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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3장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다
LNCK
2022. 9. 29. 10:21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다 민23장 여러 설교 정리
모압왕 발락은 파죽지세로 가나안 원주민을 물리친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 하여
박수 무당 발람의 ‘저주의 힘’을 빌어 물리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아람(메소포타미아)의 브돌에 거하던 선지자 발람을 청했습니다.
발람은 첫번째 청함에 응하지 않다가, 두번째 청함에 응하여 모압왕 발람에게 이르렀습니다.
발람은 발락의 압박에 못이겨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장면은 24장까지 나오게 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예언의 주 내용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본장의 구성은
발람의 첫번째 예언 (1-12절),
발람의 두번째 예언 (13-26절),
발람의 세번째 예언 (27-30, 24:1-9)로 되어 있습니다.
발람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예언의 자세한 내용은 주1)을 보세요.
▲도입 예화
제가 오래 전에 '월간 조선'에서 읽었던 기사였습니다.
우리나라 제5공화국 초기에 소위 '삼청교육대'라는 것이 생겼는데,
원래 목적이야 사회의 불량배들을 정화한다는 것이었지만 그 시행 과정에 있어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적지 않게 희생당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때 각 고등학교에도 자기 학교의 문제 학생들을 골라내어 삼청교육대로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었는데,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마지못해 훈육선생 등을 동원하여
학생들 몇 명씩을 거의 강제적으로 보내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그 지시를 거부한 학교가 바로 거창고등학교였습니다.
'만약 문제 학생이 있다면 학교 안에서 고쳐야지 우리 학교의 학생들을 어디 다른 곳으로
보낸다는 말이냐?'하고 학교 측에서 교육청을 상대로 완강하게 반발했던 것이었습니다.
군사독재의 권력이 서슬 시퍼런 칼날 같던 시기에 상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런 용기와 결단력을 보여 준 거창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스러웠습니다.
바로 자기 학교의 선생님들을 통해 삼청교육대에 들어가게 되었던 많은 학생들이
배신감, 억울함, 분노 가운데 끔찍한 고생을 겪는 동안,
그 거창고등학교의 학생(이스라엘에 비유)들은 자기들을 그처럼 철저하게 감싸 주시는 선생님들 덕분에
안전하게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처럼 당신의 선민(選民)을
끝까지 편들어 주시고 철저하게 보호해 주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때는 모압 왕 발락이 지금 가나안 땅 바로 코앞에 자리 잡고 자기네들을 위협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망하게 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발악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크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그 모압 왕 발락의 악한 열심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높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성이
얼마나 완강했던지 결국 이방 선지자 발람마저 완전히 손을 들어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발락과 발람을 상대로 당신의 선민 이스라엘을 감싸 주시고 옹호해
주셨던 하나님의 신의와 사랑을 통하여,
이 시대에도 성도와 교회를 위하여 변함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선민을
그 누구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발람의 1차 예언 23:1~12
이 세상에서 성도와 교회가 결코 망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성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자 그들을 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모압 왕 발락이었던 까닭에 그는 이스라엘을 어찌하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게 하려고 온갖 힘을 다 썼던 것입니다.
본문 민23:1~6절까지 보면,
모압 왕 발락은 시종일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과 흥정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나라에서 소위 가장 '신통한 선지자'라는 발람만
적당히 구슬리면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까지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의 22:36절 이하에 나오듯이 발락은 일부러 멀리 "모압 변경의 끝"까지 나가서
발람을 몸소 영접하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만 잘해 주면 두둑한 복채는 물론이요
"그대를 높여 존귀케" 해 주겠다는 등 온갖 사탕발림을 다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오던 길에 저 유명한 '당나귀 사건'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단단히 혼쭐이 난 상태인지라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임의로 말 할 수 있으리이까 *22:38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던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다음날 발락 왕과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이는"
높은 산에 위치한 "바알의 산당"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준비했던 과정은
당시 우상 숭배자들의 관습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습니다.
"일곱 단"을 쌓는 것이나 발락 왕이 "번제물 곁"에 서는 것,
그리고 발람 선지자가 "사태난 산" 즉 '산꼭대기의 벗겨진 부분'에 선 것이나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렸나이다"라고 자기네가 많은 제물을 준비했다고
생색내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이방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소원을 빌고자 할 때에 행하던
전형적인 절차와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발람이 입을 열어 예언을 시작하게 되자
그처럼 발락과 발람이 자기네 딴에는 정성껏 준비했다는 제물뿐 아니라
세상의 그 무엇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이 저주 받도록 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습니다.
발람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23:11
지금 여기서 이방 선지자 발람은 자기가 이전에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체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자기더러 누구를 저주해 달라고 부탁해 오면
그 사람이 주는 돈을 받고 그대로 저주해 주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의 발람은 세상의 잡신이 아니라 참 신이시요 절대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아무리 발락 왕이 큰 보수를 약속하면서 "야곱을 저주하라"고 요청해 와도
그는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자기 마음대로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오직 여호와께서 자기 "입에 주신 말씀"만 그대로 발락 왕에게 전달해 주지 않을 수 없도록,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에 완전히 붙잡혀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 선지자 발람을 그처럼 주권적으로 주장하시면서
이스라엘을 모압 왕 발락의 악한 계교로부터 막아 주신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9절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홀로 처하는" 백성이며
스스로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섬기는 법은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방법과
너무나도 다르고 유별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 신을 번갈아 가며 편리한대로 모시던 우상 숭배자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오직 여호와, '스스로 계신 자' 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아주 독특한 백성이었습니다.
신의 존재 의의를 사람의 소원 성취 수단에서 찾는 우상 숭배자들과는 달리 이
스라엘 민족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찾는 지극히 특수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이란 적어도 종교 생활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홀로 서기'를 하는 백성이었으며
'열방들과는 너무나도 별다른'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저주할 수 없을 정도가 아니라
오로지 "능히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며 남들이 부러워할
"의인의 종말"까지 누리는 축복의 가도를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당신만을 유일한 참 신으로 믿고 섬기는 이스라엘을
결코 저버리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모압 왕 발락이 아무리 '굿판'을 벌이고 '제사'를 지내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해도
그 모든 것은 그야말로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백성들이 세상의 온갖 악한 것들로부터 하나님의 자상하신 보호를 받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참 신으로 믿는 이 신앙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세상에서 '홀로 처할 줄' 아는 성도들입니다.
어떤 민족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완벽한 은혜의 품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을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 섬기고 따르는 자세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 종교인들과 '완전 딴판의 모습'을 나타낼 줄 아는 교회인 것입니다. 주2)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민이 범죄할 때에도
이미 약속하신 축복을 거두지 않으시는 인자한 분이십니다. *발람의 2차 예언 23:13~26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해할 족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약속하신 축복을
끝까지 내려 주고야 마시는 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시종일관 요지부동이셨습니다.
일차 시도가 실패로 끝난 모압 왕 발락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3~17절에 보면,
발락 왕은 이제 장소를 한번 옮겨서 재시도를 했습니다.
즉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22:41) 다 보이는 곳에서
발람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했다가,
이번에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 끝만" 보이는 장소로 바꾸어 보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한 이유가
이스라엘 진 전체를 다 보게 되는 바람에, 그 위용에 눌려 겁이 나서 그랬다고 짐작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우상 숭배자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터가 나빠서 점이 신통치 않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 발락이 일단 하나님께서 한번 내리신 말씀이라 해도
장소만 조금 바꾸면 얼마든지 취소나 무효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사람을 상대로 자기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상대방을 달래어 보기도 하고
협상이나 흥정을 하기도 하듯이, 하나님도 똑같은 식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의 종교심이란 것은 사실상 이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발락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로 어떤 말씀을 내려 주셨습니까?
이어지는 18~26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터만 바꾸면 점괘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 발락을 향하여
당신께서는 말에 있어서 사람처럼 "식언"하거나 "후회"하는 존재가 절대로 아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미 내리신 "축복의 명" 역시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물론 이방 선지자 발람이 평소에 그가 자랑하던 그 어떤 "사술"이나 "복술" 즉 주문이나
마술을 쓴다 해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결코 취소나 무효가 될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이
발락에게 예언해 주던 발람은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21
이것은 이방 선지자 발람이나 우상숭배자 발락으로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어떤 신이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 주는 결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사람 편에서 뭔가를 그 신에게 바치는 것이 당연한 전제였을 것입니다.
발락이 자기로서는 처음 만나게 되는 이스라엘의 신에게 특별한 청탁을 드리기 위해서
이것저것 많은 제물들을 준비하여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의 비위를 맞추어 주고
생색을 내려 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발락 왕이 알던 우상신들과는 달리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비록 "허물"이 있어도 그것을 "보지 아니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발락으로서는 정말 기절초풍하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혹 "패역"한 모습까지 보일지라도
일단 당신의 선민에게 약속해 놓으신 축복은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시는"
실로 신기한 하나님이셨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그들 가운데 모시고 자기들의 "왕으로 부르는" 축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광야 생활 중에서
"들소"와 같이 힘찬 행군을 하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암사자"와 "수사자" 같이 가나안 정복을 완수하기까지는
결코 "눕지 아니할" 미래의 축복까지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발람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라고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허물과 패역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초지일관 철두철미하게 축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발람은 "그가 말씀하신 바를 내가 그대로(축복) 하지 않을 수 없도다"라고 두 손 번쩍 들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26
▲실로 오늘날 역시 하나님의 선민 된 성도들은 그 얼마나 놀랍고도 신기한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부를 수 있게 된 이것이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그 왕을 모신 백성이 된 덕분에 원래 죽어 마땅한 죄 가운데 살고 있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출애굽의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이 험한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통과하면서도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심으로 인하여 시마다 때마다 '들소' 같은 새 힘을 얻어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역시 '사자'와 같이 천국을 '침노'하여 그 영원한 '가나안 복지'를 차지하게 될
최고의 소망까지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쪽에서 어떤 선행이나 헌금을 통하여
공로를 쌓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까?
우리가 무슨 착한 마음씨를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여삐 보시고
이런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쪽에서는 오로지 '허물'과 '패역'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은 아예 '보지도' 않으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면서
그저 약속하신 그대로 축복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와 같이 무한한 인자하심 덕분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무슨 '복채의 액수'나 '점괘를 보는 터'나 '젯밥의 양'에 따라서
그 뜻이 이리저리 바뀌시는 분이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그 어떤 소망이 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 우리 하나님이 만일 저와 여러분의 이 약한 본성과 악한 행실에 따라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신이셨다면 축복은 고사하고 이미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져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택하신 선민은 혹 그들이 실족할 때조차 오로지 당신의 변치 않으시는 인자하심만을 좇아
시종일관 축복해 주시는 이 고마우신 하나님께 그저 감지덕지 '우리의 참된 왕'이시라고
뜨거운 감사찬송을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하고,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 하고
그 일들을 통해 자기 미래를 컨트롤하기 원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심리입니다.
본문 민수기 23~24장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미래 안전을 확보하고 미래의 축복을 받으려고 했던 사람의 이야기와
스스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애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축복과 약속이 보장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축복에 실패한 사람 : 발락
모압 왕 발락은 자기 스스로의 방식으로 자기와 자기 백성의 미래에 큰 복이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축복과 안전을, 박수무당의 도움으로 스스로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샤머니즘 신앙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발락은
자신과 자기 백성들의 미래에 고통이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불안감이 엄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까지 물리친 사람들인데,
우리 모압까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압 왕 발락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꾀를 내었습니다.
국제적인 점쟁이인 거짓 선지자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요청한 것입니다.
민22:6절에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 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함으로써
자기 백성들의 평안과 미래의 안전과 축복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민23~24장에는 이런 방식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과
결국 실패할 방식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은 아주 신통한 국제적 점쟁이였습니다.
양신(성신, 악신)이 역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신자가 있을 수 있죠)
발락이 그를 고용해서 미래의 행복을 얻고자 했지만,
이 방식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샤머니즘, 무속신앙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경비와 노력이 많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돈을 많이 투자해야 합니다.
그리고 갖은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브돌에 있는 발람을 고용하기 위해서 귀족들을 두 번씩이나 그 곳에 보냈습니다.
가는 길이 열흘이라고 했으니 총 40일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면 귀족들이 브돌을 오고가면서 얼마나 많은 돈을 탕진했겠습니까?
이들의 여행 경비를 부담해야 했고, 또 발람이 귀족들과 함께 발락에게 왔을 때,
성대하게 대접을 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접대하는 일에도 경비가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민22:40절에 “발락이 우양을 잡아 발람과 그와 함께 한 귀족을 대접하였더라”
그리고 발람은 발락의 사주를 받아 세 번이나 장소를 바꿔가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민23:7절에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23:7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단을 쌓고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리니” :14
“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산 꼭대기에 이르니” :28
동편 산과 비스가산과 브올산으로 세 번이나 장소를 바꾸면서 저주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이 발람의 입술을 주장하셔서
저주가 아니라 도리어 축복의 말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저주를 하려고 할 때마다 단을 일곱 개씩 쌓고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수양 일곱 마리를 드리게 했습니다.
한 번 제사를 드릴 때마다 14마리씩 세 번 장소를 옮겼으니 총 42마리가 소요되었습니다.
요즘 작은 소도 한 마리에 300만원을 호가하는데, 큰 수송아지는 얼마나 비싸겠습니까?
제물로 소와 양 42마리의 비용이 소요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발람의 저주가 성공하면 성공에 따른 보수를 지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 미래의 축복과 안전을 확보하려고 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노력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미래의 축복과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
확실한 방법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용이 많이 소요되고, 노력도 많이 해야 하지만, 결과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23:3절에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갈지라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고하리이다 하고 사태난 산에 이른즉”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저주하면 하나님이 오실지 오시지 않으실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비를 들여 국제적인 점쟁이를 고용해서 장소를 세 번이나 바꾸며 원하는 목적을 얻고자 했지만,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만 얻었을 따름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쓸모없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 사람들에게는 이런 방식이 사실상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을 괴롭히거나 공격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2:9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모압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들을 괴롭힐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미래에 일어나지도 않을 위험을 갖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추진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불필요한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 없이 자기의 미래, 자기 영혼의 미래를 준비하고
영원한 행복과 평안, 번영을 얻어 보려는 발람의 방식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 방식들은 모두 실패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높은 지위, 권력이나 명예, 인기 등과 같은 것들을 얻으면
미래의 행복이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없이 얻은 권력, 돈, 지위, 명예, 인기 등은 사람의 행복을 결코 확보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은 건강을 해치고, 가족 관계를 파괴하며,
행복보다 불행의 열매를 거둘 확률이 매우 높은 것들입니다. 삶을 허비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는 미래의 안전과 행복은
결코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실패한 방법입니다.
▲미래의 축복에 승리한 백성 : 이스라엘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긴 일 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이렇듯 미래의 축복을 받는 방법은
어떤 신을 섬기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신을 섬기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기도 하고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이라고 해서 모든 신이 참된 신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신이 참된 신입니다.
귀신, 잡신, 악신은 신이 아닙니다. 그런 존재들은 몸이 없을 따름이지,
우리의 섬김을 받아야 할 신들이 아닙니다.
참된 신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원망과 불평을 했고 농사 한 번 짓지도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았으며,
생수를 공급받아 마셨고, 모세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살게 되는 것, 모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받기 위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어떤 사람을 고용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많은 경비를 투자하지도 않았으며,
특별한 제물을 드린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믿는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자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창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결정에
아무런 조건이 붙어 있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너를 창대케 하리라,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23:19~20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의 말이지만, 아주 위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이 섬겨야 할 신으로 여기고 그 분만을 섬겼습니다.
이것 이외에 다른 일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발람은 지금 하나님이 이들에게 복을 주셨는데,
감히 나 같은 점쟁이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축복을 돌이킬 수 있겠느냐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국제적인 점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을 돌이킬 자가 없다!
△여러분 가정의 신은 여호와이십니까?
우리의 신은 참되고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때문에 그 복은 거저 받는 것입니다.
비용이 많이 들거나 노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복입니다. 세상의 복은 길면 몇 십년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영원토록 존재하는 영생하는 복입니다.
이 복은 거저 주시는 복이고, 확실한 복이며,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복인 것입니다.
또한 이 복은 현세에만 관계된 복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까지 효력을 갖는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에도 복을 주셨고, 현재에도 복을 주시고,
미래에도 복을 베풀어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과거>에 받은 복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우선 백성들의 인구가 증가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민23:10절에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하매”
이스라엘의 인구가 너무 많아지다보니 사분지 일을 계수하다가 잊어버린다는 말씀입니다.
또 23:22절에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노예 해방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 23:9절에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특별한 백성으로 택해주신 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이 구별된 백성으로 대해 주시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 24:9절에 “꿇어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킨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능력 있는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렇게 많은 복들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돈 한 푼 쓰지 않고 이런 복들을 받았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현재>의 복도 받았습니다. 23:21절에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가 있어도 죄를 인정치 않으시고
허물을 덮으시며 의로운 백성으로 여겨주시는 칭의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인정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바라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없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 23:21절에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임재의 복입니다.
여러분들도 금식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임재의 정도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 기도할 때와는 또 다른 신비한 체험들을 하게 됩니다.
금식기도만의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시는 분들은 금식기도를 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23:23절에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점쟁이가 와서 당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저주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에도 복을 주셨고, 현재도 복을 누리게 하셨으며,
<미래>에도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4:7절에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로다
그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 나라가 진흥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번영과 풍요,
원수를 향해서도 승리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17절에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8절에도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당해 낼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복을 주신 것은
모두 거저 주신 복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발락은 경비를 엄청나게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지 못했는데, 이스라엘은 돈 한 푼 사용하지 않고도 다 받았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이 누리는 복은 오늘날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영적으로 누리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복은 예표이고, 교회가 누리는 복이 실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신이시기 때문에 자기의 택한 백성을 구원해 내시고 함께해 주시며
인도해 주셔서 미래에도 천국에서 영원히 복을 받고 승리하는 백성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복을 어떤 방식으로 주실까요?
▲유일한 축복의 통로 :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유일한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민23~24장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복은 구약시대, 신약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발람과 같은 악한 거짓 선지자가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메시아 예언을 했습니다.
발람은 이런 이스라엘의 모든 복이 이스라엘의 왕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민23~24장에 보면 그 내용이 점진적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23:21절에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24:7절에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로다
그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 나라가 진흥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예언들은 1차적으로 다윗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것입니다.
24:17절에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현재의 일이 아니고
먼 장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예언을 한 것입니다.
마2:1~2절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발람 선지자의 고향인 동쪽 브돌 쪽에서 온 것입니다.
거기서 동방박사가 올 때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바로 야곱에게서 난 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박사들이 발람의 이 예언을 참조해 왔습니다.
물론 별의 인도도 받았지만요)
계22:16절에도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는 것입니다.
그럼 복은 누가 받을까요? 복은 누구를 신으로 섬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원한 복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모든 복을 소유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복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미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라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영원한 미래의 행복과 안전이 보장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복, 그 복의 근원을 무시하고
스스로 그 복을 얻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모두 낭비된 시도고, 허사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고 칭해 주시고, 어려운 인생살이 가운데도 늘 함께 해 주시며
현세의 복 뿐만 아니라 내세의 복까지 누리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오늘도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여호와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선민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호로 인하여 절대로 망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택하심을 입은 성도는 비록 부분적으로 범죄할지라도
그 하늘 아버지의 무한하신 인애와 자비로 인하여 결국은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토록 변함없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세상으로부터 '왕따'가 되더라도
오직 이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더냐? 가서 나도 온 세상을 반대한다고 전해라."고 외쳤던
아타나시우스의 용기를 우리 역시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확증된 성도는
아무리 '발락'이 날뛰고 '발람'이 저주를 하려고 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 37)는 사도 바울의 승리 체험만 따라올 뿐인 것입니다.
실로 '그가 이스라엘에게 하신 축복'은 아무도 막을 자 없고
하나님 편에서도 절대로 변개치 아니하시는 축복입니다.
열방 중에 홀로 처하게 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며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만을 왕으로 모시며 따라감으로써,
모든 원수의 저주를 이기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서 승리하는
이 시대의 선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주1) 발람의 세 번 예언의 내용 파악하기
▲1. 발람의 첫번째 예언 (1-12절)
모압왕 발락은 발람을 데리고 바알 산당에 올랐습니다 (22:41).
발람은 발락에게 일곱 단을 쌓고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하나를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발람은 발락을 그 번제물 곁에 서 있게 하고 자신은 사태난 산에 올랐습니다.
사태(沙汰)난 산은 메마른 고지를 말합니다 (1-3절).
당시 동방의 이방 민족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神)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도 신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완전한 소원 성취를 원하여 원전수인 7 수대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점술사들이 신접(神接)을 하여 점괘(占卦)나 계시(啓示)를 얻기 위해
전망이 넓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높은 산 꼭대기 암벽이나 벌거숭이된 장소를 찾았습니다.
발람도 자기 고향 바벨론의 아람(메소포타미아) 풍습대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동의와 도움을 얻고자 했습니다.
△발람이 산에 꼭대기에 올랐을 때에 하나님이 임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께 자신이 드린 제물을 자랑스레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어야 하는 근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과는 상관없이 발람에게 이를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4-6절).
발람은 발락에게 돌아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예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하면서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고 예언했습니다 (7-10절).
△발람이 예언한 요지는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①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구별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는 말은 고립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존재를 말합니다.
②이스라엘은 사분의 일도 셀 수 없을 정도로 큰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야곱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티끌같이 번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12:2).
③발람 자신도 의인처럼 죽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도구로 바로 쓰임 받다가 죽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자신도 이스라엘이 누릴 복에 참여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대로 될 것이라고 축복했습니다.
이것이 이방 주술의 무용성(無用性)을 보여 준 것입니다.
아무리 술사가 저주를 하려 해도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축복하게 하면 축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2. 발람의 두번째 예언 (13-26절)
발락이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하게 하기 위해 바알 산당으로 데려갔었습니다.
발람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제사와 제물을 드리고 사태난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임함 속에서 말씀을 받고 이스라엘을 축복했었습니다 (1-12절).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한 것이
이스라엘 진영이 너무 장대해서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발람을 이스라엘 진영의 끝 일부만 보이는 비스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단을 쌓고 제사와 제물을 드리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했습니다 (13-14절).
발람은 발락과 귀족들을 제단 곁에 있게 하고
다른 장소에서 전과 같은 방법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꾀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임하여 입에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또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이었습니다.
①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식언하거나 후회하는 분이 아니고 한번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에 의해 예언한 축복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한 축복을 사람이 변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9-20절).
②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허물이 있고 패역한 행동을 많이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아주 미워하거나 떠나는 것인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택한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21절).
③이스라엘은 해할 족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애굽에서 인도해낸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강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힘이 들소와 같고 일어섬이 암사자 같고 움킨 것을 먹는 것이 수사자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술이나 복술로도 그들을 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2-24).
발락은, 발람이 또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을 보고
아예 저주도 하지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저주하라고만 하면 축복을 하기 때문입니다.
발람의 예언은 하나님이 바람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 대해 가지신 의지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약1:17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한번 택한 백성을 버리시거나 한번 축복하기로 약속한 것을 변개하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 범죄하여 패역한 길로 행할 때에 잠시 징계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버리거나 복된 길에서 제외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자 자녀의 잘못을 보고 초달하지만 아주 버릴 수 없는 성품과 같습니다. 히12:10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거나 해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겔25:2에 ‘인자야 암몬 족속을 향하여 그들을 쳐서 예언하라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를 더럽힐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무할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암몬 족속이 징벌 받는 예언의 내용이, 겔25장에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토록 함께 하시니 누구도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그런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3. 발람의 세번째 예언 (27-30, 24:1-9)
발람의 첫번째 예언은 바알 산당에서 이스라엘의 성별됨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을 축복한 내용이었습니다 (1-12절).
두번째 예언은 비스가 산에서 하나님의 진실하신 성품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이었습니다 (13-26절).
세번째 예언에 속하는 본문은 브올 산에서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광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됩니다.
이 세번째 예언은 민24장 1-9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네번째 예언은 역시 비올 산에서 메시야의 도래를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됩니다 (24:15-23).
주2)
사람이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입니다.
남들로부터 '독불장군'이란 소리 듣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기분 나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걱정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다른 종교와 어찌하든지 비슷하게 맞추어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승려들과 손을 잡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좋은 일들을 함께 할 줄 알아야 도량 있는 기독교인처럼 보이고,
랍비들과도 강단을 나눌 줄 아는 정도가 되어야 좀 트인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 이 시대에 오히려 기독교의 주류처럼 되어 가는 형편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볼 때에는 소위 '마음이 열린' 종교인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보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런 교인이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미 '음녀 바벨론의 잔'을 마신 배교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나 종교계에서 외톨이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포기하고 타협하면,
사람들은 그 곁으로 모여들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 즉시 떠나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정한 선민이라면 우상 종교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홀로 처하는' 것을 조금도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적어도 '하나님 유일신앙'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 세상에서 혼자만 남게 된다 하더라도
한 치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멋진 고집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섬기는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을 '열방의 흔한 종교인들 중에
하나로 여기지 않는' 것이 결코 독선이 아니라 진실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똑바로 믿고 섬기다가 이 인간사회에서 외톨이가 되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의인'을 두둔해 주시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교회가 바른 진리를 지키고 순교적인 신행일치의 생활을 사수하다가
다른 종교인들로부터 매도를 당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참된 이스라엘'을
오히려 '계수할 수 없을 정도'로 번성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본다 하더라도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을 유일하신 참 신으로 믿고 고백함으로써
그처럼 당신만 섬기고 당신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선택해 놓으신 당신의 백성을
그 어떤 원수도 감히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