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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구원을 이루라

LNCK 2023. 10. 4. 17:50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14            2023.10.01.정리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도입 일화/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임종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육군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께서 그 분을 방문했습니다. 
30분 동안 면회시간을 얻어서 신앙상담을 했습니다. 

면회시간이 다 끝나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병실을 나가려고 하니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좀 더 있다 가시지요' 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께서 가까이 다가가서, 그 분의 귀에다 대고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러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 건지, 제게는 아무 확신이 없습니다. 좀 도와 주시길 바랍니다.'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심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도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손을 잡고 간절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빌리, 감사하오. 나는 이제 준비가 되었소!'
그렇게 이별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구원의 3시제
여러분 구원이라는 문제는 최종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겁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가는 바로 거기에 구원의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최종 구원, '미래 구원'이고 
그 구원을 앞에 놓고 오늘의 '현재 구원'이 또 있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중요한 게 하나 있죠. '과거 구원

◑'현재적 구원'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로 그들은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파이널 골, 마지막 종착점이 거기에 있습니다만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광야 생활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았고,   *과거구원, 칭의 
또 구원 받아야 하겠고,  *미래구원, 영화
그 중간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매일 매일 사건 마다 새롭게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현재구원, 성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이 말씀은, '미래 구원'을 뜻하기 보다는,
'현재 구원'을 뜻합니다.
'이루라, 카테르가조마이'는 2인칭 복수 현재 중간태, 혹은 Passive Deponent Imperative 인데,
중요한 것은 시제가 현재입니다. 그래서 '현재 구원'을 뜻합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현재도 구원을 이루어가라.. 계속 성장시켜가라, 완성해가라.. 이런 뜻입니다.

아주 중요한 교훈입니다. 최종 목적이 '구원'입니다만
그 구원을 바라보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현재적 구원'이 또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친절하게도, 자세하게 "어떻게 현재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의 소원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나?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가시는가?' 
하나님의 소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위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현재적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란,  2:12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13

여러분 효자가 누굽니까? 효자는 부모님의 소원을 생각합니다. 
내 소원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소원을 생각하는 사람이 효자(성도)입니다. 

부모님의 소원을 져버리고, 내 소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불효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현재 구원을 이루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원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내 속에 알게 하시고, 
그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소원을 내가 갖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십니다. 이게 2:12절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내가 오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실천하고 산다면,
나는 오늘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입니다.  2:12~13 
그런 성도가, 마지막 미래 구원까지 이룰 것입니다.

▲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12
'두렵고 떨림으로' ..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피부에 와 닿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혹시라도 구원을 잃어 버릴까봐.. 
구원에 빗나가는 생을 살까봐.. 
하나님의 사람 답지 못하게 살지는 않을까.. 하고 늘 조심하는 마음, 
그것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성도가..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이죠.

가정에서도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녀가 되어서.. 부모님의 뜻에 합당하게 내가 살아가고 있는가? 
두려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가정이 평온할 것입니다.

부부가 되어서.. 배우자를 섬기는 것도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히 배우자의 기쁘신 뜻을 위하는 사람은
'그 가정의 구원(평안)을 날마다 이루어갈' 것입니다.

저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미국 유학 중에, 아 그 귀한 장학금을 받아가지고 공부했잖아요. 
'그 장학금을 내게 준 분에게 실망을 드리지 않을까?
그러니 내가 게을러서 안 되지, 내가 시간을 낭비 하면 안 되지..' 하는 
두렵고 떨리는 생각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3, 이어지는 14절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두렵고 떨림으로 생활하다 보면,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기 때문에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지는 것이죠.

지금 전체적인 정황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공동체)에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2:4
교회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다 보니.. 갈등과 다툼이 일어날 여지가 늘 있었죠.

그 가운데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현재적 구원을 이루어가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생각하며 살아라'
그래서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는 맥락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하신 큰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종종 조그만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뭐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심지어는 고기가 없다고 원망하고, 별 원망을 다했어요. 

나는 성경을 읽다가 한참 웃을 때가 있어요. 
이 사람들이 원망하다 못해서 '마늘과 부추 없다'고 원망했어요. 민11:5

결국 그들은 '현재적 구원'을 제대로 이루어가지 못했습니다.
원망과 시비하다가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4. '항상 복종하여'     2:12

공동번역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바울이 거기에 있을 때는 
(교회 리더십에, 서로에게) 잘 복종했나 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에 수감되어 있는 가운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내가 있을 때도 복종한 것처럼, 내가 없을 때에도 항상 서로 복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는 길이 된다는 권면입니다.

복종한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과 같은 말인데,
자기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며, 교회의 뜻(결정)에 따른다는 것을 뜻하죠. 

여러분, 복종(순종)의 덕을 익히지 못한 사람은 일평생 불행하게 삽니다. 
살려면, 어차피 복종해 살아야 되거든요. 복종해야 될 때가 많거든요. 
내 뜻대로, 내 맘대로만 사는 세상은 아니잖아요. 

때로는 내 생각을 딱 꺾어버리고 복종해야죠. 
그래서 복종의 덕을 익혀야, 비로소 그것이 그 순간이 내 현재 구원을 이루는 것이에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사람은.. 영영 자기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내 마음대로 늘 살겠습니까? 
내 뜻을 버리고, 억지로라도 주의 뜻을 따르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서 우리가 자랑스럽게 영광을 누리게 되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에요. 그래서 성경을 말합니다. 
'너의 구원을 오늘 현재 이루어가라' 점점 더 성숙하게, 온전하게 성장해가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찾아오는 위기는 뭐냐면 "정체" 입니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진도가 안 나가는 거에요. 
신앙이 공회전을 하는 거죠. 
엔진 소리는 욍욍 하는데, 차는 움직이지 않는 거죠. 차가 달려가지 않는 거죠.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구원의 감격, 구원의 영광을 놓쳐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구원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잘 모르는 거죠. 

그리고 나중에 자꾸 수준이 낮아지고, 목표가 떨어져요. 
'내가 예수를 믿는 게 뭔지..' 그 목표가 뭔지를 잃어버려요. 
그냥 교회를 왔다갔다 다니는 거에요. 그냥 죄 안 짓고 사는 거 정도... 
'뭐 이 정도면 괜찮지' 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교회를 그냥 열심히 다닐 뿐이지, 우리의 구원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신앙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신앙이 공회전을 하고 정체에 빠져버리기 쉽습니다.
뭔가 신앙생활에 신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대감도 없고요. 

바울이 빌2:12절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현재 이루어 가야하는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영적 고지가 있습니다. 

산악인들을 보면, 히말리아의 8천 미터 이상 되는 고지들을 올라갑니다.
그 정상을 향해 해서 계속 올라가는 거죠.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냥 동네 산에 올라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아요. 
왜냐면 더 높은 것이 있으니까요.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성화'에 대한 얘기인데, 
구원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더 깊고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룬다'는 말은 성화를 뜻하는데 
성화는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죠. 
이게 신앙에 최고의 목표예요.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

우리가 일평생 달려가도 그리스도를 100% 닮을 수는 없죠. 
그러나 우리는 그 목표를 포기해선 안 된고,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느냐...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봉사 열심히 하고, 선교 열심히 하고, 다 중요한데..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빌2장 서두에 보면,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 주고 있어요. 
하나님이신 분인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빌2:6~8

우리가 목표를 잘못 설정하면 이렇게 어떻게 되죠? 

세상 사람들과 비슷해지는 겁니다. 
우리 신앙의 딜레마가 뭘까요?
예수를 믿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도대체 뭐가 다르냐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직장에서 안 믿는 사람들과, 내가 
도대체 구분 되는 게 뭐냐는 거에요. 그게 없으면.. 딜레마에 빠지죠. 정체성 혼란이 오죠.

오늘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겨요. 
성도에게서 구별된 점, 특별한 점을 본 적이 없거든요

신자가 뭔가를 보여 준 적이 없어요.
뭔가 신비로움이 있고, '이 친구에게는 뭔가 있어' 
그런 범접할 수 없는 뭔가 있어야 되는데...
그러면 그런 미신자들이, 기신자들을 궁금해 하겠죠. 

근데 그들이 궁금해 하지 않아요.
요즘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아요. 
뻔하다는 거에요. 우습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신자다움을 보여 주지 못하는 거에요. 

우리는 열심히 하잖아요.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뭐 봉사도 열심히 하고, 
막 교회도 크게 짓고 했는데... 세상은 우리를 안 알아 줘요. 존경해 주지 않아요.
이게 우리의 딜레마에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줘야 되거든요.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하면 
교회에서는 통하는데, 밖에 나가서는 이게 전혀 안 통해요.
교회 직분자라고 해서, 안 알아줘요. 거의 존경해 주지 않아요.

바깥에 나가서 '목사님, 장로님' 이렇게 부르면
주위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며, 몸가짐을 좀 단정히 해야 되는데,
즉 어려움과 존경심을 느껴야 되는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는 거에요.
'너희나 내나 뭐가 별다르냐?' 하는 식이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그들 잘못도 있고, 우리 책임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뭘 많이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doing
'우리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being

오늘날 우리는 과연 신자다움을 갖고 있나요?
그 신자다움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야 된다는 거죠. 

그 성품과 거기서 풍겨나오는 그 모든 인격과 신앙적 기준 standard 라는 것은 
매우 고매합니다.
그리스도와 같아진다는 것, 성화로 점점 나아가는 일은 매우 고상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 예수님을
'네가 세상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모델로 보여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 스스로도, 
내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지향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갈 때,
즉 두렵고 떨림으로 매일 내 현재 구원을 이루어갈 때

하나님 나라의 모든 풍성함을 내가 누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신령한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행복해지고, 권위가 생기고, 당당해지고,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적 구원'이 몸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자동차 운전을 할 때 보면
처음에 운전이 마음대로 됩니까? No

내가 편안하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되려면
아무래도 최소한도 3년 이상 걸릴걸요?

또 어지간히 사고도 내고 이리 찌그러지고 저리 부딪치고
이래 가면서 이 '운전'을 몸에 익힌다는 말이에요.

몸에 익힌다, 익숙해진다는 말은, 숙련된 운전수가 핸들을 잡으면,
운전에 거의 신경 안 씁니다. 기어 넣고, 방향지시등 넣고, 차선 변경하고,
이거 거의 자유자재로 합니다. 도로에 차가 아무리 복잡하고 많아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운전히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거죠.

성경에 보면 "너의 구원을 이루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현재적 구원을 말하는 겁니다.

 

그 현재적 구원이, 운전이 몸에 익숙해져 배이는 것처럼,

성도 각자의 몸에 자연스럽게 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구원을 말할 때마다 "구원 얻었느니라" 그러고요,
미래의 구원을 말할 때마다 "구원 얻으리라" 하고 말씀하고요,
현재적 구원을 말할 때는.. ‘구원을 이루라’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을 이루라!" .. 이 말씀은 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가운데도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것도 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과거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현재와 미래까지 동시에 함께 생각해야 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내 몸에 마치 능숙한 운전기술처럼 딱 달라붙을 때까지..


▲신앙생활은 내세적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현재적입니다.
신앙생활은 ‘오늘’ 하는 것입니다.
구원도 ‘오늘’ 받아서, ‘오늘’ 복음을,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도 오늘 빌어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무시하고,
먼 미래에 얻을 구원만 염두에 두고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복음 이해가 아닙니다.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지만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누리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눅10:5
오늘 현재적 구원, 현재적 천국을 누리는 길 중의 하나는,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선배 목사님과 택시를 함께 탄 적이 있습니다.
택시 기사는 우리를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목사님이시네요. 사실 저도 신자인데, 신앙이 식은 지가 꽤 되네요.
저 같은 사람은 이제 신자라고 할 수 없겠죠?
저도 목사님들처럼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하는데....”

그러자 선배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기사님은 수많은 사람을 원하는 장소에 편하게 태워다 줍니다.
이렇게 자신의 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친절하게 모신다면
이것이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겠죠!”

기사님의 표정이 금세 밝아지더군요.
그리고 곧바로 “이번 주부터 다시 교회에 나갈게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때 목사님께서 “교회 안 나가면 벌 받아요.”
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이렇게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평화를 빌어주는 것이
현재적 구원, 현재적 천국을 사는 한 가지 길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