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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6장 나실인 서원의 현대적 의미

LNCK 2022. 9. 9. 08:52

◈나실인 서원의 현대적 의미             민6장 1-8               2017.01.29.출처

 

 

나실인 서원이 고대 이스라엘의 규례이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여기에는 적용해야 할 많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나실인은 누구일까요? 히브리 동사 ‘나자르’는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민수기 6장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구별’입니다.

세어 보니 총 15회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실인이 한 마디로 ‘구별된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실인은 ‘일정기간동안 자기 몸을 스스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나실인 서원의 구체적 내용

 

나실인 서원은 어느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서원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실인이 되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또 헌신을 서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마지막 재앙이었던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모두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는데,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해서 레위인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레위인은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이 되었습니다.

또 다시 헌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신을 서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나실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실인 서원은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정기간 동안 자발적으로 하는데 30, 60, 90일, 1년 등 이런 식으로 기간을 정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①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나실인으로 서원해서 하나님께 바친 경우에는

일평생 나실인으로 사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의 어머니는 한나였는데,

한나는 브닌나의 격동을 받아 아들을 낳지 못하는 설움에 성막에 올라와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하기를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사무엘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이름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무엘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나실인으로 일평생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후 자녀를 갖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후 3남 2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문헌인 미쉬나나 사해사본을 보면 사무엘이 나실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② 삼손이라는 사사도 평생 나실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일평생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블레셋 여인 들릴라에게 힘의 근원이 머리에 있다는 사실을 다 털어 놓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잘리고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③ 신약성경에도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눅1:15절에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포도주와 독주를 평생 마시지 않은 나실인이었습니다.

 

④ 1세기 유대인들 중에는 나실인으로 헌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행21:23~24절에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예루살렘 장로들이 바울에게 권면하기를 “이제 나실인 규례의 종료 절차를 위해 결례를 행하게 될텐데,

네가 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비용도 지불하고 율법 의식에 참여해서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서원이 나실인 서원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실인 서원을 할 때는 세 가지 금지사항을 잘 지켜야만 했습니다.

첫째, 포도 나무의 소산물과 독주를 먹고 마시지 말아야 했습니다.

 

본문 민6:3~4절에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실인이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에는 포도나무에서 나온 어떤 소산물도 먹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포도, 건포도, 포도 주스, 심지어 씨와 껍질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건포도가 얼마나 맛있습니까? 포도즙은 또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런데 그 맛있는 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죄의 원인이 되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의미를 넘어서

죄와 관련된 어떤 것과도 연루되지 말고 일체 끊어낼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나실인은 더 좋은 것을 위해 좋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좋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 그가 바로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좋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입니다. 5절에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사실 여자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들도 나실인 서원 기간 동안에는 삭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어 삭발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우상숭배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입니다.

 

기독교 목회자들 중에는 일부러 삭발을 한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삭발을 하는 것은 이방종교의 문화를 반영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실인들에게 이방종교의 문화와 단절한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셋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절에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시체는 사망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시체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장례식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60일을 서원 기간으로 정한 자가 59일째 되던 날 의도치 않게 시체를 가까이 한 경우,

7일간 정결기간을 갖고 다시 처음부터 60일을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체와 접촉하게 되면 그 이전에 지킨 시간은 모두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민6:13~20절까지는 나실인 서원의 “종료 절차”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서원 기간이 끝나는 것도 함부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종료 절차가 있는 것입니다.

정한 기한이 끝난 사람은 먼저 회막문 앞으로 가야 했습니다.

 

성막 동편에 문이 있는데 그 앞으로 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일이 쉬운 일일 수 있지만,

멀리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마저도 매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신사동 사는 사람이 논현동 오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부산에 사는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서원 기간이 끝난 사람은

그의 거주지가 어디이든 성막이 있는 곳으로 와야 했습니다.

 

둘째, 제사장은 그를 위해 번제, 속죄제, 화목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번제와 속죄제는 제물을 전소하는 것이고, 화목제는 일부만 태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부분들은 제사장에게 줍니다.

 

셋째, 나실인은 그동안 자란 머리카락을 깎고 그 머리카락을 화목제물 태우는 불에 던져 살라야 합니다.

이는 그 동안 머리카락이 자라도록 헌신을 받아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그리고 번제, 속죄제, 화목제를 드리느라 수고한 제사장에게 제사장의 몫을 드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화목제물로 소를 드렸다면 소의 가슴고기는 제사장이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한 번 흔들고 제사장에게 줍니다. :20

 

그래서 이를 한자 ‘흔들 요’자를 써서 ‘요제’(搖祭)라고 합니다.

흔든 가슴을 제사장이 취합니다.

 

그리고 소의 우편 뒷다리 고기를 제사장이 취합니다.

우편 뒷다리는 무거워서 흔들지 못하고 한 번 들었다가 놓는다고 해서

‘들 거’자를 사용해서 ‘거제’(擧祭)라고 합니다.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는 제사장이 취하는 것입니다.  :20

그리고 소가 아니라 양인 경우에는

양의 어깨 고기를 제사장이 취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떡도 무교병과 무교전병을 흔들어서 제사장이 취한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이 많이 수고하니 제사장의 몫을 드리고

나실인도 서원기간을 마치고 일반백성으로 돌아가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제물 이외에 더 드리고 싶으면 더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 일반 백성들이 하나님께 헌신되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아무렇게나 헌신했던 것이 아니라 정해진 방법과 규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복잡한 규정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도 일정한 기한을 정해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한 기간 동안에는 평소 좋아하던 것을 절제하고

때로는 금식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시간을 갖는 것이

구약시대 나실인의 서원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3일간 금식기도를 하겠다!” “일주일 동안 기도하고 성경 읽고 구별된 시간을 갖겠다!”

는 등의 서원 기간을 갖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나실인 서원과 비슷한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응답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정해진 기간 동안 나실인 서원을 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금식하는 기간을 정해 놓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속하게 하고 성령 충만과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금식하며 하나님의 일을 보게 된 경우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행13:2~3절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할 때, 여기 13장부터 제1차 선교여행이 시작 및

전개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더라도 기간을 정해서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매달리면

웬만한 문제들은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니 응답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교회표어가 ‘은총의 표징을 보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은총의 표징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주일 대 예배 나와서 5분 기도하고 표징을 보겠습니까?

나실인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엎드려 스스로 좋은 것을 포기하고 절제하면

은총의 표징을 보는 한 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② 고전7:5절에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젊은 부부가 서로 분방하지 말되, 다만 기도하기 위해서라면 얼마간 분방해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는 분방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기간을 정해서 기도할 때는 분방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말씀을 대할 때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기간을 정해 놓고 평소 늘 즐기며 보고, 먹고, 놀던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진지하게 구해 본 적이 있었던가?”

 

올 해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구체적인 계획들이 여러분들의 삶에

실현되는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7년 1월 설교

 

어떻게 3일을 굶을 수 있을까요? 3일 금식한다고 절대 죽지 않습니다.

20일을 해도 죽지 않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들은 금식하다가 소천하시면 곤란하니까

조금씩 먹으면서 하시기 바랍니다. 적당히 음식 양을 줄이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며칠 금식한 것으로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 올 해는 계획을 세우셔서 기도응답 받는 복된 한 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데 아무 희생이 없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첫째, 포도나무의 소산물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육신적인 욕구를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감정적인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즉, 감정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학교 선생님들이 감정노동을 심하게 겪는다고 합니다.

학부모님들이 학교를 찾아와서 선생님을 향해 욕하고 비방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하다보니

그것을 참고 견디기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감정노동이 쉬운 희생이 아닙니다.

 

셋째, 물질적인 희생도 많이 해야 합니다. 제물을 잘 준비해서 드려야 합니다.

 

넷째, 서원 기간 동안 혹여 곁에서 사람이 죽는 경우 지켰던 기간이 무효가 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간적인 희생도 치러야 합니다.

 

다섯째, 서원을 종료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 문 앞까지 와야 하는 수고와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니

이 또한 보통 희생이 아닙니다. 나실인은 희생할 것이 참으로 많은 것입니다.

 

일정기간 금식하고 기도하거나 구별된 시간을 갖고자 한다면

이런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희생하지 않고 헌신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남의 아들이 목회자 되고자 신학교에 진학한다고 하면 훌륭하다, 축하한다고 하다가

자기 아들 중에 가장 똑똑한 아들이 신학교 간다고 하면 울며불며 말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습니까? 가장 똑똑한 아들 신학교 간다고 하면 보내시겠습니까?

대답이 잘 안 나옵니다. 고민을 많이 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는 학부, 대학원 모두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고려대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서 아버지께 신학교를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한 가지를 물으셨습니다.

“왜 가려고 하느냐?”

제가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을 드렸는데,

이후 단 한 번도 신학교 진학한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거나 재차 물어보시거나 말리려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 때 속으로 판검사가 된 친구 부모님을 생각하며

“너는 도대체 왜 그러냐?”는 식으로 신학교 가는 것을 말리셨다면

제 마음도 어려웠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훗날 여러 해 저희 교회 출석하시다가 소천하셨는데,

생전에 아버지께서 제게 “판사 아들보다 네가 더 나은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희생 없는 헌신은 없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헌신도 없고

하나님의 응답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얌체처럼 은혜를 받으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나실인 서원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에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님께 무슨 서원을 했든지 간에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전도서 5장 4~6절에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건축헌금 천만 원 작정했으면 실수였다고 하지 말고 서원한 대로 지켜야 합니다.

못 지키겠다고 교회를 옮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약정한 것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의 서원이 어떤 대가와 희생이 따르는 지

계산해 봐야 합니다. 지키지 못할 서원이라면 차라리 서원하지 않음이 낫습니다.

서원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가를 계산해 보고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면

서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사기 11장에 입다라는 사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입다가 전쟁에 나가기 전 쓸데없는 서원을 한 가지 하였습니다.

 

그는 전쟁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을 반기는 자를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쓸데없는 서원을 한 것입니다. 삿11:30~31

 

그가 전쟁을 이기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무남독녀 외동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버지를 반기는 것이 아닙니까.

입다는 할 수 없이 서원한대로 무남독녀 외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사람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 서원한 것을 돌이킬 수 없었던 입다는

그가 한 서원의 내용 그대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는 쓸데없는 서원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주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면 갚기를 더디 말고 반드시 갚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헌신할 때 자기 방식대로 아무렇게나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으로 헌신하는데 절차도 없이 나는 나실인이라고 아무리 주장한들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으시고, 사람들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야 합니다. 자기 방식을 고집하면 곤란합니다.

나실인도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렇듯 나실인 서원은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방식대로 포도나무의 소산물이나 독주를 먹고 마시지 않거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시체를 가까이하지 않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우리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헌신된 나실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제물이라는 것 자체가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산 제물’이라는 단어 속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비록 살아있어도

하나님께 죽어서 바쳐진 제물처럼 헌신되어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적 예배’는 영어로 ‘Spiritual Worship’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로기코스’라고 되어 있는데,

‘논리적’이라는 의미의 영단어 ‘Logical’이 바로 헬라어 ‘로기코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지시기 위해 몸을 버리고 모든 것을 희생하셨는데

너희도 몸을 드려 예배하는 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셨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드리지 않고 입을 싹 닦고 앉아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비논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합리적인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이 교회 나아와 예배하는 것을 아주 불합리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 아까운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십일조 예물 드리는 것을 아주 못 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애써 벌은 돈을 왜 목회자에게 갖다 주냐고 막말을 합니다.

헌금은 제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모르니까, 비논리적으로 보이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시간 내어 봉사하고 예배하고 헌신하는 것을 불합리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아웃사이더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인사이더가 보는 시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니까, 지옥 갈 사람이니까

천국 갈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논리적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주 많습니다. 독생자까지 주셨는데

우리가 그 분을 위해 드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인사이더들에게는

너무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나실인처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옳습니다.

 

 

결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바벨론의 한 가족을 포로로 잡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정의 가장에게

“내가 네 자녀들을 풀어주면 너는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러면 나의 전 소유를 폐하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왕은 다시 물었습니다.

“내가 네 아내를 풀어준다면 너는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면 저는 제 목을 폐하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대답을 들은 고레스 왕이 감동을 받아 그 가족을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가족을 풀어준 고레스 왕을 칭송하며, 얼마나 그가 위대한 왕이냐고 아내에게 말했을 때,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 눈에는 고레스 왕이 훌륭해 보이지 않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대답한 당신만이 가장 훌륭해 보였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늘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셨는데 하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일평생

못에 찔리고 톱에 베이고 제대로 된 교육 한 번 받아보지 못하시고 어려운 형편에 자라나셨습니다.

거기다가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창으로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인간적으로 보면 이렇게 비참한 인생이 다 있는가 할 정도의 어려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죗값을 갚아주시고 지옥에서 건져주시고 천국에서 받아주시기 위해

십자가 희생을 다 치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나실인 서원의 규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라는 질문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대답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