2장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훈적으로 가르치십니다.

 

☞2:1~9   성도의 진

 

☞2:32~34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직과 질서 

 

 

◑1. 장자 지파가 전쟁의 가장 선두에 섰습니다. (노블리스 오브리주)

 

유다지파가 진의 동편에 위치한 대표지파 였는데, 

장막을 걷어서 행진할 때도, '군대'의 제일 선두에 서게 되었습니다. :3,

진의 동-남-서-북 순서로, 행진했거든요. '그들은 제 일대로 행진할지니라' :9

 

군대 용어로 '선봉대'라고 하는데, 

선봉대는 부대에서 가장 용맹하고, 스스로 희생을 각오하는 부대입니다.

적과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부대가, 선봉대이기 때문이죠.

 

후에 수14:12에 보면, 가나안 정복 때 헤브론은 거인 아낙 족속이 살고, 성도 크고 견고한데,

모든 지파가 그곳을 점령하기를 꺼려 했을 때 (힘든 일은 서로에게 미루고 안 맡으려고 한 거죠),

유다 지파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고 나아가서 결국 그 땅을 차지합니다.

 

유다 지파가, 그저 장자 지파가 된 게 아니라는 거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자원해서 앞장 서서 하다보니, 실질적으로 장자 지파가 된 것입니다. (물론 예언이 있었지만요)

 

이런 전통은, 조상 유다 때부터 생긴 것이었습니다.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간 11아들이, 베냐민이 붙잡혀서 큰 위기에 처했을 때,

유다가 두 번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 나서서,  (한 번은 집에서, 한 번은 요셉 앞에서)

자신의 희생과 죽음을 각오하고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서 실질적인 '장자'가 되겠습니까?

 

위험한 일, 어려운 일, 힘든 일, 희생을 요구하는 일에

늘 자원해서 선봉에 나서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어처구니 없게 '서열'을 따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임직 순서대로의 '서열'로 뭐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처럼, 가장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에 앞장 섬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장자'로 인정받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노블리스 오블리주인 거죠. 

 

▲히말라야 등정의 교훈  (펀 글)
히말라야 등정에서 가장 힘든 두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일단 산자락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본격적인 등정을 시작하는데,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고 7,400미터 지점에 마지막 캠프를 친다고 한다.

베이스캠프부터 마지막캠프까지
올라오는 과정에서 굉장히 힘든 일들이 많다.

각 산악인 개인적으로 본인이 감당해야할 체력적 소모와 육신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등반대가 같이 올라가니까, 공동으로 함께 지고 올라가야 할 짐도 많다.

그래서 이런 고봉 등반대 중에서 가장 힘든 역할을 하는 사람이.. 두 사람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은, 가장 선두에 서서 눈길을 개척하는 사람이요,
눈이 엄청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선두에 서는 사람은, 눈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선두에 서는 사람은, 10미터만 가도 탈진하기 일쑤라고 한다.

또 다른 힘든 한 사람은,
등정대가 함께 져야 할 짐들.. 예를 들면 로프, 장비, 텐트, 식량 같은 것들을,
자원해서 열심히 자기 등에 지는 사람이다.

반대로 가급적 공동의 짐을 적게 지려고.. 짐지기를 회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등반대원 중에서, 가장 힘든 두 역할을.. 기꺼이 희생해서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가장 힘든 두 역할을..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 나가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피해 나가는 사람은,
가급적 자기 짐만 지고서, 선두에 서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이다.
선두에 서서 길 개척하는 것, 공동의 짐을 지는 것 - 둘 다 회피하는 것이다.

그렇게 꾀를 부리는 이유는,
8천 미터라는 험산 고봉을 등정하려면,
자기 체력을 미리미리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마지막 등정 때, 대원들이 탈진해서 도중에 이탈해도, 자기는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 때를 대비해서 자기 자신의 힘을 평소에 아껴둔다는 것이다.

그런데 8천미터를 올라가면... 달라진다.
7,400미터 지점에서 마지막 캠프를 치고,
이제 정상 정복만을 남겨 두었을 때,
모두가 잠을 자고, 다음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데,
(낮에 출발하면 얼음이 녹아서 위험하기도 하고, 밤 늦게 돌아오면 캄캄해서 위험하기도 하다) 

그날 새벽에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고 한다.

대열에 앞장서지 않았던 사람들, 또는 자기 짐만 지고 온 사람들은
즉, 자기 체력을 소모시키지 않고, 남겨두었던 사람들은
그 다음날 새벽에 고소 적응에 문제가 생겨서... 즉 고소 적응이 되지 않아서 힘들어 한다는 것이다.

두통이 나고, 속이 미식거리니까.. 결국은 정상정복 등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마지막 베이스캠프에 머무르거나, 일찍 하산해야 한다.

그러나 앞장서서 자기 힘을 모두 다 소진해 버린 사람,
또는 공동의 짐을 짊어짐을 통해서 기진맥진 했던 사람들은,
하룻밤을 자고 나서, 마지막 가장 중요한 정상 등정의 날에,
고소 적응이 잘 되더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고생하면서 고소 적응을 잘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 8천 미터 이상을 올라가는 사람은
그 고지를 밟을 수 있는 사람은,
뒤에서 꾀부린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탈진할 정도로, 자기를 다 소진시킨 사람이라는 것이다.
꾀를 부려서, 자기 힘을 평소에 비축해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신앙공동체 생활도 마찬가지다.
행여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 짐이 남들에게 지어진 짐보다 많다고 생각될 때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인줄 아시고 감사하시기 바란다.

나 한 사람이 내 짐을 지기도 버거운데
남의 짐까지 어떻게 지겠느냐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 등정에서 주인공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중에, 공동체가 져야 할 짐을 더 지게 하신 분들도 계신다.
그런 분들은, 내일/마지막 등정 날, 이제 영광의 고지위에 올라서실 것이다.
편하게 요령을 피운 사람과는.. 엄연한 차이가 날 것이다.

 

◑2. 천국의 모형을 보여주는 진의 대형

 

12지파는,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3지파씩 이를 테면 열 십자 모양으로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 모양이 묘하게도, 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성의 12문과 비슷합니다.

동서남북 각 방향에 각각 3개씩 있다는 거죠.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계21:13

 

사도요한이 본 환상과, 민2장에 나오는 진의 대형이 그 모습이 비슷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가 만든 성막의 모든 식양은, 천국의 모형이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8:5

 

그러므로 광야 백성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나누어 진을 칠 때,

그들은 천국의 거주지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모세가 일러 주었겠지요.

 

그저 어떤 군사적 목적으로 그렇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골고루 나누기 위해서, 교통 질서 유지 차원에서 그렇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모습이 이럴 것이다' .. 를 머리에 그리면서, 진을 배치한 것이고,

 

실제로 만약 오늘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된다면,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사면에

동서남북으로 우리가 흩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도 '장막'이란 표현을 쓴 것입니다.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몸)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인들이 자기 몸을 가꾸며 화장하는 그 시간에

지옥에서 울부짖는 함성과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요.

 

우리는 그렇게 무너질 이 장막 집(몸)을 가꾸는 데는 엄청난 열심을 내면서도

그 화장하는 시간만큼도, 천국과 영생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세상에 살되, 너무 이 세상에 몰입해서 살지 말고, 천국을 늘 염두에 두고 살라고

하나님은 진을 칠 때조차도, 천국의 모형으로 진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나는, 천국의 영원한 집을 매일 단 1분이라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3.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 이스라엘 !? (말씀대로 행하기도 했고, 못하기도 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10:11 *개역

 

2: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1:1절부터 이런 표현이 반복해서 나오고,

본문 2:1절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민1~21장은 대부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언이 빠진 11, 12, 14, 16, 20, 21장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패역한 모습을 다루고 있어서 대조됩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한 게 아니라,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범죄했다는 뜻이지요.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1:54과 2:34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1:5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 (2:34)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였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이스라엘 백성 안에 질서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질서가 생깁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게 될 때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 내면 세계와 우리의 삶 전체가 질서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난장판과 같았던 우리 내면의 세계가 비로소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을 가지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는 교회가 될 때

교회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인간의 지혜가 그 질서를 만들지 못합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고 있는지 자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의 여정에 있었다면,

우리는 하늘 가는 천로역정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오늘 교회의 모습은, 사실상 광야 교회로 대변되는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자리가 광야이건 가나안이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순종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만들어갔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가 바로 이것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온갖 지혜가 이런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때 교회는 세상의 시장바닥과 같이 소란하고 복잡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생활은 .. <말씀 훈련>을 받는 곳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

 

민수기의 히브리 성경 제목은 "광야에서"입니다.

민수기 1:1절이 ‘베 미드바르’로 시작하죠. ‘In the wilderness’

 

광야에 나가 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거기에는 횡하니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아주 적합한 곳이라고들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들도 거의 없습니다.

나무들은, 강가나 오아시스 근처에서만 자라고,

강도 대부분은 우기 때나 형성되고, 건기 때는 바짝 메말라 있습니다. 매우 황량하고 메마른 곳입니다.

 

그런 “광야”에도 장점이 있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보통 출애굽기~신명기를 구원의 여정으로 해석합니다.

출애굽을 통해 .. 세례를 받고 마귀의 통치에서 벗어난 신자들이

시내산에서 약 1년 체류하면서, 광야 생활의 준비과정을 거친 후에           주1) ‘준비의 내용’

이제 민수기를 통해 .. 광야에서 훈련을 받게 되는데요

 

    참고로, 로마서는.. 신자가 처음에 구원 얻는 ‘칭의’의 도리를 주로 강조한 반면

    야고보서는.. 칭의 얻은 신자가 거치는 단계인 ‘온전, 영적 성숙’을 강조했습니다.

 

    비슷하게 출애굽해서 세례 받은 광야교회는

    민수기를 통해 장장 40년 광야생활을 거치면서, 믿음의 연단, 훈련, 영적 성숙을 받게 되는데요..

 

    혹자는 예수님의 요단강 수세 후, 40일 광야에서 금식을, 여기에 대입하기도 합니다.

    구약 백성(1세대)들은 40년 광야생활에서 결국 그 훈련과 성숙에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신자들의 대표로서, 40일의 금식과 유혹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이죠.

    백성의 대표로 마귀를 이기시고, 승리를 가져오시기 위함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의 목적이

‘말씀 훈련’에 있었다고..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다면 오늘 나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말씀 훈련’을 받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고 있습니까?

매일 여호와의 말씀이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면, 내가 너무 분주한 것입니다.

일을 줄이든지 해서.. 좀 차분해 져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순종하고 있습니까?

 

▲그럼 광야 이스라엘은, 들려오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했습니까?

본문1:54과 2:34에는.. 그렇게 순종했다고 증거하고 있죠.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10정탐꾼의 부정적 보고에 가담하여 하나님을 격노케 했습니다.

-또 메추라기 사건으로 하나님의 노를 불러 일으켰고,

-물이 없다고 불평하기도 했으며

-일부, 고라 일파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높이기도 했으며

 

-일부는 놋뱀을 쳐다보지 않음으로 불뱀에 물려 죽었을 것이고,

-일부는 40년 막바지에 모압 평원에서 바알브올 사건으로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5

 

그렇다고 그들의 전부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광야 2세대들은, 결국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다수는 실패했고, 소수는 성공했다는 얘기죠.  신구약 성경의 일관된 관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전부가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남은 자’는 반드시 구원의 성숙을 이루고, 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관점은 민수기 전체의 교훈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5

 

성경은 반복해서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가 남듯이, ‘남은 자’ 소수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고,

예수님도 ‘돌밭, 가시밭’은 열매를 맺지 못하나 (이들은 광야에서 엎드러진 이들과 같죠)

‘좋은 땅’은 열매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으며, 그 외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이란 비유로도 말씀하셨고,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도 하셨으며 *마22:14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 대해서도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으며

-들어가기를 구하여도(힘써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라고 하셨죠. *눅13:24

 

쉽게 말하면, 세례 받았다고, 교회 다닌다고, 직분자가 되었다고..

그게 구원의 성숙과 완전을 이룬다는 말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은 ‘넓은 길’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지금이나!

 

지금 민수기의 출애굽 1세대들이 (1~25장)

완전히 ‘빵점’을 맞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잘 해서 '합격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10장을 통해서, 또 그들이 반역한 사건들을 주로 설교로 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이 '빵점'이었던 것으로만 이해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날로 치면, '평균 이상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온전해지지는 않았다는 거죠.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1:5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 (2:34)

 

-성막도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다 만들었고,

-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세 지파씩 질서있게 행진하였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잘 따라갔고,

-정말 40년 동안 진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애굽으로 되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 생활을 일평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10정탐꾼의 부정적 보고에 가담하여 하나님을 격노케 했습니다.

-또 메추라기 사건으로 하나님의 노를 불러 일으켰고,

-물이 없다고 불평하기도 했으며

-일부, 고라 일파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높이기도 했으며...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5

 

▲정리하면,

광야 40년은 ‘말씀 훈련’ 받는 곳인데, 그래서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성도로 훈련, 성숙되는 곳인데

그들의 다수는.. 말씀에 순종하기는 했으나 (1:54, 2:34), 온전히 순종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부 순종하고, 일부 불순종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다’.. 라고 해석했죠.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10:11 개역

 

    그런데 여기서 신학에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거봐라, 구약을 보고, 민수기를 보니까.. 사람들은 율법적 신앙으로는 다 실패하더라,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셨어! 믿어야 돼!’

 

    이렇게 민수기의 실패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실패하기로 예정된 것처럼,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마음에 (회개나 변화가 없는 지적 동의로) 믿기만 하면 다 구원 받는 것처럼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일부는 옳지만, 일부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민수기의 올바른 해석은, 

-출애굽 성도들이 홍해를 건너서 구원은 받았지만,

영적 성장과 성숙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광야에서 대부분 엎드러지고 말았다.   ☞바깥 어두운 데

그래서 신약성도인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서,

심령의 변화를 이루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구원의 성숙과 완전(온전)을 이루자!

그들이 우리의 반면교사이다. 그들 중 소수만, 남은 자만 구원 얻지 않았느냐?

이것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봅니다.

 

민수기 백성들은, 말씀에 순종했지만(1:54, 2:34), 온전히 순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날 신약의 우리들은, 믿음으로 얻는 의 +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가 훨씬 쉬워졌고, 성숙(온전)하기가 쉬워졌습니다.

 

내 자유의지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그 길로 인도하시고, 내가 따라가는 거죠.

이것은 ‘믿기만 하면 자동 구원’이라는, 잘못된 신앙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관련글 스크랩 / 이스라엘을 광야로 우회 시킨 이유             출13:17~18         

요즘 우리가족에게 조그만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주는 아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마음에 불만이 가득 찾아온 것입니다.
아니 마음속에 불만이 많기에, 친구와 오래 사귀지 못하고 헤어진 것입니다.

아들은 그동안 가족이 자기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불평이 많았던 터였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회계사 시험을 치르고 난 뒤에도
쉬지도 못하고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자신이 처지에 대해 비관도 하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아내의 불평도 심했습니다.
생활비가 조금만 모자라도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가족들에게 날카롭게 대했습니다.
거기에 가족들이 모두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 역시 마음이 많이 상했으나
같이 싸우기에는 제 잘못이 더 많아..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불평이 쌓이니 무언가 되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짜증을 자주 내고.. 벌써부터 인생이 꼬인다고 불평타령입니다.

불평을 발설하면.. 그게 적어지는 게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내 불평이 다른 사람에게 가서 다시 불평을 일으키고
그 불평이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악순환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 사이에
‘많은 불평’이란 악한 영이 알게 모르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 역시 장사(세일즈)하는 사람이라.. 장사(세일즈)로 일어나고 싶은데
아내의 불신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그저 참고 있으나 마음속에 억울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평생 장사하던 사람을
50이 훨씬 넘어 장사를 빼고 그 무엇을 하려니..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내를 통해 그 무엇을 말씀 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마냥 참고 있는 중입니다.

회사가 한참 잘 나갈 때..
당시 심한 우울중을 앓는 아내를 위해
미련 없이 사업을 버리고 아내를 돌보지 못한 데 대한
저의 죄책감도 작용을 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좋은 사업 아이템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덥썩 붙잡고 사업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아내를 불안에 하게 하면서까지.. 사업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정의 평화가 사업보다 우선이다!’ 이건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사업이 바쁘니 아내가 뒷전이었던 때’와는.. 제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가장인 내가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 가정은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더 장사해서 일어날 수 있는데
이를 포기하려니
마음속으로 억울하다는 생각이 쉽게 떠나지 않습니다.

아들 역시.. ‘제 이런 마음과 비슷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억울한 마음이 자리를 잡으면.. 성격이 까칠해 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까칠해지면.. 친구와도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악한 영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사태를, 불러 옵니다.

그런데 어제 아들이 회계법인의 면접을 보았습니다.
면접장에 가기 전날 싸늘했던 집안의 분위기에, 많이 힘들어 했던 아들이었습니다.

더구나 빅4 중에 자기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에
낙점을 받지 못해 낙심이 많았었습니다.
아직 졸업반도 아닌데.. 아들은 벌써부터 조급증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불평을 하면 걱정이 찾아오고
걱정을 하면 마음이 조급해져 판단에 무리수를 주게 됩니다.

졸업반인 내년에 하면 될 문제를
벌써부터 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가족 모두 걱정을 많이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제는 면접을 보고나서 문자가 왔습니다.
면접을 잘 봤다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저녁에 들어와서 ‘엄마 아빠께 감사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특히 소파에 앉아 있는 엄마를 꼭 껴안고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자신이 면접장에 가니까
자신은 이미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학교의 경우 영어면접까지 까다롭게 보는데
자기 학교는 TO(채용 인원)가 많이 배정되어
비교적 쉽게 면접을 보았다는 이야기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보통사람보다도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입고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를 잘 키워주고 이끌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입니다.

환경이 바뀐 게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바뀌니.. 불평에서 감사로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예배도 성실하게 드리고, 감사하며 살겠다고 엄마와 약속을 합니다.
엄마보곤 ‘아빠께 짜증을 내지 말라’고 다짐을 받습니다.

에구구.. 저 녀석, 기특혀 ㅋㅋ
아들의 사과를 받고, 저에게 짜증을 내어 미안하다고, 아내가 제게 사과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가정을 하나로 만들고 계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 사랑이 머물면.. 서로 사과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에게 감사해 합니다.

전날까지 날카롭고 싸늘하게, 서로가 상처받던 발언이 사라지고, 감사가 넘칩니다.
모든 일은 그대로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바뀌니.. 짜증에서 감사로 바뀝니다.

며칠 전 성경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광야로 우회한 이유는
‘너희들이 바로 가나안에 들어가면, 약해 다시 돌아갈까 그러셨다’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해변)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출13:17~18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고, 감당치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않으신다는 거죠)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이신지요!
그래요 우리 마음에 감사가 부족하여 쉽게 무너지니까
이런 말씀까지 주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 가족은.. 지금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입니다.
지금의 어려움은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이 단련 후에는 제가 정금같이 나올 것입니다.

지금은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불평하지 않기, 가족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서로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기..
그리고 우리 가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기!

지금 글을 쓰는 동안
딸이 방에서 방언으로 기도하고 헤어드라이로 머리를 말리며
제법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음속으로 뭉클한 감동이 찾아옵니다.
좋은 가족을 주신 주님이여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절별 해석 ......................................................................................................................

 

2:2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직역하면 '회막 주위로 마주 보라'는 뜻이다.

한편 KJV는'회막 주위에서 멀리 멀어져'(far off about the tabernacle)로,

NIV와 공동 번역은 '만남의 장막에서 조금 떨어져'(the Tent of Meeting some distance)라고 해석했는데

이는 수 3:4를 참조한 의역인 듯하다.

 

수 3:4에는 언약궤와 이스라엘 진과의 거리가 2000규빗(약 912m) 정도 떨어지도록 명령되고 있다.

그런데 RSV는 원문에 충실하게 '각 방면에서 회막을 보게끔'(facing the Tent of Meeting on every side)으로,

만일 이것이 옳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천막 입구는 회막을 향해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이스라엘은 항상 성막을 바라보며 그곳을 사모하고 특히 그곳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레 19:30, 단 6:10).

물론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임을 당하는'(1:51) 규례로 보아

회막과 주거지와의 거리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2:2은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어떻게 진영 가운데 위치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 진영 전체의 중심에 성막이 위치하는 것입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그 사방에 레위인들이 진을 치고, 그 다음의 사방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기 세 지파가 한 부대를 이루어서 진을 치게 되는 형태입니다.

 

이 진영 형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너희의 생명이다”하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힘과 능력과 지혜는 모두 그들 중심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성막으로 보여지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됨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 언약의 내용을 성막과 그 위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날마다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모든 민족과 구별될 수 있는 특징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 형태 속에서 그대로 메아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요,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출 33:1~4)”

 

이 말씀 앞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또 구합니다. 이때 모세가 한 기도는 그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을 너무나 잘 알았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출애굽기 33:16입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로 자기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신 것입니다.

 

2:9 유다 진영에 속한 군대로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팔만 육천사백 명이라 그들은 제 일대로 행진할 지니라

 

‘제 일대로 진행할지니라- 즉 '첫 번째로 출발해야 한다'(RSV, they shall set outfirst)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첫 번째'(리숀)란 말은'머리'(로쉬)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머리, 곧 행진시 선봉에 서는 영예를 누리게 된 셈이다(창 49:10).

 

그러나 그것은 직분상의 머리가 아니라 전투적 사명에 있어서의 머리를 가리킨다.

실로 유다 진 기에 속한 자들은 싸움에서 물러서기를 싫어했다.

그 단적인 예가 80세의 노년에 이르러서도 전투에 앞장섰던 유다 지파 출신의 장군

갈렙의 용맹성에서도 잘 나타난다(민 13:6, 30, 수14:13, 14, 15:14).

 

진정 하나님은 비겁한 자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오직 강하고 담대한 자라야

그의 부르심을 따라 죄악과 싸우는 전투에 앞장 설 수 있는 것이다.

 

아이작 왓츠는 '뭇 성도 피를 흘리며 큰 싸움 하는데 나 어찌 편히 누워서 상 받기 바랄까?'

라는 찬송시로 성도들의 분발은 촉진했다. 실로 용맹했던 유다 지파처럼

각자에게 부과된 사단과의 영적 전쟁을 충성스럽게 수행하기 위해 '제일 대'에 편성되어

싸움터로 나가는 성도야말로 오늘날 하나님 나라 건설에 꼭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2:16 르우벤 진영에 속하여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오만 천사백오십 명이라 그들은 제 이대로 행진할 지니라

 

‘제 이대로- 실제 행군에 있어서 유다 지파를 뒤따랐던 제 2행렬은

성막 물품들을 운반하는 레위 지파의 게르손, 므라리 자손들이었다 (10:17-70).

그렇다면 르우벤 지파는 정확히 말해 제 3행렬에서 행진했던 것이다.

이들이 성막 물품을 호위하며 행진했을 것으로 본다.

 

2:17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회막이 레위인의 진과 함께- 이는 고핫 자손들이 성막 내의 성물(聖物)을 메고 행진하는 것을 가리킨다(10:21).

이와 같이 성막의 성물은 성막과 분리되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제일 중앙에 위치했다.

 

즉 이스라엘의 네 편대 중 두 편대(유다, 르우벤 진 기에 속한 자)는 회막 앞에,

나머지 두 편대(에브라임, 단 진 기에 속한 자)는 회막 뒤를 따랐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거주할 때 뿐 아니라, 행군 시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을 중심하여 생활할 것을 묵시적으로 명하셨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로서,

진정 하나님께서는 장소를 불문하고 당신을 중심한 신앙생활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2:3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

 

이 단순한 행동 속에 이스라엘 백성의 나머지 38년간의 광야 생활이 함축되어 있다.

실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설정해 주신 행동의 규범을 따라 기나긴 광야 여정을 진행해 갈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 거하는 동안

주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필연성을 제공한다(시 119:105).

한편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전체 진 규모 면적은 12평방 마일(약 19,308km2) 정도였다고 한다.

 

 

...........................................

 

주1)

그 시내산에 머무는 1년 사이에, 대략 4가지 중대한 일을 했습니다.

 

1) 시내 산에서 성막 계시와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규례들을 지시받았습니다.

 

2) 출애굽 2년째 1월 1일에 <성막 건립>했습니다.(출40:17).

 

3) 성막 건립 후 곧 <레위기 규례>가 주어졌습니다. *레위기서

이 규례들은 출애굽 제 2년 1월 1일 ~2월 1일, 즉 한 달 사이에 주어진 것입니다.

 

4) <민수기 규례>가 출애굽 제 2년 2월 1일부터 약20일간 주어지기 시작했는데,

본문 민1장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진의 대형과

-인구조사에 관한 것입니다.

 

민10:11~12 '출애굽 후 제2년 2월 20일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