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2장,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
◈합2장,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 여러 설교 모음
※합2장에 여러 은혜스런 설교들이 많이 모아져 있으므로
그 설교문들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본 장의 내용 이해가 충분합니다.
<개요>
1~4절,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
5~20절, 하박국의 5가지 화 선포
◑합1~2장의 줄거리, 또는 문맥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은 (1:1~4)
유다에 강포와 포악과 패역이 많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다는.. 하박국의 불평이었죠.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은 (1:5~11절)
하나님은, 말하여도 믿지 못할 놀랄만한 큰 일을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갈대아 (바벨론) 사람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 (1:12-17절)
하나님이 악인 바벨론을 들어서
하나님의 백성 유다를 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질문이었죠. 17절이 핵심.
(이렇게 합1장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대답은 2:1~4절에 나오는데,
그 중에 2:4절이 가장 핵심입니다.
2:4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바벨론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남유다의 남은 자들
하나님이 바벨론을 들어 남유다를 벌하시지만,
바벨론도 결국 자기 교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암시합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키워내고 계신다는 거죠. 2:4
<이 단락 추천설교>
하박국처럼 성루에 올라가서 기도해야 ☞ 2:1~4 성루에 선 하박국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비결 ☞2:1~4 계시를 가지라
하박국에서 주신 하나님의 응답 - 기다리라 ! ☞2:1~4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외 적용 ☞ 2:4~5 스카이댄서와 헤븐댄서
2:1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플랜 비를 행하신다
▲그러면서 2:5~20절에, 하박국은 5가지 화를 선포하는데
이는 유다를 치러 오는 바벨론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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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2장 절별 해석
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내 파수하는 곳'에의 히브리어 '미쉐마르티'는 파수하는 행위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파수하는 장소인 '파수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성루'가 암시하는 대로 파수꾼의 직무를 수행하던 성벽의 파수대를 가리킨다.
실제로 하박국이 파수꾼이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하박국이 파수꾼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하나님과 교통하겠다는 태도를 가졌음은 분명하다(시5:3, 미7:7).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하박국이 파수대에 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하박국의 태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이다.
또한 '내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를 직역하면
'내 안에'라는 의미로 스가랴 선지자도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
(슥 1:9,13,14, 2:2, 4:1,4,5, 5:4,10, 6:4).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파수대에 서 있는 외적인 행동과 대비되는 것으로
잠잠히 내적인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보여준다.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여기서부터는 본장 전체에 걸쳐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계속된다.
먼저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응답받을 준비를 갖추도록 조치하시고 나서,
악인과 의인의 차이점이라든가 침략자 갈대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갈대아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더라도
그들의 탐심과 잔인성, 허탄한 삶의 태도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묵시'의 히브리어 '하존'은 이미 1:1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본서 전체를 개관한 1:1을 반영할 뿐 아니라,
하박국이 성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 결과 받게 된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에 도움을 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출 17:14) 특별히 판(板)에 기록하여
미래의 정한 때까지 보존하도록 하셨다. 이렇게 조치하신 이유는 많은 거짓 예언으로부터
참된 예언을 보호하고 전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판(tablets)은 돌이나 점토 혹은 금속 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판에 쓰여진 메시지는 통보자에 의해 전달되었고,
통보하는 방식이 그것을 가지고 '달리는'것이었다.
(삼상 4:12, 삼하 18:19-27, 에 3:13,15, 8:10,14, 렘 51:31)
여기서는 특별히 하박국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렘 23:21).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이 묵시는...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종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츠'는 어떤 목적, 행위 또는 사기의 끝을 의미한다(애 4:18, 겔 7:2,3, 21:25,29).
본절에서 '묵시'의 직접적인 내용은 바벨론 압제의 종식을 가리킨다(4-20절).
기록된 묵시는 현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미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시간의 최종적인 순간까지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의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쇼'는 '영', '생명'(KJV,RSV)이라 번역할 수 있고,
'욕망','욕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접미사 '그의'는 1:2-2:1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갈대아(바벨론)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만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펠라'는 '아팔'의 푸알형으로 본래 '부풀어 오름'을 의미하며
무례와 뻔뻔스러움을 나타낸다(민 14:44). 이는 교만한 자의 심중이 안정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런 심적 상태를 소유하고 있는 까닭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의 히브리어 '에무나토'는 '공평', '견고', '확실', '영원'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특별히 신뢰성에 기초하여 증명되는 개인의 품성이나 행위의 '공평함'을 뜻한다.
본 구절에서 믿음의 속성은 '그의'라는 소유격앞에 위치한 '의로운'에 의해 잘 설명된다.
믿음은 의를 실천하려는 그의 태도가 확고한 것을 의미하는 바,
'믿음'은 의의 개념과 동일하게 사용되곤 한다(삼상 26:23, 시 33:4,5, 40:10, 96:13, 119:75,138, 143:1).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청의의 교리를 가르친다.
2:5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본절은 만족할 줄 모르는 정치적인 정복욕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벨론인인이 자만과 탐욕,
노골적인 침략으로 말미암아 도덕적인 파탄을 입게 될 것을 보여준다.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술'은 바벨론인처럼 기만적이고 미덥지 못한 특성을 지닌다. 술이 삶을 흥겹게 하기도
하지만, 그 중독성으로 인해 가난과 혼돈과 파괴를 초래한다(잠 20:1, 23:20,21,29-35).
특별히 본 구절에서는 사회적인 불의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그것은 곧 궤휼과 교만과 한없는 욕심 등이다.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
'그 욕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쇼'는 '욕망','목구멍','욕구'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들은 욕망의 정도를 좀더 확실하고 자세하게 알려준다.
다시 말하면 1:5-17에서 이미 증명되었듯이 그 욕망이 만족할 줄 모르고 지속된다는 것이다(잠 27:20, 30:15,16, 사 5:14).
한편 '음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스올'은 먹이를 삼키는 곳으로 일관되게 언급되며
(민 16:30-34, 잠 1:12, 27:20, 사 5:14)
'지하 세계', '지옥'(KJV,RSV)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만큼 갈대아 사람들은 자신의 과다한 욕심과 파괴적이며 모든 것을 삼켜도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가지고 왕성하게 이웃 나라들을 독식하였다.
2:6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본절에서부터 갈대아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의 집행이 단호하고도 최후 통첩적인 어조로
기술된다. 이는 앞에서(1:5-2:5) 심판의 집행을 암시적으로만 보여준 것과는 대조된다.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속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솰'과 '평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멜리차'와 '조롱'에 해당
하는 히브리어 '히도트'는 잠 1:6에서도 함께 나오는데, 주로 교훈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비웃는 듯한 어투로 사용되어 앞으로 전개될 내용(6-20절)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다.
'곧 이르기를 화있을진저...무겁게 짐진 자여‘
'화 있을진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이'는 일반적으로 심판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예언 문학에서 주로 사용되었다(사 5:8,11,18,20-22, 렘 22:13, 23:1, 암 5:18, 6:1).
여기서도 앞으로 계속될 선포가 저주의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저주를 듣는 자들을 향해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라고 표현하여 그들이 당하게 될 화는
그들이 자행했던 강탈과 노략에 근거한 것임을 시사한다.
2:7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2:8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너는 물 자들이...너를 노략하리니...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앞에서 언급된 사실을 반복하는 단락으로 심판의 시행이 자기 죄에 해당되는 보응임을
보여준다.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사실과 명확한 대조를 보인다.
즉 악인은 자기의 행위대로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실제로 여기서 선포된 재앙이 바벨론과 메대와 바사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들에 의해 집행
되었다(사 13:17-22, 21:2-10, 렘 25:25, 49:34-39, 51:11,12, 겔 32:24,25, 단 5:28).
2: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본절은 히브리어 원문과 반대로 앞 구절과 뒷 구절의 순서가 바뀌어 번역되었다.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이는 에돔과 마찬가지로(옵 1:3)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높은 곳에 위치해 있거나
성을 높이 쌓은 상태를 가리킨다.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이'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문장 맨 앞에 위치하여
본 구절이 심판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들이 온갖 수단을 다해 재앙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더라도
반드시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임을 명백히 한다.
실제로 바벨론은 난공 불락의 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상황과 거짓된 교만으로 인해 스스로 몰락해 갔다(단 5:1-30).
2:10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2: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네 집에 욕을 부르며...들보가 응답하리라'
앞 구절의 내용을 보다 강화하면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욕을 부르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아체타'는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들이 생명을 파괴한 것에 대한 보응으로 생명을 상실하고,
자기 집을 안전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도리어 그 만행의 보응으로 분열되고 조화가 깨어지게 될 것을 보여준다.
2:12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본장에서 세 번째로 언급되는 '화 있을진저'의 히브리어 '호이'도
앞의 경우(9절)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원문에는 문장 첫머리에 나온다.
본절의 내용은 바벨론의 수도 건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전에 예루살렘을 향해
적용되기도 하였다(미 3:10).
이스라엘의 여호야김은 재위 기간 동안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국가 기금으로 사치스런 왕궁을 지은 적이 있다(렘 22:13,14).
바벨론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세워진 성읍이었다.
이처럼 국민의 복지와 안녕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명예와 권력에만 관심을 쏟는
통치자는 결국 백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2:13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민족들이...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본 구절은 앞서 언급된 바벨론의
성읍건축을 염두에 둔 말로 민족들과 열국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헛된 이상을 묘사한다.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히브리어 원문에는 본 구절이 문장 첫머리에 나온다.
이로써 바벨론이 당하게 될 심판이 필연적이며 노동 착취로 건립된 문명은
스스로 망하게 될 것을 강조한다. 이것으로 봐서 인류 역사의 주된 원동력은
역사적인 사건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계시적 목적에 기초한다.
2: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본절은 앞의 내용(12,13절)의 강조점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결론적으로 언급된다.
즉, 세상 끝날에 모든 세상 열방이 여호와의 위력과 위엄을 느끼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리라는 것을 언급하여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다(민 23:21).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여호와의 집에 가득한 것처럼 온 땅에 가득해야 한다는
영원한 목적에 기초한다(출 40:34,35, 민 14:21, 왕상 8:11, 시 57:5,11, 72:19).
2:15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 번째로 사용된 '화 있을진저'(호이)도 앞에서 사용된 것(9,12절)과 마찬가지로
문장 첫머리에 등장한다. 이로서 여호와의 심판 예고는 그 절정에 이른다.
본 구절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음란한 행위를 조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실제로 이방 민족을 침략했을 때,
그곳의 여인들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우고 추행하였다(나 3:5).
2:16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2:17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네게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취한 수치스럽고 음란한 행위은
필연적으로 파괴적인 강포로 이어진다.
여기서 '레바논'은 여호와께로부터 할당받은 땅(신 1:7,8, 수 1:4),
혹은 이스라엘로 상징되기도 했으며, 특별히 바벨론의 침략을 받은 이스라엘로 상징되었다(왕상 9:19, 렘 22:6,23).
본절은 다름 아닌 바벨론의 이스라엘 침공을 가리킨다.
바벨론이 심판을 받게 된 이유는 이기심을 추구했기 때문이며,
자기의 영광을 추구한 데다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닥칠 심판은 13,14절에서 언급된 대로 다른 사람에게 가했던 방식으로 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예언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갈대아 사람들의 성읍 바벨론은
약 25.8m 두께의 성곽으로 그 둘레가 17.7Km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었다.
이처럼 난공 불락의 견고한 성읍도 B.C.539년 바사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단 11:2).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2:19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새긴 우상은...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본 단락은 6-17절에 이어지는 결론으로 앞에서와는 달리
심판의 선언이 없고 주로 우상들이 가진 거짓되고 헛된 특성을 지적한다.
우상은 무생물인 돌, 나무, 금속 등으로 만든것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생명력도 없다(시 135:17). 더욱이 그것들은 진리를 가르칠 수도 없고 교훈을 베풀 수도 없다.
이는 그것들이 인격체도 아니고, 생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우상들을 부르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어리석은 짓이다(왕상 18:22-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은 인간들의 허탄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롬 2:21-25).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우상의 무익성에 대해 피력하고 나서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언급한다. 이는 장차 이루어질 현상을 염두에두는 표현이기도 하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의인은 믿음을 고수하는 의인과 악인의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이는 하나의 전쟁으로 악의 세력과 의인의 믿음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쟁은 계속되겠으나 하나님은 크신 권능으로 악인의 노력을 방해하고
의인에게는 악에 대항하고 그 도전을 견딜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본절의 여호와의 임재는 모든 강탈자들에게는 심판의 선언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