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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0:14-21 손 내미시는 하나님

LNCK 2022. 11. 27. 16:01


◈(구원의 초대의) 손 내미시는 하나님             롬10:14-21           2022.11.20.

롬9, 10, 11장 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른 우리의 구원을 말씀하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문제를, 그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데,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불신앙가운데 처해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지 않은 것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인가?' 이런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그 역사는 무엇인가?   *아브라함 등
이런 많은 의문들이, 유대인인 바울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와 동시에 바울은, 동족 유대인을 향한 간절한 구원에 대한 열망,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과 기도를 동시에 올리면서 

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책임, 응답response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롬9장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예정>을 통한 구원을 강조했다면 
롬10장에서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책임, 
즉 '믿음으로' 그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예정 과 인간의 반응)는 서로 이율배반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선택과, 그에 따른 인간의 책임(믿음)은 상반되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는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이것이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이해와 경험과 판단으로는, 다 해석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은혜와 진리도 상반되지만, 서로 융합됩니다.
예수님을 소개할 때 요1:14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죠.
은혜와 진리 또한 우리 경험과 판단으로는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영역이죠.

사람들은 '은혜 없는 진리'를 추구하거나, 
또 '진리 없는 은혜'를 추구합니다. 

어느 한 쪽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치우칩니까?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자신에게는 '진리 없는 은혜'를 한없이 적용하고, 
타인에게는 '은혜 없는 진리'를 항상 적용한다는 거예요. 

타인에게는 언제나 '진리의 잣대'만을 들이대고
자신에게는 언제나 '은혜의 잣대'만을 강조하죠. 
자기 자신에게 언제나 '진리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성향이 있기에 
은혜와 진리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는가? ...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하나님의 성품은 
100% 은혜의 하나님이며
100% 진리의 하나님입니다. 

그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하게 나타난 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심으로, 진리 앞에 합당하지 못한 우리들을 
그분의 아들을 통해 심판하시고   
또한 우리를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변화시켜 주신 은혜! 

그 은혜는 진리의 기준을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눈감아 주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진리를 버리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도리어 진리를 진리 되게 하는 것이 은혜 이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통해 이 두 가지가 하나가 되었듯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과 '인간의 책임'은 절대로 서로 상반되지 않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둘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에요. 
또 구원받지 못한다면 전적인 '인간 자신의 책임' 때문입니다. 

왜 서로 상반되는 것같은 이 명제가 왜 진리일까요?
지난 2주 동안 롬9장과 10장을 통해, 우리가 살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구원받아야 마땅한 존재가 아니라 
심판받아야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야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그 중에 일부만 택하여 구원하셨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죠.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임에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인간이 구원받도록 모든 일을 다 행하시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조청하고 계신데 

사람들의 완악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신 분이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며, 
동시에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겁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이 있었지만 인간들은 변화 되지 않았습니다. 
역사상에 수많은 심판이 있었지만,  인간 안에 있는 이 죄는 
그 심판의 무서움을 역사 속에서 보고도, 스스로 돌이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 자신의 의로움으로, 노력으로 그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또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 속에 나타난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모든 조건, 그 환경, 그 상황을 
다 마련해주시고, 다 이루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믿음은, 회개와, 믿음의 증거인 변화된 삶을 포괄하는 믿음임. 지적동의 아님)


그 믿음이 얼마나 쉬운 것입니까. 그러나 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자기의 때문입니다. 

자기 의! 자신의 타락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진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불신앙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표적으로 함께하셨습니까. 
얼마나 크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통로로 사용하기 위하여 
그들을 사용하시고, 축복하시고, 함께하신 역사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은 완악함으로 거부함으로써
결국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불신앙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의 불의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함도 아닙니다. 
인간 자신에게 있는 완악함의 문제입니다. 

애굽 왕 바로에게 있었던 완악함은, 바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도 있었던 것이고, 
유대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 완악함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구원 받는다면, 전체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 
구원 받지 못한다면, 인간 자신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롬10장에 이르러서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책임을 말하였고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10:13절은 이렇게 시작하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누구든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구원받도록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도록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게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하시고, 그리고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나의 선택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고 
나의 믿음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걸 믿고 구원 받고 난 이후에 돌이켜보면 
이것은 나의 선택이나, 또 나의 깨달음이 아니라 

나를 미리 아시고, 택정하시고, 부르시고, 이끄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라는 이 고백, 그 고백이 바로 '예정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지 이름을 알고 부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믿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표현, 믿음의 그 행위가 바로 '부른다'는 거죠. 
그러므로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4 '그들이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믿음의 간청과 요구와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죠.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개인적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1)


▲또 우리가 다 이해 해야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해가 다 안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 보면, 
다 이해 하지 않고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학교에서 어떤 수학공식을 배우면, 그 공식을 설명 들으면 
그 공식 이면에 있는 원리를 증명해서, 따라가는 학생이 있고, 

그냥 무작정 그 공식을 외우는 학생도 있죠. 
그 공식이 생긴 원리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 있죠.

다 이해해서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적용해 보면 이해가 되는 영역이 
우리 삶에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부분 우리가 깨달은 깨달음, '아 이것이 진리이구나' 라는 그런 깨달은 만으로도 
그 길로 가다 보면,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지를, 더 깊이 이해하고 깨닫게 되죠. 

또 그것을 언제 확실히 깨닫게 됩니까? 
곁길로 빠져 봤을 때! 

믿음의 길을 떠나가 봤더니 '아 이래서 확실히 믿어야 하는구나!'를 깨닫고 
다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어쩌면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 실패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때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이해하고 믿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이해하고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옵니까? 들음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또 이 말씀이 나옵니다. 
'듣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14

이것은 예수님의 관하여 어떤 정보나 지식을 들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부터 들어야 한다, 

그분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개개인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어떤 내적인 음성 이전에 
객관적인 말씀으로 예수님이 우리 개인에게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어디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우리는 그분을 믿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예수님에 관한 어떤 사상, 철학 그것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 그분을 믿는 겁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신 그분을 믿는 겁니다. 
그분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늘 되새기며, 자주 읽으며, 나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하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듣겠습니까?'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14

여러분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구원을 이루심에 있어서 
우리의 전파(전도)를 통해서 일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신 거예요.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책임은 '전하는'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의 달려 있는 겁니다. 

우리의 책임을 뭡니까? '전하는' 책임이에요.
우리는 전하는 책임을 감당을 뿐이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고 결코 하나님께로 올 것 같지 않은 사람도 
믿음으로 전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내가 생각할 때, 믿을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그 믿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만, 천국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전도한 사람이 천국에 올라온 거예요. 

그가 전도한 사람이 이제 천국에 와서.. 기뻐했죠. 
그런데 보니까,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은 거에 대해서 
예수님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시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좀 따졌다는 거죠. '천국인데도 시행착오가 있군요. 
저 사람은 내가 전도한 사람인데, 왜 면류관은 다른 사람에게 씌워주십니까?'

예수님은 '네가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건 맞다. 
그런데 너는 저 사람을, 그저 우연한 기회에 만나 복음을 전한 것 뿐이지만, 
저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 수십년간 기도한 사람이, 면류관을 받는 것이니라!'

그처럼 우리가 말씀을 전해서 회심하면 
'내가 그를 구원했다' 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거죠. 
그런 교훈을 주기 위해서, 그런 예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전하는 것 뿐이에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뿐이지,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복음전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 세계가 진동 할 만한 
그런 천둥과 번개 소리와 같이, 온 세상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모두 잠에서 깨어나라, 일어나라, 들으라고 친히 말씀하시며 
우뢰와 같은 음성으로 하나님이 진리를 전하시고 다 결신시키면 될 것 아닙니까?'

'왜 우리의 복음 전도의 과정을 통하여, 꼭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겁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죠.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진짜 천둥소리와 같이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셨고 
불과 구름기둥으로 역사하셨고 
하늘에 만나와 메추라기로 역사하셨고 
홍해와 그런 놀라운 기적과 표적으로 함께 하셨지만 
그들이 올바른 믿음을 가졌냐는 겁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올바른 믿음에 이를 것 같지만 
표적과 기적으로 인간 안에 있는 죄와 악함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무서운 심판과 진노가 임하면, 인간 안에 있는 완악함이 사라질 것 같지만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도, 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을 보면,
여전히 그 죄의 완악함은 존재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적이나 심판의 무서움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안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는 역사,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영혼으로 변화시키는 
십자가와 그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으로 변하지 않는 인간이, 예수 십자가로는 변화되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어야 
그 복음을 듣고 변화된 이들을 보고, 그들의 간증을 통해서 
또 다른 이들이 믿음의 이르게 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전한다면, 그 사람은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냄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15

누가 보내십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2)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사교 클럽처럼, 교회가 그렇게 흘러가는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것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그저 나, 우리만의 그러한 클럽처럼 되어 가는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최근에 제가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갔을 때 
그 교회 담임목회자가 젊은 분이었어요. 

그 젊은 목회자가 담임으로 교회에 청빙되어 
열심히 해 보려고 '아웃리치도 가야 된다. 선교도 가야 된다.' 
정말 그렇게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그 교회에 오래 다니신 한 분이 찾아오셔서 조언을 해 주셨대요. 
무슨 귀한 조언을 하시는가 해서, 그 젊은 목회자가 귀담아 들었더니 

'목사님, 저는 이 세 단어가 제일 싫습니다. 
근데 모든 목사님들이 항상 담임으로 와서, 이 세 단어를 얘기하는데 
저는 그 세 단어가 너무 싫습니다. 

첫째는 '다음 세대' .. 그 말이 저는 너무 싫습니다. 
우리 같은 올드 세대가 이제껏 얼마나 헌신하고 희생했는데 
우리를 좀 알아 줘야지... 맨날 다음 세대만 얘기합니까! 
말도 안 듣는 다음 세대들인데...

두 번째는 '땅 끝' .. 가 보지도 않은 땅끝, 예루살렘을 맨날 얘기합니까?
우리 교회가 중요하지요.

세 번째 더 싫은 것은 '새신자!' 라는 말이 너무 싫습니다. 
새신자가 많이 오면, 주차할 데 없지.. 예배 공간도 부족하죠... 

목사님들은 구신자는 내버려두고 새신자만 따라다니고... 
이 세 가지 단어가 저는 너무 싫습니다... 

여러분 충격 아닙니까? 
그런데도 겉으로 볼 때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일 수 있어요. 

다음 세대 / 땅 끝 / 새 신자 ... 에 대한 
말은 못 하지만 속으로 불편한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복음이 전해질 것입니까? 

안타깝게도 그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정 반대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서도 우리는 예배 잘 드릴 수 있고 
신앙 생활 잘 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고 
교회에서는 리더십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 수 있어요. 
저도 오래 전에 목회할 때, 그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아주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이 저를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교회에 새신자 많이 찾아오는 것이 싫습니다. 
주차할 데 없고... 똑같은 얘기를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책임감으로 가득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다면,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요. 
누군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인간 자신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을 향하여 
'그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5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5
죄악으로 빨리 달려가는 발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우리 신체 중 가장 주목받지 못하고, 가장 더러워보이는 발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이사야 52:7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하나님의 위로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위로란
이제 포로되었던 그들이 해방되고 
평화와 구원이 다시 찾아오는 그 소식을 전하는 
누군가의 발이 아름답다.. 라는 그 비전을 보여주신 거죠.

올림픽 경기 중에 하이라이트는 마라톤이죠. 
마라톤은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의 발을 기억하는 경기죠. 

주전 490년,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군대에 승리를 거두었을 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 같은, 그 당시에 막강한 페르시아의 군대를 이겼다는 
그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전투가 이루어졌던 마라톤 지역으로부터 시작해서 
아테네에 이르기까지 42키로를 달려, 그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탈진하여 
죽은 한 병사, 그 병사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시작된 경기가 마라톤이죠. 
올림픽의 하이라이트는 마라톤이죠.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헌신한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이 다 소진될지라도 
그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하고 자는 그 헌신에 발이 아름답기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 라는겁니다. 

이것을 적용하면, 우리는 복음의 마라톤 경기를 뛰는 선수들과 갖고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바로 그 마라톤 선수처럼,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의 발이 상하고 부르트고 또 고장 날지라도 
'그 발이 아름답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거예요. 


▲얼마 전 CGN TV 후원 모임에서, 태국에서 CGN 협력 하시는 선교사의 소식을 
듣고 너무나 감동했습니다. 

태국 CGN TV 에서 태국어로 제작된 이 컨텐츠들을 영상으로 보고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찾아오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직원들이 영상을 만들 뿐 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또 결신까지 시키고, 또 기초양육까지 해야 되는.. 
그러고 나서 교회로 인도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작년만해도 141명이 결신하고, 교회로 인도했다는 거예요. 
방송을 보고 연락 온 사람은 더 많은 거지요. 

근데 올해는 더 급증해서, 올해 11월 18일까지 결신자가 370명 이라는 거예요.
연락 온 사람은 훨씬 더 많죠. 

그들의 연락이 오면, 복음을 전하고, 결신 시키고 지역교회로 연결시켜 주고 있죠.
CGN TV 직원들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영상 제작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있는 거죠.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미야자키 에서도 가장 작은 도시였지만 
가장 결신률이 높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 코로나 팬데믹을 통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겸손하게 하시고 
우리가 전하기만하면, 놀라운 추수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어느 때보다 선교에 열심을 내야 됩니다. 
어느 때보다도 땅끝을 향하여 나가야 돼요. 
어느 때보다도 다음세대,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이 구원받는.. 
새로운 신자들이 많아저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뭡니까? 전화는 겁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그러나 모두가 복음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16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슬픈 현실을 바라보면, 더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데 
전해지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이 임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완악함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죠. 


동족 이스라엘의 문제를 다시 꺼내면서 바울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지죠. 
그러면 첫 번째로 '그들이 듣지 못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듣지 않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믿지 않았나요?

그것은 들어도 믿지 못하게 하는 완악함, 죄의 완악함 
곧 자기 의가 인간에게 그렇게 무섭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복음이 들려줘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비유로 든 것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비율적으로 3/4이 복음을 거부한다는 거예요.
복음이 전해지면, 믿는 사람 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하여 완악함으로 거부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믿을 수 없는.. 믿을 수 밖에 없는.. 믿어야 하는 
모든 구원의 길을 다 예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비유는 
어떤 사람은 길가로 태어나서 길가로 살다가 길가로 죽고,

어떤 사람은 돌밭으로 태어나서 돌밭으로 살다가 돌밭으로 죽는다는 
그런 운명론 아닙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도, 말씀이 들려오면 
말씀이 들려오는 있는 그대로 100% 가 다 말씀이 뿌린 대로 열매 맺습니까? 

아닙니다. 대부분의 말씀은 길가 와 돌밭과 가시떨기 같은 그릇된 토양으로 인해서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합니다. 

어떤 말씀은 길가에 떨어져요. 어떤 말씀은 돌밭에, 가시떨기에 떨어지죠.
우리의 마음에도 4가지 밭이 있는 겁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들이 알지 못하였습니까?' :19
'그것 또한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보았고, 
체험 했기에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오직 그들의 완고함, 완악함 때문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계획을, 바울이 성령 안에서 말하고 있어요. 
이것은 뭐냐면, 먼저 택한 백성들이 그렇게 완악함을 믿지 않기에

하나님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함으로 
그 택한 백성들을 시기하게 한다는 겁니다. 

19절 '내가 백성이 아닌 자로 (이방인) 너희를 시기하게 하고 
내가 미련한 백성으로 너희를 분노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미련하다'고 하신 게 아니라,
유대인들이 평소에 이방인들을 '미련하다' 라고 부르니까 
그 표현을 바울이 빌려 쓴 것입니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시기하게 하셨어요. 
왜냐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표적과 기사와 그런 계시와 그런 약속과 
그런 말씀이 직접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방인들이 수없이 많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유대인들이 이제 '시기하는' 겁니다. 

▲요즘 메시아닉쥬들을 보면, 그런 시기심들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갈릴리에, 헐먼 산 근처에, 갈멜산에,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데,
우리 서울에 사는 성도들은,
남산보다도 예루살렘을 더 많이 얘기하고 
한강보다도 갈릴리 호수를 더 자주 언급하니까요...

한국 성도들이, 이스라엘 지역을 한 번도 와 보지도 않고 
이런 체험이 없음에도, 그저 성경말씀만으로도 믿고 저렇게 변화되는데 
(메시아닉 쥬들이) 우리는 지금 뭐냐는 거죠. 
그래서 지금 그들이 시기나서 믿음의 사람들이 더 증가하고 있다는 거죠. 


바울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역할이 바뀐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20~21절 '나를 찾지 않는 자들 (이방인들을) 내가 만나주고 
내게 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나타나시고, 만나주시므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킴으로 
유대인들을 자극 하신다는 겁니다. 롬11장 그 내용이 더 자세히 나옵니다. 

21절에 '내가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여기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온종일, 매일 매순간 하나님은 그 손을 내밀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처럼 말씀을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에도 불구하고 
택한 백성이나, 나중에 부르심을 받은 이방인이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은 손을 내밀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년이 하루처럼, 하루가 천년처럼 
하나님은 말씀을,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는 영혼들을 위하여 
끝까지 초대의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언제까지요? 모든 사람들이 변명할 수 없을 때까지 
하나님은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서, 물에 빠진 사람이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곳에서 
손을 내밀고, '내 손을 잡아, 구해 줄게!' 라고 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이 잡을 수 있는.. 변경할 수 없게, 그 손이 내밀어져 있는데 
그 손을 붙잡지 않고 '나는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 믿어, 
내가 믿는 종교에서 손 내밀 때 나는 잡을 거야!' 

그러한 시각으로 하나님의 내미신 손을 잡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면, 누구 책임인가요? 잡지 않는 자신의 책임이죠. 

잡을 수 있는 상황, 잡을 수 있는 그런 힘, 잡을 수 있는 위치... 
그 모든 것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으로 이끄심에도 불구하고 
그 손을 잡지 않은 믿음의 불신, 믿음을 가지지 않는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구원 받는다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구원 받지 못한다면, 인간 자신의 책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손을 내밀지는 않으십니다.
오래 참으시며 손을 내미십니다. 그러나 그 손이 언제 거두어질지 우리는 모르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손내밀고 계실 때 
그분을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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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주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합니다. 제 스스로의 능력으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의로움을 덧입혀 주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나의 구원이 되어 주십시오. 제가 믿음으로 받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고백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기도를 인도하여 도와줄 수는 있지만 
결국 자신의 믿음의 고백으로, 자신의 입술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주2)
그 하나님의 보내심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는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곧 교회를 통해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셨다. 복음을 전하는 일로 보냄을 받았다'라고 
스스로 느낄지라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면,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당신은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스스로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즉 내적인 소명과 외적인 소명이 하나가 되어야 하죠.
어느 한쪽이 아니라면..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통해서도 올바르지 않은 분별이 있을 수 있어요. 
윌리엄 캐리 선교사가 청년의 때에, 교회 선교 위원회에 찾아가서 
'내가 인도의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 그랬더니 

교회의 어르신들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거죠.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께서 인도의 이교도들을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셨다면 
당신이 안 가도 구원하실 거야, 갈 필요 없어!' 라고 말했다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