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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보좌

LNCK 2023. 7. 18. 18:27

https://blog.naver.com/karamos/220974235963 정리

◈하늘의 보좌        계4:1~11          2011.09.04.       계시록설교모음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4:2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이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닙니다. 

계4장은 사도 요한이 몸은 밧모섬에 있지만 
영혼은 하늘로 올라갔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입신이라고도 합니다)

육은 밧모섬에 있고, 영은 성령에 이끌려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 곳에서 보좌를 봤다는 얘기입니다. 

하늘의 보좌가 있는데 그 곳에 앉으신 분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었음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아무렇게나 돌아가는 것 같지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은 그것을 영으로 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해야 할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의 사명은 무엇이냐고 하면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선교라고도 하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고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오는 천국의 모습을 보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예배”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보좌에는 24보좌가 둘러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4보좌에는 24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있었다고 했습니다. 

24장로는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사도를 합한 
신구약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신구약 모든 교회를 통틀어서 24장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4장로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4:10-11

지금 24장로는 금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드리면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경배하는 겁니다. 

24장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는 24장로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좌 가운데와 그 주위에는 네 생물이 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같이, 둘째 생물은 송아지같이, (*생물은 천사)
셋째 생물은 사람같이,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앞 뒤로 눈이 가득했다고 하고있습니다. 
눈이 많다는 것은 지혜롭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람은 눈이 두 개입니다. 하나만 더 있으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것입니다. 
손가락에 눈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보면 됩니다. 컨닝하기 쉽습니다. 
눈이 만약 뒤에 달려있다면 앞 뒤를 다 볼 수 있으니까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네 생물들은 앞 뒤로 눈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혜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생물들은 천사를 상징합니다. 천사 중에서도 계급이 높은 천사입니다.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으니까 계급이 높죠)
이들은 날개가 여섯 개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했는데, 
네 생물, 높은 천사들이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계4:8 

하나님을 가리켜서 “who was, and is and is to come.” 
찬송하고 있습니다. 

즉 신구약의 모든 교회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높은 계급의 천사들이 
하는 일은 기쁨과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보좌를 보니까 거기에 앉으신 이의 모양, 
즉 하나님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다고 했습니다. 

벽옥과 홍보석을 본 일이 없어서 이것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매우 아름답다는 뜻일 것입니다. 보석이라는 점에서 
아름답고 찬란한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 말씀은 뇌성과 같고 번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아름다운 분이시고, 
보좌는 위엄이 있는 보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의 제 1의 사명은 
이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육신은 밧모섬에 있고, 영은 천국에 이끌려서 본 것은 
교회와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그곳에서도 예배했다는 
예배의 중요성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 어떤 자세로 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예배를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반복되는 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고 찬양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있는지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귀한 날로 생각하고 그 분을 예배하는데 
우리의 마음을 다 드려야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임을 첫 번째로 말하고 있습니다.
    
몸이 가는 곳에는, 마음이 먼저 가 있는 법입니다                      
몸이 가지 않는 곳에는, 마음도 가지 않는 법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 나서고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요?

기도원에 매일같이 예배 드리러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번 강추위에도 빠지지 않고, 그 새벽에 기도드리러 오셨습니다.

저는 기도원 안에 사니까, 멀리 찾아 갈 필요가 없었지요.

찾아 가는 것,
몸이 가지만..
몸이 가기 전에, 마음이 찾습니다.

그러니 찾아 감에는, 몸과 마음의 어떤 관계가 있습니다.

몸이 찾아 갈 필요가 없으니.. 마음의 찾음이 그리 열렬하지 않습니다.
몸이 편안하니.. 마음이 그리 뜨겁게 찾지 않습니다.

평소에 저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 어디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하나님을 찾아 어디 간 적이 없습니다.

아무튼 기도원에 주님이 계시고,
내 안에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니
무엇을 찾아 어디 갈 생각이 없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의 축복인 것 틀림없지만
미동微動도 않으니.. 감동感動도 없는 것은 아닌가요..?   *작을 미, 움직일 동

몸으로 찾지 않으니..
주님을 찾는 마음도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몸이 간다는 것은, 먼저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이 가지 않기 때문에, 몸이 따라서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이 먼저 가야할 곳은, 과연 어디인가요?
또한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될 일은 지금 무엇일까요?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2.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통치자 하나님

세상에 누가 통치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물러날 것이고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보좌가 어떤 것입니까? 왕이 좌정하시는 의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권위의 자리이며, 의사 결정의 자리이고, 통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셔서 의사결정도 하시고, 통치도 하시고, 권위도 행사하십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가 네로 황제인지, 도미시안 인지 이견은 있지만, 
로마가 핍박을 할 때에 순교자가 속출하고 성도의 가정이 파괴되고 
성도들은 불의한 재판을 받아도 호소할 때도 없고, 
교회는 세상에 의해서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였음은 공통점입니다. 

이러한 때에 요한은 천국에 올라가서 비전을 본 것입니다. 
“아니다. 비록 세상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되 영원히 보고 계신 것입니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라는 것은 영원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임기 5년이 있는 것도 아니고 4년도 아닙니다. 
영원한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축복을 받는 것에 비하면 
잠시 잠깐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호주 시드니에 아더 스테이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1884년 생으로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인 영향을 받아서 
그는 10대에 알코올 중독에 걸렸습니다. 15살 때에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1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했다가 병을 얻어서 제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는데 그가 46세가 되던 1930년에 
교회에 양식을 얻으러 갑니다. 그 자리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는데, 
다른 단어는 생각이 안나는데 “영원”, 
인간에게는 “영원”이 있다는 단어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46세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영어를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는데 
“영원”이라는 글씨는 멋있게 쓰는 것입니다. 
손으로 “eternity”라고 스펠링도 틀리지 않게 잘 써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로부터 35년 죽을 때까지 약 50만 번이나 
시드니 곳곳에 다니면서 “영원”이란 단어를 쓰고 다녔습니다. 
지하철 역, 전봇대, 슈퍼 할 것 없이 다 쓰고 다닌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사람을 잡으려고 하는데 잡지를 못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페인트를 칠하는데, 이 사람이 쓰는 것을 발견해서 
그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잡아서 왜 “영원”이라는 낙서를 하고 다니냐고 하니까 
그가 “하늘로부터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영원이라는 
한 단어를 생각나게 하시고, 
이 영원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라고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시드니 선데이 텔레그래프 신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호주 시드니 광장에 가면 “영원 eternity”라는 이 사람이 쓴 글자가 
복제 돼서 알루미늄으로 포장되서 한 복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도 “영원”이라는 한 글자가 쓰여져 있습니다. 

이 아더 스테이스는 그 후로 “Mr. Eternity(미스터 이터너티, 영원씨)”
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호주 사람들이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표제어로 무엇을 쓸까 하다가 
이 아더 스테이스의 “영원”을 표제어로 사용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심지어 조나단 윌스라는 사람이 오페라로 만들었습니다. 
“the eternity man.”이라고 하는 오페라를 공연하기도 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노숙자 한 사람이 “영원”이란 한 단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50만 번이나 호주 사람들에게 영원이 있음을 깨우치게 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이 영원한 보좌에 앉아계시고 
영원히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확실한 사실에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불확실합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진리는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 한 가지는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3.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원자 하나님

3절을 보면, 보좌에는 무지개가 있어서 보좌를 둘렀다고 했습니다. 
왜 무지개가 보좌에 둘렀는가요? 

무지개는 창9:8-17절에 보면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을 불러놓고 언약을 맺습니다. 
“이제 다시는 내가 생물들을 홍수로 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너희하고 언약을 맺는다. 
그리고 그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겠다”고 하심으로써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홍수가 나고 어떤 지역이 수해를 입더라도 
인류가 물로 멸망하는 일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홍수로 망하지는 않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무지개 때문입니다. 

심지어 윌리엄 워즈워스 라는 사람은 
“내가 무지개를 볼 때 마다 내 가슴은 뛴다.”는 시를 썼습니다.

‘보좌에 무지개가 둘렀다’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구원의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다. 즉 구원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고 
회개하고 예수 믿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배를 받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24장로들은 머리에 있는 금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던지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면류관은 승리의 상징입니다. 

올림픽이나 육상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들에게는 옛날엔 면류관을 씌워줬죠. 
바로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죄로부터의 승리, 마귀로부터의 승리, 지옥으로부터의 승리, 
세상으로부터의 승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말미암는 것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주권자 하나님, 
지금도 통치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기도하는 성도들, 회개하는 죄인들을 구원
하시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영원히 경배하는 성도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자기 보좌에서 스스로 내려와서, 
주님 보좌 앞에 엎드린 사람의 참회시

「주님 지금 제가 절망하는 것은
저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입니다

저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제가 받아야 할 영광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인가를 상실했지만
그로인해 누려야 할 저의 기쁨이 떠나간 것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자신을 학대하고 있지만
주님앞에서 저를 내려놓은 겸손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다는 실망감으로
무기력해져 있습니다

이제까지 달려 온 정상을 향한 길에서
갑자기 마비가 온 것은
저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꽂아놓은 깃발이 나부끼는 자기 공화국에서
저는 보좌에 앉아 그 속에서 군림하기를 원했습니다

기도를 했으나.. 저를 세우기 위함이요
봉사를 했으나.. 제가 남보다 선행을 했다는 자기만족이요
교제를 나누웠으나.. 제가 인정받고 있다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을 했으나.. 그곳에도 저의 행복이 우선시되었고
축복을 했으나.. 상대보다 저를 더 우위에 두고 싶어 했으며
이 땅이 아니면, 하늘에서조차 보상받고 싶어 했습니다

나의 주님,
그토록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께서 저의 낡은 옷을 벗기시고,
묵은 짐들을 정리할 때마다

감사하기는커녕 비통해하고, 고뇌했으며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기보다는
날마다 힘겨운 잔들이 옮겨지기를 구하였습니다

오직 십자가 없는 면류관만을
믿음의 기적으로 사모했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고
사랑할 수 있는 감성을 주셨으나

이 모든 능력을 당신의 보좌로 가져가기 못했기에
나의 하늘은 먹구름이 끼었고
나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기를 저는 주님을 향한 순교자로 여겨졌고
세상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피해자로 여겨졌습니다

지나친 열정과 강박증에 가까운 집착 후에는
자기비하, 열등감, 무력증에 시달렸으니

내가 앓고 있는 우울증과 무력감의 중병은
자기사랑으로 인한 부패된 죄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기 환상’과 ‘자기 확신’을 불어넣으면서   
‘네 믿은 대로 될 지어야!’ 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자기와의 사랑을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왕국에 이르는 
절망의 나락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
이 세상에서 완전한 상실은 없습니다.

이는 애초에 제 자신도 주님의 것이었고
제가 가진 것은,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벗기시고, 낮추시고, 방향을 돌리심은
입히시고, 높이시고, 온전한 새 길을 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우리의 완전한 행복은 나를 부인하는 그곳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주님만 바라는 그곳에만.. 온전한 자유가 있습니다

당신을 구하는 그 곳에만.. 참된 기쁨이 있고+
당신의 영광을 소원하는 그 곳에만..
주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희락이 있나이다

진정한 겸손은
내가 사라진 보좌위에
오직 주께서 왕이 되셔서
저를 다스림 속에서 존재하나이다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지 않고서
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이는 당신만이 저의 진정한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