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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증인

LNCK 2023. 6. 8. 21:38

https://blog.naver.com/karamos/220977114732 정리

 

◈두 증인               계11:1~3            2011.11.06.              *계시록설교모음

 

요한계시록 11장은 <성전측량과 두 증인>이 주제입니다.

 

계11장은 내용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요한이 성전을 척량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두 증인이 땅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에게 핍박을 받고 순교했지만

결국 삼일 반 만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통해 승리하는 사건입니다.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 혹은 두 촛대라고도 합니다.

이들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했지만,

곧바로 부활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셋째는 심판의 날이 와서 신자는 부활하고

불신자들과 거짓 교회가 심판 받는 사건입니다.

 

◑먼저 요한이 성전을 척량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건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요한은 먼저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았다고 했는데

오늘날로 치면 자 ruler 와 같은 것입니다.

과거에는 갈대를 자로 만들어 썼거든요.

 

그것을 받아서 성전을 척량하라는 명령을 받는데

성전 바깥은 척량할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마흔 두 달동안 짓밟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오는 “성전”은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미래의 7년 환난기에 모리아 산에 있는 이슬람 사원이

무너지고 세워질 미래의 성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곳에서 예배할 사람들은 7년 환난 중반에 예수를 믿은 유대인이라고

미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7년환난, 유대인이라는 말이 없다는 점에서 이 해석은 오류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과거주의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성전은 1세기에 존재한 유대인 성전을 말하는 것이며

파괴된 유대인 성전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가장 합당한 해석은, 11장의 성전은

‘적대적인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성전은 교회의 상징입니다. 신약성경의 성전은 다 교회를 상징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성전은 교회라고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엡 2:21)

 

성도들이 성전이 되어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전은 교회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성전이란 교회를 의미한다는 증거는 신약성경에 풍성하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밖 마당”은 무엇입니까?

구약에 보면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리웠던 곳입니다.

 

예루살렘에도 성전이 있었고, 그 밖에는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그곳에 오는 사람들은 몸은 예루살렘에 있어도

영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와서 관광하는 곳이었습니다.

즉 관광터를 이방인의 뜰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밖 마당’이란 교회 안에 존재하지만

영적으로 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성전은 진실로 예수를 믿어 교회가 되어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전 밖은 몸은 교회라는 곳에 있지만 영적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이 있어도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몸은 교회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성전 밖 마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더라도 알곡만 있지 않고, 가라지가 섞여있다 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를 보더라도 순수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 증인, 배교한 사람, 이세벨 같은 사람,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이름 안에 있는 사람중에도

가짜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침례교회는 중생한 사람들만 교회를 이룬다고 하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와의 차이점입니다.

장로교회는 중생한 사람들만 교회를 이룬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장로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 즉 중생한 사람들이 낳은 자녀들도

구원받지 못해도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아세례를 줍니다.

 

하지만 침례교는 기도는 해줄지언정 세례는 주지 않습니다.

왜냐면 세례나 침례는 믿는 사람들만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침례를 믿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중생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관을 가진 곳이 침례교회입니다.

그래서 침례교회는 알곡으로 가득한 교회입니다. 

 

‘성전’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교회이고

‘성전 밖 마당’은 영적인 가라지들이고

교회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배교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이 있어도 교회 아닌 집단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또한 성도, 교회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배교한 무리들도 많죠.

주의하셔서 교회 안에서 성전으로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이 “성전을 척량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문자대로 자를 가지고 성전크기를 잰 것은 아닐 겁니다.

왜냐면 성전은 크기가 성경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잴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의 모든 기구는 정해져서 정확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로 재어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성전을 쟀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성전을 쟀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을 척량했다’는 의미는,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에 보면

성전을 척량한다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1) 이것이 주는 의미는 모두 성전을 보호했다는 의미입니다.

‘보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개념을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계 7:3상) 라는 표현입니다.

 

‘인을 쳤다’ 나 ‘척량했다’는 말은 동일한 말입니다.

이 말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이 특별히 보호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특별히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2) 측량을.. 건축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집을 건축할 때.. 측량하잖아요.
그래서 교회 시대(초림~재림사이)에,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교회를 건축해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밖에 있는 이방인은 거룩한 성을

42달 동안 짓밟는다고 했습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2)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을 지칭합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성전 밖 이방인 뜰에 있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짓밟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배교한 교회가 참된 교회를 핍박한다는 의미입니다.

배교한 교회가 참된 교회가 행하는 증거와 예배를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이단자들이 간첩처럼 들어와서 예배를 방해하기도 하고,

목회자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거룩한 성을 짓밟는 사람들입니다.

배교한 교회가 참된 교회를 핍박을 하고, 증거(전도)를 방해하고, 훼파하는

행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2천년 교회 역사를 보면 참된 교회를 가장 핍박한 존재는

몽고의 칭기즈칸도, 잉카 제국도, 에스키모도, 중국의 오랑캐도 아닙니다.

 

참된 교회를 가장 많이 핍박한 존재는 배교한 교회들입니다.

중세 시대 때는 로마 가톨릭입니다.

당시에는 로마 가톨릭이 가장 많이 참된 교회를 핍박했고,

진정한 성도들을 가장 많이 죽였습니다.

 

성전 밖 마당의 이방인들이 교회를 짓밟은 기간은 42달입니다.

계시록 11:3절의 두 증인이 예언하는 1260일과 동일한 기간입니다.

 

계12:14절에서 여자가 뱀의 낯을 피해서 양육받는 시간을

한 때, 두 때, 반 때로 표현하는데

이 기간이 3년 6개월인데 이것도 42개월로 동일합니다.

 

이 기간 동안은 하나님이 악에 대해서 결정적인 심판을 내리지 않고

허용하신 일정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42달=1260일=세 때 반은 ‘교회시대’, ‘초림~재림사이’로 봅니다.

 

하나님이 지금 사람들이 악을 행해도 곧바로 심판합니까?

우주적인 심판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을 저질러도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역사하는데 허용을 하고 있습니다.

 

악령들이 역사하지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악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 사단과 악령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허용되는 1260일, 3년 6개월, 42개월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

즉 교회 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 펜데믹이 공교롭게도 거의 '3년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3년반에 대한 해석도, 전교회 시대를 지칭함이 맞지만, 이차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일정 기간, 즉 핍박, 환난도 일정 기간이 있고, 그게 지나면 끝난다는 거죠. 물론 일차적으로 크게 보면, 그것은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지만요.)    

이 기간동안 교회는 두 증인으로서 증거도 하고,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핍박도 받고,

하나님이 측량하시는 보호 와 건축도 경험하다가

마지막 심판 날에 교회는 다 부활해서 하늘로 끌려 올라가

주님을 만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성전’은 교회이며

‘거룩한 성’도 교회로 봅니다. :2

구약에서 ‘예루살렘 성’은, 종종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의미했죠.

 

‘성전 밖 마당’ 과 ‘이방인’ 은 가짜 교회이며,

성전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시고,

성전 밖 마당의 가짜 교회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인 교회를 핍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이고,

재림 후에는 가짜 교회들은 추풍낙엽처럼 심판받고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기간에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두 증인의 사명이죠.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3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 두 명씩 짝지워 보내셨죠.

그래서 두 증인은, 교회를 가리키되 특별히 ‘전도(증거)하는 교회’를 뜻하죠.

 

그러다가 두 증인(교회)은, 핍박도 받고 순교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인 승리를 할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5

 

두 증인도 패할 때가 있는데, 그 때는 ‘마지막 대환난’의 때로 봅니다. :7

 

계11:1~3은 우리에게 참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전 밖 마당에서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또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 밖 마당에서 교회라는 이름 안에 있으면서도

거듭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채 참된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 되지말고,

성전 안에서 참된 교회 안에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잔느 귀용이라는 17세기 영성가가 있었는데

그 당시가 천주교가 전 세계를 지배했던 암흑의 때였는데

 

천주교 식으로 예수님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개신교식으로 예수님을 가르쳐서

핍박을 받고 프랑스 감옥에 수 십 년동안 갇혀 있던 여자분이에요.

 

근데 그 감옥에서 쓴 책들이,

오늘 이 세대에 예수님을 진짜로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싶은 사람들,

진짜 복음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정도의 길을 제시하는데

 

이 잔느 귀용의 자서전 <순전한 사랑>이 두란노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그 책을 포르투갈 어로 번역해서 브라질 선교지 우리 교인들에게 나눠주면서,

이 분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싶은 사람.

정말 진짜 복음대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마존 우리 교회에 계속 나오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말라.. 고 제가 얘기를 했어요.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강수를 두었지요...

 

김철기 선교사 설교 “하나님의 사람” 중에서

 

▲크리스천의 시련과 고통을 많이 겪어서 아는 분 중에,

잔느 귀용이 있습니다.

 

부인은, 마치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자기를 돌보지 않으시는 것 같고,

하나님은 입을 닫으시고 말씀하시지 않는 것 같으며,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지 않으시는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으며

 

마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과 같은.. 오랜 시간을..

귀용 부인은 보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영혼의 깊은 밤’(오랜 기간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기간)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우리 각자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때 특별히 ‘축적(저축)된 은혜’가 요긴하게 쓰여집니다.

그러나 ‘축적된 은혜’가 없는 사람은, 이때 심령이 고갈되고, 흔들리고 맙니다.

 

귀용 여사는, 몇 개월 동안 계속해서 사탄의 시련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둘러싼 온 세상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귀용 여사는, 마치 예수님의 광야 40일 같은 그 시련의 기간을,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겨냈습니다.

 

계시록에, 서머나 교회에, 예수님이 이렇게 편지하셨습니다.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여기서 ‘부요하다’는 의미가, ‘축적된 은혜’를 뜻한다고 봅니다.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궁핍을 오래 겪었으나,

그들에게는 ‘부요함, 축적된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승리하고, 예수님께 칭찬과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