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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에 임하신 성령

LNCK 2024. 11. 20. 17:5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성령론

2021 11 07 사도행전 강해 (6) / 사도행전 2:1~4 /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 - YouTube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       행2:1~4     

 

※성령론에 대해 다양한 주장과 신학들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도 성령이 임하신 적이 있지만, 신약의 성령과 다른 점은,

구약의 성령은 그냥 '성령'이고,

신약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고, '예수님이 보내신 영'입니다.

구약의 성령은.. 영, 혼, 육 할 때의 '영'이란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고,  요4:24

신약의 오순절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나타남이란 점에서 현격한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      


행1장에서 우리는 성령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던 성령이 임하십니다.
오순절 날 모여 있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하죠.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우리가 먼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강림의 의미입니다. 

◑행2장 오순절 성령강림을 접하면서 생기는 질문들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마주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마치 '성령이 새롭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새롭게 일어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방언을 하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마치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처음 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면에서,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1. 첫 번째 질문은, 구약에서 성령님이 오신 적이 없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마치 성령이 처음 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전에는 성령이 오신 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그 전에는 성령님이 오신 적이 없습니까? 
구약에는 성령님이 임하신 적이 없습니까? 

아니죠. 구약에 보면 성령님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님께서는 여러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먼저 성령님은 성경 첫 장인 구약 창세기부터 등장합니다. 
창1장은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는 장면이죠. 그때 성령님의 사역이 나옵니다. 

창1:2 '땅이 혼돈 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 하나님의 영은 누구를 가리키죠? 성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창조 때부터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사 삼손인데요.

삿13: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삼손)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여호와의 영이, 즉 성령이 삼손을 움직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삼손에게 임하셔서, 강력한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능력은, 머리카락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삼손의 능력은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영, 성령님의 능력에 있었습니다. 

삼손뿐만 아닙니다. 출애굽기에도 보면, 
모세 역시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고요. 
또 다윗에게도 역시 하나님의 영,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구약에 보면 수많은 구약의 본문에서 
우리는 성령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질문이 당연히 오늘 본문에서 생기는 거죠. 
'그러면 성령님이 구약 때도 임했는데, 
왜 본문에서는 마치 처음 임한 것처럼 성령을 새롭게 소개 하는가?' 

▲2. 두 번째 질문은  '성령은 두 번 받아야 하는가?' 
한 번 성령을 받는 걸로 부족한 것일까?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습니다. 
여기서 또 우리가 한 번 헷갈리는 거죠. 

'제자들은 그 전에 성령을 받은 적이 없는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전에 제자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다/ 아니다, 받았다'
여러분 어느 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전에도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죠. 고전12:3

그들은 주님을 믿었잖아요.
그러니 그들은 성령을 이미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들은 또 성령을 받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오해를 당연히 하게 되는 거죠. 
'아 성령은 두 번 받아야 하는구나'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한 번 받고, 
믿은 이후에도 또 한 번 받아야 하는구나!' 

'그러니까 성령을 한 번 받는 걸로 부족하고, 두 번 받아야 충분한 것이구나' 
'두 번 받아야 능력 있는 그리스도 인의 삶을 사는구나' 
이런 오해를 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렇게 가르치는 교단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먼저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 하면, 우리는 사도행전 전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는 내내, '성령'이 나오는 본문마다 계속해서 장애물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주해 설교 보다, <오순절 성령> 자체에 대한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래야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오순절 날 성령이 새롭게 임하셔야 했는가요? 
분명 구약에 보면, 성령이 임하셨었죠. 
또한 신약의 제자들도 성령을 이미 받은 자입니다. 


(*물론 사복음서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나오진 않습니다.
고전12:3절에 근거해서, 제자들이 이미 성령을 받았다고 유추하는 거죠.

구약시대의 성령을, 오순절 성령과 동일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 본문은 
이전에 성령님이 임하신 적이 전혀 없다는 듯, 
갑자기 오순절에 성령이 새롭게 임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중략

            

◑그렇다면 오순절 날 성령이 오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순절 날 성령의 강림이, 구약의 성령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요? 

여기에는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1. 첫 번째, 오순절 날 임한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 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을 보면, 구약에 보지 못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표현입니다.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을, 베드로가 이렇게 친절하게 해석해 줍니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구약에 절대로 등장하지 않는 성령에 대한 표현이 있습니다. 
오직 신약에 오순절 사건에만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에는 성령에 대한 이런 (예수님이 보내신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이 표현이 처음 쓰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 성령 사건은, 단순히 그냥 성령님께서 오신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을 누구의 이름으로 보낸다고 말하죠?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표현은 구약성경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만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도,
구약의 성도들이 받은 성령님과 동일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성령님이나, 신약의 성령님이나 동일한 성령님이십니다. 
다만 구약의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 이란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을 시작으로, 우리가 받은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 이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구약의 성령과 오순절 성령의 첫 번째 차이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받은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 전에 이들은 이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죠? 
그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7:39절은 이렇게 말씀한 바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제자들은 예수를 믿고서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고전12:3절에 의해 추론하는 거죠.

이 경우, 같은 증거를 해 줄만한 서너 구절의 증거가 더 필요한데, 오직 이 구절 위에

모든 신학적 이론을 쌓아올리기에는, 기반이 너무 허약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뭐라고 말해요? 
그럼에도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요7:39 

(*그렇죠. 제자들은 아직 성령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죠? 
그러면 이때 받지 못한 성령은 어떤 성령이에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 입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아직 예수님이 죽으시지도 않고, 부활하시지도 않으셨고요. 
그걸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다'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직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으셨죠. 그분의 구속 사역이 다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제자들은, 드디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입니다. 
이게 바로 구약의 성령과, 오순절 성령의 차이입니다. 

오순절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2. 그래서 구약의 성령과 오순절 성령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 이십니다.

 

자, 구약 성경에 절대 등장하지 않는, 
신약성경에만 등장하는 성령님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을 표현하는 다양한 호칭 들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 하나님의 영' 이렇게 성령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부터는, 성령에 대해 다른 표현이 등장합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벧전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여기서도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성령을 '예수의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갈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을 '아들의 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행5: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성령을 '주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행2장 이후로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 아들의 영, 주의 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구약에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른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같이 신약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표현합니다. 

왜 그렇죠? 
신약의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순절 전과, 오순절 후의 성령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 전에도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전의 성령은, 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구약의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또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령은, 물론 이러한 일 들을 계속해서 하시지만, 
주된 사역이 무엇이죠?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신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드러 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시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영돈 교수는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오순절 전과 오순절 후의 성령 사역의 근본적인 차이는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영적으로 다시 오신 것이다"

여러분 물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성령님이 같은 존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 영이 두 역할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성령님은, 삼위일체에 있어서 구별된 분이시죠. 
다만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영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순절 전까지 그 누구도 
이러한 성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제자들도,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전까지 그들은,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죠. 예수님이 아직 영광을 받지 못 하셨기 때문이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구속사의 영광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속의 사역을 다 완성하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제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성령을 이미 받은 이들이 
오늘 성령을 받아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이 약속된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우리가 처음부터 예수를 믿을 때 받은 성령은, 어떤 성령이에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입니다. 우리는 그 이후에 태어났으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또 성령을 받아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처음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을 
예수를 믿을 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 번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시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를 믿은 후에, 즉 중생 이후에 
성령을 2차적으로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또 성령을 받은 받는 게 아니라, 
이미 받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거죠. 

그래서 성령충만 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거죠.
그러나 본문의 제자들은 과도기에 있었던 거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아직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죠. 
그러나 모든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하늘에서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제자들이 받은 오순절 성령의 의미입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이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임하신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 깨닫게 하시고, 만나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시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었죠. 
그러나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며칠 전에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이죠. 

더 이상 그들은, 사랑스러운 예수님을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승천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만큼이나 
영적으로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만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영인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별하기 전에 
이렇게 계속해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러분 이때 예수님이 '다시 오리라'는 말씀은, 먼 미래가 아닙니다. 
곧 진짜 금방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곧 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오십 일 후, 그날이 오순절입니다.
승천하시고 십 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 오순절 날에, 예수님은 약속대로 진짜 오셨습니다. 
물론 다시 오신 그 분은, 육체로 볼 수 있는 예수님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 내시는 성령이, 
우리의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 같이 생생하게 그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제는 예수를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그 분을 사랑할 수 있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겪고, 만지고, 체험하지 못하지만, 
성령을 통해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자, 이것이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정리하면, 성령님은 구약 때나, 신약 때나 똑같이 임 하셨습니다. 
자 그런데 오순절 이후에 성령님의 주된 사역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드러내고 나타내는 사역을 하십니다. 

그 성령을 통해,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이고요. 
그리고 그리스도 그 분을 믿게 된 것이고요. 
그리고 오늘도 그리스도 그 분을, 눈으로 보듯이 생생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행전 입니다. 왜 그렇죠?
성령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12제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때,

예수를 주로 믿을 때 성령을 이미 받은 것이라면,

사도행전의 권세와 능력들이. 이미 사복음서의 제자들에게 나타났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제자들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천지 차이입니다.

그들이 성령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시인했다 하더라도,

그 성령(고전12:3의 성령)은, 오순절 2장의 성령과는, 이름은 같아도,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 분기점, 분수령은.. 행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입니다.

 

위 전개가 많은 부분 맞지만, 서로 서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적용 / 그렇다면 여러분, 성령충만 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령충만은 단순히 은사 충만이 아닙니다. 
요란한 은사가 나타나고, 방언을 하고, 눈으로 보여지는 뭔가가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충만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주님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만 높이게 되어 있고요. 주님을 점점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의 가장 첫 번째 열매가
바로 겸손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해 지면 무서워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열심이 있다고 하시는 분들 보십시오. 
기도를 꽤 한다는 분들을 보십시오. 무섭습니다. 

겸손보다 교만이 많이 묻어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무서울 때가 있는데요.

(*이런 분이 극소수 있죠. 그런데 타교단보다 훨씬 덜 싸울 겁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건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역할이,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드러내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베소서도 한 번 살펴 봤었는데요. 
에베소서를 보면 재미있는 구조가 하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엡5:18절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 충만의 열매로 나타나는 현상을 소개를 하는데요. 
하나 같이 어떤 게 소개 되죠? 관계에서 순종이 소개됩니다. 

먼저 '아내와 남편'이 나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순종합니다. 싸우지 않는 거죠. 
부부 간에 서로 순종하는 모습으로 성령 충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나옵니다.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합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자녀를 양육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녀는 그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조건 없이 부모라는 권위에 대한 순종이 나타납니다. 

이어서 '종과 상전'이 나오는데요. 
상전들은 종을 외모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은, 그리스도께 하듯 상전을 섬깁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령이 충만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한 마디로 관계에서의 순종입니다. 
그러니까 사람과의 관계가 여러분 건전해지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기능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관계에서의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만일 여러분, 우리 교회가 성령의 충만을 구합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교회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성령 충만의 열매가 우리 가운데 어떻게 나타납니까? 
여러분 방언으로 나타납니까? 
아니면 사람이 모이는 수적인 부흥으로 나타날까요? 
아니면 뭔가 막 열심으로 나타납니까? 

아닙니다! 가장 먼저 교회 안에 관계의 순종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목사가 전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직분의 권위에, 여러분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다스림과 직분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분을 맡은 자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바른 관계의 순종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죠. 

여러분, 그게 성령 충만 입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성령 충만의 열매는, 언제나 관계의 순종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이 관계의 순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기도한 게 아닌 거죠. 

여러분이 아무리 종교적 열심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 관계의 순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 그건 성령으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성령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겸손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관계의 순종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순종을 통해,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고요.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 모두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라기는 우리 교회 가운데 
정말 이런 참된 성령 충만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에 
이런 성령 충만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래서 모든 깨어진 관계가 새로 교회에 회복되고 
또 세워지는 성령 충만의 참된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