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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4장 야곱의 장막, 야곱의 별
LNCK
2022. 9. 30. 14:22
◈야곱의 장막, 야곱의 별 민24장 2006.12.17.출처,여러 설교 정리
민22장부터 24장은 민수기에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출애굽기부터 시작된 광야 여정이, 이제 끝나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발람의 예언이 중요한 것은, 그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요, 자기 백성됨을 선언하십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인증 마크를 찍어주십니다.
그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도 그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모압 왕 발락으로 시작합니다.
정통과는 제일 먼 사술을 쓰는 거짓 예언자 발람의 입으로 선언됩니다.
악인들의 입술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참 백성 되심이 선포되어졌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저 광야의 유랑 민족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적용 "발람의 길을 주의하자"
우리는 본문 민24장을 묵상하며, 나는 당연히 이스라엘일 것이라 스스로를 단정 짓습니다.
내가 발람이라고는 믿지 않을뿐더러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가족, 지인, 직장 상사가.. 발람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의 피공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임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발람의 길'로 갈 수 있음을, 신약성경이 경고했듯이
깨어있지 않으면, 나도 발람의 길을 얼마든지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벧후2: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우리는 광야의 길을 걷고 있는 와중에서,
발람처럼, 입신양명을 꿈꾸며 돈과 권력으로 향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발람의 길'입니다. (한 그릇 식물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도 비슷하죠)
돈이 되는 길이라면.. 묻지마 투자, 묻지마 직장, 묻지마 청탁을 응하거나 받습니다.
그리고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지만, 발람이 저주한 것 자체는 명백한 범죄인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이웃이나 형제를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다면
나 역시 발람의 길을 따르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 기준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또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게 돈벌이가 된다면 그 일을 마다하지 않거나
그게 내게 유익이 될 것 같으면, 남을 해치는 저주를 하거나, 그런 일에 직접 가담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있는 '발람의 길'을 따르려는 유혹입니다.
이런 발람의 길은, 초신자들만 가는 길이 아닙니다.
발람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올바른 예언'을 할 만큼, 그는 영적인 자였습니다.
본문 15~24절에 나오는 발람의 4번째 예언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정말 구약 전체를 통털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정확하게 예언했던'
몇 안 되는 예언자 중의 한 명입니다.
그런 신령하고 영적인 사람도 '발람의 길'로 가는, 타락한 삶으로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 본문의 경고입니다.
계시록에도 말세에 일어날 '발람'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계2:14 '거기 (버가모 교회에)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본문 민24장에는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발람이 꾀를 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방식으로는 그가 실패했지만,
이스라엘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는' 방식으로는 성공했던 것입니다. 계2:14
발람이 처음부터 타락한 (이방)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본문 13~14절에 나타난 그의 말을 보면, 그렇게 신령할 수가 없습니다.
“13 가령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14 이제 나는 내 백성에게로 돌아가거니와 들으소서
내가 이 백성이 후일에 당신의 백성에게 어떻게 할지를 당신에게 말하리이다 하고'
이렇게 신령했던 발람이, 어느 순간에 그렇게 타락해버렸는지가 미스터리 이지만,
오늘날 아무리 신령하고, 영적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민감하게 듣는 자라도
한 순간에 이렇게 '발람의 길'로 가는, 타락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최후도 비참했습니다. 가나안에 진입하던 이스라엘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민31:8, 수13:22
오늘날 우리는, 내가 "오늘" 아무리 신령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똑바로 하나님을 섬겨도
"내일" 한 순간에 타락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계2:14절에 발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일차적인 뜻은.. 우상숭배를 뜻합니다. 거기엔 음행도 포함되었습니다.
버가모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상숭배도 동시에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어느 주의 종이 앞장을 섰다는 것이지요! 그 교회에 '발람 선지자'가 있었다는 거죠.
오늘날의 우상숭배는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물질주의, 쾌락주의, 성공주의, 번영신학 등의 우상입니다.
만약 오늘날에 성공주의, 번영신학 등을 주장하는 주의 종이 있다면
그는 발람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자기 혼자만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는 말씀처럼 계2:14
다른 사람도 그 길로 엮어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가 한 때 신령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대언했던.. 하나님의 (이방) 선지자 였는데,
하나님은 그를 나귀의 입을 열어서 경고하기도 하셨는데도
그가 돌이키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행했을 때.. 그는 영생(영원)에 타락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발람 사건의 교훈이요, 경고'입니다.
<스크랩 설교 시작>
▲영국에서 어떤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 언론의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존 라인이라는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폐의 발육부진으로 인하여
의사들로부터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일생 동안 무려 16차례의 죽을 위기들을 넘겼다고 합니다.
벼락을 두 번이나 맞았던 것을 비롯하여 탄광 사고로 매몰되는 위기와
세 차례의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들, 그리고 익사 직전까지 가는 아찔한 순간까지 있었고,
한 번은 어릴 때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팔이 부러져서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는데
그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같은 팔이 또 부러지는 변까지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숱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존 라인 씨는 54세가 된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었는데,
최근에 맨홀 구멍에 빠져서 중상을 입는 사고를
또 한 번 당하는 바람에 그렇게 화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전치 32주의 부상'을 입은 그를 보면서도 본인을 포함해서 그의 부인과 가족들은
"별다른 걱정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언론은 덧붙여 보도했습니다.
그처럼 목숨을 위협하는 각종 사고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끈질기게 목숨이 유지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의 인생에서 이런 '억세게 좋은 운'은 계속될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불신자들은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불행도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압의 선지자 발람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와 꼭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이 나타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군하던 길에 모압 변경에 이르자
모압 왕 발락은 매우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망하게 하려고 계획합니다.
발람은 비록 '선지자'라고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가 아니라.
본문에서 '이전에 사술을 쓰던 자'라고 말하고 있듯이 24:1
오늘날의 무당과 비슷한 우상숭배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발람이 감히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나귀의 입까지 동원하셔서 주장하신 바람에,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친 모압 왕 발락의 시도는 계속 실패해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23:27~30절에 보면, 발락은 포기하지 않고 이제
세 번째로 발람에게 명하여 또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즈음에 와서는 발람도 이미 포기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본문 24:1~4절에 "1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사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 낯을 광야로 향하여
2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3 그가 노래를 지어 가로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다음 25장에 나타나는 사건을 보면 곧 알 수 있는 대로, 지금 발람이 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결코 그가 완전히 하나님 신앙으로 돌아섰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자기의 "사술"을 써서 저주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으며, 이제 그 자신은 그저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는 대로
예언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대언 도구처럼 되어버렸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발락과 발람이 기를 쓰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해도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건드릴 재주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 발람의 입에서 나오게 된 말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향한 두 가지 축복의 예언이었습니다.
23:1~24:9절에서 발람은 이미 세 번의 예언을 했었는데, *발람의 세 번의 예언 주1)
본문 24장에서는 그 세 번째 예언이 "야곱의 장막"이란 말로 시작되고 있으며,
발람의 네 번째 예언(24:15~24)은 "야곱의 별"을 주제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 축복들은 둘 다 '야곱'이라는 이름,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원조가 되었던 그 축복의 조상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두 가지 축복들, 신앙의 조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확고부동하고도 불변한 축복들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1.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신자의 축복은
바로 '야곱의 장막' (교회) 중심으로 구원의 확신에 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야곱의 장막'을 통하여 누리던 복이었습니다.
'야곱의 장막' 즉 이스라엘 민족이 거하고 있던 거처란 과연 어떤 곳이었습니까?
24:5~7절에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6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의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7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로다
그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 나라가 진흥하리로다"
이스라엘이 거하고 있는 장막과 거처를 두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발람은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두고 비유하기를 그들의 거처는
물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공급되는 곳에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강가의 동산 같으며' :6
"골짜기"나 "강가," 혹은 "통에 넘치는 물"이나 "많은 물가"
이 모든 말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연한 것입니다.
물이 귀한 근동 지방에서는 누구에게 복덩어리가 굴러 떨어지는 경우를 두고
이처럼 '물이 넘친다'라고 흔히 표현했습니다.
즉 바꾸어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날마다 장막을 치고 거하는 곳마다
복이 따라 다니며 넘친다는 말인 것입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은 어떤 곳에 장막을 쳤기에 그처럼 가는 곳마다
복이 철철 넘쳐흐르는 백성이 되었습니까?
그 사실을 두고 바로 이어지는 8절과 9절 말씀에
"8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9 꿇어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여기서 특별히 9절의 내용은 옛날에 야곱이 그의 아들 유다에게 축복했던 말을
발람이 그대로 반복하는 것임을 볼 때,
이 축복이 야곱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여기서의 제일 요점은 바로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거하고 있는 장막이요 거처요
그 광야 공동체의 실질적인 현주소였던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종살이하며 고생하던 그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인도함을 받아 나온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축복의 첫 물줄기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람 눈에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로만 보였던 출애굽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된 이스라엘에게는
이제 그 앞길에 아무 더 이상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광야 행군이라는 어려운 길도 마치 "들소"와 같은 힘으로써 :8
모든 "적국"들을 거침없이 무찌르며 일사천리로 진행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리될 것이었습니다.
지금 가나안을 바로 눈앞에 두고 진을 치고 있는 그 분위기 역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수사자"와 "사자" 같이 아무도 곁에서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할 위용으로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9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구원 역사로 인하여 사기가 충천해 있었던 까닭에
그들이 지금까지 누려왔고 또 앞으로도 받게 모든 복들은
주위의 그 어떤 민족도 방해하거나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런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만 "복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으며,
반대로 그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뿐이었습니다.
'야곱의 장막'은 이와 같이 '출애굽의 구원'이라는 현주소에 있었으며,
거기에 거하는 백성의 앞날에는 가는 곳마다 계속하여 물이 절로 넘치는 축복이
따라오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바로 이런 '야곱의 장막'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성도가 받는 복은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출애굽과 같은 복의 물꼬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입니다.
신자가 진정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복의 근원이 먼저 터져야 하며,
일단 이 샘이 이것이 터지게 되면
그 나머지 복들은 그저 줄줄이 따라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지옥의 영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 십자가 공로로 구원 얻고 천국의 영생을 얻게 되었는데,
그런 감사와 감격이 심령에 넘치는 사람 앞에 그 어떤 것이 거칠 수가 있겠습니까?
광야생활이 좀 고달프다고 "아이고, 내 인생이 왜 이 모양 이 꼴일까?"하고 주저앉게 될 리가 없으며,
오히려 "죽을죄도 용서받고 구원 받은 몸인데 이까짓 것쯤이야."하고
그야말로 '들소처럼' 힘을 떨치며 매사에 승리할 것입니다.
천당소망이 확실한 성도가 아직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다고 해서
"왜 나한테 아직까지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하고 기죽게 될 리가 결코 없으며,
마치 움츠리고 있다가 뛰어나가는 '사자'와 같이 언젠가는 이 땅에서 붙잡아야 할 것을
꼭 성취하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와 같은 십자가 대속의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영생구원이라는 이 엄청난 복을 내 인생 최고최대의 보화로 받아서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함을 자랑하는 신령한 단체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면서 이처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인생이란 것은
그야말로 '강가에, 물가에 심긴 나무'나 다름없이
그저 '시절을 좇아 절로 과실을 맺는' 복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서 파송 받은 선교사님들은 일단 거주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선교지의 국가로부터 체류비자를 받아야 마음 놓고 선교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이민 간 교포들은 무엇보다도 영주권부터 받아놓아야
그 다음의 인생을 여유롭게 펼쳐갈 수 있습니다.
비록 광야와 같은 이 세상살이이기는 하지만, 교회를 자기 인생의 든든한 '거주지'로 받고
이 교회를 통하여 '천당 시민권'까지 이미 확보하고 있는 성도라면
그 앞에 거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은혜의 장막 안에서 구원확신이라는 현주소를 가지고 살게 된 것을 늘 감사하면서,
실로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흔들지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불변의 축복을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앞으로도 평생토록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발람의 네 번째 예언 : 야곱의 별 24:15~24
※발람은 총 4번의 예언을 했습니다. 1~3번째 예언은 발락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는데,
본문의 4번째 예언은.. 자발적인 예언이었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그냥 예언이 나온 것입니다.
▲본문 10~14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발락과 발람 사이에서 앞에서도 있었던 실랑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람을 불러왔는데 오히려 세 번씩이나 축복하는 것만 보게 된
모압 왕 발락은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려가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케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가 그대를 막아 존귀치 못하게 하셨도다 (주님께서 당신이 후하게 보답받는 것을 막으셨소)"
라고 발람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11
즉 "당신이 그 따위로 굿을 했으니 복채 한 푼도 줄 수 없소. 이제 당장 꺼지시오.“
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발락에게 발람은 "나는 내 백성에게로 돌아가거니와 들으소서"라고 하면서
한 가지 예언(네 번째)을 덤으로 얹어주었습니다. :14
옛날에는 돈 안 받고 남에게 점쳐 준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발람이
이제 와서는 성령의 역사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또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예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아주 별난 체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발람이 네 번째 예언을 시작합니다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15~16
발람의 자기 소개는 자화자찬격인 교만한 소개입니다.
그러나 이 교만한 거짓 선지자의 입술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복음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개역개정에는 '규')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17
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위대한 복음을, 교만한 거짓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십니까?
이는 복음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증거되기만 한다면 참된 선지자든 거짓 선지자든 상관없이
그 입술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발람은 입으로 말했으나
자기 영으로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망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발람이 대언한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발람이 선포한 복음은 자기 시대의 일이 아니라 먼 장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임을 알려줍니다.
먼 장래에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날 것입니다.
홀(scepter)은 왕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입니다. 이것은 왕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서 나오는 별은 왕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왕권을 가진 야곱에게서 나오는 별이
모압과 에돔과 아말렉과 겐 족속을 모두 정복하고 이길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인생의 그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는 신자의 축복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왕 중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야곱의 별'을 모시고 살았던 축복입니다.
"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18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19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20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아말렉은 열국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하고
21 또 가인 족속을 바라보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너의 거처가 견고하니
네 보금자리는 바위에 있도다 22그러나 가인이 쇠미하리니 나중에는 앗수르의 포로가 되리로다 하고
23 또 노래를 지어 가로되 슬프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시리니 그때에 살 자가 누구이랴
24 깃딤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 앗수르를 학대하며 에벨을 괴롭게 하리라마는 그도 멸망하리로다 하고"
"내가 그를 보아도,"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라고 말하는 대로, :17
여기서 발람은 분명히 어떤 한 인물을 내다보며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물 출현 시기를 가리켜 "이 때의 일이 아니며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라고,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의 장래에 나타날 그 어떤 인물의 이름이나 그에 대한 다른 정보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그 대신 "한 별," "한 홀" 그리고 "주권자"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17, 19
'별'은 요즘은 인기 연예인의 상징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군주의 대표적인 상징이었습니다.
'홀'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휘봉이었습니다.
즉 발람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어떤 강력한 주권자가 등장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계 22:16)”
그리고 그 왕이 출현하게 될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그동안 그들을 괴롭혔던
이방 민족과 나라들을 완전히 압도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고 있는 "모압"을 비롯하여,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오던 도중에 길을 막고 방해하던 "에돔,"
그리고 큰 나라는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데 있어서는 그야말로 으뜸이었던 "아말렉"
이런 민족들이 이스라엘에 바로 그 왕이 출현함으로써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 주변에 살던 "가인 족속" 즉 겐 족속이나 "깃딤 해변"에서 온 해양민족인 블레셋 족속 등
이스라엘 주변에서 시끄럽게 구는 군소 민족들 역시 다 그 왕의 출현과 함께 깨끗이 처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때가 오면 모든 "소동하는 자식들" 즉 신자를 욕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이 다 멸망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 이스라엘은 불신 세력 앞에서 "용감히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왕을 통하여 이루어질 그런 불신자에 대한 심판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인 까닭에 아무도 그 앞에서 "살 자"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왕이 누구겠습니까?
이 왕은 결코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정치적 군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님에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최전성기에도 이런 주변의 이방 국가들이 완전히 다 망한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 장차 메시아 왕국의 주권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임이 명확합니다.
이상의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하여 이미 성취되었고
또한 그분의 재림으로 인하여 완전히 성취될 예언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내 인생의 주권자로 모시고 사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인 것을 우리 신자가 모르고 살아서야 말이 안 됩니다.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앞에 두고,
또 지금 현재 우리를 괴롭히는 세상 세력들 사이에 끼어 살고 있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왕을 모시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얼마나 복스러운 일입니까?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 보면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소련의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 안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저 목숨만 부지해나가는 것이 모든 죄수의 하루하루의 목표 그 자체였습니다.
그 무서운 추위 속에 새벽부터 밤까지 눈밭에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바깥 사회에서는 짐승들 사료에나 쓸 것을 식량이라고
그것도 그릇 밑바닥만 겨우 채울 정도로만 주는 곳에서 십년, 이십년 씩 산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사는 게 아니라 언제 죽느냐 하는 생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수용소에 살던 이반 제니소비치는
그 와중에서도 반장을 잘 만나게 되서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반장이란 같은 죄수들 중에서 한 작업반을 책임지도록 뽑힌 사람인데,
그 반장의 역량에 따라 그 작업반에 속한 죄수들의 식량 배급이나 작업 책임이 좌우되기 때문에
이 반장을 잘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죄수의 생사가 갈린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설의 주인공 이반 제니소비치는 다행히도 자기는 능력 있고 수완 좋은 반장을 만나서
목숨은 건졌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반장을 만난 것은 "마치 든든한 모선을 탄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세주를 만나게 되고 따르게 된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정말 다행한 일 아닙니까?
아니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복이 터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땅에서의 우리 인생이란 모진 세파 속에서,
못된 사람들의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밟히는 가운데
목숨을 연명하기에 급급한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구주를 알지 못했으면, 혹 이 땅에서는 좀 잘 먹고 잘 살았다 하더라도
결국 영벌의 지옥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죽음의 수용소나 사실 아무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모양으로 살더라도 우리는 사단의 종이 되고 물질을 우상으로 좇는 가운데
비참하기 짝이 없는 짐승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주인 하나 잘못 만나면 문자 그대로 인생 끝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을 만나고 그분을 모시고 따르게 된 후에는 완전 딴판이 되었습니다.
일단 이 분을 자기 인생의 대장으로 따르기만 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악한 세력 앞에서도 용감히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이 예수님을 내 구세주로 따르게 되기만 하면 지금 당장은 무슨 모진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일단 목숨만은 확실히 건져놓은 든든한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주님을 모시게 된 저와 여러분이야말로 행운아 중의 행운아이며
복 중의 복을 타고난 백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야곱의 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금세와 내세에서 왕으로 모시고 살 수 있는 것
- 오직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최상의 축복을 결코 놓치거나 빼앗기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끝절에 "25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갔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야곱의 이름으로 받은 복을 끝내 조금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방 선지자 발람은 아무리 돈 받고 하고 싶어도 이미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로 작정해놓으신
이스라엘을 입으로 저주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두 손 번쩍 들고 떠날 수밖에 없었고, 축복의 조상 야곱의 이름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약속되고 선포된 '출애굽이라는 장막'과 '메시야라는 별'의 축복은
아무도 막을 길 없이 고스란히 성취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 역시 저와 여러분에게 이 두 가지 복을 남겨주고 가신 '축복의 선조'들이 아니었겠습니까?
돌과 나무 앞에 손 비비고 무당 앞에 복채를 갖다 주고 죽은 조상의 묏자리 잘 고르면
복 받을 수 있다고 하던 '사술'들만 가득했던 이 나라였습니다.
'발락'과 '발람'이 판을 치던 곳이 바로 옛날의 우리 조국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나라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참된 복을 우리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목숨을 건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분들의 순교의 피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참된 진리의 신앙'과
그 '신앙의 자유'라는 이 진짜 복을 오늘까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난 2006년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볼 때에는 그렇게 복스러운 한 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외적 불안 요소들이 결코 건드릴 수 없었던 것,
이 불신 사회가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지난 한 해 동안에도 이 '교회'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고 누렸던 복들입니다.
'야곱의 장막' 안에 사는 이 든든한 영적 안보와 '야곱의 별'을
내 인생의 유일한 주인으로 섬기며 따라가는 이 믿음직한 영적 리더쉽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고 물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입니다.
◑야곱에게서 나오는 별의 의미
▲1. 첫째로 별은 왕권을 의미합니다. 별과 홀은 같은 본문에서 동어반복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 19절을 보면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별은 왕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도 별은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를 의미합니다.
통치권자가 등극했다는 의미로 별이 떴다, 혹은 통치권자가 죽거나 물러났다는 의미로
‘별이 졌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에게서 나온 별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권자이며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정치적인 대통령은 OOO씨이지만 우리의 영적인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신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며
복 줄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벌 줄 사람에게 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시편 2편 11-12절이 그 대답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왕에게 입 맞추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지혜와 처세술에 관한 책이 수백만 권 있을지라도 왕에게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처세술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둘째로 별은 광명을 의미합니다. 빛이 없는 별은 별이 아닙니다.
단12:3절에도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요1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은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학문과 철학과 정치와 예술과 교육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한 때 사람들은 이러한 학문, 철학 등이 세상에 빛을 비춰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대기의 계몽사상(enlighten movement)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철학과 학문,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내세를 알 수도 없고, 인류 역사의 진행방향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을 홀로 비추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류 역사에 대한 참 지식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광명한 천국에 갈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거절하는 사람은 영원히 벌 받는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대학의 교수라도, 박사 학위를 수십 개 가진 사람이라도 빛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어두운 소리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영혼이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빛 되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셋째로 별은 인도자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밤중에 나가서 어두컴컴한 하늘을 봐도
북쪽과 남쪽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북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도 별의 인도를 받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도자가 되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쁘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살다보면 그 곳에서 자유와 생명과 평안과 영생과 부활을 발견하게 됩니다.
▲4. 넷째로 별은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흔히 점성술가들은 별의 움직임이 인간의 운명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별점을 쳤습니다. 그릇된 점성술은 성경의 말씀과 위배되지만,
별이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기 때문에
별의 움직임에 따라 인간의 때에 변화와 영향이 온다는 것을 성경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2)
예수 그리스도는 별과 같이 인간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사회에 들어오시면 모든 것이 좋아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류 문명의 기초이며, 인류 문화의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면 어떤 사회라도, 어떤 가정이라도 반드시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잘 살게 된 것도 예수님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지도자가 있거나 민족성이 좋아서 이처럼 잘 살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교회를 세우며
아침마다 새벽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선한 영향력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심령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면 모든 것이 선해집니다.
술주정뱅이가 술을 끊게 되고, 바람피우던 사람이 정결한 삶을 살게 되며,
엉망으로 살던 사람의 삶에 질서가 잡히고 악하게 살던 사람이 선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면 반드시 선한 영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에게서 나오신 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 분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축복과 영생이 보장되어 있으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멸망과 영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뮤지컬의 제목처럼 예수님을 슈퍼스타로 모시고 예수님을 평생토록 따라다니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올해도 주일마다 내게 십자가 구원확신을 굳게 붙잡게 해주었던 이 '아름답고 물댄 동산' 같은 교회,
날마다 내 원수를 물리치게 하셨고 끝내 사망 권세까지 이기게 하실 '금세와 내세의 영원한 주권자' 예수 그리스도!
2006년 내내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했던 이 불변의 축복을 진정 감사하면서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이 복을 계속 누리는 '야곱의 자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주1) 발람의 세 번 예언의 내용 파악하기 민23:1~24:9
▲1. 발람의 첫번째 예언 (1-12절)
모압왕 발락은 발람을 데리고 바알 산당에 올랐습니다 (22:41).
발람은 발락에게 일곱 단을 쌓고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하나를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발람은 발락을 그 번제물 곁에 서 있게 하고 자신은 사태난 산에 올랐습니다.
사태(沙汰)난 산은 메마른 고지를 말합니다 (1-3절).
당시 동방의 이방 민족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神)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도 신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완전한 소원 성취를 원하여 원전수인 7 수대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점술사들이 신접(神接)을 하여 점괘(占卦)나 계시(啓示)를 얻기 위해
전망이 넓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높은 산 꼭대기 암벽이나 벌거숭이된 장소를 찾았습니다.
발람도 자기 고향 바벨론의 아람(메소포타미아) 풍습대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동의와 도움을 얻고자 했습니다.
△발람이 산에 꼭대기에 올랐을 때에 하나님이 임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께 자신이 드린 제물을 자랑스레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어야 하는 근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과는 상관없이 발람에게 이를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4-6절).
발람은 발락에게 돌아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예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하면서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고 예언했습니다 (7-10절).
△발람이 예언한 요지는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①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구별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는 말은 고립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존재를 말합니다.
②이스라엘은 사분의 일도 셀 수 없을 정도로 큰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야곱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티끌같이 번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12:2).
③발람 자신도 의인처럼 죽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도구로 바로 쓰임 받다가 죽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자신도 이스라엘이 누릴 복에 참여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대로 될 것이라고 축복했습니다.
이것이 이방 주술의 무용성(無用性)을 보여 준 것입니다.
아무리 술사가 저주를 하려 해도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축복하게 하면 축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2. 발람의 두번째 예언 (13-26절)
발락이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하게 하기 위해 바알 산당으로 데려갔었습니다.
발람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제사와 제물을 드리고 사태난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임함 속에서 말씀을 받고 이스라엘을 축복했었습니다 (1-12절).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한 것이
이스라엘 진영이 너무 장대해서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발람을 이스라엘 진영의 끝 일부만 보이는 비스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단을 쌓고 제사와 제물을 드리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했습니다 (13-14절).
발람은 발락과 귀족들을 제단 곁에 있게 하고
다른 장소에서 전과 같은 방법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꾀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임하여 입에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또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이었습니다.
①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식언하거나 후회하는 분이 아니고 한번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에 의해 예언한 축복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한 축복을 사람이 변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9-20절).
②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허물이 있고 패역한 행동을 많이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아주 미워하거나 떠나는 것인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택한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21절).
③이스라엘은 해할 족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애굽에서 인도해낸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강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힘이 들소와 같고 일어섬이 암사자 같고 움킨 것을 먹는 것이 수사자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술이나 복술로도 그들을 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2-24).
발락은, 발람이 또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을 보고
아예 저주도 하지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저주하라고만 하면 축복을 하기 때문입니다.
발람의 예언은 하나님이 바람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 대해 가지신 의지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약1:17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한번 택한 백성을 버리시거나 한번 축복하기로 약속한 것을 변개하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 범죄하여 패역한 길로 행할 때에 잠시 징계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버리거나 복된 길에서 제외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자 자녀의 잘못을 보고 초달하지만 아주 버릴 수 없는 성품과 같습니다. 히12:10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거나 해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겔25:2에 ‘인자야 암몬 족속을 향하여 그들을 쳐서 예언하라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를 더럽힐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무할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암몬 족속이 징벌 받는 예언의 내용이, 겔25장에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토록 함께 하시니 누구도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그런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3. 발람의 세번째 예언 (27-30, 24:1-9)
발람의 첫번째 예언은 바알 산당에서 이스라엘의 성별됨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을 축복한 내용이었습니다 (1-12절).
두번째 예언은 비스가 산에서 하나님의 진실하신 성품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이었습니다 (13-26절).
세번째 예언에 속하는 본문은 브올 산에서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광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됩니다.
이 세번째 예언은 민24장 1-9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네번째 예언은 역시 비올 산에서 메시야의 도래를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됩니다 (24:15-23).
▲4. 발람의 세번째 예언 (24: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