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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0장 므리바 물가에서 다투다
LNCK
2022. 9. 26. 11:05
◈므리바 물가에서 다투다 민20장 여러 설교 정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2년이 지났을 때 가나안 접경지역인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했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보고를 한 정탐꾼들로 인하여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고 다시 광야길로 들어갔습니다 (14장).
그로부터 38년을 광야에서 절망의 여정을 보내고 애굽에서 나온지 40년만에
다시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지도자였던 미리암과 아론이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으므로 인해 또 모세를 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나안 진입을 위한 진군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오늘날 죄로 반역으로 일관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 대해 소망을 가져야 이유입니다.
본 장의 <개요>는
-미리암의 죽음 (1절),
-물이 없으므로 인한 백성들의 원망 (2-5절),
-하나님의 지시와 모세의 실수 (6-13절),
-에돔 왕의 자국 영토 통과 거절 (14-21절),
-아론의 죽음과 엘르아살의 승계 (22-29절)
▲출애굽기 17장에도 맛사, 혹은 므리바라고 하는 물이 나옵니다. (40년 전, 출애굽 초기. 지금은 40년 후)
민수기 20장의 므리바는 출애굽기 17장과는 구별되는 므리바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20장의 므리바를 ‘가데스의 므리바’라고 부릅니다. *므리바는 ‘다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 즉 38년 전
자기 조상들이 열 명의 불신앙 정탐꾼들을 따라 모세를 대적했던 그 지점에서
하나님과 또 다투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결국 반석을 두 번 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왜 이런 벌을 받게 됐을까요?
우리는 이 사건에서 모세의 몇 가지 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론 : 물이 없다고 백성들의 다투다
영어에 'Look at the big picture.'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큰 그림을 보라.'가 되겠지만, 의역하자면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라.'
혹은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닥친 사건이나 주변의 상황들을 그냥 좁은 시각 안에서만 보게 되면
성급한 속단에 빠지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 쉽지만,
보다 높고 깊고 넓은 시각에서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훨씬 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총회'라는 너무나 멋진 말이 나옵니다.
출애굽을 하고 광야생활 중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서는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자손', '이스라엘 민족'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여러 번 반복하여 나타나는 '총회' 혹은 '여호와의 총회'라는 말은
(*과거 개역에 4번 나오고, 개역개정에는 ‘회중’으로 나옴)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임을 특별히 강조할 때 쓰는 말로서,
여러 명칭들 가운데서 가장 의미 깊은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실로 고귀한 신앙공동체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큰 그림'을 볼 줄 모르는 바람에 엄청난 시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현실과 자기 주변의 상황과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그저 '좁은 시야'에서만 보고
성급히 행동하는 바람에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모세와 아론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언행들이 얼마나 못난 것들이었는지, 결국 하나님께서 스스로 진노를 발하시고
친히 그 난리를 평정시키셔야만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광야교회가 40년 세월을 거의 다 끝내고 있을 무렵에
신 광야의 한 구석,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통하여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모인 신앙공동체,
바로 우리가 오늘도 교회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는 이 '여호와의 총회'가 온전히 세워지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각자의 심령에 꼭 기억하고 지켜야 할 '영적 큰 그림'들이 과연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총회는 '구원의 감격'이, '육신적인 불평'을 덮어 버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총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본장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으로 짐작됩니다.
이 때 미리암이 죽은 사건과 또 이 20장 끝에 아론이 죽은 사건이 기록된 것은,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이었던 자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두는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40년 전에 바로
이 "가데스"에서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40년 전에 열 정탐군들과 함께 불평하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된 징벌을
지금 바로 그 순간까지 현실로 겪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또다시 그 악습을 재현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은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은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 하였도다"라는 말로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물 없어서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옛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땅속에 빠져 죽고
불에 타 죽고 염병에 걸려 죽었더라면 훨씬 더 좋았겠다.'라는 악담을 서슴없이 내뱉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여 다 죽게 하였느냐?“
라고 한술 더 떠서 말했습니다.
즉 간단히 말해서 출애굽 그 자체부터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 온 민족이 염원하였던 출애굽의 기쁨, 그 고통스럽던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을 받은 감격은 지금 당장 마실 물이 좀 모자라는 현실 앞에서
온데간데없이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5절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불평했습니다.
원래의 불만은 식수 부족 한 가지였지만, 이제는 그 불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무화과, 포도, 석류와 같은 싱싱한 과일을 먹을 수 없다는 데에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일용할 만나를 공급받고 있었으므로
스스로 농사지을 필요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종할 곳"이 없다는 불평까지 덧붙였던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구원의 감격은 '차라리 일찍 죽었더라면 좋았겠다.'라는 저주의 악담으로 바뀌고,
마실 물이 모자라는 문제점은 '맛있는 과일도 못 먹고 있다'라는 철없는 투정으로 확대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이미 '여호와의 총회'라는 고귀한 이름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똑같은 불평이 오늘날의 교인들의 입에서도
너무나 쉽게 나오고 교회 안에서 너무나 흔히 들리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하는 소리, "아이고, 내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못살겠다"라는
말을 명색이 신자라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너무나 쉽게 내뱉고 있습니다.
날마다 누리고 있는 일용할 양식의 축복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좀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려 하는데도 왜 장사는 여전히 안 됩니까?"라는 불만에만 항상 가득 차 있는 교인,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드렸는데도 왜 이 지병이 낫지 않습니까?"라는 불평을
자기 딴에는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정당한 항의라고 여기는 교인들이 적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불평불만의 소리들은 모두가 다
이미 받은 '출애굽의 구원'을 완전히 망각한 소치입니다.
광야생활 중에 육신적인 어려움, 물질적인 부족함이 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애굽의 종노릇하던 때의 비참함과 비교해 본다면
그 어떤 불평불만도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지사일 뿐입니다.
자신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 중에 살고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이 최고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고 있는 신자라면, 그런 따위의 유치하고 파렴치한 불평의 말은
감히 입 밖에 내기는커녕 마음속에서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워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진정 구원의 확신 중에 거하는 중생인이라면 자신의 의식주 생활에 부족함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불평한다는 것은 정말 가당치도 않습니다.
지옥의 저주로부터 해방을 받고 영원한 천국의 생명을 거저 얻게 된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신자라면
설사 지금 당장 죽고 싶을만한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서의 광야행군이 남아 있는 한
온갖 육신적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럴 때일수록, 주님 앞에 나아와서 이미 받은 영생 구원의 은총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심령을 더욱 뜨겁게 되새기고 굳게 지켜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므리바 물가에서 모세의 잘못 4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여호와 앞에서 다투는 죄
여호와 앞에서 다투는 죄는, 백성들이 다 함께 범죄한 것이지만,
모세가 지도자로서 그 일을 방치한 책임이 있는 거죠.
여호와의 총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인간적인 다툼'이 사라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불평의 소리가 높아가고 흥분된 감정에 휩싸이게 된 이스라엘 총회는
결국에 가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려 버리는 최악의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본문 12절과 13절에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다툼)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가리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은 물론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그처럼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실 역사를 믿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감정에만 치우쳐서 실언을 하고 실수까지 저지른 것을 꾸짖으신 말씀이었습니다.
2절과 3절을 다시 보면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즉 하나님의 총회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박'과 '다툼'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흥분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세와 아론도 그 싸움에 함께 휩쓸려 들어간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원망하거나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자리에서 흥분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13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고 여호와께서 모으신 총회를 두고
망언을 하고 여호와께서 이끄시는 백성을 향하여 화를 폭발시키는 행위들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다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런 언행들은 적어도 '여호와의 총회'라고 불리는 곳 안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최소한 모세와 아론만큼은 바로 깨닫고 처신했어야만 했습니다.
비록 백성들이 그들을 향하여 빗발치듯 원망하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모세와 아론은 끝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들의 "목전"에서 나타내야만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스라엘 회중은 바로 '여호와의 총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총회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지금 모세나 그 백성이나 모두가 다
그 여호와 하나님 앞에 모여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조금이라도 의식하고 있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모세와 아론이나 공히 그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사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결코 그 안에서 그처럼 서로 다투고 있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무엇이었습니까? -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대리인/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혈기방자한 분’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20:13
모세가 깨뜨린 하나님의 거룩함을, 하나님 스스로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반역하고 패역한 백성들에게.. 여전히 사랑으로 물을 공급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가 두 번 내려쳤으므로 물이 나왔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면서’ 물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분노해서 안 될 것은,
우리 각자가,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 보여주는 사명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바로 앞에 앉아 계시는 자리에서 그 무슨 일이 있다 할지라도
세상의 어느 자식들이 감히 서로 다툴 수 있겠습니까?
형제지간의 싸움은커녕, 혹 자녀에게 호되게 야단을 치고 벌을 줄 일이 있다 해도
적어도 그 아이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보고 계시는 앞에서는 삼가고 나중에 하는 것이 예의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자신의 체면이 하나님의 거룩하심보다 더 귀해서 교회 안에서 다투겠습니까?
교회의 재산이 하나님의 거룩하심보다 더 중요해서 불신법정에 고소까지 하면서
신자끼리, 아니 목사끼리도 그것을 두고 싸우겠습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한시라도 잊지 않는 교회와 교인이 되어야만
진정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질서와 화목'을 동시에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교회의 주인으로서 지금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 좌정하고 계신 것을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의식하고 있다면, 이유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목사와 교인이, 교인과 교인이 서로 공박하고 다툰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
혹 교회 안에 그런 싸움이 일어난다 해도 최소한 교회의 지도자들만큼이라도
그 시험에 같이 빠져들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도록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교회를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사람의 자질구레한 다툼들은 절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실로 거룩한 '여호와의 총회'로 함께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만의 죄
두 번째로 모세의 죄는 교만죄입니다. 모세는 사실은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민12: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했습니다.
‘humble spirit’, 즉 ‘겸손한 영’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했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겸손한 모세의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교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만 모세는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10
이 말을 가만히 들으면 모세와 아론이 물을 주겠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모세가 수많은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 기적의 주체는 모세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모세가 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
하나님께서 안 계시고 모세와 지팡이만 있었으면 기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모세의 말을 들으면 마치 모세와 아론에게 능력이 있어서
반석에서 물을 쳐 내는 것 같이 들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보편적인 잘못 중 하나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환자를 위해서 기도해서 병도 좀 시원하게 고쳐 주고..
성도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면.. 문제가 척척 해결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능력 있는 목사’라는 인정도 받고...
그러나 이 때, 하나님이 내적음성으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목사, 그러면 너는 교주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내가 능력을 네게 주지 않는다!’
우리는, 조금만 자기를 통해서 무슨 신유/문제해결 이런 응답이 나타날 때
‘이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신유를 몇 번만 행하고 나면, 신유 능력이 근원이 자기인줄로 착각합니다.
‘이런 사역자들이 범하기 쉬운 전형적인 증세에 모세도 빠졌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에서
“우리가”에 강조점을 두고 해석할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만하면.. 그래서 분노까지 하면.. 그 길에는 패망이 있을 뿐입니다.
모세는 순간적인 교만 때문에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죄
근데 사실 모세가 오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3,
너희들이 감히 나를 무시하고 공박해. 그는 회중들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중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공박할 때, 모세는 그들에 대한 미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회중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중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13
그런데 모세의 인격이 덜 성숙하였기에, 그의 내면의 문제(분노)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모세는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인격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가"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회중 사이에 소리가 아니라 자기의를 세운 결과입니다.
모세는 나아가서 반석을 향하여 두 번 칩니다.
그것도 백성을 위하여 희생당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원망하면서,
모세가 감정적으로 불필요한 분노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모세는 지팡이로 내려쳤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두 번이나 내려쳤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감정/분노가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이것은 의로운 분노가 아니라, 왜곡된 감정적 분노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이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 모세였다면, 두 번 내리치는 것으로는.. 분이 다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지팡이가 부러지도록 몇 번 더 내리쳤을 것입니다.
모세 정도의 믿음과 인격이 있으니까.. 두 번만 쳤지,
보통 사람 같으면 지팡이를 집어던지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과거에 분노의 흔적들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진 의자, 부러진 안경, 괜히 애매한 애들 장난감이 날아가서 부서지기도 하고
그러한 의롭지 못한 분노의 흔적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는, 기대했던 신세대가, 구세대와 동일하게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분노가 치밀 때가 있겠지요.
그런데 모세는 그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화나는 거야 할 수 없는 일이지 분노는 통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분노를 마음에 새기고 통제하지 못하여 성급하게 입술로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시편에 “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시106:32-33)
모세가 아주 성급한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분노를 드러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지닌 인간적인 약점 한 가지입니다.
모세는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성질이 나면 그것을 즉시로 풀어야 했습니다.
출2장에서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히브리인을 치는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그 시신을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출32장에서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40일 금식을 하고 두 돌비를 받아서 내려오는데, 산중턱에서 보니까
산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분노해서 그 돌비를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려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이 또 다른 두 돌비를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약1:19~20절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권면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는데
모세가 성질을 내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해서 벌을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손해입니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모세는 분노는 사실 의로운 분노였지만 그 분노를 올바로 통제하지 못해서
결국 어마어마한 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1)
잠16:32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분노하지 마시고, 그 분노를 잘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 분노하는 교만
◑4.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
민20:24절을 보면 “아론은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니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반석을 두 번이나 때렸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반석을 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전10: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반석은 그리스도이며, 이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는 성령과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한번 침을 당하시지 두 번 침을 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단번에 우리 죄를 모두 사하시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두 번, 혹은 세 번 죽으시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17장에서 모세가 한 번 반석을 친 것과는 다르게
두 번 반석을 친 것은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자기의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모세의 생각은 아마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출애굽기 17장에서는 쳐서 나왔는데요. 하나님께서 뭘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내 경험으로 보건데 반석은 그냥 말해서는 물을 안냅니다.
내 경험을 보건대 반석은 지팡이를 가지고 쳐야 나옵니다.
지난번에는 한번 쳐서 나왔는데, 이번은 두 번째니까 두 번 쳐야 나올 것 같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신의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반석이 그리스도이므로 이 반석이 두 번 침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말씀 하셨는데, 모세가 그것을 깨달을 리가 없습니다.
모세의 손에는 신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무조건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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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어떤 부부가 부부싸움을 너무 심하게 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서로 사랑하였지만
서로 화가 나면 단 5초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 심하게 다투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내가 “여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이렇게 다투며 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우리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진찰을 한번 받아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의사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노란 물약이 든 큰 통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약에 화가 치솟거든 이 물약을 세 숟가락씩
꼭 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물약을 한꺼번에 세 숟가락씩 삼키지 말고
한 숟가락 먹을 때마다 입 속에 넣고 1분 동안 머금은 후에 삼켜야 합니다.
그렇게 세 숟가락만 먹으면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의사의 말을 실천하였습니다. 성질이 날 때마다 노란 물약을 찾아 마셨습니다.
물약을 먹고 3분이 지나니 성질이 가라앉아서 싸움을 하지 않게 됐습니다.
이 약을 먹는 동안 부부는 서로 싸움을 하지 않고 잘 지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약이 떨어지자 부인이 다시 의사를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 약이 떨어졌습니다. 한 병만 더 조제해주세요.”
그러자 그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부인. 이제 더 이상 약은 필요 없습니다. 사실 그 약은 설탕물입니다.
부인이 싸움을 안 하게 된 것은 그 약을 먹고 3분 동안 기다리는 동안 분노가 삭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부부싸움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맹물이라도 마시고 3분간 분을 삭혀보십시오.
그러면 싸움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처럼 모세도 노란 물약을 먹고 3분만 기다렸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