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 지냄, 은밀한 제자의 공개적인 헌신
내일교회 2024-11-10 주일예배 // 장사 지냄: 은밀한 제자의 공개적인 헌신
◈장사 지냄, 은밀한 제자의 공개적인 헌신 눅23:50~56
오늘 본문 내용은 '예수님을 장사 지내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은밀한 제자의 공개적인 헌신' 이런 설교제목을 제가 붙였습니다.
◑1. 예수님의 장례를 주도했던 사람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였는데, 은밀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숨은 제자'였습니다.
그 숨은 제자는.. 바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입니다.
▲눅23: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0절은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보라 Behold'로 시작합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고, 강조하는 거죠.
'공회 의원' ...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는 겁니다.
오늘날로 하면 국회의원 같은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앙인격적으로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50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했던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눅23:51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과 관련해서 내린 결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형에 내어주어야 될 사람으로 결정하고,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던 산헤드린 공회 결정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라고 요셉을 소개합니다.
당시에 워낙 요셉이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요즘도 매우 흔하죠.
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지역을 소개합니다.
그래서 '아리마데 요셉' 이라고 부릅니다.
아리마대는, 대부분 학자들이 추측할 때는
이스라엘 중간에 있는 '라마'와 같은 장소로 추측합니다.
라마는 구약성경에서 사무엘의 고향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예루살렘과는 아주 가까운 동네였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그 놀라운 구원이 있는데,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라고 누가는 소개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마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마태는 그를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새 무덤을 예수님께 내어주었죠. 마27:60
'그도 예수의 제자라'
마태는 그를 '예수의 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자'라는 호칭은, 이후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에 대해
가장 광범위하고 자주 불렀던 호칭이었습니다.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오늘 설교제목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근데 어떤 제자죠?
은밀한 제자, 숨은 제자입니다.
근데 왜 숨어 있었겠습니까?
바로 유대인이 두려워서!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 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지위, 신분에 큰 해가 올 수 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두려워해서, '은밀한 제자, 숨은 제자'였다... 라고 요셉을 소개합니다.
근데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장례를 도왔던 또 한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니고데모 입니다.
요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니고데모는 요3장에 등장하는데, 그도 역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그는 예수님과 '거듭남'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던 인물입니다.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
요3:2절에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기록되었는데,
요19:39절에도, 그 사실을 한 번 더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밤에 찾아 왔습니까? 사람들의 눈이 의식되어서,
또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밤에 찾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장례를 주도했던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하면,
이 사람들은 '은밀한 제자, 숨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죠.
-공회원이라는 사회적인 신분, 그리고 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큰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때 이 두 사람이 나서서 예수님의 장례를 주도하게 됩니다.
◑예수님 장례의 3가지 특징
지금 한국 사회도 아마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의식은 바로 장례식입니다.
한국 사회도 정말 장례를 귀하게 생각하죠.
유대인들도 장례를 정말 귀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나무에 달려 저주 받아 범죄자로 죽은 경우에도
그 사람의 장례를 잘 드려주도록, 성경이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신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달린 이런 저주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능하면 그 날 장사를 드려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제 누가 장례를 치르는가요?
가족들도 아니고, 제자들도 아니고,
이 두 명의 은밀한 제자들이 장례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장례 과정을 보면, 3가지의 특징적인 모습이 있는데요..
▲1. 아리마대 요셉은 "대담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습니다.
눅23:5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을 보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요구를 합니다. 막15:43
그러니까 영어 번역은 'boldly 대담하게' 입니다.
지금 아리마대 요셉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러분, 담대한 요구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다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로,
로마와 유대인에게 위험한 존재로 인정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데,
그 사람의 시신을 달라는 거는
이거는 얼마나 정말 엄청난 요구입니까.
이런 위험한 요구를, 요셉은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요청을 합니다.
이게 예수님 장례의 첫 번째 특징이고요.
▲2.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왕처럼" 극진히 장례했습니다.
눅23: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수습하고 세마포로 싸게 됩니다.
이렇게 누가는 간략하게 기록했지만, 요한은 좀 더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요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몰약과 침향은, 대부분 영어번역은 myrrh and aloes 죠.
그러니까 시신 부패를 방지하고, 그분을 존귀하게 대접하는 표시로
몰약과 침향(알로에) 섞은 것을 100리터라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100리터라는 33킬로 정도입니다.
요19: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위 구절의 주어는 복수입니다. 동사 '가져다가'가 3인칭 복수죠.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they 가 나오는데, 개역에는 원전에 충실한다고 그랬는지
주어를 생략했습니다. they는 요셉과 니고데모죠. (또 수종드는 여인들, 종들도 있었겠죠.)
그러니까 지금 요셉과 니고데모 두 사람이 주도해서
예수님의 시신에 몰약과 침향으로 바르고,
그 몸을 세마포로 싸게 됩니다.
여기서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이냐면, 100리터라 입니다.
'100리터라'는 33kg 정도입니다.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33KG나 가져와서 예수님 시신에 발랐다는 것은,
그 귀한 것을 엄청나게 많이 발랐다는 거죠.
100리터라 정도의 향품을, 예수님 몸에 바르고 세마포(가는 모시 베)로 샀다는 것은
누구에 대한 예우냐? 당시 귀족이나 왕에 대한 예우입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왕처럼
이처럼 정중하게 그 장례를 엄수했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장례식이 "민첩하게" 엄수되었습니다.
눅23: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마27:60절을 보면,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예수님 시신을 두었다고 했죠.
우리 한국은 매장을 하지만,
이스라엘의 장례 풍습은, 거기는 석회암 산들이 많기 때문에, 동굴 파기가 쉽죠.
그래서 폭은 약 2M, 높이는 약 3M 정도의 굴을 파게 됩니다.
그 굴에다 시신을 두게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유골만 남게 됩니다.
그때 유골을 추려서, 조상들의 유골들이 있는 곳에 함께 두게 됩니다.)
그리고 작은 출입구를 만들어서 그 동굴을 막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에 안장 되게 되었느냐?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를 위해서 준비한 그 동굴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리고 동굴 무덤을 '큰 돌'로 막았습니다.
부자의 무덤이라서, 이렇게 잘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장례의 세 번째 특징은 '민첩함' 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54절을 보면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때는, 금요일 오후 3시입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6시(해질 때)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근데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으니,
안식일 날 장례를 치르는 것을 피하려면,
지금 요셉이나 니고데모에게 주어진 시간은 3시간밖에 없습니다.
이 3시간 안에, 빌라도를 설득해야 됩니다. 그래서 시신을 넘겨 받아야 되고,
그러면 십자가로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야 되고,
또 장례식을 위한 기름과 향품을 준비하고, 세마포를 준비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장지를 준비해야 돼요.
이 모든 것을 3시간 만에,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끝을 내야 했습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은 요셉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도록 쉽게 허락해 준 것은 이유가 뭐죠?
요셉이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부자였으니까,
즉 요셉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니까, 빌라도도 협조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향품을 준비하는 것은, 니고데모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요19:39
이렇게 신속하게,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장지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을 주님을 위에 드렸기 때문에,
바로 3시간 안에 장례가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장례가 당일에 신속하게 진행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시신이 십자가에 달려 있음으로 말미암아,
시신이 부패되었을 것이고,
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일들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안식일 날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의 수고를 통해서...
그의 대담한 헌신, 그의 정중한 헌신, 그의 민첩한 헌신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바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뭔가 하면, "은밀한 제자가 공개적인 헌신을 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라는 것을 나타내게 됩니다.
◑3.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까?
은밀한 제자였던 요셉과 니고데모로 하여금
무엇이 공개적인 헌신을 하게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커밍아웃 하게 했겠습니까?
그 답은, 바로 십자가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것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이런 변화가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역설이죠. 가장 가까이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보고, 그들은 부인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고난과 십자가를 대면했을 때
은밀한 제자였던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을 향한 공개적인 헌신을 나타내게 되는 거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그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감동 받고 공개적인 헌신을 하게 됩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 첫 번째는, 우리 성도들 가운데 은밀한 제자, 숨은 제자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드러나는 헌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저희 교회 처음오시는 분들에게, 심심찮게 질문 받는게 있습니다.
'목사님, 저 분은 언제부터 이 교회에 다니셨습니까?'
왜냐면, 자기 거래처 사장님이신데,
한 번도 자기한테 교회 이야기 안 하셨대요.
그런데 여기 교회에서, 그 분이 있는 거 보고 깜짝 놀랐대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에
부딪히게 됐을 때, 그들은 공개적인 제자가 되고, (계속 은밀한 상태에 있지 않고)
공개적인 헌신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2) 두 번째, 이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무엇이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시대의 은밀한 제자들을 깨우는 방법은 무엇이냐?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님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실천할 때,
거기에 크게 감동을 받고서
은밀한 제자들이 깨어나서
주님을 향해 공개적으로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4. 여인들의 이야기
눅23:55~56절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누구 뒤를 따라가겠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뒤를 따라갑니다.
무덤의 위치와 예수님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
이 여인들이 자세히 보게 됩니다.
56절에, 여인들은 돌아가서 향품과 향유를 준비합니다.
왜요? 급하게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아무리 니고데모가 많은 양의 향품을 준비했다 하더라도,
예수님 몸에 바를 시간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너무 시간이 촉박했으니까!
그래서 여인들이, 니고데모가 준비한 향품과 향유를 챙깁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쉰 후에 23:56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게 됩니다. 24:1
미처 다 못 바른 향품을,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려고 간 거죠.
바로 이때 누구를 만나느냐?
무덤에 계신 주님께 향품을 바르려고 갔다가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장례,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이 여인들은, 멀리서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23: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왔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와서, 예수님이 고난 당하시는 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모두, 멀리서이지만 다 지켜보았습니다.
그다음에 뭐 했습니까?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때, 그때 아리마대 요셉을 따라갑니다.
따라가서 예수님께서 누이시는 무덤도 보고,
그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되는 것도 그들은 다 지켜봅니다.
이들도 조용한 헌신자들, 은밀한 제자들이라 할 수 있죠.
본문 성경에는, 그 이름도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꼭 필요한 일들을 스스로 자원해서 찾아서 합니다.
숨은 헌신자들, 배후의 공로자들입니다.
이 여인들은 참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근데 이 여인들이 누군지 24:10절에 그 중에 세 명을 소개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야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는 바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참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죠.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으나, 고침을 받았던 여인이죠. 눅8:2
◑적용
제가 캐나다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했는데,
한번 기회가 주어져서 한 달 동안 제가 수도원에 가서
복음서를 한 40일 정도 묵상하는 그런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그 시간 중에 어떤게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장사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향품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여인들이 그날 안식일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장례 치르고 나서, 안식일날 향품을 준비하면서
이 여인들이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요?
이거는 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한번 묵상하는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저도 저희 어머니, 아버님을 먼저 천국에 보내드리는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그날 제가 무슨 묵상을 했냐면,
'제가 부모님을 매장하고 집에 돌아와서
생전에 부모님들과 보냈던 귀한 시간들, 그 부모님들이 보여주신 사랑,
이런 것들 기억하고 추억하지 않습니까.
1) 아마 이 여인들도, 안식일 날, 향품을 준비하면서도,
그들이 예수님과 그들이 가졌던 아름다운 시간들,
예수님과 함께 보내었던 아름다운 시간들을 그들은 기억했을 겁니다.
그 외 주님이 자기에게 행하셨던 놀라운 일,
또한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하셨던 놀라운 일들,
그들에게 가르치셨던 놀라운 말씀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셨던 그 아름다운 일들을,
아마 그들은 기억을 했을 겁니다. 토요일, 안식일에.
2) 또 하나,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 때문에 그들이 가셨던 기대와 소망!
그것들을 또 회상, 회고했겠죠.
3) 그렇지만 세 번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기대와 소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깨어진 기대, 산산조각이 난 꿈,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은
-이 악한 세상이, 이 의로운 분을 죽이다니...
이 위선으로 가득찬 지도자들, 이 악한 세상!
그러면서 세상을 향해 그들은 분노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또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이죠.
도대체 우리 하나님은 무엇 하시나?
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이런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
그런 이것이 뭉쳐져서 그들은 지금 절망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여인들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아마 이 여인들은 세 가지 마음을 가졌지 않겠는가?'
-예수님과 보냈던 그 사랑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예수님 때문에 꾸었던 그 놀라운 꿈과 소망,
자신을 향해, 교회를 향해, 세상을 향해 가졌던 기대와 소망,
-그러나 그 꿈이 산산조각이 났고, 그들은 악한 세상 때문에 절망하고,
하나님의 무관심과 무능력 때문에... 그들은 지금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렇게 그 여인들과 관계되는 걸 묵상하면서
또 하나 해야 되는 일이 뭔가 하면,
'내가 그 여인들과 같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 그 장례 치르고 온 그 여인들과, 저도 한 일행으로 같이 있는 거죠.
같이 있으면서 저도 장례 지낸 예수님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저도 역시 이 세 가지를 똑같이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는, 정말 아름다웠던 그 사랑의 순간들의 기억,
-두 번째는, 예수님 때문에 꿈꾸었던 미래,
-그러나 그 꿈은 잔인하게 깨어져 버렸습니다.
왜냐면 제가 한참 이것을 묵상하고 있는데,
정말 마음이 뭔가 울컥했습니다. 왜 제 마음이 울컥했느냐?
▲그 여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가졌던 마음은
저한테는, 좀 죄송한 말씀인데,
제가 한국 교회를 향해서 가졌던 마음과 참 비슷했습니다.
1) 교회를 향해서 가졌던 저의 마음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저도 참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모든 좋은 것을 다 경험했습니다.
제 모든 기억들은 교회 속에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교회생활이었죠.
2) 그리고 저는 교회 속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제 인생에 대해서 꿈을 꾸었고, 이 나라와 민족에 대해서 꿈을 꾸었고,
교회에 대해서도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꿈을 꾸었어요.
3) 그렇지만 세 번째, 그 꿈은 점점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답게 보이는 교회 속에, 인간의 그 어떤 여전히 꺾이지 않는
그런 부패함들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이 교회를 부끄러운 모습으로 만들어 갈 때,
그리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느꼈을 때,
저는 이 꿈이 깨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그냥 버려두시는 예수님께 대해서
제 마음에 화가 치밀기 시작했어요.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그들의 마음에 일어났던 일이
어쩌면 저한테는, '교회에 대해서 가시는 제 마음'과 같았어요.
그때 제 마음이 '이 여인들이 가졌던 그 마음이 나한테도 있었구나...'
근데 저한테는 '그 다음 날'이었어요.
그 다음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이 여인들이 안식일이 끝나고 나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달려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표면적으로는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지만
이면에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죠.
그들의 꿈은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무덤에 누워 계시는 예수님을 향해 그들은 달려갔습니다.
근데 그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바로 무덤에 죽어서 누워 계신 분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 놀라운 반전이 왔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향해 나의 꿈은 깨어졌다고,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고,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있던 나,
내 속에도, 여러분 속에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한 번 더'
무덤에 계신 주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바로 무덤에 누워 계시는 것 같은 예수님,
여전히 우리를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무덤에 누워 계시는 그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한 번 더 나아갔을 때,
우리는 누구를 만날 수 있느냐?
무덤에 죽어서 누워 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패배와 절망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해 된 희망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이 여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1) 우리는 교회 속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사랑의 시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그리고 우리는 교회에서 꿈을 꿨어요.
단순히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한 꿈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 같은 공동체를 세우고,
그리고 이 세상을 한번 새롭게 해보자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교회를 향해 꿈을 꾸었습니다.
근데 이 꿈은 자꾸만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사랑일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지독한 고민거리가 되어 있는 이 현실!
3)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번 이 깨어진 마음을 가지고,
이 아픈 마음을 가지고, 여전히 무덤에 누워 계시는 것과 같은 그 주님 앞에 나아가면,
우리는 누구를 다시 만날 수 있느냐?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바로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새로운 시대를 깨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넘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