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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기
LNCK
2023. 7. 14. 18:48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기 엡4:1~3 설교녹취, 정리
에베소서는 모두 6장으로 되어 있고,
크게 두 파트로 나눠 질 수 있습니다. 1~3장, 4~6장
1~3장에서 말하는 것은 뭐냐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믿고 있는 사람들인가?'
라는 것을 1~3장에서 말씀하는 있어요.
여러분 가운데,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라고 스스로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1~3장에 언급된 내용을 확인하셔야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믿음은 반드시 1~3장에 있는 이 말씀으로 기준을 삼아
체크업 하셔야됩니다.
4~6장은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 으로서 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3장은 '무엇을 알아야 되는가?' 지식을 말한다면
4~6장은 '어떻게 살 것인가, 행함, 삶을 말하는' 것이에요.
바울서신뿐만 아니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대부분의 성경은
이렇게 구성됩니다.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믿는 것'과 '사는 것'이 절대로 분리가 되지 않아요.
'사람은 말씀만 잘 전하면 됐지...'
아니요. 절대로 안 됩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 내가 아는 것은
반드시 나의 삶, 나의 행함으로 드러나야지만 되고,
이 '아는 것'과 '사는 것'
'믿는 것'과 '삶'은 반드시 연결되어야 됩니다.
레위기는 모두 27장인데,
레위기 역시 두 파트로 나눠져 있습니다.
1~10장은, '하나님께 어떻게 제사를 드릴 것인가' *제사법
11~27장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제사장과 성도의 성결 규례, 정결법
즉 1~10장은, 성전 안에서의 삶을 말한다면
11~27장은, 일상에서의 삶을 말하겠죠.
이렇게 성경은 절대로
성전 안에서의 삶과, 일상에서의 삶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둘은 반드시 같이 가야 되는 것이에요. (마치 이론과 실제 처럼요)
▲엡4~6장에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합당한 삶,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굉장히 자세히 말씀해요.
셀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다양한 항목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다양한 요구사항은 크게 3부류로 범주화 할 수 있어요.
그 다양한 명령, 권고들을 3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4장 전체 :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
5장~6:10절 :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라'
6:11~24끝절 :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그 중에 오늘은 4장을 살펴보려고 해요.
◑엡4:1~2절
제일 먼저 권면하는 것은 뭐냐면
만일 당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 있다면, 믿고 있다면,
이렇게 사십시오.. 라면서 제일 먼저 권면하는 것은 뭐냐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이에요.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러면 질문이 생겨요. '도대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게 뭡니까?
본문은 명확히 말씀합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에요.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 된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4:1~3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를 써서 하나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뭐냐면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셨으니'
'그 하나됨을 지키라'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것은 뭐냐면
'성령께서 (이미)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4:3
그렇다면 그 하나됨을 지키는 방법은 뭔가요.
사도바울은 4:1~2절까지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께서 이미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다섯 가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1~3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 5가지를 찾아보세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5가지는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 평안의 매는 줄 .. 입니다.
▲1. <겸손>
지금 우리가 사는 2023년, 미국이 됐든 한국이 됐든
대부분의 나라에서 겸손은 덕목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너 겸손해야 돼' 라고 가르치는게 상식이에요.
그러나 2천 년 전, 사도 바울이 살았을 당시
예수님이 살았을 당시에, 2천 년 전 로마 제국에서의 겸손은 '악덕' 입니다.
당시에는 겸손이 '미덕'이 아니에요.
2천 년 전 예수님이 살았을 당시, 사도 바울이 살았을 당시에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 입니다. 누구도 겸손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은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노예나 종에게 요구되는 덕목 이었어요.
'너는 좀 낮춰, 그리고 네 주인을 높여' 라는 겸손은
당시에 절대 미덕이 아니었어요.
그 당시에 미덕은 '네가 얼마나 자격이 있는지, 네 자신을 증명하라'
'네가 얼마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는지,
네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높은 능력과 그 화려한 기술을 갖고 있는지
너의 자신을 증명해 봐!' 그게 미덕이었어요.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야 너 좀 겸손해!' 라고 말하면 싸움납니다.
'뭐라고? 내가 노예가, 종이 되라는 거야?' 하면서 싸움납니다.
오늘날이나 겸손이 미덕이지
2천 년 전에 겸손은 절대로 미덕이 아니었어요.
대신에 '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라,
네가 얼마나 뛰어난지, 다른 사람보다 더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하라'
가 (당시 문헌에) 훨씬 더 많이 나와요.
근데 왜 사도 바로 이렇게 (겸손하라고) 말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 당시에 로마 문화를 몰랐을까요?
아니요. 사도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났고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누구보다도 당시 로마 문화를 잘 아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에게 '겸손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높이고, 당신 자신을 낮추세요'
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들이 분노를 일으켜서 싸울 것을 알아요.
그런데 바울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세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가지세요.
감람산에서 마가의 다락방으로 오시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발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집에 들어오면,
그 집에 가장 낮은 하인이 나와서 발을 닦아주는 것이 그 당시 문화에요.
그리고 미드라쉬, 미쉬나 책에 의하면
만일 그 집에서 가장 낮은 계급의 종이 바빠요.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럼 누가 손님의 발을 닦아줄까요?
미드라쉬, 미쉬나에 보면, 주인이 닦아주라고 되어 있어요.
그 주인이 손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그 손님 발을 닦아줍니다.
그런데 만일 종도 바쁘고, 주인도 바빠요. 그 집에 없어요.
그러면 누가 손님의 발을 닦아줄까요?
유대인 랍비의 책에 의하면, 그 당시 상식은
그 집에 먼저 들어온 손님이, 그 다음에 들어온 손님의 발을 닦아주는 것이
문화였고, 상식이었어요.
생각해보세요.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누구도 발을 닦아주지 않습니다.
서로 발을 쳐다봐요. '근데 저 친구는 왜 내 발을 안 닦으려고 하지?'
'내가 자기보다 제자가 육 개월이나 먼저 됐는데...
내가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데... 저거 무식한 거 아니야?'
제자들은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어요. 그 긴장감이 느껴지세요?
누구도 먼저 무릎 꿇고, 다른 제자의 발을 닦아주지 않았어요.
계속 서로 쳐다보기만 합니다. 서로 마음속으로 정죄만 해요. 판단만 합니다.
'저거 아주 교만하네.. 저거 못 됐네..' 서로 그러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물동이를 가지고 오시고,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더니 (종의 전형적 모습)
상상해보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무릎을 끓으시고
그 더러운 발을 끌어당겨 그 발을 닦아주세요.
이 장면은 온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앞에 무릎 꿇으시는 장면입니다.
만왕의 왕이, 자기 백성 앞에 무릎 꿇으시는 장면이에요.
CEO가 신입사원 앞에 무릎 꿇는 장면이에요.
여러분, 그 당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낮은 직급의 사람이, 높은 직급의 사람을 섬기는 것은
상식이고 문화였던 사회였어요.
근데 그 상식을, 예수께서 한번에 뒤집어 엎으셨어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에베소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에베소교회 성도 여러분들을 이미 성령안에서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됨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렇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높이고
나 자신을 그 앞에서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하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우리 그린스보로 제일장로교회를 하나로 지킬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 예가 사실은 2천년 전 얘기이기 때문에, 마음에 와닿지 않으시죠?
만일에 우리가 오늘 점심 때 식당에 간다면
누가 냅킨을 깔고 수저와 젓가락을 놓는 게 맞습니까?
여자 성도님입니까? 나이가 어린 사람이죠?
그러면 교회의 하나됨이 깨지는 겁니다.
아니에요. 여러분, 예수님이 만일 2023년에 오셨으면
식당에 갔을 때, 예수님이 제일 먼저 네프킨 깔고 수저 놨을 겁니다.
왜 대접 받으려고 합니까?
'넌 나보다 어리잖아? 네가 나보다 배운게 없잖아?
너 연봉 얼마야? 그렇다면 네가 당연히 나를 섬겨야지, 내가 너를 섬길까?'
여러분, 그렇게 하면 그 한 번에, 교회의 하나됨은 바로 깨지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사랑하는 제일교회를 하나로 묶으셨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뭐냐면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겸손이 첫번째 권면입니다.
(펀글) 자선 중에 가장 으뜸가는 자선은 겸손한 자선입니다.
남보란 듯이 떠벌리는 자선이 아니라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자선,
할 일을 다 했으면 미련 없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자선,
끝까지 기자들의 취재를 거부하는 자선,
그것만큼 아름다운 자선은 다시 또 없습니다.
▲2. 두 번째는 <온유> 입니다.
저는 이 '온유'라는 단어를 굉장히 좋아해요. *헬, 프라호테스
이것은 단지 '친절, 부드더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시 '온유한' 사람이 주변에 있으세요.
'이 사람은 참 온유해..'
여기서 '온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친절함이 아니에요.
이 단어의 뜻은 '사나운 야생짐승을 길들이다'는 뜻입니다.
그 전혀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야생동물이 길들여지는 것,
그 사납고 날카로운 이빨이 가지고 있는 맹수가 길들여지는 것이에요.
저는 이 단어를 볼 때마다 항상 한 장면이 떠올라요.
저는 그게 온유 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TV에 보면, 밀림에 사나운 사자가 있어요.
수풀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먹이를 선택합니다.
타겟을 결정하면 쏜살같이 뛰어 나가요.
그리고 나서는 그 기다란 송곳니로 먹이의 목을 한번에 물어서 죽여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뭐냐면, 그 짐승을 죽인 그 날카로운 송곳니로
자기 새끼 사자의 목을 물어요. 그리고 들어서 옮깁니다.
그런데 상처가 전혀 안 나요. 그게 온유 이에요.
그냥 부드러운 게 아니라, 힘을 써야 될 때와
힘을 쓰면 안 될 때를 정확히 아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은,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자기가 리더라고 자랑하고
힘을 쓰는 사람이 있어요.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온유는 뭐냐면
-힘을 써야 될 때와
-힘을 쓰면 안 될 때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 그것이 온유함인데,
그런 온유함이 우리한테 있다면, 하나됨을 지킬 수가 있죠.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내세울 때와,
그 권위를 내세우면 안 될 때.. 를 구분해야죠.
리더로서의 권위를 내세울 때와
그걸 숨겨야 될 때를 정확히 구분하여 생활하는 것,
여러분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 입니다.
그 온유함이 우리 교회에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이 교회를, 지켜나갈 수가 있겠죠.
(펀글) “야생마 길들이기”
미국의 목장에서는, 말 안 듣는 야생마를 길들일 때는
그 길길이 뛰는 말을 당나귀와 한데 묶어놓는다.
그러면 야생마는 앞다리를 쳐들고 콧김을 연신 뿜어내면서
한데 묶인 당나귀를 끌고 방목지로 이리 저리 뛰어다닌다.
당나귀가 매우 귀찮다는 뜻일수도 있고
아니면 가소롭다는 뜻일수도 있다.
이렇게 야생마는, 처음에는 느림보 당나귀를 한동안 질질 끌고 다닌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 상황이 뒤바뀐다.
이제 지친 쪽은 야생마요, 둘 사이에 앞장은 당나귀가 선다.
야생마는 그 야생의 기질이 당나귀의 미련과 뚝심앞에서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고 며칠 사이에 그만 고분고분해졌다.
그래서 결국은 포기한듯 당나귀가 가는대로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며
그렇게 야생마가 길들여 진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의 인간성을 생각해 본다.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나의 야생마적 기질과 혈기....
그래서 주님은 당나귀같은 미련한 강적들을 항상 내 곁에 붙여주신다.
나의 거친 기질과 혈기를 꺾어 놓으시려고.....
그래서 내가 고분고분해져서 길이 잘 들었을 즈음
주님은 비로소 묶인 끈을 푸시고, 당나귀를 떼 주신다.
바꾸어서, 나보다 더 거친 야생마들을 만날 때도 있다.
이제는내가 당나귀 입장이 될 때도 있다. 살다보면....
그 때는 당나귀처럼 뚝심과 미련으로 버텨야 한다.
같이 날뛰어서 문제가 해결된 적은 과거에 한 번도 없었다.
당나귀처럼 온유와 겸손으로 버티기로 나가면,
야생마들이, 시간이 지나면, 결국 길들여지는 모습을 여러 번 경험했다.
▲3. 세 번째는 <오래참음>이에요.
여러분 '오래참음'은 단지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70인역에서는, '오래참음'을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책
그냥 '견디다, 참아내다'로 번역하지 않아요.
이 한 단어로 번역하는데, 확고부동 이에요.
확고부동, 흔들리지 않는 것,
어떤 상황이나, 어떤 말이나, 어떤 공격이나,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은 것... 그거를 '오래 참음' 이라고 번역해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오래 참음'은
단지 '야, 견뎌 견뎌! 이거 다 지나갈 거야, 그때까지 입술 깨물고 참고 견뎌!'
그게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오래참음 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에요.
어떤 말에도 요동하지 않는 것이에요. sustain, to endure
여러분이 예배끝나고 나가는데, 갑자기 어떤 말이 들리잖아요.
그러면 그 말 때문에 갑자기 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올라요.
그래서 내가 받은 은혜를 한번에 다 쏟아버릴 때가 있어요.
어떤 표정, 어떤 말, 어떤 상황이
나를 그냥 뒤집어 놓을 때가 있어요.
여러분 그때가 바로 오래 참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오래참음'은
어떤 상황과, 어떤 말과,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늘 한결같은 것, 확고부동한 것.. 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어요.
(헬라어 본문에는, 두 단어로 나오는데, 한글은 '오래참음' 한 단어로 번역함)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21:19
위 말씀은 예수님이 '종말에 관한 설교'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즉 종말의 때에는.. 인내할 일이 많아진다.. 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사람이.. 자기 영혼을 구원한다는 뜻이고,
인내하는 사람이.. 남의 영혼도 얻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종말은 우리에게 파멸이 아닌, 구원의 시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4.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려면,
위에 언급한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겸손, 온유, 오래참음을 <아가페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아가페-사랑은, 구약의 헤세드-사랑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인데,
'언약적 사랑'을 뜻하죠. 절대 변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무리 배신해도, 내가 아무리 주님을 떠나도
주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한 번 사랑, 영원 사랑으로' 굳게 언약하셨습니다. 그런 사랑입니다.
이것은 친구간의 사랑, 부모-자식 사랑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정말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셨는데,
너희도 그 아가페 사랑으로..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참으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 집사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저 집사를 용서하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요?'
맞아요, 저 사람은 용서받을 자격이 전혀 안돼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가페-사랑으로
전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는 나를.. 사랑하시고, 위해서 죽으시고, 구원하셨어요.
그 아가페 사랑으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미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교회'를 지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편파적, 편애처럼 보이는 이유 (중요)
또 예수님은 그 12사도들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사건 때,
즉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다볼산에서 변모하실 때,
겟세마니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3명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거 편애 아닌가요? 이게 아가페 사랑의 본인가요?
그리고 베드로에게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평하게 사랑하지 못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왜 부활하셔서는 공평하게 남녀 만인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자에게만 나타나신 것일까요?
그리고 부활하셔서 유일하게 그녀의 이름만을 부르신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구체적으로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면
누구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없이 ‘아가페 사랑’을 논하지만
구체적으로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는 말
저는 아들만 3 명이에요. 양해하고 들어주세요.
안타깝게 다 저 닮았어요. 제가 입술이 작아요.
근데 남자애들이 셋 다 입술이 작아요.
그래서 속상할 때도 있어요.
남자라면, 입술이 좀 크고 두꺼워야 남자다워 보이지요.
그래서 속상하다가도 또 기분이 좋아요.
왜냐면 아이들이 아빠인 저를 닮았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부모들도,
자녀들이 부모인 자기를 닮으면.. 대개 기분 좋아하더라고요.
하나님도 그렇지 않으실까요?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성도인 그분의 자녀들이, 그걸 닮았을 때
얼마나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실까요!
'천사들아, 여기 와 봐! 저 성도를 봐봐!
아가페 사랑으로, 성도를 사랑하고 있어!
쟤가 내 아들이야, 내 딸이야!' 이렇게 얼마나 자랑하고 싶어하실까요!
왜 여러분, 젊은이가 어른에게 먼저 인사합니까?
왜 목사님은 늘 인사를 받으셔야 됩니까?
그게 진정한 의미의 겸손인가요? ........
..................................
▲두 마리 늑대의 싸움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자기 손자에게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는 `큰 싸움`에 관하여 이야기해 줍니다.
“얘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단다.
두 마리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 놈이 가진 것은 분노, 질투, 후회, 탐욕, 거만,
자기 동정, 죄의식, 열등감, 거짓, 자만심, 우월감, 그리고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들은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손자가 추장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둘 중에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은 간단하게 답하였습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