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승천
2021 10 17 사도행전 1:9~11 / 예수님의 승천 - YouTube
◈예수님의 승천 행1:9~11
행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서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장면입니다.
승천은 말 그대로, 예수님이 하늘로 올려진 사건이죠.
원래 계셨던 하늘로 예수님이 달리 다시 올라가신 사건입니다.
이 승천은 그리스도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이 승천 만큼, 또 무시되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그분의 부활'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승천'에 대한 질문에는, 대부분 잘 대답하지 못합니다.
'승천'은 뭐 그냥 하늘로 올라가셨다... 뭐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 주일에 승천을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이렇게 우리는 주님의 승천 (교리)을 매 주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죽으심과 부활 못지 않게, 승천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예로 요7:3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예수님의 승전을 말씀을 하시는 거죠.
요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이처럼 주님은 누누히 제자들에게 승천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 말씀해 주셨을까요?
그만큼 우리를 위해 중요한 사역이 '승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승천' 이야기가,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분기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고대로 승천을 하십니다.
자 그런데 주님이 승천하시는 장면은, 신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 보면,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장면이 미리 나옵니다.
단7: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여기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고 말합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는 방향이 어디죠?
밑으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로 가십니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로 가십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예수님의 승천을, 미리 구약에 예언하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에 걸쳐서,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승천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만 얘기한 게 아닌 거죠.
예수님의 승천 역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셨던 그 장면, 그 현장을 마주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는데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만 승천하신 것이 아니었죠.
구약에 보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려진 두 사람이 나옵니다.
엘리야 와 에녹입니다.
그런데 엘리야 와 에녹의 승천은 예수님의 승천과는 다릅니다.
마치 이것은, 주님의 부활과 나사로의 부활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부활보다는 신유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결국에 다시 죽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정확히 부활이 아닌 거죠. 그냥 신유의 일종입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다릅니다.
그분의 부활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 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죽지 않으시는 부활 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주님의 몸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몸입니다.
그 분의 부활한 몸은, 시공간에 메이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활과, 나사로의 부활은 질적으로 다른 부활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사로의 부활은 우리에게 주는 이익이 없습니다.
물론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우리가 영적인 교훈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부활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사건은, 우리에게 유익이 있습니다. 왜 유익을 있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분을 믿는다면, 그분이 부활하신 것처럼,
나의 몸도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승천도 마찬가지겠죠. 구약에 에녹과 엘리야가 승천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님의 승천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후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신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부활체를 가지고 하늘에 계십니다.
그분의 승천은,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과는 현격히 다른 거죠.
뿐만 아니라 엘리야와 에녹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분의 승천 역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이익이 무엇입니까?
혹시 이 부분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승천에 대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세 가지로 정리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여러분, 참고로 교리를 꼭 배우셔야 합니다. 주1)
*요리(要理)란, 한자로 '요긴한 가르침', '종교의 중요한 교리'를 뜻함. 주2)
그래서 오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따라서
<승천의 3가지 이익>을 함께 살펴볼 텐데요,
이 3가지 이익은 우리가 가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9문 문 :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로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간구하십니다. 둘째, 우리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 이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인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올리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 보증으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며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위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
이것이 (신학자들이 정의한) 승천의 세 가지 이익입니다.
그러니까 이 순서에 따라서, 하나씩 오늘 본문을 대입하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유익, 승천하신 주님이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십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로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말없이 승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말 없이 그냥 하늘로 이렇게 쭉 올려지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어떻게 올라가셨죠?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눅24:50~51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예수님은 손을 들어서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여러분 이때 축복은, 단순히 립서비스(덕담)가 아닙니다.
'그래도 내가 이제 너희들과 마지막인데 축복을 한 번 해주고 떠나마'
그런 차원의 축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승천하시는 순간에,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그대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서도,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그들에게 여전히 축복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믿는 우리를 여전히 축복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는 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죄 사함의 축복이죠.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시는 죄사함의 복입니다.
이 죄사함의 복을, 하늘에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히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여기 '그'는 승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우리 옆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 바로 옆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자 그러면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요일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대언자'는 변호사 advocate 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우리의 변호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상황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실까요?
'우리가 범죄했을 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참 많이 짓죠.
그때 우리는 죄책감이 밀려 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놈은 버리실 거야'
'최소한 나를 버리진 않더라도, 나를 고깝게 보실 거야,
내가 하는 일을 망하게 하실 거야'
그런 죄책감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쓰나미처럼 몰려옵니다.
기도를 하려고 하면 '나 같은 놈의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을 거야'
이렇게 기도가 안 됩니다.
심지어 우리의 구원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나 같은 자를 하나님이 정말 구원 하실까?
나 같은 놈을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실까?'
그때 예수님이, 하나님 옆에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변호해 주시는 거죠.
자 어떻게 변호해 주실까요?
'성부 하나님, 저가 원래 그런 자예요.
쟤는 원래 저렇게 죄를 짓는 사람이예요. 쟤는 원래 좀 부족한 자예요.
저도 쟤 때문에 참 답답합니다. 성부 하나님, 쟤는 그냥 좀 이해해 주세요..'
여러분 그렇게 하실까요. 아니겠죠.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이렇게 변호해 주십니다.
'하나님, 이정관(설교자)이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내가 이정관이 받아야 할 모든 죄의 형벌을
다 십자가에서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정관의 행위를 보지 마시고,
저 Jesus 를 보시고, 이정관의 행위를 용납하여 주옵소서.
내가 이정관의 모든 죄를 저의 피로 다 씻었으니, 이정관을 선대해 주옵소서,
이정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정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지금도 승천하는 주님은,
이 땅에서 이루신 십자가에서의 사건을 계속해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공로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적용해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공로에 기초해서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그 분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니 결코 영원히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롬8: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러분 누가 지금도, 오늘도,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 옆에서, 오늘 이 시간에도, 하늘에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죠?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일입니다. *대제사장적 기도
우리를 위해 지금도 하늘에서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죠?
여러분들 우리의 행위 때문일까요, 우리의 믿음 때문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간구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니, 결코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히 사랑해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아니, 영원히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마침내 하늘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면 승천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 옆에서 쉬지 않고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기도를 쉰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의 이익입니다.
▲2.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시는 두 번째 이익은 무엇일까요?
승천으로 우리를 (예수 안에서) 천국에 앉혀 주셨습니다
"둘째, 우리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
이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인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올리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하이델베르크 49문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을 볼 때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행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데서 올려져 가십니다.
이 장면을 볼 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꼭 공개적으로 승천하실 이유가 있으실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부활하실 때는 공개적으로 부활하셨나요? No
주님이 부활하실 때, 그 주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만난 건, 부활하신 이후인 거죠.
그런데 승천은 다릅니다. 승천하실 때는, 지금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올라가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굳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시는 이유가 있으실까?'
그냥 따로 제자들에게 '나 내일 천국으로 올라간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홀연히 모습을 감출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안 보이는 데서 조용히 사라지셔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보는 눈 앞에서 승천하십니다. 왜일까요?
△여기에는 먼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 엘리야의 승천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서 엘리야를 하늘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그 광경을 본 엘리야의 제자들이 어떻게 했죠?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회오리 바람이 엘리야를 하늘로 올렸다가, 땅에 떨어뜨려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디 산이나 골짜기에 엘리야가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한 거죠.
여러분! 만약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으러 다녔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승천)을 믿지 못한 채
예수님의 흔적을 찾으러 다닐 것입니다.
아마 수많은 유튜버들이 지금 활동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아마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하늘로 올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을 직접 눈으로 보게 하심으로써
그들도 주님처럼 하늘로 들어가게 될 것에 대해, 확신을 주는 데 있습니다.
행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예수님이 지금 하늘로 올려져 가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뭐가 등장하죠? '구름' 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구름이 예수님을 가려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구름'은 단순히 물리적인 구름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구름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나타냅니다.
그 예로,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구름 기둥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상징이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임재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영광의 구름입니다.
출40장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성막을 완성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이 성막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구름 때문에, 막상 성막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출40: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여러분 모세는 구약의 중보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자입니다.
그런데 막상 모세는, 영광의 구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도 가득해서, 성막에 감히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 9절을 보면, 예수님이 구름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영광의 구름입니다.
출애굽기 성막에 가득했던 그 구름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모세와 달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구름을 뚫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의 성전, 하늘로 들어가십니다.
여러분, 지금 비교가 되시나요?
구약의 중보자인 모세는, 그 영광의 구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영광의 구름에 쌓여 하늘의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여기 '하늘의 성전'은, 진짜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장소적인 천국을 말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우리에게 친절하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히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여기 하늘의 성소는, 구약의 성전과 달리 진짜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 분의 보좌가 있는 곳이고, 장소적인 천국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성전,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후로, 이 하늘의 문은 인간에게 닫혀져 버렸습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던 영원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 영원한 곳으로, 우리 구주께서는
지금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 분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천국의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믿는 우리 또한,
그 분을 따라 하늘의 영광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지금 주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들에게 닫혔던 하늘의 문이 나를 통해 열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대표해서, 너희들보다 먼저 내가 하늘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이제는, 나를 따라 하늘로 올려 지게 될 것'을
그들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승천하심은, 단순히 이벤트가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멋지게 올라간다' 그걸 보여주는 단순한 퍼포먼스나 뽐냄의 차원이 아닙니다.
이 승천은 우리를 위한 승천입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들어 가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은
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으로 그렇게 들어가게 될 것을
지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한 확신한 바울은,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살전4:16~18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어떤 일이 벌어지죠?
그 분을 믿는 우리 역시 어디로 끌어 올려져요?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집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어디서요?
주님이 먼저 들어가신 참 하늘, 천국에서요!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 승천을 본 제자들도 확신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자들의 터닝 포인트의 시점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잡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담대하게 변했다'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런데요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게 된 것은,
바로 오늘 주님의 승천을 목격한 때부터 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의 결말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의 그 이후 반응이 이렇게 나옵니다.
눅24:52~53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그 전에 제자들은, 주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이라는 문은 다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두려움의 장소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똑같은 장소에서 하나님을 담대하게 찬송합니다.
그것도 '늘 성전에서' 보란 듯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유대 종교 권력자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잡아갈 테면 이제는 잡아 가라'는 거죠. 왜 그렇죠?
죽음과 동시에 영원한 하늘로 들어갈 것을, 이제는 너무나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직접 주님의 승천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그들은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된 결말이, 여러분 우리의 결말입니다.
이 영원한 승리가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그 천국의 문을 통과하여
영원한 천상에 들어가게 될 자들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영원한 천상의 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영원한 문을 통과하여, 천상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또한 그 문을 따라, 그 문을 지나, 천상에 들어가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우리는 이미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둘째, 우리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
이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인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올리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49문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함께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몸이 분명히 현실에, 한국에 있죠.
그러나 우리의 몸은 동시에 '이미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건 그냥 뇌피셜이 아닙니다. *자기 개인의 생각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금 하늘에 앉아있다고 말씀합니다.
시제를 보십시오. '앞으로 하늘에 앉을 것이다' 하는 미래형 시제가 아닙니다.
시제가 과거입니다. *살리셨고, 일으키사, 앉히시니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서 죄와 싸우며, 날마다 넘어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긴 존재라는 것입니다.
죄를 이겼고요. 사망을 이겼고요. 사탄을 이긴 존재입니다.
내가 잘 하면 천국에 가고, 내가 못하면 지옥에 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존재 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순종과 변화와 승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게 없으면 '지적 동의')
왜냐면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의 승천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죽은 다음에 하늘로 반드시 올려 질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 된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앉아 있다'는 말은, 성경에서, 보좌에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내용을 쓰고 나서,
또한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발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는 하늘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소속된 사람과는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선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땅의 일입니다.
전부 다 땅의 것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갑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 살까?'
결국에는 땅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사도 바울은 지금 뭐라고 설교 하죠?
'너희는 하늘의 시민인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땅의 것들에 의해, 너희들의 삶이 좌우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의 것들에 의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놀아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고,
거기에 기도해서 하나님의 도움까지 더 받아서
이 땅의 것들을 더 누리고 살아가는 (기복주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그런 인생과는 무관한 삶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성공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을 덜 하고,
더 편하게 살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게 아닙니다.
여러분 잘 먹고 잘 사는 게, 우리의 삶의 목적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 인은, 오히려 그런 세상의 삶에서 구속함 받은 존재입니다.
이러한 삶으로부터 우리는 건지 받은 자들입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이 우리에게 이미 활짝 열려 있고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거처가 이미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곳(지상)에서, 우리는 그 승리를 누리는 자들 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대충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이 확증되었으니) 공부하지 말고 놀아라, 일하지 말고 놀아라...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시각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도는 '하늘에 앉은 하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시각, 천상의 시각으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불신자와) 똑같은 삶을 살지만, 하늘의 시각으로
다른 가치와 기준으로, 오히려 이 땅을 거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여러분 우리는, 위의 것을 바라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으로,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모든 은혜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시민권자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이 영생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천상에 눈이 열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이 땅을 다르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땅을 다르게 살게 하는 믿음은, 이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앉아 있는 하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주님이 올라 가셨던 하늘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열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한 주간 땅의 것이 아닌, 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승 천이 우리에게 주는 세 번째 이익이 무엇입니까?
승천하심을 통해서, 성령을 대신 보내주셨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 보증으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며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위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49문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승천을 볼 때 드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굳이 예수님을 승천하셔야 했는가?'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계속 이 땅에 살아계신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지금도 직접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옥 같은 설교 또한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지 않으시고, 여기에 계속 계시면
훨씬 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No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제 몸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여기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동시에 옆에 있는 교육관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거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계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려면, 사람들이 주님이 계신 곳으로 직접 가야 했습니다.
주님은 세상 어디에나 계시지 않으시기 때문이죠.
요즘 큰 교회를 보면, 담임목사님 얼굴 보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물론 스크린으로 볼 수는 있겠지만, 직접 대면해서 교제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계속 계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전히 우리의 담임목사님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이스라엘로 직접 가야 했을 것입니다.
간다고 해도, 쉽게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먼 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매일 예수님을 보고, 그 분과 교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늘의 계심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성령님(예수님의 영)을 통해, 주님은 우리와 늘 함께해 주십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우리 눈 앞에 승천하시어 우리는 슬프게 돌아섰으나
알고 보니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계셨나이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천의 이익입니다.
주님은 천상에 계시지만,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오늘도 함께 하십니다.
언제까지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입니다.
여러분,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행1:11 '하늘로 올려지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말합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게 아닙니다.
그 때까지 주님은 우리와 날마다 함께 하십니다.
어떻게요? 그분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그래서 승천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바로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승천 후 10일 후에
주님은 이 성령을 통해,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날마다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승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날마다 만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시간과 장소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무릎 끊는 그곳에서 언제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가운데, 주님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늘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을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 그것이 우리를 이 땅에서 다르게 살아가게 만드는 힘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날마다 역사하시면! 말입니다.
여러분, 이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매일 일어나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날마다 보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곳에 앉아 있는 우리를 보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다르게 살아가게 하는 하늘의 시각이
우리 모두에게 진실로 열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주어진 복된 신분과 영화를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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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교리를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이유
여러분 우리가 어디서 승천의 유익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성경을 공부한다 할지라도, 여러 설교를 듣는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서, 스스로 승천의 유익을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스스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리는, 그런 신학적 질문을 우리에게 정리해서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신앙의 내용들은, 교리를 배워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교리를 꼭 배우셔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나,
우리 교회는 지금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배우고 있는데요.
이런 교리를 배우지 않고서는, 우리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승천 교리에 대해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승천 교리 뿐만 아니라
사실 다른 모든 기독교의 핵심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단순히 그런 교리를 모른다, 단순히 승천을 모른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죠.
승천의 유익이 주는 복음의 풍성함을 누릴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의 가난함을 넘어서 부유함을 위해서도
여러분 교리를 꼭 함께 배우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리는, 참고로 인간의 산물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산물입니다. 성경의 빛 아래에서 정리된 성경의 내용입니다.
주2) 교리문답 Catechism 은 그리스어 '카타케오'(κατηχέω)에서 나온 말.
'알려주다 inform, 전해주다 report'는 뜻. 눅1:4
'이미 각하가 알고 있는 바(카테케데스)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 눅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