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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3:36 후기 기독교 사회의 선교전략 8강

LNCK 2022. 10. 17. 08:38

후기기독교시대의 선교전략(8)-하나님은 어떻게 신세대가 신앙을 유지하고 보전하게 하셨는가 - YouTube


◈후기 기독교 사회의 선교전략 8강   삿6:13~14, 행13:36  2022.09.21.    

'후기 기독교 사회'라는 문제가 야기 된 것은 
선대의 신앙을 후대가 물려받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선대가 신앙을 물려주는데 실패를 한 것이냐,
후대가 물려 받는데 실패를 한 것이냐? 
굳이 잘못의 출처를 따진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둘 다 잘못을 한 것이죠. 

그러나 성경적인 전례를 보면 
그 유산을 물려주고 싶어도 
자녀가, 사람에 따라서, 물려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 받기를 사모했습니다.
에서는 그것을 업신여겼습니다.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같은 날 태어난 아들인데 
같은 집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란 자식들 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면, 

후대가 선대의 믿음을 이어 받지 못하는 것을 
반드시 어머니의 잘못, 아버지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고, 

원래부터도 성경에 이같은 패턴이 (야곱의 집안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세대를 신앙으로 인도 해야 될 필요를 말하지만 
누가 (물려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느낍니까? 
부모 세대가 죄의식을 느끼고, 또 주의 종들이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해서.. 기도를 하지 않아서.. 
우리 자녀가 신앙을 제대로 물려 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 부모세대가, 우리 자신만을 탓할 수 없는 이유는 
여러분이 처음 신앙을 가질 때, 부모님이 잘 해서 신앙을 가졌습니까? 

우리도 젊었을 때 스승이 있었지요. 스승이 필요해요. 
그러나 딱히 내가 다니는 교회가 뛰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무슨 부모님이 남다른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여러가지 다양한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한두 가지 원인만 놓고 따질 수 없습니다.

부모 세대의 신앙이 후대로 제대로 전수되려면,
반드시 부모의 역할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무슨 교회가 큰 교회, 뭐 유능한 설교자이고, 
프로그램이 좋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대 간의 신앙적인 단절은 항상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탕자의 비유가 나오는 것이죠.

탕자의 비유에 나타나는 것이, 세대간의 단절이죠. 
세대 간의 영적인 단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절과 회복이 있기 때문에 
주님도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처럼 
젊은 세대의 신앙이, 구세대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대대로 어떤 방법으로 자녀세대가 
신앙을 보전하고 유지하게 하셨는가요?> 
이것을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신앙이 전수되려면>


◑1. 첫 번째는 <부모 세대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머니의 기도 뿐만이 아니고, 아버지의 기도, 
할머니의 기도, 할아버지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잉태한 후, 출생한 후부터의 기도가 아니고 
잉태하기 이전부터 기도했었어야 됩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후에 기도 한 게 아니고 
임신한 후부터 기도 한 게 아니고 
잉태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 소원하고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잉태한 후에 기도한 게 아니고 
잉태하기 이전에 주님이 사가랴에게 약속을 하시고 
또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을 보면 

한 사람의 믿음의 인물을 만드는 것은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의 집중적인 믿음과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2. 둘째로는 <신앙 교육>이 필요합니다. 
신앙교육을 위해서 교회마다 주일학교 프로그램, 선데이 스쿨 등
뭐 여러 가지 애를 씁니다만,

프로그램을 갖추고, 인력을 갖춘다고 해서 
제대로 된 신앙교육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의 교육을 맡기는 사람들이 (주일학교 교사진)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유능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 식으로 자녀의 신앙을 도와 주는 것이, 별로 효과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지금 모든 교회가 하고 있는 방식,  
즉 연령별로, 학년별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따로 격리해서 가르치는 것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엄마 아빠가 목사님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왜 자녀도 (장년예배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녀들을 따로 격리시켜서, 자기 또래와의 예배에 몰아넣고 
그리고 교회가 고용한 젊은 교역자에 교육을 맡겨버리는가요?

그 전도사님 목사님들이 어떤 설교를 하는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과연 또래끼리 그렇게 묶어 놓는 것이, 어떤 유익이 있는지를 알 수 없으면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과거에도 그렇게 했고,  다른 교회도 그렇게 하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리라고 전제하는데 
그 방법이 먹히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 방법이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자녀는 부모가 데리고 예배에 같이 참석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같이 듣게 하고, 같이 기도하게 하는 게 
어쩌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주일 학교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구절이 있습니까? 
구약 성경에 없고, 신약 성경에도 없고 
초대교회가 자녀들을 연령별로 나누어서, 따로 예배를 드리게 했다는 
성경구절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시대에는, 온 가족이 같이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하지요. 
식사를 할 때, 연령별로 나눠서 밥을 먹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형제, 삼촌 이모들과 같이 한 자리에서 밥을 먹죠.
다같이 대화하며 밥을 먹지요.

이것이 가정의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왜 교회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을 못 하는 겁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아웃소싱을 하려고 해요...
그러나 그게 결과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때로는 자녀를 부모가 데리고 와서, 부모 옆에 앉히고 
그리고 같이 예배를 드리고, 성령의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고 
그리고 내가 먹는 목사님의 꼴을, 자녀도 먹게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죠.
여러분이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게다가 이미 어른이 된 청년들을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격리해서 따로 예배를 드려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결혼적령기에 있는 배우자 감을 찾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청년들이 반드시 청년끼리 예배를 드려야, 신앙의 도움이 되리라고 
결론 지을 수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평소의 패러다임을 깨뜨려야 됩니다. 

그게 우리는 효과적인 걸로 알았는데,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어요. 
왜냐면 그게 그렇게 효과적이라면 
왜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더 이상 교회를 안 다니는 것입니까? 
왜 부모의 슬하를 떠나면 더 이상 교회를 다니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패러다임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요. 

신앙 교육이 필요합니다. 
'신앙교육' 이라 함은, 핵심적인 부분에 있어서 
성경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이런 식의 여러 성경지식을 가르쳐 주고, 
무슨 율동을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핵심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알도록 도와주는... 
그걸 빼면 그건 신앙교육이 아니에요. 

아이들이 교회에 재미를 느껴서, 교회를 즐겁게 다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그렇지만 10년 20년 재밌게 교회를 다녀 보세요. 
주님을 한 번 만나는 것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상 3:8~9절에 
엘리 제사장이 어린 사무엘에게 한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이 아이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음성을 자기가 들려준 게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이 하신 것이죠. 

다만 사무엘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뿐입니다. 
다만 사무엘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이 이 아이에게 말씀하시는 줄을 깨닫고 
다음 번에 음성이 들리면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서, 사무엘이 선지자로 이제 데뷔를 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그의 삶 속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게 결정적인 신앙교육의 핵심입니다.
이걸 빼면, 뭐를 가르쳐도, 별 소용 없습니다.

▲교회 가서 무슨 뭐 게임을 하고, 운동을 하고, 놀러 다니고, 
맛있는 것을 주고... 뭐 10년 그렇게 해 보세요. 아무 소용 없어요.

학생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없으면, 
세상에 더 즐거운 일이 있으면, 
그렇게 교회 몇년씩 다닌 학생도.. 금방 세상으로 떠나가요.

우리가 뭔가를 잘못 하고 있을 수 있어요. 
애들에게 뭐 좋은 간식을 나눠주고.. 
엄마들이 와서 무슨 뭐 간식을 만들고.. 얼마나 헌신적으로 봉사합니까? 

그런데 우리가 별로 불필요한 일에 애를 쓰고 있는지도 몰라요. 
애들이 신앙을 갖도록 하는게 중요하지,

뭐 교회 가서 무슨 떡볶이를 먹고, 무슨 간식을 먹고... 
무슨 풀장에 가고.. 그걸 통해서 신앙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데 
우리는 그렇게 하면 걔들이 고마워하고, 교회를 계속 나올 줄 알고 있어요.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그 아버지는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잃어버린 줄 알고 슬퍼 했는데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고, 종으로 살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받고 해석하고 
믿음을 붙들어서 자기가 하나님을 의지해서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어서 

이후에 기근이 왔을 때 
그 가문을 구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야 
꼭 가정에 도움을 주는 자식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에요.

요셉이.. 형들이 그를 배신하고, 종으로 팔고 그렇게 매정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자기 가문을 구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작금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괴로움은 
그들이 이제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힘을 키우고, 스스로 믿음을 개발하고, 
스스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자신의 믿음을 갖는데 필수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잘 해주면.. 청소년들이 부모 세대를 따라오리라고 생각을 했어요. 
사랑을 많이 주고, 많이 보호해주면.. 부모 세대를 따라줄 줄로 생각을 했는데 
신앙교육의 핵심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행사 위주의 신앙교육을 배제해야 됩니다. 
행사 위주로... 부모님이 와서 사진 찍는 그런 행사는 더 이상 할 필요 없습니다. 

애들이 특송을 맡아서, 교회에 나와서 무슨 노래를 부르면 
할아버지까지 찾아와서 카메라로 찍고... 

물론 가정이 즐거운 시간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게 과연 그 애들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핵심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불필요한 행사를 제거하고, 핵심(신앙으로 승부)에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청소년 사역을 하던 어느 신부님이, 청소년하고 교류하기 위해서 
그들하고 그렇게 농구를 했대요. 뉴욕시에 농구코트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 도시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교류를 하기 위해 
신부님이 그 젊은이들과 같이 농구를 하고, 놀아주고.. 

그러다가 이 신부님이 어느 날 성령세례를 받은 거죠. 
그래서 이제는 그 청년들을 위해서 안수하고, 기도하고, 예언해주기 시작했는데 
한번 안수기도 해주는 것이, 열 번 같이 농구하는 것보다 낫더라는 거죠. 
더 그들에게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 세대의 신앙교육을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돈을 많이 쓰면 되는 줄로 알고, 고급으로 해주면 되는 줄로 알고.. 
우리가 사랑과 인간적 관심을 많이 주면, 걔네들이 회심할 줄로 생각하는데 

여러분, 신앙교육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신앙 교육의 방식을 생각해야 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6:63
'육은 무익하니라!' 

우리 모두가 육신적으로 더 편안한 것을 지향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데 
신앙교육도 더 편안한 첨단방식으로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생각할 수 없고 

오히려 신앙은 겸손과, 시련과, 아픔과, 연단과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사회 전반적인으로 더 편한 환경,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 
사람들이 좋아하리라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이 세대로 하여금 더 나약하고, 더 자기의 아픔에 민감하고 
또 자신의 불만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가정의 문제로 비화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자녀들이 너무 좋은 환경에서 연약하게 자라나다 보니
결혼을 해서도, 부부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젊은 커플들이 있어요.

신혼 부부간의 갈등이 일어날 때, 쉽게 포기(이혼)하는 거예요. 
'내가 이런 집에 시집을 왔나? 내 남편은 왜 이렇게 이상하나?

내가 실수했나 보다. 내가 친정으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돌아가보세요. 친정 부모님이 환영하지 않습니다. 기뻐하지 않아요. 
'어서 오너라. 너를 위해 방을 준비했다.' 라고 말하는 친정 부모는 없고
'돌아가라. 그래도 신랑에게 돌아가!' 이렇게 하죠.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통의 분량은 일정해요. 
고통스러운 현실은 과거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어요.

그 고통이 직장 일이든, 돈 벌고 사는 일이든, 자녀를 교육하는 일이든 
결혼생활이든, 시댁이든... 세상이든... 뭐 이 모든 고통은 일정한데 

사람이 나약해지면, 그럼 어떻게 그것을 감당하려고 합니까? 그렇잖아요. 
오히려 사람이 더 강건해져야지요. 더 담대해져야죠. 더 배짱이 있어야죠. 
더 지혜를 얻어야 하죠. 

그게 아니고 '오~ 나는 이런 것까지 참으면서 살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직장을 견디겠습니까, 결혼 생활을 견디겠습니까? 
심지어 교회생활도 적응하지 못해요. 교회생활도 적응하지 못합니다. 
'내가 왜 (고통을 참아야 하지)?' 합니다.  그러니 강하게 키워야 된다는 거죠!

▲예수님이 제자들을 받으실 때 처음부터 
'어서 오너라!' 뭐 이런 식으로 하신 게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매정하게 대하실 때가 있었죠. 

'너는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지 않으셨고
'너는 가서 네 재산을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이런 식으로 하셨는데 
그걸 (강한 훈련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걸 소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순종할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되는 것이 그냥 거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원래 '제자'라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된다고 했는데 
그 교습비를 내야 된다는 얘기죠.
강습비(대가)가 있어요. 
그걸 내지 않고서는 제자의 길을 갈 수가 없죠. 

엄청난 능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엄청나게 배짱이 있고, 용기가 있고, 결단을 내려야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들어설 수가 있는 거죠. 

그래야 물 위를 걸을 수도 있고,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고 
감옥에 있는데 천사가 건져줄 수도 있고 그런 것이지... 

그러지 않고 나약해서는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연약하게 키워서는) 그걸 어떻게 감당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두번째로는 (본질적인, 강인한) 신앙의 교육이 참으로 중요하고요. 


◑3. (신앙이 자녀 세대로 전수되려면) 세번째로
이제는 자녀 세대 스스로가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돼요.

그게 없이는, 이건 누가 심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신이 스스로 가져야 되는 부분이죠. 

야곱과의 에서를 비교하면, 야곱은 그게 있었고, 에서는 없었어요. 
그건 아버지 이삭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리브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그걸 가져야 돼요. 

히12:16절에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망령된 자도 있고, 야곱같이 축복을 사모하는 자도 있어요. 
그건 본인의 몫이에요. 본인이 그걸 가져야 해요.
그건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어요. 

기드온의 예를 보면, 삿6:16절에  기드온이 타작 틀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기드온을 사사로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때 기드온이 천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니까?' 

기드온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이 민족이 어떻게 이런 상태가 되었을까?' 

'하나님은 왜 이런 상태를 허락하셨을까,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요,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이었어요. 

기드온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사사로 부르실 수가 있었던 거예요. 
이건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대부분의 사람은, 그 시대 상황에 무관심했을 거예요. 
이방 나라가 쳐들어오고, 나라가 부끄러워지는 걸 모르는 게 아닌데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무관심했을 거예요. 

그런데 기드온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 

그러면서 그 질문,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삿6:13 
즉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라는 질문인데, 
그가 평소에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했어요.

이스라엘에 기드온과 같은 젊은이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사사로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었죠. 
이스라엘을 구원했어요. 

여호와께서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삿6:14
유럽이든 어디든.. 이런 마음을 가진 젊은이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다시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고 이런 일에 관심이 없고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염려도 안하고... 

현실 상황을, 하나님에 대해서 연계시키지도 않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원통해 하지도 않는다면... 도리가 없어요. 
에서와 같이 되고, 소돔 성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기드온 같은 인물들, 이런 인물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지 있지 않겠습니까? 할렐루야!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에 
영적인 쇠퇴의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기드온과 같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세우셨어요. 
그래서 그 세대, 그 나라를 구원하게 하셨어요. 
지금도 그렇게 하시리라고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주님이 그런 식으로 과거에 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실 줄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4. 네 번째는 젊은 세대에게 <영적인 능력을 가르쳐 주어야> 됩니다. 

더 정확한 단어는 "전수해줘야" 됩니다. 
구세대가 신세대에게 말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있고 

 

말로 전수해 줄 수 없고, 
이건 정말 인간문화재에게 제자가 찾아가서 배우는 식으로 
직접 배우지 않으면 전수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엘리사가 엘리아의 영력을 이어받은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일하던 사람이 죽으면 
그 능력이 사라져버려요. 그가 받았던 은사도 사라져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고, 단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이신데 왜 그럴까요? 왜 단절시키실까요?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전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일하던 사람을 
하나님이 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떠난 후에,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똑같은 능력을 주시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워진 사람들이 보면, 그렇게 사랑할 만한 자가 아니면 
마치 우리집에, 우리 자녀가 입던 옷, 갖고 놀던 장난감을 누구에게 줄 때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야 주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귀한 자녀가 입던 옷, 장난감을 
우리 애와 가깝지도 않고, 나와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쓰시던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셨는데 
이제 그 사람이 떠났는데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와서, (그와 똑같은) 유산을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실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여러번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이론적인 것, 신학적인 것은 책으로도 학교에서 배울 수 있지만 
영적인 능력은 마치 인간문화재와 같아서 
판소리든.. 무슨 궁중음식이든.. 무슨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든.. 
이런걸 할 줄 아는 장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 실력이 사라져 버리잖아요. 

더 이상 누가 기억을 하지 않아요. 
그 사람만이 갖고 있었던 능력이기 때문에 
이건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인간문화재가 살아있는 동안에 
제자가 가서 물도 떠오고, 수발도 하면서 배워야 됩니다.
가까이서 간절히 그걸 보고 배워야 됩니다.

그래야 그 실력을 전수받을 수가 있지 
만약에 젊은 세대가 관심이 없으면, 인간문화재가 세상을 떠나면 
그 실력도 사라져버립니다.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법을 모르고, 
궁중음식이든, 판소리든.. 더 이상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도 이와 같아요. 
과거 대한민국에 주님이 뜨겁게 사용하셨던 종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는데 
누가 그것을 이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쉽게 이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분들이 세상을 떠나니까,
은사도 떠나가고, 능력도 떠나보고, 사역도 사라지는 거예요. 

살아 있을 때 누가 스승을 사랑하고.. 간절히 그것을 배우려고 애를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게 다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요즘 시대에는 하도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스승에게 배울 마음은 있지만, 그렇게까지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은 것처럼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뭘 배울까? 내가 뭐 그렇게까지...' 
그러나 나의 스승에게, 

'내가 저런 능력을 나도 배워서 나도 저런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좇아다니면서 
그것을 배우려고 해야 돼요. 

이것은 잊혀진 예술과도 같아요. 지금은 그런 것을 할 줄 몰라요. 
요즘 사람들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은 있지만 
'내가 저걸 배워야되겠다. 배우고 싶다' 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제자훈련은, 같이 앉아서 교재를 공부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전수된다' 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impart 

'전수'라는 말은, 무엇과 비교할 수 있냐면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것과 같아요. 
바이러스는 주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너에게 바이러스를 주는 게 아니고 
바이러스는 옮는 것이죠. 옮아져서 전파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도 옮는 것이에요. 마저 내가 누구와 같이 있고 
누구의 영향력이 있고, 같이 예배를 드리고, 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스승이 갖고 있는 영적인 것이 내게 옮아와요.
바람에 꽃가루가 널리 퍼지듯이.. 그렇게 묻어지는(자연스럽게 옮는) 거예요. 

영적인 것이 전수되는 방식이 그와 같죠.
내가 저 사람하고 같이 예배를 드리고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은연중에 그것이 내게 옮아오는 거죠.

물론 그냥 덤덤하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어요. 
반대로 누구는 같이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것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것이죠.
이상하게 그게 나에게 옮겨와요. 

은사도 옮겨와요. 처음에는 내가 흉내내는 줄로 알아요. 
'내가 저 사람 옆에 있다 보니까 흉내를 내나?' 

그런데 그게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이후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면, 내가 그걸 옮은거에요. 그게 나한테 온 거예요. 
그건 주님이 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건너가는 경우는 없어요.
요즘에는 인터넷이나 유튜브나 책을 통해서도 
내가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은사가, 내게 옮겨오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영적인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내가 그 사람이 좋고, 그 사람이 하는 사역이 마음에 들고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고.. 내가 멀리서라도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능력이 내게로 자연스럽게 전수될 수 있어요. 

그래서 훌륭한 스승은,

이 세상에 자기가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많이 있는 거죠.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 세상에 자기를 닮은 제자들이 사방에 있을 수가 있는 거죠. 

반드시 만나서 뭐 인사를 하고.. 그러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아니면 단 한두 번의 만남이 있었더라도 
여러분 이것은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부흥사였던 신현균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 
제(김영준 목사)가 오산리 기도원에 세미나에 갔다가 
그 신현균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실 때 
안수기도를 해달라고 제가 부탁했어요. 

보통 안수기도를 부탁하면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사절합니다. 
힘드니까요. 

그렇지만 그분은 "시간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안수를 해주셨죠. 
그러니까 그런 마음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귀중한 분, 만나기 어려운 분을 만났는데 
평소에 내가 존경하던 분을 만났는데 
'내가 그분께 기도라도 부탁을 해야지, 
그분이 갖고 있는 그런 능력이 내게 왔으면 좋겠다. 나도 저런 사역을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저분이 거절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기도를 부탁하고 안수를 부탁하고 
'저도 이런 사역을 하게 해달라..' 

그건 이제 저의 욕심에 의해서 된 것이지만 
욕심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런 전수가 이루어질 때도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일주일 동안 진행된 
미국교회의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그 동네에 가서 모텔에 거하면서 
일주일 동안 아침, 오후, 저녁 하루 3번 집회를 일주일 동안 참석을 했는데 
전세계 유명한 강사들이 와서 강의하는 Word Explosion 라는 집회였는데 

그때 처음 뵌 부흥사죠. R. W. Schambach 라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그런데 다른 목사님은 예배가 끝나면 즉시 무대 뒤로 사라지는데 
이 분은 사람들이 다 갔는데도 남아가지고 
사람들을 위해서 안수기도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분은 남아서, 오히려 성도들은 다 떠나는데도 
일일이 안수기도 해 주시고.. 예언기도를 해 주시고.. 하셨죠. 

그런데 사람들이 기도 받을 사람들이 줄 서 있는데 
거기에 십대 후반의 흑인 여학생의 두 명이 있었어요.

Schambach 목사님이 그들을 딱 보더니 상황을 안 거죠. 
'주여, 이들이 아직 나이가 몇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애를 가졌나이다. 
하나님 하실 수 있다면 어떻게든 도와주옵소서'

기도 부탁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기도해 달라고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샴박크 목사님이 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안수기도해 주셨어요.

그걸 제가 옆에서 지켜보는데 너무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고 
'저게 정말 목자의 마음이구나' 그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분의 그 영성이 느껴지는 거예요. 
'내가 저런 분한테 배워야 되겠구나' 

아마 그 자리에 앉아서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 
뭔가 저한테 옮겨왔을 거예요. 옮겨오지요! 

여러분, 배우는 것은 그냥 요즘은 이론적으로.. 줄 긋고.. 
무슨 이런 식으로 배우려고 하는데, 영적인 것은 그렇게 배우는 게 아니에요. 
영적인 것은 느끼는 것이에요.
느끼고.. 마음에 와 닿고.. 감동이 오고 
그러면서 성령이 내게 임하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5. 다섯 번째로 <복음사역의 유통기간은 한 세대> 입니다. 

그 세대가 믿고 가르치고 전할 필요가 있지만 
다음 세대가 되면 이제 그 다음 세대가 그것을 되풀이해야 돼요. 
그 세대가 이제 자기가 믿고 전하고 가르치고 해야 됩니다.

사도행전 13:36절에 '다윗은 당대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으니' 

당대, 당시.. In his generation 
다윗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당대에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죽는 거에요. 

그 말은, 다음 세대는 다음 세대로서 그 일을 (다윗처럼) 되풀이해야 하는 거죠.
이 일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끊임없이 모든 세대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후기 기독교 사회가 된다는 건 
다음 세대가 그 일을 안 했기 때문이에요.
그 부모를 탓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부모 세대가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죠. 
부모 세대가 아무리 당대에 열심히 주님을 섬겨서도.. 잠들면 끝이죠. 
다음 세대는, 자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 될 필요가 있죠. 

그런 의미에서, 복음사역의 유통기간은 한 세대 뿐입니다. 
영향력을 생각하면 1.5 세대 정도 되겠죠. 
한 절반 정도 영향을 주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대신 그것을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건 다음 세대가 자기들이 해야 돼요. 

우리의 실책은, 다음 세대가 해야 되는 것을 
우리가 해주려고 했던 것이었을 수도 있어요. 

다음 세대가 스스로 배워야 되는 것을 
우리가 대신 밥을 대신 먹어줄 수 있습니까? 
대신 숙제를 해 줄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겪고, 감당 하고, 깨닫고 
그리고 능력을 키워나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하여 잃어버린 줄로 알았던 자식이 
오히려 더 강건하여져서, 가문을 구원할 수도 있습니다. 할렐루야! 

 

후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 전략 1강 

후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전략 2강  P1

후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전략 2강 P2

후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전략 5강

 

후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전략 9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