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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33~38 믿음의 야성을 회복하라

LNCK 2022. 10. 19. 15:26

[두란노] 영권 회복_3. 믿음의 야성을 회복하라 - YouTube

 

◈믿음의 야성을 회복하라         히11:33~38        2014.01.16.


이번 집회에 들은 메시지들을, 이제 여러분들이 실제 삶에서 적용하셔야 돼요. 
그냥 머리로 알고 끝나면 안 돼요. 

기도도, 한번 내 인생에 기도로 한번 승부를 걸어보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리고 자꾸 일상 속에서 기도하는 것도 훈련하고 
그리고 한 번 기도에 푹 깊이 잠기는 그런 기도도 경험하고.. 

어떤 때는 문제가 있을 때, 그냥 일상을 다 접고 그냥 보따리 딱 하나 싸가지고 
기도하러 가서 '나는 죽으면 죽으리라' 한번 생사를 거는 그런 기도도 해보고 

이러면서 이제 우리 믿음에 근력이 생기고, 영적인 삶에 잔뼈가 굵어지면서 
어느 날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커 있는 거에요.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성장해 있어요. 

그래서 살다가 문제를 만나면, 이제는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 거죠. 
예전에는 문제에 막 휘둘렸는데 
그러니까 평소에 이렇게 기도훈련, 경건한 생활 등을 통해서 
내가 영적으로 이렇게 성장해 있으면.. 위기가 닥쳐도 놀라지 않는 거죠. 

어릴 때 수영을 못할 때는, 큰 파도가 치면 도망가기 바빴지만, 
수영에 능숙해진 사람은, 큰 파도가 다가오더라도 겁내지 않잖아요. 

여러분이 뭐 '영권 회복 5일 집회'에 나오면 이제 영권이 회복된다..가 아니고 
이제 무서울 정도의 기도에 침잠하는 그런 자기 훈련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을 훈련시키는 여러 프로그램을 가지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양육'이라는 단어를 별로 저는 안 좋아해요. 
대신에 '훈련'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양육'하면 뭔가 유약해 보여요. 키우기는 키우는데 유약하게 키우는 듯 보여요.
신앙훈련은 그런게 아니에요. 기본적인 것 몇 가지 가르쳐주고
그냥 광야에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체득해 나가는 거에요. 진리의 길은, 자기가 직접 가는 거예요. 
누가 어떻게 일일이 다 가르쳐줘요? 
교회에서는 방향만 잡아주는 거에요. 
그리고 그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치열한 싸움은.. 각자의 몫이에요. 

그래서 각자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교회에서 한 번씩 격려해주는 거죠. 
이런 집회를 통해서든지..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든지..

방향은 다 잡아주고.. 해야 될 몫은 자기에게 있어요.
그게 없으면요, 좋은 설교만 들으면 좋은 신자가 됩니까? No

우리는 착각해요. 좋은 교회에 다니면 좋은 신자인 줄 알아요.
그거하고 내 신앙하고 전혀 상관없어요. 

▲여러분, 맹수들에게는 야성이 있어요. 
사자, 호랑이는 그 안에 본성적인 야성이 내재되어 있어요. 

아무리 동물원에 가둬서 새끼 때부터 막 우유 먹이고, 막 매니큐 칠해주고 해도 
근본적인 야성이 있어요.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그 야성이 드러난다고요.
너무 예쁘게 키워도 그 안에 야성을 없애지는 못해요. 그래서 사고가 나는 거죠.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적수가 생기면 맹수의 기품, 기질
이런게 드러나는 거죠. 

여러분 우리에게 '신자의 야성' 이라는 게 있습니다. 
히11장 본문을 보면 이 내용이 그거에요. '성도의 야성'이에요. 

가슴이 뛸 정도로, 믿음을 가진 자들의 삶이.. 이렇게 말을 하잖아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히11:38

뭐 무서워하는 게 없어요. 칼날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믿음으로 나라를 이겼다'고 해요. 히11:33
'사자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라고도 하고요.  :33
 
'불의 세력을 멸했다'는 거죠. 
'여자들은 자기의 죽는 것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히11:35
죽는 것을 안 무서워 했다는 거예요. 

뭐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는' 야성의 삶을 살았어요. :35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신앙생활 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 단어 하나 하나를 보면 무서운 단어들이요. 
조롱과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이게 다 그리스도인들을 흔들어 놓을 수 없는 강력한 야성! 
이게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본래의 모습입니다.

평소에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게 드러난다는 거에요. 
진짜 신자는 이게 있는 거예요. 부활의 신앙이 있는 거죠.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망하면 망하는 거고.. 진리는 진리대로 내가 살아가는 거죠.

참 신자인지/ 아닌지를 알려고 하면, 어려운 순간에 직면해 보면 금방 알아요. 
그러니까 이게 사자인지, 호랑이인지 자꾸 건드려보면 (야성이) 나와요. 
그런데 아무리 건드려도 막 안기고 그러면 고양이죠. 

진짜 뭐가 도전이 오면, 여전히 믿음이 살아남으면 진짜 신자란 말이에요. 
그 안에 믿음의 야성이 있는 거에요. 

오늘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봐야 됩니다. 
'믿음의 야성이 있느냐?' 
믿음이 야성을 가져야 합니다. 

야생이 뭡니까? 어려움이 오면 더 강력해지는 게 야성이에요. 
어려움이 오면.. 적수가 나타나면.. 진짜 본색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야성이에요. 

온실속보다는 광야에서 더 어울리는 게 야성입니다. 
그러니까 온실이 좋지가 않아요. 사람들이 막 먹을 거 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은 호랑이를 죽이는 거예요. 

호랑이를 호랑이답게 만들지 못하는 건 
사실 인간들이 구경하려고 동물원 우릿간에 집어넣어 보호하는 건데, 
호랑이는 그걸 원치 않아요. 
호랑이는 거친 들판을 막 달려가서 잡아먹고.. 막 숨을 헐떡이고.. 이게 호랑이죠.

그러니까 어려운 환경에서 더 진가를 발휘하는 것 그게 야성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절대로 이런 맹수들은 죽을 때, 죽더라도 기가 안 죽어요. 
장렬하게 죽을지언정, 그 기품은 잃어버리지 않는 거예요. 
그게 맹수들이 가지고 있는 야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히11장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다 그거에요. 
세상에 대해서 절대 기가 안 죽어요. 절대로 야코가 안 죽어요. 

그러니까 잡초 같은 거하고 비슷해요. 밟으면 더 신이 나요. 
밟아도 막 일어나는 거예요. 들풀처럼! 

그런데 요즘 한국의 꽃들은, 온실에서 많이 키웠나 봐요. 
방에 놔두도 금방 시들어버려요. 

호주의 꽃들은 오래가요. 야생화 같은 게 좀 많거든요. 
들판에서 꺾어다 집에 꽃아놓으면 굉장히 오래가요. 잘 안 시들어요.
그런데 한국 꽃들은 한 2~3일만 가면 다 시들어 버려요.

▲사실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의 믿음의 선배들에게는 야성이 있었습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믿음의 야성이 입증되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등 믿음의 여러 걸출한 인물들은 
죽는 것을 안 두려워했어요. '죽음은 죽으리라' 하고 안이숙 여사처럼 나가갔죠.
그러니까 죽음과 당당하게 맞짱을 떴어요. 

그런데 오늘 현대그리스도인들은 야성미가 사라졌죠. 
이전보다는 많이 세련됐어요. 굉장히 세련됐어요. 

이전에는 여러분 어땠습니까? 찬 마루바닥에서 겨울에 그냥 엎드려 기도했어요.
그냥 밤을 새우고 그냥 철야를 했어요. 

어려움이 있으면 그냥 교회에 가서 담요 뒤집어쓰고 그냥 철야한 거예요. 
꼬박 철야한 것입니다. 그게 야성이죠!

그래도 답답하면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 붙들고 기도했어요.
당시에 '소나무 뿌리는 뽑아야 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죠. 
그러니까 산에 올라가서 '만만한 소나무가 뭔가?' 하고 둘러볼 때도 있었죠. 
그게 야성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더운 데 에어컨만 안 틀어도, 우리의 예배 못 드립니다. 

▲교회에 수없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있죠. 우리는 아는 게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이전보다 성경은 훨씬 더 공부 많이 한 편이고, 좋은 신앙서적도 많이 읽습니다. 
집에 가면 수료증이 몇 개쯤은 다 있습니다. 교회가 학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공부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9월 학기에 많이 등록하세요. 

그런데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우리 믿음의 야생을 키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수련회를 해가지고 은혜 받는 것... 그것도 하되

좀 몰아세우는 거친 광야에 이제 내 보내는... (태국 치앙마이에 가서 전도하는)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에 그냥 헌신을 하는.. 희생을 하는.. 땀을 흘리는.. 
위험하고 좀 모험스러운 그런 것들을 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야성이 사라져 버리니까 
이전보다 훨씬 더 아는 건 많은데, 가분수가 되어버리잖아요. 
그러니까 별일 아닌 것에 시험이 들어요. 
교회에서 직분자 선출할 때는 홍역을 치르는 거에요. 
이것은 히11장에는 없는 얘기에요. 

여러분 직분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서열도 중요한 게 아니고, 실력이 중요해요. 
영적 실력, 영권이 없는데 타이틀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요즘 목사 타이틀 가지고 아무도 안 알아줘요. 

직분에 목매지 마세요. 그런 시대는 지나갔어요. 
세월이 지나갔고, 세상이 바뀌었다니까요. 
직분 때문에 뭐 존경해주던 시대는 지나갔어요. 이제 다른 세상이 왔다니까요. 

▲종이가 약하지만, 콘크리트 벽에 붙어버리면 이거는 콘크리트처럼 강해지듯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과 하나될 때 괴력, 즉 야성이 나타납니다. 

히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믿음의 영웅들을 보면, 그들이 생명을 걸어요. 

그래서 11:38절 말씀처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한 사람이 나라를 이겨요. :33

어떤 시련과 핍박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대로 정면 돌파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는가요? 히11장에 그 비결은 딱 하나요. '믿음으로!' 

그러니까 이런 믿음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우리에게 말씀하는 거죠. 
그게 믿음의 야성이에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이건 온실속이 아니라, 거친 들판에서 살아 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실천해내는 용기... 
믿음은 야성을 드러내는... 현실 상황에 무릎을 꿇지 않고 
믿음으로 삶에 어려운 현실에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 


◑ 믿음의 야성을 우리가 회복하기 위해서는 

▲1. 첫번째는 두려움에 맞서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이전에 살아가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이전에 살아가던 삶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삶, 새로운 길로 걸어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익숙했던 내 삶의 방식을 벗어던져야.. 그게 믿음이에요. 
이전과 똑같이 살면, 그건 믿음의 길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거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동경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길을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두렵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변화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뭡니까? 
현재의 삶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죠.

항상 무엇인가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하면 
항상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과 싸워야돼요. 

△여러분 실제로 믿음의 삶은 모험입니다. 
모험을 거부하면 안주가 찾아오죠. 
이전에 살았던 삶을 거부하고,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게 모험인데 
문제는 두려움이에요. 믿음과 두려움은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공존이 안 됩니다. 

믿음의 길에 최대의 적은 두려움입니다. 
믿음의 야생은 두려움에 맞서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도 두려움이 오죠.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있지만, 
두려움을 넘어서는 그것이 야성이거든요. 

믿음으로 살고 싶은데,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별 수 없습니다. 
야성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용기죠. 
두려움의 고비를 넘겨야 하는 거죠. 두려움의 장벽을 넘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이 와요. 
이 세상에 방식과 맞서 다른 방식으로 키우려고 하면.. 두려움이 오죠.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세상 방식을 따라야 되는 거죠. 

△여러분 사탄이 주로 하는 일이 뭡니까? 
진짜 사탄이 밥 먹고 날마다 하는 게 뭐냐면 (밥을 안 먹겠지만) 
두려움을 주는 일이에요. 사탄의 1번 무기입니다.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할 것은, 사탄은 겁만 준다는 거에요. 
여러분 두려움은 그냥 두려움 이에요. 두려움은 하나의 감정 상태이지 
그게 실체가 아니라고요. 이거를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세요!

두려움은, 일어나지 않을 일을 앞당겨 마치 일어난 것처럼 여기는 
자신의 감정의 상태일 뿐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명수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일어날 것처럼 확신을 심어주고자 하는 거죠.
부풀리며 과장을 합니다. 그래서 시도조차 못하도록 총공격을 하는거죠. 

거짓에 속아 두려움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속지 마십시오. 
사탄은 두려움을 주는 영입니다. 

롬8: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러분 이 세상은 전부 다 '두려움의 영'이 지배합니다. 
세상의 종교도 두려움을 줍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 안에 두려움이 장악합니다. 
두려움은,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에 빠지면요 모든 게 올 스톱 입니다. 
야성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드러눕게 되는 겁니다. 
두려움은 모든 가능성을 다 빼앗아 갑니다. 

우리가 지난날 얼마나 많은 그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혀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신자들이라도 두려움에 걸려들면 무기력하게 되고요. 
이게 심하면 정신병에 걸리는 겁니다. 

정신병에 굉장히 핵심적 요인은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의 덫에 빠지면 믿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적용하려고 하면 두려움이 오는데 어떡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야성이 없어져버리면,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사자와 똑같습니다. 
소리만 지르지, 고기만 축내지.. 맹수가 아닙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싸워야 돼요. 신자로서의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 
신자로서의 기품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세상에 승리하기 위해서 
첫번째 통과 관문이 두려움 극복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해부해서 들여다보면, 앞서도 얘기했지만 실체가 없는 거예요. 
사실은 속는겁니다. 마귀가 주는 거에요. 

△여러분 두려움을 이겨내려면, 일어나지 않는 모호한 상황에 주목할 게 아니라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 그분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거예요. 
현실 상황에서 시선을 떼고, 하나님에게로 시선을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히12:1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의 눈을 주님에게 고정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는게 뭐에요? 왜 눈을 감아요? 집중하기 위해서! 
이런 것도 있지만.. 세상의 상황을 주목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께만 집중하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 시간에 뭘 봅니까? 상황을 봅니까? 
아니죠.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기도의 출발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겁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의 기도시간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그의 위대하심을 올려드리는 그 일에, 우리의 기도가 푹 빠지면 
나중에 내가 하고 싶었던 기도 제목을 다 잃어버릴 거에요. 

△우리의 영적 전쟁, 이 싸움은 
내가 치르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치르시는 것이기 때문에... 무기가 필요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에도, 무슨 무기를 들고 나간게 아니었어요.

두려움을 이겨내는 비밀이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야성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내가 야성을 가져야지' 그래서 가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죠.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절대적으로 신뢰하느냐에 따라서 믿음의 야성이 옵니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얼마나 부지런히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사느냐는 거예요. 

왜 우리가 종종 실패하는가요? 
하나님보다 세상을 너무 열심히 바라보고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별로 바라보질 않아요. 너무 열심히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요. 
너무 열심히 세상 속에 빠져서 살고 있는 거죠.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고, 말씀 듣고,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로 나아가면요. 
눈에 뵈는 게 없어요. 겁나는 게 없어요. 

뭐가 겁나요? 하나님의 처분대로 따르면 되는 거고 
나는 말씀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이긴 사람을 사용 하십니다. 
아무리 약속의 땅을 다 준비해 놓아도 
아무리 기가 막힌 축복을 다 준비해 놓았어도 
두려움 때문에 강을 건너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믿음의 야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땅을 예비해 놓으셨어요.
여러분들이 밟고 밟아도 끝이 안 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축복의 지경과 
영역들이 있어요. 상상을 할 수가 없어요. 

'나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 하겠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선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때 비로소 믿음의 야성을 회복하는 거죠...


▲2. 두 번째, 우리가 그 두려움을 극복하난 다음에는 
믿음으로 <한계 지점을 돌파해야> 돼요. 

데드라인이 어디든 있습니다. 
수 없는 사람들이 실패하고 넘어지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 선은 절대 넘을 수 없다' 라고 말하는 한계선이 있어요.

여러분 믿음의 삶은, 그 데드라인을 지나가는 거예요. 
한계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 스스로 자신의 나이를 자기 인생의 한계로 그어놨어요. 
'내가 이 나이에 뭘 하랴?' 

모세가 120세까지 기력이 쇠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멈추라 해서 모세가 멈춘 것 뿐이지 
그는 가나안을 밟을 사람이었어요. 한계가 없었어요.

갈렙은 '내 나이 85세로되,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아무도 가기를 꺼려하는 그 산지를 정복하려고 나아갔어요.
은퇴도 아니에요. 은퇴는 사회적 은퇴이지, 영적인 의미에서 은퇴는 없는거에요. 

하나님이 쓰시면 쓰임을 받는 거지 
나이가 많아서 / 나이가 적어서 ... 그런 것은 우리 인간의 얘기에요. 

하나님이 쓰시면,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도 멋있게 쓰임받으면서 
마지막 호흡이 넘어가기 직전까지도 '예수 믿으세요!' 하는 거예요.

인생이 너무 아까워요. 
1년도 지나가는게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나가면 너무 너무 아까워요. 

여러분께는 무슨 한계가 있나요?
'난 돈이 없어!' 돈이 없는게 한계입니까?

돈이 없어서 사업을 못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 만들어낸 스토리죠. 

'난 재능이 없어서..' '경험이 일천해서...' 다 우리의 이야기 입니다.

'수없는 실패로 인하여 나는 내 삶의 자존감이 무너져 있어요'
그게 한계선입니까? 

여러분 이것을 모두 넘어서게 만드는 게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 한계에 도전하는 거죠. 

△믿음의 특징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삶 가운데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기를 갈망합니다. 
현실에 대한 거룩한 불만족을 품고 사는 거죠. 

보통의 사람들은 안정된 삶을 사는 게 목표인데,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거에요. 
안정된 환경이 오면,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라고 하는 신호로 받아들여요. 
이게 믿음의 특징이에요. 

신앙생활도 한 교회에서 오래 하다보면 안정감이 와요. 
그때 믿음은 빨간불이 켜진 거에요. 답보상태에 빠진 겁니다.

땀을 흘리는 것보다 누리는 게 더 많아지면, 항상 믿음의 삶에는 위기에요. 
언제나 초심의 마음으로, 늘 새로운 것에, 좀 더 어려운 것에 도전하지 않으면 
내가 머물러 있거나 도태되고 있는 거에요. 

사역을 내가 열심히 하다가 안정이 되면.. 그 기득권을 누리는 게 아니라 
그 안정된 사역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더 어려운 자리로 찾아가는 일꾼이 
많아지면 그 교회는 건강해지는 거예요. 

갈렙이 그랬던 거에요. 그냥 분할받은 땅에 주저앉은 게 아니에요.
'나는 새로운 땅으로 간다!'며 개척 나가는 거예요. 

믿음은 안정된 것을 거부합니다. 새로움을 시도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본토 아비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모델이죠. 

아브라함의 삶은 언제나 장막을 쳤습니다.
장막을 쳤다는 것은 말뚝을 박지 않았다는 것이고, 안주하지 않았다는 거죠.

우리가 끊임없이 한계를 돌파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현실의 벽에 갇히고 맙니다. 
도전하지 않으면 결국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현실에 눌러앉고자 합니다. 
누구나 편안하고 안정된 것을 좋아 합니다. 금방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한계에 도전하지 않는 삶은 일종의 정신적 장애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한계에 도전해야 합니다. 
모두가 '안된다'고 하는 곳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그게 정상입니다. 

언제 기적이 일어납니까? 한계 지점을 향해 거침없이 밀고 나갈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대 한계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앞에 까지 나갔습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한계 지점 앞에서 모세의 믿음의 결단은 홍해를 갈라놓았습니다. 

부딪혀야 돼요. 죽을 것 같은 데드라인에 
머리가 터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목숨을 걸고 다가가다 보면, 끝을 보려고 하면 
그 끝지점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거죠. 

△우리는 모두가 연약합니다. 그러나 연약하다 라고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나가면 
저돌성, 바로 야생이 생기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상황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무모한 짓이라고, 바보 같은 짓이라고 
그만두라고 야유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한계를 깨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현상유지의 삶을 위해서라면, 믿음이 과연 필요합니까? 
별일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게 목적이라면,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써야 하는 겁니까? 

조용히 편안하게 살다가 가는 것은 일종의 안락사입니다. 
한번뿐인 우리 인생, 믿음으로 한계에 도전하고 
용기 있는 선택과 결단으로 하나님이 주신 땅을 밟게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눈을 뜨면요, 두려움이 사라지고 도전 정신을 가지면요. 
이 세상이 익사이팅 해집니다. 흥미로워지고, 할 일이 너무도 많아요. 
새로운 세계가 열려요. 

내 나이와 상관없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상관없이 
정말 신바람 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주저앉기를 원치 않으세요. 믿음으로 도전하기를 원하세요. 

▲3. 마지막으로, 믿음의 이 야성을 <내 삶가운데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은 교회 안에서 토론하고 나눔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믿음은 우리끼리 좋다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믿음의 야성은, 거친 삶의 현장에서 빛이 나게 돼 있습니다. 
절대로 사자의 야성이, 동물원 우리에서는 나타날 수가 없어요. 
우릿간을 돌아봐야 몇 바퀴 안 돼요. 서로 물어뜯기만 할 뿐이죠.

 

여러분, 교회안에서는 우리의 믿음을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겁니다. 

뭐 집회 열심히 나오고 하는게 다 좋지만, 그걸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삶의 현장 속에서,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적용하며 살았는가? 
이렇게 교회 안에서의 점수가 아니라, 교회 바깥에서 점수를 가져와야 돼요. 

여러분, 믿음의 실체를 보려면,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계속적으로 사용해봐야 합니다. 
믿음은 실제로 사용해야 진가가 드러납니다. 

믿음은 머리의 작용이 아니라, 몸의 작용에서 빛이 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계속 살다보면, 그것이 점점 자신 안에 
믿음이 점점 드러나며 활동성이 되는 거예요. 운동성이 되는 거예요. 
적극성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의 삶을 계속 살아가고 적용하는 사람은요. 
나중에 성격도 변해요. 소극적인 사람이 굉장히 적극적인 사람이 돼요. 
저돌적이에요. 아주 조용했던 사람도, 굉장히 액티브한 사람이 돼요. 

제가 원래 굉장히 소극적인 사람이었어요. 
저는 사람들 앞에 서면, 어물쭈물 하고 
사람 앞에 서는 걸 굉장히 두려워했던 사람이에요. 막 가슴이 쿵쿵 뛰고 했었죠.

제가 수영로 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도 그랬어요. 
저녁 예배 시간에 강단에 올라가면 덜덜덜 떨렸어요. 불편한 진실이에요.

그래서 아내 보고 기도부탁을 했어요. '내가 설교할 때 기도를 많이 해달라고..
특별히 안 떨고 설교하게 해달라고' 진짜라니까요! 

그리고 저는 조용한 사람이에요. 얌전한 사람이에요. 
뭐 어디 나대고, 설치고 이런 게 아니라.. 아주 조용한.. 아주 소극적인... 
그런데 제가 변했어요. 

여러분, 믿음의 삶은 우리의 삶의 스타일을 바꾸고요. 
믿음은 우리의 삶에 흥분을 일으킵니다. 사건을 일으키게 해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길로 달려가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믿음으로 산 것만 우리에게 남을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행동으로 옮긴 것만, 내 인생이 되는 거예요. 

말씀이 아무리 풍성해도 소용없어요. 
'말씀대로 살아보았더니 그 말씀이 진짜더라' 라고 하는 수준이 되면 
그것이 능력이 되고, 나의 삶에 권세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음의 역사를 통해서 하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의 삶에 놀라운 권세들이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했을 때 
남들은 다 안 된다고 했는데 
되는 것을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로 '능력 능력!' 해도 소용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살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믿음으로 사는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늘의 능력과 권세가, 여러분 삶에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으로 살아보니 되더라! 하는 
믿음의 역사를 눈으로 목격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원 합니다. 

△여러분 복음의 능력, 복음의 능력..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 
복음의 능력을 언제 경험해 봅니까? 
실제로 나가서 복음을 전해 보았더니, 내가 기도 하고 복음을 전해보았더니 
그 복음앞에 꼬꾸라지는 영혼을 볼 때야 비로소
'이게 복음의 능력이구나!' 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거죠. 

아픈 환자가 있는데 그분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내게 강한 마음을 주시면 
그 사람을 두고 끊임없이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그 환자를 살려내는 경험을 해 보았을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기도 했는데, 죽어가던 환자들이 살아나는 걸 보고 
일어나는 걸 볼 때.. 여러분 이게 이제 믿음의 야성이 살아나는 거에요. 
 
하나님이 누구를 도우라고 하셔서 도왔더니 
그 다음 단계에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을 주시더라... 

문제를 가지고 기도 하고 금식하고 매달렸더니 기적이 일어났더라... 
오랫동안 맺혀 있던 사람을 용서하라고 해서 
힘들었지만 말씀대로 용서를 했더니 
하나님이 의외로 우리의 가정에 모든 수십 년 묵은 문제를 풀어 주시더라... 

이렇게 믿음을, 삶 가운데서 행동으로 드러내라는 거에요. 
믿음으로 살아보라, 해보라는 거에요.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시고 
닫힌 문이 열리게 하시고,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누가 안 된다고 했냐? 말씀대로 되더라!' 라고 선포할 수 있는 게 믿음의 야성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쪼그라들지 말고, 꼬리를 내리고 말고..
자꾸 우리의 믿음에 변명이 많아지지 말고..
말만 많아지고 행동이 줄어들지 말고.. 
이제는 믿음의 진가를 드러내는 삶을 우리가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포기해버린다면 
세상 속에서 신자가 이제 멸시를 당하게 되는 거에요. 

직장에서 '사장님, 우리 기업이 이렇게 힘들어지고 있는데 
제가 어느 날 기도 하는데, 제 마음에 기도하는 가운데 강력한 마음을 주시는데 
사장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기만 하면, 기업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을 
제가 새벽기도시간에, 우리 기업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제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선포를 해서, 그대로 할 때 
기업도 살아나는 역사를 여러분이 경험해 보셔야 되는 거에요. 

그냥 '망하고 있구나, 망했구나, 이제 내가 다른 직장으로 옮겨야 되겠구나' 
이게 아니라 
'하나님, 이 기업이 살 길은 없습니까?' 날마다 엎드려 기도하며 
그 사장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자기 직장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장에게 모든 진단과 평가를 해줘서 
그 기업이 살아나게 만드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고... 

내가 이 사업장을 위해서, 비록 내가 사장은 아니지만 
'내가 이 직장을 위해서 때로는 사십 일간 아침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라고 하는 이 믿음의 명승부를 거는 거예요.

이런 실제적인 믿음의 증명이 우리 삶속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의 말은 다 헛것입니다. 
이제 말 잔치는 끝내고, 실제적으로 믿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믿음의 명승부를 걸고, 믿음의 야생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진리가 진리인 것이 드러나도록.. 행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좀 거칠게 예수를 믿으시게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믿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러서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경험의 세계를 뛰어넘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야성을 가진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날마다 경험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