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이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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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이 없는 사랑 요13:1~7 2006년
몇 년 전 나온 “캐스트 어웨이 Cast awa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표류되어짐” 혹은 “던져짐”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척 놀랜드 Chuck Noland 라는 사람인데,
Fedex(우편회사)의 회사원으로서 매우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한 젊은이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족들과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호출을 받고 비행기를 탑니다.
그의 girl friend 약혼녀 캘리에게, 새해 전야에는 같이 있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탄 우편배달 비행기는 그만 바다로 추락 합니다.
척 놀랜드는 무인도에 표류하여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4년이 넘는 기간을 혼자 고독을 이기면서 매우 힘들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서 모든 어려움을 이길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하여금 생존에의 의지를 불태우게 한 원동력을 준 것도 켈리의 존재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뗏목을 만들어서 그 배를 만들었고,
그리고 지나가는 상선에게 발견되어서 구조됩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캘리는 다른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어요.
그리고 척 놀랜드는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장례식까지 치루었습니다.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괴롭지만은,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는 조용히 물러섭니다.
그리고는 갈곳이 없습니다. 매우 허탈해 합니다.
무인도에서는 탈출했지만, 그의 인생은 여전히 cast away. 표류하는 인생
“앞으로 가야하나? 뒤로 가야하나? 옆으로 가야하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방황하는 놀랜드의 모습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무인도에서 4년을 고독하게 가난과 고통과 어려움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었지만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린 허탈감, 이제 그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이제는 삶의 모든 에너지가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서 사랑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The art of loving> (사랑의 예술)이라는 저서에서
사랑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관심입니다.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책임을(responsibility)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책임이 아니라, 저 사람의 책임이라고 느껴지는 순간부터 참 사랑이 아닙니다.
셋째, 사랑에는 존경(respect)을 동반합니다.
상대방이 존경스럽게 느껴집니다.
진정으로 사랑할 때에는 반드시 존경을 겸하게 되어 있습니다.
넷째, 사랑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하려고 억지로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을 거야”하고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다섯째 사랑은 희생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참된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셨나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위를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하셨나요?
▲1. 끝까지 사랑함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전날 밤
몇 시간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이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훈을 주려 하십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3년동안 교육하신 모든 교육의 결론 부분이며,
가장 중요한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
He loved them to the very end.
예수님께서는 시간적으로 끝까지, 내용적으로 끝까지, 질적으로 끝까지,
사랑의 질에서 충만하게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기 쉽고,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본질도 변변치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완벽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이 식었다는 것은
신앙의 열정이 식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책망하는 말입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사람의 사랑은 이처럼 식어지고 변질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변치 아니합니다. 영원합니다. 완벽합니다.
이 시간도 여러분들을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끝까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신 은혜 베풀어 주실 줄 분명히 믿습니다.
♣나치 시대의 저항 신학자 본회퍼가 옥중에서 결혼식을 주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주례사가 『옥중서신』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만의 것이며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초개인적인 어떤 것이며, 하나의 신분, 하나의 직분인 것입니다.
사랑은 당신들로부터 오고,
결혼은 위로부터..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높고 보다 신성하듯이,
결혼의 권리와 그 약속은, 사랑의 신성이나 권리나 약속보다도 훨씬 더 높은 것입니다.
당신들의 사랑이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 당신들의 사랑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인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계21:9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
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결혼의 언약으로 묶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이 주님과 결혼을 유지해 가는 것이기 이전에,
주님과 결혼이, 그 사랑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루할 때나 식었을 때도, 그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면.. 결혼했으니까요!)
♣끝까지 가는 사람
수도원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잘 생기고, 능력 많고, 인간성 좋은 형제들, 하나 둘 떠나가더군요.
결국 끝까지 남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끝까지 남아도 그렇지 않은 형제들도 물론 있습니다만)
모질거나, 아니면 천사거나, 아니면 바보 같거나...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요즘 와서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이런 부족한 사람들이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족함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펀 글)
▲2. 섬김의 모범
요13:4~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잡수시고 계십니다.
유대사람들의 풍속으로는 식사를 하기 위해서 집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발을 씻어야 합니다.
주로 잘사는 집에서는 발을 내놓으면 집에서 일하는 종이 씻어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중동지역이 대부분 사막이고, 모래가 많고, 또 옛날에는 신발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발에 먼지가 많고 지저분 합니다.
그래서 발을 반드시 씻어야 됩니다.
이때, 종이 발을 씻어주게 되어 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서로서로 씻기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잔치음식을 잡수시는데
마침 거기에 발을 씻기어줄 시중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집이 노예가 있는 집이 아니었던 것같아요.
그러니 서로서로 씻기어주어야 할 텐데,
아무도 먼저 씻기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면 제자들의 마음속에 지금 시기 질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생각에는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유대나라 왕이 되실 것이다.
왕이 되시면 우리들은 좌, 우 정승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 우편에 누가 앉고, 좌편에 누가 앉고,
그 다음 자리는 누가 앉고, 그 다음 자리는 누구일까?...’
이런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자리다툼에만 마음을 쓰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먼저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 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네가 먼저 나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은 예수님의 발도 씻기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발씻지 못한 채로 그대로 앉아서 지금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매우 섭섭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한심한가요?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에는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식사 도중에 일어나셔서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에게 가셔서 '발을 내놓아라'하십니다.
성경에서 보는대로,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베드로는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6
예수님을 씻기어드리지 못한 바에는 씻김받는 것도 죄송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아무 말씀도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교부 크리소스톰은, 예수님께서 맨 먼저 가룟 유다의 발부터 씻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차례차례 열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배신하고 배반하는 그 사람들을 위하여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봉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 성숙한 성도 인가요? 섬기는 자입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요?
주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 나라의 한 권속이기에
서로를 돕고 섬기며 살아야합니다.
△안소니 드 멜로의 “사랑”이란 글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7명의 청년이 어느 마을 큰 잔치에서 정신없이 먹고 마시며 놀았습니다.
술에 취한 채 집으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청년들은 나무밑에 누워서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고 깨어나 보니 7명의 손과 발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고통 가운데 신음합니다.
한 수도사가 길을 지나가다가 묻습니다. "왜 이리 야단들인가?"
"어제 밤에 이 나무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느덧 우리 손과 발이 엉켜져 있어서
어느 손이 누구 손이고 어느 발이 누구 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좋은 수가 있지. 바늘을 가져와." 수도사는 바늘로 어느 발을 찔렀습니다.
"아야." "아, 이 발이 바로 자네 발이네." 다음 어느 손을 찔렀습니다.
"아야." "이 손은 자네 손이네."
7명의 청년들은 자기 손과 발을 다시 찾았습니다.
안소니 드 멜로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랑은 곧 이웃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웃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아무런 아픔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아픔을 느낀다면 그곳에 사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들은 영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섬기면서 살아야합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면서 살아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인 삶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을 씻겨 주는 이 사건을 통하여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3:14~15
♣복음서에는 두 개의 대야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쓰셨던 대야이고, 또 하나는 빌라도의 대야입니다.
<빌라도의 대야>는 뭐였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고서,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으로
자기 손을 씻었던 ‘회피의 대야’였습니다. 마27:24
의인이 죽든지 말든지, 나만 살겠다는 ‘회피, 방관, 이기심’이었습니다.
오늘도 세상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고개를 돌리고, 자기 손만 열심히 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저들의 굶주림과 아무 관련이 없다!’
빌라도와 같은 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야>는 사람을 섬기고 더러움을 씻어내는 대야였습니다.
누구든 수용할 수 있는 ‘겸손의 대야’였고,
죽음을 앞두고 애끓는 심정으로 사랑했던 ‘사랑의 대야’였습니다.
오늘도 노숙자/행려자/독거노인 사역을 하면서
그들을 씻기시는 분들은
‘예수님의 대야’를 가지신 분들입니다.
▲3. 내일을 바라보고 인내함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예수님께서 ‘이 센스 없는 사람들아!’ 하고 책망하지 않으셨어요.
지금은 뜻도 모르고, 왜 이렇게 하는지도 모르고,
왜 이런 일이 있는지도 모를 터이지만,
언젠가는 너희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later you will understand.”
여기에서 우리 주님의 참 사랑을 또한 깨닫게 됩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참아 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내일을 바라보고 오늘 인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7
얼마나 여유있고,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망을 두시고,
먼 미래를 바라보고 참고, 기다리고 인내합니다.
△피터 곰즈(Peter Gomes)라는 하버드 대학의 교목실장으로 일하시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어느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자기 가정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농부였습니다. 크랜베리 Cranberry를 재배했는데
아주 재배하기 어려운 농작물입니다.
하루는 아버지와 제가 같이 밭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목회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보더니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아들에 대한 소원이 하나 있었지.
나의 아들이 정직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어.’
저는 아버지의 뜻을 너무도 잘 이해했습니다.
저는 게으른 농부가 훌륭한 농부가 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농사 일은 지속적인 노동입니다. 또한 열매를 기다리는 노동이죠.
한편 일을 많이 할수록 열매가 많이 맺히는 정직한 노동입니다."
농부의 특징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
일한 것의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인내입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성령 충만한 삶은
주안에서 미래의 열매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마치는 말
이 시간 여러분들을 향한 우리 예수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2)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시며 사랑해 주셨습니다.
3) 내일을 바라보고 인내하시며 사랑해 주십니다.
이 한주간도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아낌없이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 그리고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신 성령님의 은혜를 굳게 의지하고
승리하는 한주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굽이 돌아가는 길 박노해 詩
올곧게 뻗은 나무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아름답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 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