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K
2022. 9. 21. 09:12
◈반역과 그 결과 민16:1~11 출처
◑서론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 한자로는 백성 민(民)에 숫자를 나타내는 수(數)를 사용해 백성의 숫자를 말합니다.
이 책의 제목이 민수기인 이유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두 번에 걸쳐 계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민수기를 보면 백성의 숫자를 계수한 것은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불평과 원망과 반역의 사건은 끊임없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에는 만나만 먹는 문제로 백성의 원망 사건,
12장에는 아론과 미리암의 원망사건,
13장~14장에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일어난 백성의 반항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민수기는 차라리 ‘불평수기’라고 이름을 바꾸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본문 16장에서 우리는 또 다른 ‘고라의 반역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 고라의 사건은 그저 지나간 옛날일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교회가 이런 위험성을 언제나 안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고라의 사건을 보면서 함께 교훈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반역의 이유
먼저 우리는 고라뿐만 아니라 다단, 아비람, 온, 이 네 사람이 반역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유명한 지도자였지만 모세가 하는 일에 늘 불평만 했습니다.
우발적으로 한두 번 불평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체계적이고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불평했습니다.
민16:1절에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당을 지었다는 말은 조직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모세에게 반항운동을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군소정당이 아니라 거대야당입니다.
이 네 사람들이 주동자가 됐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유명한 족장 250여명이 힘께 가담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2절)고 했습니다.
족장 250여 명이 가담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대거 가담을 했습니다.
49절에 보니까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14,700명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거대한 반역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반역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첫째 이유는, 모세나 아론 두 사람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운 은혜 기관(지도자)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나 아론이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두 거룩하고 평등한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3절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회중이 모두 거룩하고 여호와께서 회중 가운데 계시는데,
왜 모세와 아론만이 스스로 여호와의 총회 위에 높이느냐고 따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은혜기관으로 세우신 사실을 부정합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고라, 다단, 아비람, 온이 이런 말을 했을까요?
민수기 앞서 15:37절부터 보면 그 원인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을 만들고 술을 달아 입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파란 줄을 매게 하셨습니다. 왜 술을 달게 했을까요? 그 술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기억하여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 거룩한 옷을 입고 다니다 보니
모세와 아론을 자신들과 평등하게 여겨, 반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거룩합니다.
루터의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모든 신자는 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택하신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진리이고 옳은 말이지만, 이 한 가지 진리를 내세워서
은혜 기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그 직분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물론 다 거룩하고 평등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 교회에 직분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이 원리를 잊어버리고
우리가 다 거룩하고 평등하므로 은혜기관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반항한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반역의 원리였습니다.
▲2. 그러면 왜 이들이 은혜기관을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과연 그들이 말한 대로 평등한 원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모세와 아론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 은혜기관을 허물어버리고
그 대신 자기들이 그 자리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반역 이유입니다.
본문 9절부터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제사장의 직분을 구했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자신들이 그 자리에 올라가도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반역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거기서 출발합니다.
고라(레위지파)는 하나님께서 고라 자손들에게 주신 성물 운반하는 사명을 작은 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직분을 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왜 제사장 직분을 구했을까요?
이들은 르우벤 지파 사람들입니다. 르우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장자인데,
아주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자신의 서모를 범하여 자기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야곱이 르우벤의 장자 특권을 뺏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르우벤 지파는 장자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레위 지파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앞장서서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르우벤 지파의 후손들이 불만을 가졌습니다.
불만에 찼을 때, 마침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 중에 불만에 앞장서는 지도자, 고라가 나타나니
그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에 진을 치는데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세 개의 지파와
레위자손 중 고핫 자손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고라와 르우벤 지파는 남쪽의 한 동네에 텐트를 치고 있었던 이웃사촌입니다.
떨어져 있었으면 반역을 안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웃을 잘못 만나 반역에 가담했습니다.
평소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고라가 일어나니까
부화뇌동하고 휩쓸려서 반역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반역의 판결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네 사람에 대해 판결을 내리십니다.
어떤 방식으로 판결을 내리시는지 본문 6-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라. 너 고라와 너의 모든 무리는 향로를 취하고 내일 여호와 앞에서
그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라 그 때에 여호와의 택하신 자는 거룩하게 되리라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6~7
그들이 제사장이 되려고 하자, (제사장처럼) 향로를 가지고 나와서 불을 담아 하나님께 분향을 해보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지 받지 않으시는지에 따라 판결을 내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향을 받으시면 그들도 제사장이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면 그들은 제사장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반역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다 나옵니다.
이 반역 운동의 1급 주동자인 고라,
주동자는 아니지만 주동자와 앞장서서 나간 2급 반역자인 다단과 아비람과 온,
3급 반역자인 이스라엘의 족장 250인,
그리고 모든 백성들 중 이들에게 부화뇌동된 4급 반역자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멸하려 하셨습니다.
16:19-21절을 보면 “고라가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아 놓고 그 두 사람을 대적하려 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노하셔서 순식간에 다 죽이려고 하니까 모세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 한 번 시원하게 처리하시지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엎드려서 온유하고 침착하게 22절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모세는 1, 2, 3, 4급 반역자들이 있을지라도 고라 한 사람만을 범죄한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을 다 멸하려 하십니까? 하나님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중보기도를 받아들이셔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멸망에 처할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예배하는 이 자리가 마지막 기회가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들은 예배 중)
하나님은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
23절 “회중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 하라”
그래서 모세는 다단과 아비람에게 가서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은 아무 것도 만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죄 중에서 너희도 멸망할까 두려워하노라”고 경고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라의 장막을 떠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의 가족들입니다.
이들은 장막의 땅 밑이 꺼질 때, 땅속으로 모두 생매장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1급 반역자와 2급 반역자는 이처럼 땅에 생매장되어 죽고
3급 반역자인 족장 250여명은 여호와께로서 나온 불에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35절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
4급 반역자인 백성들은 그 날에는 모세의 말을 듣고 고라의 장막을 떠나서 일단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음날 일어나서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41절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고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그들을 죽였습니까?
모세 아론은 살려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아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회중들은 또 불평하고 원망하며
“너희가 여호와 백성을 죽였도다”고 말하며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더 이상 안되겠다 하여 염병을 내리셨습니다.
염병이 급속도로 퍼져가자 모세와 아론은
향로에 불을 담아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서 하나님께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결국 염병은 14,700명만 죽이고 멈추게 되었다는 내용이
고라 반역 사건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민수기 16장을 보게 되면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민수기 16장을 볼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떨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의 사랑의 하나님이므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옛날 2세기에 마르시온(Marcion)이 그런 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게 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맞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그 날로 부부동반으로 죽지 않았습니까?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나 고라의 사건이나 다 비슷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진리의 양면을 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라 사건의 교훈
이 고라의 반역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이 시대에 받아야 할 교훈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주의하며 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신앙생활을 주의하며 살아야 합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온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길어도 7~80년입니다. 이 짧은 인생 동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쓸데없이 고라와 같은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아무쪼록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아름다운 믿음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까요?
1) 첫째,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혜기관을 함부로 비방하고
중상모략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마다 이런 일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일들은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2) 두 번째, 이웃이 반역할 때, 우리는 이웃의 반역에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주동자도 죽었고, 부화뇌동 한 사람들도 다 같이 죽지 않았습니까!
3) 세 번째, 아무리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신앙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옳지 않은 일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문제는 가족의 정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부모들이 식탁에서 목사님을 욕하고 비방하면, 그 자녀들이 다 배웁니다.
부모들이야 나중에 생각을 바꾸면 그만이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목사님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아이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게 되는 책임은 그 부모들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앙문제 만큼은 가족 정신에 이끌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 서 있습니다. 각자가 자기 영혼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스토리를 읽다보면 한 가지 희한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그 가족들까지 모두 죽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는데
주동자였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반역하는데 끼지 않고, 그 장막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민26:11절을 통해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고라의 자손들은 나중에 시편도 많이 짓고,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양하는 일도 감당하게 됩니다.
시84편을 보면 “고라 자손의 시라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시85편에는 “고라 자손의 시라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84:10절을 보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고라 조상들은 성물을 메고 가는 직분에 만족하지 못하여 제사장이 되겠다고 했지만
고라의 자손들은 이 일을 반면교사 삼아 배우고 고친 것입니다.
또한 시85:8절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찌로다”
역시 고라 자손들은 “우리 조상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상을 심판하셨지만
우리를 죽이지 아니하시고 마지막 기회를 주셨으니 우리는 망령된 대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문지기 일이라도 감사하며 감당하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결론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책의 저자인 서진규 씨는
어촌에서 엿장수 딸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는 가발공장에서도 일하고, 골프장에서도 일하다가
23살에 단 돈 1백달러를 들고 미국에 가서 식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식모살이를 하던 중, 미국의 군대에 들어가서 소령까지 진급을 했습니다.
소령으로 예편한 후에도 계속 공부를 해서 지금은 50살이 넘는 나이에
하버드 대학의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습니다. 서진규 씨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멋진 반항심, 거룩한 반항심이 자기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마음속에는 반항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살짜리 어린애도, 어른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반항정신이 다 나쁜 건 아닙니다.
때로는 반항심이 삶을 건설하는 에너지로 작용하는 때도 있습니다.
자기의 나쁜 환경에 반항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반항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반항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좋고 나쁜 것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반항하는 것,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혜기관을 향해서 반역하는 것,
그것이 나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양면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올 한해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는 조금도 보지 마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만을 보시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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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프 하우블이는 사람은 "시기심"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시기심은 매우 정열적인 감정인데 사람들은 시기심이 생길 때 세 가지 방법으로 극복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우울입니다. 이것을 무기력하게 하는 시기심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갈망하는 재산을 소유하지 못했는데 상대는 정당하게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인정하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신에게 격분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울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야심입니다. 고무적인 시기심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도 갈망하는 그 재산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분노입니다. 논쟁적 시기심이라고 말합니다.
상대가 재산을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을 때 생기는 시기심이라고 합니다.
재산의 공평한 분배를 위해 투쟁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쓴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당하게 하나님처럼 될 것같으니까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권한을 제한한 것이라고
속인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심에 가득 찬 욕망을 일깨운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고라와 그 일당들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부당하게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려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저마다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모세에게 아론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레위지파 고핫에게 그리고 르우벤 지파 자손들에게 저마다 고유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비교하면 끝없는 시기의 늪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시기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비교하지 말고 나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바라보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면 됩니다.
레위 지파 고핫자손 고라에게는 성막 일을 맡겼습니다.
(그 일도 꽤 높은 일입니다. 적어도 레위 지파 중에는 제일 높은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충성스럽게 하면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