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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1:15~19 기도의 우선순위

LNCK 2022. 9. 27. 14:23

◈기도의 우선순위          엡1:15~19         2022.09.04. 출처

 

한 사람의 수준은 그가 가지고 있는 관심이 무엇인가를 보면 압니다.

대화하다 보면 저절로 그 사람의 관심사가 나옵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은 분은 대화 내내 건강에 대한 이야기만 합니다.

만나기만 하면 TV 드라마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수준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기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앞부분인 에베소서 1장 3~14절은 찬양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복을 받은 백성의 마땅한 반응은 찬양입니다.

 

그리고 17~19절까지는 바울의 목회적 기도가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생각 없이 늘어놓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가보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시간의 양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오늘 그것을 바울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의 첫 번째 기도는 본문 17절에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7

 

바울이 간절히 기도하는 첫 번째 기도제목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는 바울의 논리정연함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냥 내용을 풀어놓고 있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루고 싶은 기도제목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바울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취업이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들의 기도제목은 어떻습니까?

일반적으로 교회성장, 성전건축 등 모두가 가능한 기도이고 필요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기도는 다릅니다. 왜 바울은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이미 바울을 통해 말씀을 가르침 받아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기도에는 강한 열망이 담겨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지식적이거나

피상적으로 아는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큰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핍에서 출발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핵심적인 요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것을 선포합니다. 호세아 4장 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을 버렸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버렸다고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만듭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원하는 신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상을 섬기는 단계까지 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신을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부부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오랫동안 살아도 서로를 모를 수 있습니다.

왜 오해가 생깁니까? 서로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또한 서로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대화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연스럽게 오해는 잦아지고 갈등이 쌓여 어느 순간부터는 같이 못 살겠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 없이 교회 활동만 한 사람은

오래가지 않아 신앙이 병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 활동을 하고 출석을 잘 한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치명적 결함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분의 성품, 속성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무지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나타나고 우상 숭배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단순히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제임스 패커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 knowing about God 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God”을 강조합니다.  *본질, 속성을 아는 것을 뜻함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지식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성경 지식이 박식한 사람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절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신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지식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만 가지고는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앙의 핵심은,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부부가 친밀함이 없다면 어느 한쪽에 종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권위에 일방적으로 따라간다면 그것은 상호적이지 않고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필요에 의해 따를 뿐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면 찾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또한 좀 더 힘이 센 신이나

혹은 다른 조건을 제시하는 신이 나타나면 바꾸어 버립니다.

좋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믿는 관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요청하시고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못 살지만,

하나님도 마치 우리가 없으면 못 사실 것처럼 우리에게 구애하십니다.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부부의 특징은 대화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상호적입니다.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작업은 대화를 통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고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인격적인 관계로 묘사하는 비유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남편, 또 양과 목자의 관계로 말씀하기도 하고, 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드러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이란 절대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앙의 모호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면서도 상대에 대해 모호하고 알 듯 모를 듯 하다면 함께 살기 어렵습니다.

 

한집에 같이 살긴 하는데 어색하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속적인 교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좋은 사람을 사귀어도 세월이 지날수록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관계도 오래 같이 살다 보면 신비가 사라집니다.

신비가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죄의 본성이 드러나고 치부가 드러납니다. 갈수록 결혼생활에 지칩니다.

 

우리 인간관계가 대부분 그렇습니다. 기대하면 할수록 실망하고 후회로 끝나는 만남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만남은 많은데 아름다운 이별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알아갈수록 신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다가갈수록 더 알고 싶으신 분이십니다.

친밀해질수록 더 가까워지고 싶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관계는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끝이 없습니다.

 

작은 산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뻔합니다. 몇 번 오르고 나면 지루해집니다.

그러나 명산은 다릅니다. 한라산만 해도 엄청납니다.

 

그렇다면 에베레스트는 어떨까요?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 일평생 자기 청춘을 다 바치고, 생명을 걸고 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산이 주는 깊은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행을 가면 브로셔를 먼저 구해 봅니다.

기가막힌 풍경을 찍은 현지 사진이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가보면 사진만큼 좋지 않습니다.

기대한 곳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행은 실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알아갈수록 매력적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이고 축복이고 은혜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지구가 얼마나 큽니까? 하지만 우주 속에 지구는 눈곱만큼 작습니다.

우리가 이 천계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손으로 바닷물을 떠내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렇게 광대하신 분인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기대감과 설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일찍 기대감을 접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간혹 하나님을 이미 다 아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대체로 신앙의 목표가 “무엇을 하자!”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 열심을 냈습니다. 세계복음화, 민족복음화도 좋은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먼저 가져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목표가 뒤로 밀리면, 다른 목표들은 공허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하나님을 내가 알고 있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최고 관심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이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도 대단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됐다”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정작 관심 없는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낭비고 후회로만 남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져서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려주십니다.

 

물론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단계까지이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 당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경험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하나님을 더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게 우선이고 그다음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쉽습니다.

친한 친구와 만나서 대화하는 게 어렵습니까? 친구라면 대화가 술술 풀릴 수밖에 없습니다.

늘 교제하니까 할 이야기도 많습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할 게 없다면 관계가 아직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일상 속에서 하는 작업을 통해서 조금씩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집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세 번째로는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본문 17절 말씀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지혜와 계시의 영’은 누구십니까?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지혜로 인도하시고 계시를 알게 하시는 영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이 도우셔야 가능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깨닫고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대할 때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성경을 내가 해석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금물입니다.

성령이 알게 하시는 곳까지만 알 수 있습니다.

 

넷째로는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을 배웁니다.

 

여러분들 주변에도 반드시 그런 신앙의 선배들이 있을 것입니다.

초점이 바로 맞춰진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과 교제를 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바울의 기도의 모범을 따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노력을 해온 사람은 목마름이 있습니다.

사역의 노하우가 아니라, 세상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들이 얼마나 부요한 가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 18-19절 말씀에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부르심의 소망,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크심을 알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이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갈수록 내가 누구인지가 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면 그때 세상이 보입니다. 그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이고 하나님의 원리와 방식과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하나님이 알려주십니다.

모든 것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전에는 인생이 복잡하고 모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길이 보이고 삶의 질서가 잡힙니다.

인생에 복잡하고 고민했던 것들의 답을 얻게 되고 모든 게 명료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많아지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오늘날 우리 문화는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부추기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 때 교만할 수 없습니다. 교만을 해결하는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겸손해지고 싶다고 해서 겸손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아가면 저절로 겸손해집니다. 그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순종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자기 본토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믿음과 용기가 어디에서 난 것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백 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에서 바치는 그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2장부터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아브라함은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실수도 하긴 했지만, 점점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가면서

그의 믿음이 커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단하신 것입니다.

대단하신 하나님을 그가 알았기 때문에 순종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면 끝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면 평안은 그냥 오는 것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골리앗으로 인해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 잘 알았던 한 사람은 어린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골리앗보다 위대하신 분임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두려움을 이기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예배를 드릴까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면 예배는 예배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교회를 섬길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면 그분이 알려주실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사랑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사랑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되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복잡한 분이 계십니까? 신앙에 진도가 안 나가는 분이 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첫 자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열정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정말 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중심에 있습니까?

오늘 바울의 기도 속에 ‘하나님을 알아감’이 기도의 첫 자리에 나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 기도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해야 할 가장 최우선의 기도는

“하나님, 저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중한 기도가 없습니다. 사람이 그냥 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간 만큼 우리는 깊어지게 될 것이고 풍성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조금 더 알았을 때, 그때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게 되기를 바라고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신앙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