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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관련 조각글 3

LNCK 2023. 7. 30. 22:27

◈‘은퇴’ 관련 조각글 3       유1:24          ▣ <은퇴> 관련글 모음    

한경직 목사님은 영락교회의 목사님이 아니셨어요. 
대한민국 기독교의 목사님이셨습니다. 

특별히, 은퇴하시고 원로 목사님이 되신 뒤로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개신교의 (대표) 목사님이셨어요.

가톨릭에 김 수환 추기경이 계셨다 그러면, 
개신교에는 한 경직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 분이 남한산성에서 삶을 마치시던 그 공간을 가서 접했을 때는, 
그냥 오두막이에요 오두막, 남한산성이라고 하는 데가.
도저히 그렇게 흉내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습.

남한산성의 뭐 한 열다섯 평 되는 조그만 집에서
침대 하나 밖에 없는 침실에서

다섯 명이 앉을 수도 없는 거실에서 
그런 집에서 26년을 살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분도 가난의 영성, 삼무, 四無, 오무의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한경직 목사님은 모든 사람과 화해와 평화를 도모하셨습니다.

최창근 장로가 은퇴 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한목사님이 교회를 목회하실 때, 제일 주력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한목사님의 답변) ‘그것은 화해였습니다.’

영락교회에서 담임목사님으로서 은퇴하신 뒤에, 
개신교의 목사님으로서 삶을 사시던 그분에게 주어진 명성과 신분과 
위치에 비해서, 
그분의 실제 삶의 검소함과 청렴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다른 사람을 구제하시는 긍휼히 여기시는 그런 마음 같은 것은, 
흉내를 낼 수가 없고, 그야말로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로부터, 
복음으로 자유 하시다는 것을 아주 체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이 주는 (명예심으로부터, 물질로부터의) 자유에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오히려 은퇴 이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더 분명하게 깨닫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직업과 함께 나타날 수 있지만, 직업과 상관 없을 수도 있어요. 
어떤 모습이던지 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일평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지속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 넘어서까지 지속되는 겁니다. 
나를 통해 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후대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계속될 수 있는거에요. 

내가 직업으로 나의 정체성을 설명하려고 할 때, 
내가 그 직업을 잃고 은퇴하고 사라져버렸을 때 
‘나는 도대체 누구이냐?’ 

내가 그렇게 믿고 그 남편으로 인하여 내 존재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죽고 나면 ‘나는 누구냐?’ 

그것으로 인하여 그것으로 집중하고 
그것으로 내 존재를 설명하려고 했던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도대체 뭐냐?’.. 라고 하는, 크나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직분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만 
   사실은 한시적으로 제도적 교회 안에서 
   기능적인 그 일을 감당하도록 주어진 것이지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잖아요. 

   여러분들도 뭐 천국 가서도 "목사, 장로, 권사" 직분으로 부를 것 같아요? 
   직분은 천국 가면 없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상에서 어떤 기간 동안에, 
   제한적으로 주어진 기능을 감당하도록 준 것이란 말이에요. 

그 직분 자체가 나의 정체성으로 소개하려고 하면, 
나중에 공허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에요. 
결국은 우리의 삶에 어떤 것도 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아니 내가 이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의 세계까지 붙들 수 있는 나의 존재됨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물을 때, 주님이 한 가지 주신 기가 막힌 이름이 있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 신분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주어질 때 
이 신분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뭐 현재 어떤 현직에서 물러나도, 
하나님의 자녀 됨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오늘 만약에 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 신분 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것으로 포장하고 요란하게 나를 꾸미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내 존재를 자꾸 돋보이게 하려고 하고, 
그것을 인정을 받으려고 하니까, 불안해지잖아요. 
그래서 많은 것을 가져오는 거예요. 

제가 명함을 받은 것 중에 진짜 어떤 분은 앞 뒤를 빽빽하게 채운 분이 있더라고요. 
이것이 스스로 자기가 공허하다는 표현이겠죠. 

여러분 오늘 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딱 하나에요. 
우리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신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유1: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저 존 파이퍼는 지금 67세입니다.   *1946년생, 2021년 은퇴
이제 제 평생 목회 사역을 막 마치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간직하셨다는 사실에 압도당했습니다.

제 능력으로, 지금까지 목회를 해 온 것이기보다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제가, 타락하지 않도록 지켜주셨고, 
주님의 이름에 욕을 먹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제가 교회를 파괴하도록 놔두지 않으신 것도.. 바로 주님의 역사였습니다.
그걸 제가 은퇴하는 이 시점에, 강하게 깨닫습니다.

저는, 지난 수 십 년간의 제 사역을 되돌아보면서, 팔짱을 끼고서
‘나는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사역자였군!’ 이라고 자화자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주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주님이 제 일평생을 지키고 보존해 주셨습니다.
제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러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상태에서 바울이 1차 2차 3차 선교 여행 다 마친 
상태에서, 보통 선교사들이 세 텀 끝나면 은퇴합디다. 

여기서 바울이 은퇴한다고 아무 누구도 바울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죠. 
‘너 가면 잡히고 죽어.’ 그것도 한 번만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두 번까지는 참았다. 
저 같으면 두 번까지는 그래도 할래요, 했을 것 같은데 
‘아 이건 가지 말라는 말이구나.’ 라며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 뒤에 보세요 계속 성도들이 비슷한 계시를 받았어요 성령께. 
빌립의 딸들이 띠를 이렇게 묶고 성령께서 나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바울이 말하죠. 

‘나의 달력을 길고 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에 복음 전가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이 구절 ’마치려 함‘에서 ‘선교 종결’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바울과 같은 마음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선교 종결이요? 그 종결을 위해서 올인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의 생명을 조금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복음을 향한 밸류, 참 중요한 이 최종 주자 파이널 스프린터로서 가져야 할. 
근데 이거 어렵지 않습니다. 감히 말합니다. 
복음을 알면 돼요. 주님을 가지면 돼요. 

▲로제타 홀 선교사  
125년 전, 뉴욕에서 배를 타고 무려 54일간 걸려 
태평양을 건넌 로제타의 여행의 고생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만 54일만에 서울에 도착한 로제타는, 자신이 일할 여성전문병원인 
보구여관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그 다음날부터 조선 여성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2년 후 로제타는 서울에서 캐나다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해서, 
아들 셔우드 홀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2년 만에, 남편은 발진티푸스로 순직해서,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당시 로제타의 나이는 29세였고, 그때 로제타는 임신 7개월이었습니다. 
남편이 순직한 이듬해, 유복녀 딸 에디스 홀이 태어났지만, 
그 딸도 3살 때 이질로 죽어 양화진 아버지 묘 곁에 묻혔습니다.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과 어린 딸을 이국/조선 땅에서 잃었지만, 
로제타의 조선여성 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로제타는 1933년, 68세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조선 여성을 위해서, 자신의 평생을 아낌없이 내어주었습니다.

의사로서 단지 조선여성을 육체적 질병을 치료해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인으로서, 
주님께서 가난과 무지에 시달리는 조선 여성들에게 부어주시기 원하시는
‘참 생명의 통로’(바울처럼)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제타 자신이, 그 생명 속에 있었기에, 사랑하는 남편과 딸의 죽음도
그 생명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로제타로 인해서, 본문의 유두고처럼,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입은
조선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직도 살아있는 로제타의 생명
로제타 선교사의 후손들이, 로제타의 일기와 유품들을
‘양화진 문화원’에 기증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15년9월17일, 로제타 탄생 150주년과 내한 125주년을 맞아, 
로제타 홀 선교사의 후손들을 초청한 가운데, 
오전에는 선교기념관에서 <로제타 홀 일기 제1권> 출판기념식이 있었고, 
오후에는 양화진 홀에서 <로제타 홀 일기> 공개 특별전 개막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특별하신 섭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조선 여성들에게 주님의 생명을 부어주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던 로제타를 잊지 않으시고

그녀의 삶을, 역사의 조명 아래로 이끌어내셔서, 
그녀가 사랑했던 조선 땅에서
그녀의 삶이 영원토록 기려지게 하셨습니다.

로제타는 하나님 나라에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육체는, 소멸했지만 
그의 믿음과 정신은, 이곳 양화진에, 
아니 한국과 세계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은퇴 후 기도의 시간이 더 많아짐 

인간 한경직의 기도와 눈물의 삶은 
그가 17세 되던 191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신의주에서의 13년 동안과 영락교회에서의 27년 동안 지속되었고 
목회 은퇴 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1973년 1월 한경직 목사는 원로목사로 추대되면서, 
다음과 같은 소감의 말을 했다. 

"목사의 기도는.. 축복의 기도요, 감사의 기도요, 간구의 기도인 동시에 
목회자의 기도는.. 땀의 기도요, 고뇌의 기도이다. 
때로는 눈물의 기도요, 맥박의 단절을 느끼는 숨 가쁜 기도이다. 

목사는 현직에 있어도 목사요, 은퇴했어도 목사인 까닭으로 
기도의 내용과 그 특성이 달라질 리 만무하다. 
그러나 왠지 더 자유로운 심정을 가지게 된다. 기도의 폭이 넓어짐을 느낀다. 
기도의 시간이 더욱 많아짐을 감사한다." 

한경직 목사의 남한산성에서의 마지막 26년 동안의 삶도 
기도와 눈물과 묵상으로 이어진 삶이었다. 

백운경 장로의 말에 의하면 한경직 목사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30여분 동안 산책과 체조를 한 다음 
5시 30분부터 기도와 예배의 시간을 가졌고 

때때로 언덕길을 올라가 조그만 바위 돌 위에 앉아서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일본의 복음화와 남북의 통일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한다. 

아마 신의주 보린원 언덕에 올라가서 북쪽을 바라보며 
신의주 제2교회와 교인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던 때를 회상하며 
남한산성 언덕에 올라가서 북쪽을 바라보며 
영락교회와 신의주의 성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으리라! 

▲자빠져서 받은 은혜 (이중표 목사님 생전 설교) 

반포의 좁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어떤 때는 한이 생겼었다. 
'교회당만 넓으면, 수많은 청중을 모아 설교하면서, 나도 멋진 목사가 될 터인데....' 

그러다가 분당 신도시에 6천 평의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 땅을 둘러보니, 그 동안 쌓인 한이 
한꺼번에 눈 녹듯 다 풀리고 마음이 시원했다. 

그 이후로 옛날에 없었던 마음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이 넓은 교회 부지를 놔두고 어떻게 죽나? 어떻게 <은퇴>하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목회 열심히 해야지...' 

그래서 전에 안 하던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운동한답시고 배드민턴을 치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는데, 깁스를 두 달 동안하고 드러누웠다.  

'주여, 빨리 낫게 해 주옵소서. 설교하는데 지장이 많습니다..'기도했더니 
'너는 자빠져야 하느니라!'는 근엄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주여, 왜 그렇습니까?' 
'너는 6천 평의 땅을 가지고, 벌써부터 그 땅에 안주하려고 하느냐? 
차라리 자빠져서 하늘을 쳐다보아라!' (누워있으면 자연히 하늘을 보게 됨)

없던 땅이 생기고 나서, 거기서 안주하려고 하는 욕심이 생겼는데 
자빠져서 드러눕고 나니, 다시 옛날처럼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자빠지지 않고, 하늘을 보게 되시기를 축원드린다! 

▲다시 선행하는 행20:33~34의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절제하고 이웃을 위해서는 나눔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재정을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이런 교회상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는 것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께 드린 이 헌금이 두려운 돈이라는 것을 인식을 바탕으로 
단 한 푼의 낭비 없이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깨끗한 재정의 청지기로 살아오고자 애써왔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무섭게 양적으로 성장해 가던 시절에 
이런 성장이 목회자 자신의 왕국의 성장으로 비치는 오해가 없도록 
지구촌교회를 다른 목회자 보다 조금 빨리 만65세에 조기 은퇴할 것과 
지구촌 교회를 떠나는 날 어떤 경제적 이득이 없이 떠나겠다는 것을 
약속해 왔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중형 교회이상 대형교회를 목회하면 
소위 은퇴비의 명목으로 10억에서 30억을 받고 
주택을 목회자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이 사역을 마무리하며 
그런 보상을 받는 것이 반드시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만약에 단 한 사람의 교우라도 
제가 이런 보상을 받음으로 마치 돈을 위해 목회를 한 것처럼 비추이는 것은 
정말 싫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은퇴하며, 저는 약속대로, 단 한 푼의 경제적 이득이 없이 물러갑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서 귀국할 때 
몇몇 분들이 기흥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구입해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교회 사택으로 구입해 주신 것인지 
개인의 주택으로 주신 것인지 확실치 않아 고민하다가 
수년전 선교사님들이 사용할 주택으로 교회에 헌납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개척할 때와 마찬가지 모습의 빈손의 청지기로 물러갑니다. 
어쩌면 이런 약속의 이행은 지금까지 제가 해온 어떤 설교보다도 
더 중요한 마지막 설교일지도 모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은퇴 이후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하나님과 자신의 독특한 관계는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누구나 누리는 삶은 아닌 듯하다. 

시편 기도 
저는 매일 아침 5시반 이나 6시쯤 일어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고, 커피를 끊여서 마시고 
서재로 올라가 1시간 반 정도 시편과 신약을 읽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시편으로 기도하기도 하고, 
영어로 시편을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것들을 외우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도를 주로 한다는 뜻, 개인적 필요의 기도보다..) 

결혼 후 하루도 빠짐없이 이러한 아침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껏 40여 년쯤 되었을까요? 

숲에서 보내는 안식일 
그리고 동일한 세월 동안 우리 부부는 안식일
(일주일에 하루를 온전히 쉼)을 지켰습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저희는 숲으로 향합니다. 

숲에서 우리는 시편을 읽고서, 
두세 시간 정도 조용히 침묵의 시간을 갖습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나서, 육신이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 
일이라 부를 만한 것은 피합니다. 

저는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통제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제하시는 삶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아의 통제가 멈추게 됨으로써 말입니다. 

삶이 단순해지면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분주한 가운데 있으면서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리젠트칼리지를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삶의 분주함이 줄어들었습니다. 

이때 제가 느끼는 것은 
하나님에 관해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깊은 지각입니다. 

이러한 상실감과 빈 느낌 속에서 저는 
제 자신이 줄어들고, 하나님이 더 늘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모세처럼 기꺼이 퇴장하시는 용기 

일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서, 
자신은 느보산에서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끝까지 인솔해서 가나안까지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집착하다가, 평생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한 것을 
헛된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를 개인의 명예와 유익을 위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경직 목사님은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셨다. 
한 목사님은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주신 축복이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 분은 ‘한국교회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최소한 십 년 이상 더 목회하실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훌륭한 후계자를 세우시고 자신은 스스럼없이 은퇴하신 데 있다. 

그래서 <당신이 친히 목회하실 때 보다, 
후임이 목회하실 때 영락교회가 더욱 성장했다. 
한 목사님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란다. 나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다가 깨달았다; 
자신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사람도 훌륭하다. 
그러나 정말 더 훌륭한 지도자는, 자기 후임을 잘 세워서 
자기 때보다 교회가 더욱 부흥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영락교회의 예에서 보듯이, 
그 교회는 한경직 목사님 때보다 후임인 박목사님 때 더욱 부흥했고 
교회의 정점에 도달했었다.               *박조준 목사 

박목사님도 훌륭하시지만, 
자기 후임을 통해 교회가 절정에 도달하도록 유도하신 한목사님은 
더욱 훌륭하셨다. 

이런 역할과 모델을 보여준 지도자가 그 후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 
어쩌면 한국교회의 비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일할 때 그 단체가 정점peak과 절정기에 도달하기 원한다. 
나에게도 그런 어리석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동안교회를 섬겼던 기간이 
동안교회 역사상 가장 정점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만약 제 후임자가 동안교회에서 저보다 목회를 더욱 잘한다면 
마음이 게름직하고 걸리는 것이 아직 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나는 훌륭한 목회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런 어리석음과 싸우고 있다. 

▲영락교회 이철신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추억했다. 
한경직 목사로부터 예수님을 닮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배우게 됐음을 고백했다. 

이 목사는, 한경직 목사님은 늘 겸손하고 온유한 인격의 소유자로 회고한다. 
어떻게 저러실 수 있을까 하면서 유심히 지켜봤지만, 
몸이 아프고 고통이 심할때도 늘 한결같으신 모습은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 그것이었다고 기억한다. 

이철신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후임으로 많은 것일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늘 ‘수고하십니다.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합니다’라는 말만 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간섭하지 않으시는 겸손) 

한경직 원로목사님께 교회 일을 보고 하러 매주 찾아뵈었지만, 
한 번도 말로 지도해 주신 적이 없다며, 지난 날을 회고했다. 
-은퇴 이후에, 교회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시는, 극기의 인격을 보여주신 것이다. 

▲한국교회와 사회가 존경하던 한경직 목사님께서 

템플턴 상 수상 연설을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생의 삶을 지탱해 주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너무너무 귀중한 말씀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대로 인생의 삶을 지탱해 주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돈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스펄전 은퇴 당시 일화 

스펄전이 그의 타버너클 교회에서 평생을 사역하다가, 
이제 늙어 몸이 쇠잔해지니까, 사역에 대한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랬더니 온 성도가 일어나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이 
“제가 이 건강으로는 한 달에 한 번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말까입니다. 
그처럼 불충하게 목사일을 하는 것보다 나를 쉬게해 주십시요”라고 청했습니다. 

온 교회가 안 된다고 떠들었습니다. 

“목사님. 한 달에 한 번밖에 설교 못하셔도 좋으니 
제발 그만 둔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교인들이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지금이야 한 달에 한 번이라고 제가 말했지만 
그 다음 달에는 한 달에 한 번도 설교를 못할 터인데.”라고 하자 

온 교인들이 울면서 
“목사님, 우리 교회 목사님이 스펄전이다 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저희들은 만족하겠습니다. 
제발 그만둔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온 교우가 울며 말렸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려는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일까요. 
많은 축복 중에 하나는 좋은 신앙의 지도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스펄전은 평생 맡은 일에 충성했기에 
하나님께는 물론 교인들에게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담임목사 은퇴를 하고 아주 만만치 않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제 2년이 지나고 있는데, 제가 은퇴한 다음에 
이 예수동행집회를 처음 열게 되었을 때, 
어느 목사님이 '제가 너무 불쌍해 보이더라'는 거예요. 
마치 개척교회 하는 목사처럼 그렇게 보이더래요.

저렇게 큰 교회 담임목사 였다가 
갑자기 이제 은퇴하고 이렇게 예수동행집회를 여는데 
그 선한목자교회에서 예배드리며 집회하던 그때와 비교하면 
너무 모이는 인원수가 적어 보이고... 그래서 너무 초라해 보이는... 
그리고 너무 불쌍해 보이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뭐 그렇게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솔직히 뭐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제가 은퇴하고 난 다음에 '내가 너무 초라해졌다. 그래서 힘들다...' 그런 생각이 없어요. 

물론 제가 은퇴하고 난 다음에 변화는 많습니다. 
선한목자교회 담임목사 때하고, 지금 은퇴 후의 저의 삶하고는 변화가 많아요. 

은퇴 후가 힘들다고 느껴지는 경우는, 인생을 보는 관점이, 
신학교 들어가기 전, 
신학교에 들어가서 전도사 시절, 
목사 안수 받고 난 다음에 부산에서 목회할 때, 
안산에서 목회할 때, 
선한목자교회에서 담임 할 때... 이런 형태로 구분을 하게 되면 

그러면 분명히 제게 있어서는, 제 삶의 가장 피크가 지나간... 
선한목자교회의 단임 목사로서의 어떤 위치에 있다가, 
지금 은퇴한 목사로서의 제 삶은, 
분명히 예전보다 좀 쪼그라들고, 적은 규모이고, 
보기에는 좀 불쌍해 보일 수도 있는 삶이죠. 그렇죠. 

은퇴 전 담임 목사 때 제가 받았던 대우는, 이제 저에겐 다 사라졌습니다. 
그게 허전할 수도 있는 거죠. 

근데 예수님 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제 인생을 보면, 완전히 달라요.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을 때, 
목사의 아들 이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을 때..

그때는 외모, 외형.. 그런 게 중요했지요. 

근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면서 회심을 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 눈이 뜨이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점점 더 깊어져서 친밀함을 느끼게 되는 단계까지 갔을 때,

이런 관점으로 보면, 제가 담임목사에서 은퇴하는 것은, 
예수님과 친밀한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사건일 뿐이에요.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에 있어서는 
제가 은퇴한 이후에 더 깊어지고... 더 정확해졌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로 있을 때도 '주님과 동행하자'고 하는 삶이 제게는 가장 갈망이었지만, 
그래도 선한목자교회라는 울타리 때문에, 
제가 더 치열하게 더 주님 만을 갈망하는 것에 있어서는... 
은퇴하고 보니까, 훨씬 제가 (과거에) 전심을 다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은퇴를 딱 하고 난 다음에, 이제 담임목사 자리에서 나오고 보니까 
주님은 저에게 더욱 갈망의 대상이고, 
정말 예수님 한 분만 붙잡게 되고, 
예수님은 나의 왕 되심이 너무너무 분명해진... 
그러니까 은퇴는 제게 너무나 복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로 보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안드레를 부르시고, 
이렇게 제자를 부르실 때 예수님은 '24시간 나와 함께 지내자. 
이제 나 하고만 이야기하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그리고 나하고 같이 일하자...' 
그렇게 부르셨어요. 우리도 똑같은 거 아십니까? 

베드로와 나는 달라요? No 
베드로는 그렇게 부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까? No
여러분 이 생각이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베드로나 안드레나 또는 마태나 빌립이나 저나 여러분이나...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24시간 나와 함께 지내자, 나하고 이야기하자, 
나하고 같이 먹고, 내 일을 너가 같이 하자!' 똑 같은 거예요. 

여러분이 베드로, 안드레, 마태입니다.
그게 주님의 우리를 향한 부르심 이에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왕되심 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이 분명해지게 돼요.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을 살게 돼요. 그게 바로 천국 백성이에요. 

예수님이 왕 되신 삶을 살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냥 마음에 '예수님이 나의 왕이셔!' 이래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의 왕 되심이, 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다시 훈련되고 
또 순종하고, 실패 했다가 다시 주님이 일으키시고... 
그 과정을 겪어 가면서, 예수님의 왕 되심이 분명해 져요. 
제자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길을 겪는 거예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유혹도 올 거고요. 또 두려운 순간도 올 거예요. 
그때 예수님의 왕 되심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 
예수님이 왕 되신 사람으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다 무너지게 돼요. 

유혹 앞에 장사가 없어요. 핍박과 두려운 일이 닥칠 때, 
그 두려움에서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지금부터 주님의 왕 되심이 분명한 삶으로 계속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