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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3장, 대속물로 바쳐진 레위인
LNCK
2022. 9. 7. 07:29
◈대속물로 바쳐진 레위인 민3장 여러 설교 정리
<민3장의 개요>
3:1~4 아론의 아들들
3:5~10 제사장을 돕는 레위 사람
3:11~51 레위 자손 인구 조사
◑1. 제사장은 기름부음을 받았고, 위임을 받았다
3절,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은 제사장들이라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왕같은 제사장'인 우리들(벧전 2:9) 역시
어떠한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
'복음의 제사장'(롬15:16)으로서 위임을 받아야 되는데요,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따로 떼어놓습니다.
이렇게 따로 떼어져서, 즉 거룩하게 구별되어 :3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이, 즉 '레위인'같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위임 받은’
직역하면 '그들의 손이 채워진'입니다. 제사장은 제물이 그들의 손에 주어졌죠.
즉 하나님께 분명히 지시(위임) 받은 일만 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요!
위임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구체적인 ’사명‘을 뜻합니다.
물론 교회의 위임을 받는 것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펀 글) 성령의 기름은, 퍼내도 퍼내도... 줄어들지 않고 다시 채워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항아리를 하나씩 주셨다.
신비한 항아린데 <꼭 반밖에 차지 않는 항아리>다.
어떤 사람은, 이 반밖에 차지 않는 항아리에다
자꾸만 가득 채우려고 노력한다.
사랑도, 관심도, 돈도 채우고, 별의 별 것을 다 채워보지만
항아리가 가득 안 차니까.. 평생을 괴로워하며 산다. <절반만 차는 항아리>다.
또 어떤 사람은,
반밖에 없지만, 그것을 열심히 퍼 주고, 나눠준다.
사랑도, 관심도, 구제도, 자꾸 자꾸 나누는데
항아리가 줄어들지 않고, <항상 그 절반 수준을 유지하는 신기한 항아리>다.
그 항아리가 나에게도 주어졌다.
없다고 말하지 마시라.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나누고 퍼 주는 일에 사용할 때
평생 '나누는 행복' 가운데 살게 될 것이다.
오병이어 기적도 나눌 때 일어났다.
먼저 받은 사람이.. 나누지 않았다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항상 절반만 차는 항아리>처럼,
자꾸 자꾸 떡을 떼는데도.. 신기하게 줄지 않았던 것이다.
나눌 때 늘어난다.
떼지 않고, 쪼개지 않고, 나누지 않았다면.. 그대로다.
사렙다 과부의 기름도 절대로 마르지 않았다.
이것도 <절반만 차는 항아리>와 같다.
자꾸 부어내도 절반,
안 부어내도 절반, (안 부어내면 기름이 저축되어야 되는데..)
나눠도
안 나눠도
내 항아리는 항상 절반이다.
그래서 <신비한 항아리>이다.
◑2. 레위인, 제사장은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
4절,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여호와 앞에’ - 직역하면 '여호와 면전에, 얼굴 앞에'란 뜻이죠.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의 경거망동은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완전히 무시한 행위나 다름없었죠.
직장에서 직원들이 자기들끼리는 농담도 하고, 가벼운 욕설도 섞어가며 대화하다가
그래도 상사가 있는 자리에서는, 그 면전에서는, 경거망동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상사의 면전에서, 언어나 행실이 경거망동 한다면... 상당한 불쾌감을 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장과 레위인 등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항상 ‘여호와 앞에’ 즉 ‘여호와의 면전에서’ 섬기므로
언행심사에 절대 경거망동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안 그러면, 본문의 나답과 아비후처럼 하나님의 침을 받아 ‘죽게’ 된다는 거죠.
그들의 잘못은, 자기들이 아론의 아들들인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섬긴다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죠.
일찍 종교개혁자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코람데오’를 강조했습니다.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고양(高揚)하든지 아니면 훼손하든지
둘 중 하나의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운명과도 직결됩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써(눅 1:6) 의인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됩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합니다.
재임기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직무를 수행하겠다는 약속이자 다짐입니다.
우리고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결혼할 때, 또는 교회 직분자들 임직식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합니다.
요즘 만약 이런 의식이 점점 사라져 간다면, 다시 원상복귀 시켜야 합니다.
요즘 신랑신부가 손을 잡고 입장해서, 사회자만 세우고, 주례자 없이 하는 결혼식도 있는데,
하나님 앞에 서약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복을 안 받아도 된다는 뜻도 됩니다.
레위인, 제사장만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것이 아니요,
교회 직분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것이요
성경에 손을 얹고 결혼한 부부들도 ‘하나님 앞에서’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서 다른 불’을 드리다가 사망했다면,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다른 짓’을 하다가는
사망에 이르거나, 아니면 사망의 고통을 당하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롬6:23
◑3.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은 레위인들을 향해 ‘너희는 내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12, 45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집에 종들이 된 것입니다. 어떤 자유인의 신분이 박탈된 것이죠.
유월절에서 히브리 장자들이 살아남은 이후로,
하나님은 ‘너희 모든 장자는 내 것이라’고 하셨고,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 대신에, 하나님은 레위인을 대속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더 자세하게는 주1)을 보세요.
그래서 반 세기 전에, 구약성경을 읽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장자는 하나님께 바친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성도의 각 가정에 장남은, 억울하게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하나님께 서원하고 바쳐진 가정이 많았습니다...
▲그럼 신약에도 ‘레위인’이 있나요?
즉 성도의 각 가정에 마땅히 하나님께 바쳐져야 될 장자를
대신해서 바쳐지는 레위인 같은 사람들이 있나요?
각 교회마다 전임사역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레위인’들인가요?
원칙적으로는 아닙니다. 그런 정신은 신약에도 계승될 수 있어도
그런 제도는 신약에 없습니다. 새언약에서 구약의 모든 제도는 철폐되었습니다.
(장자와 차자와 딸들을 포함한 성도들인) 우리의 생명값을 대신할 대속물은
레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이미 다 치러졌습니다.
그러니 각 가정에서, 장자를 하나님께 바칠 필요도 없고
교회의 전임사역자들을, 하나님께 바쳐진 레위인으로 간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형식과 제도는 철폐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신, 그 의미는... 신약에도 계속 계승되며, 우리가 되살려야 되는데
그것은 ‘누군가 내 생명을 대속했다’는 것입니다.
(*대속 : 대신 값을 치르고 그 생명, 사람을 사다, 노예에서 자유케하다)
신약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 피로 우리를 사셨으므로 (행20:28),
우리에게 대한 소유권을 갖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 상황을 두고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했죠(고전6:19, 20).
이런 사상은, 구약의 본문을 배경으로 하는 거죠.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장자들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누가 장자입니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은 모든 신자들이 다 장자입니다.
히12: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여기서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이 무슨 말입니까?
장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은 모든 장자들, 곧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레위인이 되셨다!
본문에서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바쳐졌듯이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18:23~35절에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제도로는 철폐되었으나, 그 의미와 정신은 신약에도 계승됩니다.
그 의미와 정신이 신약에서 계승되는 이유는, 구약과 신약이 일맥상통하는 주제의 흐름이 있기 때문이고,
만약에 구약의 모든 사건의 의미와 정신마저도 신약에 계승되지 않는다면,
아예 구약성경 39권을 버려야 됩니다. 신약27권만 우리는 갖고 다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66권을 성경으로 치는 것은, 그 ‘의미와 정신’이 신약에도 계속 계승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레위인으로 대속했다는 사건은
-신약에서는 모든 성도가 장자이며 (히12:23)
-신약의 모든 성도들은 1만 달란트 같은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대속물 레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죠.
1만 달란트보다 더 값비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빚진 자’라는 의식이 확고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1:14
그런데 우리는 ‘빚진 자’를 좀 색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구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전해 받았으니.. 빚을 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선교에 힘을 써야 된다...’
그것도 말은 되지만, 원래 성경에서 말하는 ‘빚진 자’의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빚진 자’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값으로 대속받은 .. 빚
1만 달란트나 되는 내 죄의 값을 탕감받은 .. 빚
그것이 구약에서 유래하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본문에 ‘레위인’이 이스라엘 가정의 모든 장자들을 대신해서
대속물이 된 것입니다.
▲아울러 덧붙여서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만약 광야의 출애굽 백성들, 12지파라면
레위인에게 마땅히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마땅히 우리집 장남이 징발되어서, 하나님 집에 종이 되어야 했는데,
레위인들 전체가 (장남이 아님) 대신 징발되어준 것입니다.
그러니 12지파는 십일조 등으로, 레위인들을 먹여살린 것입니다.
십일조가 하나님이 정하신 구약의 법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도 그런 의미가 있었던 거죠. 대신 징발되어준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그럼 신약에서는 ‘그 정신과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물이 되셨기에, 레위인은 신약에 필요 없습니다만,
하나님은 ‘영’이시라서, 하나님이 영으로 뭘 하실 수는.. (어떤 의미에서) 없습니다.
하나님께도 반드시 손발이 필요하며,
레위인은 아니더라도, ‘레위인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불러서 사용하십니다.
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에서 제도적으로는 폐지되었다 할지라도
‘그 의미와 정신’은 여전히 전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의미와 정신’마저도 폐지된 것으로 만약 누가 믿는다면,
그는 성경에서 39권은 떼버리고, 27권만 들고 다니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물 되심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앞서 구약에서 레위인이, 이스라엘(나)의 대속물 되어줌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그 은혜에 감사해서,
오늘 내 주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신약의 레위인들 (풀 타임 사역자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십일조가 신약에 폐지되었다고 해서
내 주위의 전임 사역자 full-time minister 들이 생활고를 겪고 있는데도
‘나는 레위인으로 부름받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하고, 그들을 모르는 척하고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대속받은 사실을, 외면하고 부인하는 결과와 같은 것이고
-그것은 결국은 자신이 대속(영생)을 받지 못하는 결과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면 진정으로 대속받은 사람은,
그 은혜와 감격이 너무 크게 흘러 넘쳐서
일평생 스스로 ‘빚진 자’로서 살 수밖에 없거든요.
본인이 진짜 대속받은 게 아니니까,
‘빚진 자’의 심정이 없는 것입니다!
..............................................
주1)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속함
15절에서 하나님은 레위인 계수의 원칙을 주시는데,
그것은 한 달 이상된 남자의 수를 계수하라는 것입니다.
계수하니 그 숫자가 모두 22,000명이었습니다. :39
그 다음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남자 아이들을 계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42
그 숫자는 22,273명이었습니다. :43
두 숫자를 비교하면 레위인의 숫자가 273명이 부족했습니다.
이 부족분에 대해서는 1인당 5세겔씩을 속전으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셨고
이 속전은 아론과 그 아들들 즉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졌습니다. :46~48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가축 중에서도 처음 태어난 수컷에 대하여
동일한 원리로 레위인의 가축으로 대속한다(제사장에게 준다)는 개념이 포함됩니다. :45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한 가지 선언이 있는데,
“레위인은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12, 45,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특이한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 역사적 유래는, 첫 유월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불과 1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 밤, 애굽 전국에서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궁에서부터 모든 백성의 가정에서 장자들이 일제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백성들의 장자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날에 하나님의 은혜로 죽지 않고 살았던 장자들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
즉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유월절 이래로, 하나님은
각 가정의 장자와 짐승의 처음 난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출13:11~12
이 말씀에 의하면 중요한 원리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바쳐졌다는 것입니다.
짐승 중에서 수컷의 처음 난 것은.. 제물로 바치고,
사람의 경우에도 다른 것으로 대속(대신 바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장자는 레위인으로 대속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제시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룰(정해진 규칙)인데
그 대신에 바쳐진 사람들이 바로 ‘레위인’인 것입니다. (*레위인은 장자가 아니라 모든 레위인)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인에게 ‘너는 내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12, 45
이스라엘 모든 장자들의 목숨 값으로, 하나님이 대신 취하신 것입니다.
12절,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절,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