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제목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너무 쉬운 구원" 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은 로마서 9장 이었어요. 롬9장에는 '누가 주인인가?, 예수님이 진정 주님 Lord이신가?' 를 다루었어요.
◑그런데 오늘 읽은 롬10장에는 "자기 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어요.
롬10:2~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지금 읽은 롬10장은, 유대인들에 대한 말씀이예요.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맡았잖아요. 그리고 성막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주님이 들어오신 것을 다 봤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택한 백성이 되었고, 그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제사장 나라로 택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어요. 여러분, 유대인들은 정말 열심이 있어요.
비행기를 타면, 기내식이 나올 때, 유대인들에게 음식을 먼저 줘요. 왜냐면 코셔 음식이 나오는 거죠. 그들은 레위기의 말씀대로, 정결한 음식만 먹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클린/ 언클린, 즉 뭐가 정한 것인지/ 부정한 것인지... 어렸을 때부터 레위기를 통하여 배워요. (*열심이 있다는 말)
그래서인지 유대인들은 정말 깨끗해요. 그래 전쟁이 나도, 전염병이 돌아도,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에는 전염병이 없었어요. 그렇게 정결법에 열심이 있었어요.
유대인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정말 유대인들은 열심이 있어요. :2 이스라엘의 독립전쟁과 6일전쟁 때, 주변 아랍국들은 6일 전쟁을 계획했어요.
그들이 '6일 전쟁'을 계획할 때, *1967.06.05.~10 그래서 그들이 쳐들어올 때 수요일 날, 월요일 날에 쳐들어왔다면, 방어가 쉬었을 거예요.
그런데 안식일에 아랍국들이 공격을 하니, 유대인들은 안식을 날이라고 반격도 안 하고 기다리다가, 토요일 저녁 6시부터 반격을 했는데 결과는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욤키푸르 전쟁' 때는, 제가 이스라엘에 살면서 직접 주민들로부터 들었어요. 하늘에 비행기가 가득 찼대요. *1973.10.06.~25
욤키푸르(대속죄일)이잖아요. 대속죄일 지키느라 서로 무전도 안 하고.. 그래서 주민들은 '다시 나라를 잃어버리는구나'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데 욤키푸르 (대속죄일이자 안식일) 지키느라, 지프 타를 타지 않고, 걸어가서 전쟁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정말 유대인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어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켜요. 하나님께 열심이 있어요.
그런데 2절에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10:2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 말씀에 열심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던 유대인처럼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3절에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제가 예수 믿고 나서, 말씀을 배운 지가 40년이 넘었어요. 목사가 된 후로도 몇 십년이 지났어요.
그러나 이제 제 나이가 60세가 넘고 있지만, 저는 별로 변한 게 없어요.
여러분 이 시간에, 어린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걸 보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신앙은, 도무지 자라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이 상태로 앞으로 평생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연합된 삶'이 되지 않으면.. 영적 성숙이 없습니다.
내가 노력을 해서, 내가 맺는 열매가 아니라, 포도나무처럼 예수님께 붙어 있어서, 열매 맺는 삶이 되어야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이시간 각자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제껏 이렇게 살아 왔는데요. 이것을 막는 것이, '자아, 자기 의'입니다.
불와 불의는,
양심도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고 기록된 말씀에 죄 라는 것은 분명히 누구나 알아요.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 '자기 의'이에요. 그렇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어요. 왜 그랬습니까?
그들 유대인들은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게 아니에요. 그들 자신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자들이었어요. 그 중에서 대표적인 자가 사도 바울이잖아요. 청년 사울은 생각했어요.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이 특심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은 어려서부터 주님을 섬겨왔다는 거예요. 근데 어땠습니까?
사울 속에는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을.. 죽이고자 했어요. 왜 그랬습니까? 그는 자신이 '율법에는 흠이 없는 자'(자기 의)로 생각했어요.
자기 스스로 바라볼 때, 자기는 율법의 흠이 없는 자요, 양심에 거리끼는 삶을 안 산 거예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음성을 듣게 되죠.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은 자신을 그 핍박당하는 성도들과 동일시 했어요. 그때 사울은 말합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그 때 주님은 그를 장님으로 만드셨어요. 사울은 스스로 알았어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게 장님으로 살아왔구나'
▲여러분, 저 자신도 지금 그런 마음이에요. 제가 성경을 많이 보고 살아 왔어요. 괴로워도 성경을 봤었어요. 괴로울 수록.. 괴로움이 제게서 사라질 때까지 성경을 계속 읽었어요. 내 마음에 통증이 멈출 때까지 성경을 봤어요.
그런데 저는 깊이 기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도 기도는 (몰임이, 깊은 기도가) 잘 안 되는 거예요. 너무 너무 괴로워요. 저는 지금은 기도에 힘쓰려고 그래요.
여러분, 우리가 기도에 힘 쓰는 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은 하루종일 읽을 수 있습니다. 지성의 영역이니까요. 그런데 기도는요, 한 시간도 하기 어려워요.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하루 종일 볼 수 있어요. 그런데 기도는요, 주님 앞에서, 그분과의 교제이고, 호흡인데요. 호흡이 원활하지 못하고, 일부 막혀 있는 때가 있는 거예요.
저희 교회 주일예배가, 정직하게 주님 앞에 서는 예배 되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죽은 영혼을, 주님이 살려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렇게 성경을 힘써 보며 살아왔는데요. 그래서 제 마음속에는 교인들을 많이 가르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어요. '성경을 열심히, 잘 가르치면 (목회가) 될 것이다' .. 라고 막연히 생각 했는데요.
그런데 지금까지 저의 목회의 결과를 보니까,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머리로만 성경지식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이 두꺼운 성경책에 나오는 수많은 성경 지식을 가르치는 데요. 특별히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저는 이 말씀이 구원의 핵심인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이 말씀을 중점적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성경을 지식으로만 배워 온 거예요. 한때는 이런 말들이 저희 교회 주변에서 들려왔어요. '저 교회 교인들은 말로는 못 당해! 다 목사 급이야!'
그때는 잠시 우쭐했는지 모르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게 다 머릿속에 지식일 뿐인 거예요. (여전히 '자기 의'가 안 변함)
저는 그것을 몰랐던 것 자체가, 제가 장님이었다는 거죠. 이제 수많은 교인들이 떠나갈 때..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요.
'자기 의'가 드러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대부분 교회에서 충성을 다해 열심을 낼 때 드러나져요. 유대인처럼! 어떤 사람은 10년 만에 드러나요.
그건 충격이었어요. 왜냐면 그렇게 교회 일에, 목회에 열심을 냈는데요. 뭐가 드러나냐면 '내가 주인'인 거예요.
그리고 들어나는 게 '내 자아' 구원 받은 성도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절감 했어요.
왜냐면 '자아' 라는 단어는 현대 말로는 '자존심'이에요.
왜냐면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도 그 집사님의 자존심만 건드려지면,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져야 될 '옛 본성'이 나오는 거예요. 못 견디는 거예요.
제가 그것을 보면서 '주님, 저는 머리 속에 성경 지식만을 가르쳐 왔습니다.' 저는 제자훈련도 말씀을 잘 가르치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물론 말씀을 잘 가르쳐야죠) 지금 저는 뼈저리게 나 자신부터 돌이키고 있어요.
여러분, 머리에 담겨진 지식은, 우리를 구원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며 눈물로 애통할 때, 머리에서 우리의 가슴으로 내려옵니다. 눈물로 애통해도, 우리는 삶이 돌이켜지지는 않습니다.
▲설교의 황태자 라고 불리는 스펄전 목사님은 <천로역정>을 죽을 때까지 100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6살 때부터!
근데 하루는 기자들이 찾아와서 그 분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설교하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회개합니다.'
그 말을 듣고 스펄전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인들이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집에 돌아가서 슬픈 소설을 읽으면, 더 뜨거운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자주 부르던 찬송은 이거였죠.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단 하나! 머리 속에 지식만 들어있으면, 죽은 지식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에요!
이 행함은, 우리가 애통하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여러분, 성경 전체는.. 능력을 나타내는 게 아니에요. 성경 전체에 가장 중요한 것은, the will of God 하나님의 뜻이에요.
진정 회개하는 자들은 주의 뜻 앞에서, 주의 뜻을 살피며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주인"인 사람들은, 믿는 것 같지만 예언도 좋아하고 그래요. 왜요? 예언을 왜 알고 싶어 합니까?
올바른 예언은 주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 거잖아요. 물론 예언은 바로 쓰면 유익해요.
제 삶에서도 과거에 절망속에서 살 때에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빛이 비춰진 때가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셔도, "내가 주인"인 사람은, 내가 싫어할 때는 그 예언에 순종하지 않아요.
내가 기분 좋은 것은 순종해요. 근데 내가 싫으면 순종하지 않아요. 기준이 누굽니까? 기준이 자기 입니다. 이게 "자기 의"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지난 1년간 처럼 내 머리 속의 생각, 내 판단, 내가 살아온 모든 경험이 주님의 뜻을 막는 '자기 의' 라는 것을 비로소 주님이 보게 하셔서 정말 감사해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저는 회개해야될 죄 가운데서 돌이키는 가운데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요, 주님이 드러내신 것은 제 "자기 의" 이에요. 지금 제가 교인들에게 현재 설교를 하는 시간에도 제 머리속에 '내가 맞다고 믿는 이 설교!'
이것이 주께서 허락하신 게 아니라면, 열매를 맺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저는 속으로 '내 설교가 맞아!'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겠지만,
이 설교가 맞다고 칩시다. 그렇지만 이 설교가 생명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정말 저의 이 무능력함, 그리고 이 부패한 마음.. '이 속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이런 마음으로 지금 설교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낙심되고 좌절되지만.. 모르겠어요.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은 주님이 긍휼히 여기사 제게 주셨어요.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은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라서 저를 설교하게 하시고 계세요.
어러분, 이 시간에 이 설교로 인해서, 이 예배로 인해서 우리는 더 약해져야 될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더 강해져야 될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구할 수 있는데, 근데 성령의 능력을 구할 때, 만약 내가 바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바꾸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건, 일터에서건.. 주님은 그 잘못된 의견,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는 가족이건, 직장 동료이건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들을 바꾸려고 하는 게 먼저가 아니에요.
복음은 그들을 통하여, 우리를 바꾸시는 거예요.
주님은 에서를 바꾸려고 한 적이 없어요. 주님은 야곱을 계속 부수셨어요. 환도뼈가 부서질만큼 주님이 야곱을 바꾸셨어요.
여러분 이 시간에 오늘 우리가 은혜를 받아서 가족을 바꾸려고 하거나, 일터에서 우리를 연단하는 사람들, 그들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을 통하여, 내가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들은 더 약해져야 되고, 야곱처럼 환도뼈가 부서져서 주님만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 여기에 이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열심이 있었으나 그는 예수님을 죽이는 열심이 되고 말았어요.
오늘 본문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롬10:2
바울이 그랬어요. 자기는 율법에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는 동안에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어요.' 롬10:3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는 의가 없어요.
제가 종종 보는 책이 있는데요. <청교도들>이란 책인데요. 그 중에서 조지 휫필드 목사님을 제가 자주 말할 거예요.
휫필드 목사님이 죽었을 때, 장례식 설교를, 감리교를 만든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했어요
(근데 오늘날 휫필드 책은 품절이에요. 절판이에요. 여러분 휫필드의 메시지를 복구하는 교회 되길 기원합니다.)
휫필드가 죽었을때, 장례식에서 웨슬리가 이렇게 말했어요. "초대교회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휫필드처럼 쓰임 받은 사람은 없다"
사실이에요. 왜냐면 웨슬리 자신이 장례식에서 설교하면서 웨슬리는 휫필드와 (신학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했어요. 휫필드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했던 거예요.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단언을 했어요. 웨슬리처럼요.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휫필드 같이 쓰임 받았던 사람은 없다"
(주/ 그 이유는, 휫필드가 신학적으로 칼빈주의를 정립해서, 18세기 당시에 널리 전파했기 때문. 그냥 말을 타고 열심히 전도만 하고 다닌 것이기보다는, 신학적으로 정통 신학을 당대에 세웠던 것 때문)
휫필드 목사님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어요. 그러면 이렇게 휫필드 목사님 말한 것을,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근데 나는 지금까지, 그 분의 책을 눈을 뜨고 읽었으면서도 그분이 강조하신 '자기 부인'의 중요성을 몰랐던 거예요.
내가 거기에다가 밑줄을 치기는 했지만, 그 중요성은 뼈저리게 몰랐던 것이죠.
휫필드 목사님이 한 말씀이에요. 뭐냐면 "인간의 마지막 최후의 우상은 자기 의 이다"
저는 밑줄을 쳐 놓고도 몰랐었죠. 그러나 최근에 주님께서, 저와 저희 교인들에게 자기 의를 드러내시면서 그 중요성을 새삼 알게 된 거예요.
휫필드가 말하기를 "인간은 끝까지 최후의 우상, 끝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자기 의.. 이다" 라고 말했어요.
여러분, 이 시간에 휫필드 목사님이 그토록 강조했던 "자기 의" 끝까지 내가 지키려고 하는 마지막 우상, 최후의 우상이 "자기 의" 라는 거예요.
여러분, 주께서 정말 이 말씀으로 우리 속에 빛을 비춰주시기를 바래요. 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다'는 거예요. 10:3
▲루터도 그랬습니다. 루터는 프로테스탄트, 반발하는 신부가 아니었어요. 루터는 모범적인 신부였어요. 그래서 그는 신학교에 교수가 되었어요.
그는 고해성사에 가장 열심인 신부였어요. 그런데 그가 율법에 매여 있는 거예요.
루터는 자다가도 고해성사 하지 않은 것이 기억나면 한밤 중에 주임신부를 찾아가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고해성사 해야 될 것을 까먹었다고요.
그렇게 루터는 모범적인 신부였어요. 착실한 신부였어요.
그런데 이렇게 모범적으로 가톨릭에서 인정받는 루터 신부가 그가 이제껏 세워 온 것이 "자기 의" 라는 것을 깨달았던 거예요.
자기가 가톨릭 교회에서 열심을 내었던 어떤 모든 에너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고해성사와 여러가지 가톨릭의 활동을 통하여 "자기 의"를 열심히 세워온 것을, 그가 깨닫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는 로마서를 통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걸 알게 돼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 루터에게, 이 로마서 말씀이 그에게 빛이 되었어요.
그 빛은, 그 겁쟁이였던 마르틴 루터,
자기 친구가 자기 옆에서 벼락을 맞고 불에 타 죽었어요. 그 충격으로 루터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신학교에 가게 돼요. 그렇게 겁이 많았던 루터 였어요.
이렇게 평생에 겁이 많았던 루터가 로마서를 통해 빛이 자기에게 비춰졌을 때,
그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교황에 의해서 화형 당할 줄 알면서도 평생 겁쟁이로 살아온 마르틴 루터는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돼요!
그러면서 이런 찬송시를 지었어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러분, 우리가 겁쟁이로 태어났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능력이 있고 성격이 강한 사람을 보면, 부러워 할지 몰라요.
여러분 근데 그런 강함도.. 자기 의, 육적인 열매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의!'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손과 발이 못 박힌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극한 고통의 십자가, 원래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건데, 로마제국이 십자가형을 도입했어요. 예수님은 그렇게 손과 발이 못 박혀 죽으셨어요.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사는 동안에, 저는 60이 넘었지만 60세가 되건, 80세가 되건 간에 이 시간에 정직하게 주님 앞에서, 주님께 드릴만한 열매가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있는데요.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겸손하게, 정직하게, 주님 앞에 서는 예배가 되길 바래요.
그렇다면 당연하게 어린아이들이, 우리가 보이는 본을 통해서 그들이 따라올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난 40년 동안 이렇게 목회를 하면서 살아왔는데요. 제 삶의 열매는 '광야'인 거예요.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이 아닌 거예요.
저는.. 풍성한 가르침, 풍성한 설교가.. 열매를 맺게 할 줄로 착각을 했어요. 저는 풍성한 설교를 가르쳤고, 풍성한 말씀을 나눴는데요.
저 자신도 아니었고, 우리 교인들도 주 앞에 설 때 주님께 드릴 만한 열매가 없는 거예요. (라고 생각해요)
이 열매는, 우리 속에 생명이 없다면 아무리 말씀을 가르쳐도, 틀린 것을 고치려고 해도, 살리는 역사, 살리는 영의 역사가 없을 수 있습니다.
회개를 하려고 힘쓰는 동안에도 교회는 장례식장 처럼 죽어질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어요.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펄전도 똑같이 말했죠. 뭐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3일 만에 장사 지냈고, 부활한 것처럼 이 코스를 피할 수 없고, 건너뛸 수 없다'는 거예요.
정말 회개하는 사람은,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죄인인지..
교정될 수 없는 전적 타락의 사람인지를 깨달은 것이 없이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셨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물론 지식으로 알게 될지는 몰라도, 삶에 열매가 없다는 거죠.
스펄전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의 부흥운동은 재앙일 수 있다." *당시 '현대'는 1800년대 그 당시에 1800년대에 전도 집회들이 유행 했는데요.
스펄전 목사님이 보기에는, 거듭남을 경험한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의 부흥 운동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들은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영혼을 구원하려고 교회에서 계속 전도 집회를 했는데요...
'그 이유는, 오늘날에 전도집회는, 우리가 얼마나 내 마음대로 살아 왔는지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왔는지, 인간은 얼마 만큼 타락을 했냐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지 않고는, 고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것을 깨닫기도 전에, 그들을 위로하는 집회가 되었다'는 거에요.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살아온 모든 것이.. 즉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broken heart, contrite spirit (깨어진 마음, 상한 심령) 애통하고, 상한 회개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럴 때 인간적인 위로를 말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위로를 부어주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위로가 아니라 성령의 위로입니다.
그 성령의 위로, 보혜사 Comforter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통하고 회개하는 거예요.
이 회개 없이, 이 생명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사모한다는 것은 불법이에요.
여러분, 예수 믿은 지 몇 년 됐습니까?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회개 뿐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말 못할 나의 불행.. 가정에서의 불만족, 일터에서의 실패.. 이렇게 살아왔을지라도 이민사회의 어려움 속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의 위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욥처럼 사단이 치고, 자식이 다 죽고, 비즈니스가 다 도적질 당하고
이러한 불행속에서도 주님이 그에게 보이신 것은, 위로가 아니었어요. 폭풍속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욥아, 너는 대장부처럼 내가 묻는 말에 답하라' 라고 폭풍속에 말씀하셨어요. 뭐예요? 회개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시간에 주님의 말씀이 폭풍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폭풍처럼.. 주의 말씀이 정말 들려지기를 축원합니다.
놀랍게 욥은 깨달아요. '내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미워하고 티끌과 죄 가운데 회개하나이다' 욥42:6
여러분 혹시 남에게 말 못할... 인생의 고통과 실패를 경험했습니까? 그래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에요.
수많은 목회적인 위로는, 인간적인 육신적인 열매일 뿐입니다.
저로부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회계 뿐입니다. 나이가 70~80이 될 때까지 주님 없이 살아온 죄, 그리고 지금 자라나고 있는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예요.
회개하지 않으면, 걔네들도 (우리와) 똑같이 될 거예요. 그리고 이 옛 습관은,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말한 것처럼 절대 기독교교육 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교육은 답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함께 죽어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은 자만, 예수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는 수선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날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너무 너무 쉬운 구원이 온 땅에 퍼져 있나이다.
오 주님, 너무나 쉬운 길, 넓은 길에 서 있는 교회들을 봅니다. 주님, 좁은 길, 협착하여 찾기 어려운 길, 그 길을 가는.. 회개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정말 영접 만하면 구원 받는 건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입으로만 시인하면 정말 구원받는 것인지...
우리가 진정 거듭났는지, 예수님을 영접 했는데 정말 거듭났는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하지만, 회개하고 거듭났는지.. 자신을 살피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루터처럼 깨어나고, 자기를 살피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오 주님, 저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우리가 죽은 자는 아니지.. 우리가 죽은 믿음은 아닌지... 잘 살펴 주세요.
저희를 낮추시며, 정결케 하옵소서. 우리 죄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감격이, 새롭게 깨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