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29장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보낸 편지와 그 반응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보낸 편지와 그 반응
렘26-29장은 크게 보면 한 묶음인데, 그 주제 및 각각의 장들은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이 백성이 거부하고 있다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장, 렘29장에는 네 통의 편지가 들어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보낸 것이고 (1-14, 21-23절),
-예레미야가 스마야에게 보낸 것(24절),
-바벨론에 있는 스마야가 예루살렘의 스바냐에게 보낸 것(26-28절),
-마지막으로 포로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두 번째 서신(30-32절)
정확한 연대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본장의 역사적 상황은
바벨론의 2차 침입(B.C. 597년, 왕하24:8-16) 및 시드가야 즉위 직후인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 렘29장은 해석 없이, 성경 텍스트만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페이지 맨 아래 <절별 해석>을 참고하시면, 본문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설교1. 받아들이기 어려운 '바벨론 멍에를 지라는 예언' 렘29:1~14
20181022새벽-바벨론의 멍에를 지는 삶이란?-예레미야 29장 1~14절
제가 저희 집 어린 영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예방 접종을 하러 가면
세 아이 모두 다 공통적으로 가졌던 표정이나 얼굴을, 제가 가끔씩 기억합니다.
첫째, 둘째, 셋째가 다 마찬가지였죠.
보건소에 예방 접종을 하러 가면, 보통 주사 두 대를 맞아요.
아이들은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기분 좋게 앞 엄마아빠 품에 안겨 있다가,
이제 자기 순서가 되어서 주사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앞에 아이들이 우는 것을 보면서 '뭔가 좀 심각하다' 이런 생각을 하죠.
그리고 난 이후에 자기 차례가 되어서, 저희 부부가 간호사에게 아이를 넘깁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울먹울먹 합니다. 그리고 허벅지에 주사를 놓으려고 알코올을
바르면, 그제야 막 울면서 떼를 쓰기 시작해요.
그때 떼를 쓸 때에 아주 강하게 떼를 쓰기 때문에,
간호사 분이 이제 부모인 저를 부릅니다.
그러면 제가 다가갑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이가 이제 안도를 하는 표정을 짓죠.
근데 가까이 다가갔던 아빠가 어떻게 합니까?
아이를 더 꽉 잡습니다. 그리고 주사를 잘 놓을 수 있도록 간호사를 협조하죠.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너무너무 원망 섞인 얼굴로 확 울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뭔가 이해되지 않는다' 라는 것이죠.
'왜 아빠가 지금 나를 이렇게 하는가? 왜 나를 아프게 하는가?'
라는 그런 원망 섞인 얼굴로 웁니다. 세 아이가 각각 다 똑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병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했던 행동 이지만,
그 아이들이 받아들일 때는, 그것이 자기들 해롭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죠.
지금 본문의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이, 그런 심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레미야는 '유대로 돌아올 생각을 접고, 거기서 정착해서 잘 살아라'고
예언을 하고 있으니까요...
▲본문 렘29:1~14절은, 바벨론의 실제로 (2차)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자들에게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바벨론에서 얼마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유다의 사신이, 바벨론 왕에게 보내는
유다 왕 시드기야의 편지를 가지고 가는 인편에,
바벨론에 먼저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메시지 예언을,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29:4~14, 21~23
바벨론에서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드디어 편지가 도착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편지의 내용을 보니까, 11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9:1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보내신 편지의 내용은
그들이 기대했던 내용도 아니요,
그리고 최근에 들려지던 '2년 안에 곧 멍에가 꺾이고, 고국에 돌아가게 되리라' 28:3
하는 그런 소망의 메시지도 아니라,
예레미야가 예전부터 이야기하던,
그리고 지금도 똑같이 이야기하는 '70년이 차면 돌아올 것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벌써 몇 년을 고생하면서, 이 타국에서 포로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낸 메시지는 그렇다 라는 것이죠. 이때 얼마나 절망스러운 것이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구치소의 미결수가 징역을 수 십 년 선고받은
느낌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고국에서 전해진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도 아니요,
최근에 들려지던 (거짓선지자의) 소망의 이야기도 아니라,
앞으로 칠십 년을 채우기까지 계속 고통을 받아야 된다... 라는 메세지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메시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죠.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근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듣기에 절망스럽고 당황스러운 메시지만
그러나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안다.
너희를 향한 나의 계획 (원어는 '생각'이 아니라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를 향한 나의 계획을, 내가 아는데, 그건 재앙이 아니다.
너희가 지금 느껴지는 것처럼 재앙이 아니다. 평안이다. 소망을 주기 위한 것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벨론의 시간을 지날 때 먼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재앙이 아니고 평안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바벨론의 멍에를 순순히 메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계획,
우리를 향한 소망, 우리를 향한 회복을 주시는 이 계획에 순종해서
(포로들이) 바벨론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오늘 하루 일상을 살아가야 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주어진 그 일상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된다' 라고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29:5~6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행하고 계신 이 '바벨론 포로 프로젝트'를
실패라고 생각하고, 어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신비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디에서 민족으로 만드셨습니까?
이집트 라는 곳에서, 부족에서 → 민족으로 만들어 내셨어요.
이집트 라는 곳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람들 소수가 나라가 되어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나라로 만들기 위한 장소가 애굽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바벨론 이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성숙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바벨론 포로기는
내 인생이 다 끝난 곳, 그리고 내가 그냥 얻어 맞는 곳,
그리고 나의 실패, 그리고 나의 절망의 장소,
그래서 빨리 벗어나야 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만들기 위해 허락하신 곳이다. 성숙시키기 위한 곳이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벨론의 멍에를 지는 것을 예로 들면,
어떤 사람은 병원에 입원해서 몇 달이고 거기서 나오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체가 실패해서,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집에만 머물러 있어야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벨론의 멍에를 진 채, 관계가 깨어져서
홀로 거기서 회복을 기다리며 있어야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바벨론에 있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지금 끝났다' 라는 절망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뭘 하겠나? 내가 재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삶을 연결해서 내가 나갈 수 있을까? 내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우리를 잡아 끌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허락하신 그 바벨론의 삶 속에서도,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도 하루의 일상이 있을 것이며,
내가 하던 일에서 지금 손을 놓았다 할지라도
내게 주어진 하루의 일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 있는 일들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하루 하루를 성실히 살아 내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바베론 포로)은 우리가 망할 곳이 아니라, 그곳은 우리가 잠시 있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는 곳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렵더라도... 너무 무료하게...
누워 있다가 밥 먹고, 누워 있다가 밥 먹고 해야 되는 병원 생활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나를 찾는 이가 없고, 지금 들어오는 재정도 없고,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은 그런 상황 속에서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런 하루 동안 나는 성실히 살아 나가야 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바로 오늘을 내가 성실히 사는 것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 또 한 가지는 그 오늘을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 인에게 주어진 길,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라'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그 바벨론 성이 평안해야, 자기들도 평안하게 때문에
평안을 구하라고 하셨지만,
사실 이 말씀은 사명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어요. '너는 복이 될 지라' 라고 말씀하셨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인은, 어떤 모습으로 있든, 어떤 상황 속에 있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그들은, 이런 메시지가 아주 충격적이었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적국,
자신의 하나님의 성전을 깨뜨려 버린 바벨론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하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빨리 망하게 해달라'고 빌어야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 라고 얘기하고,
'바벨론을 위해서 기도하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 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길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해요?
그저 한 사회인으로, 그저 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 인 처럼 살아가라'는 거예요.
'그리스도 인 답게 살아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라'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의 평화를 비는 것,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사명을 감당 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는 것도 중요해요.
그런데 그리스도 인은, 그리스도 인 답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냥 밥 먹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며, 그리스도 인이 살아가야 갈 사명의 길,
그것을 향하여 걸어 가라! ... 라고 말씀하십니다.
▲3. 그리고 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가라' 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그 바벨론이라는 곳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야 되고,
그 바벨론 이라는 곳에서 바벨론 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실패하고 어두운 바벨론에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무서웠던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형식적이었기는 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져서
이제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실패를 하면, 사람이 절망을 하면, 언제나 드는 생각이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다' 라는 느낌입니다.
왜냐면 바벨론 이라는 곳은 성전이 없습니다.
바벨론에는 제사장도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바벨론에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이곳 바벨론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뭐라고 얘기하십니까?
'성전이 없는 그곳에서도, 너희가 부르짖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루살렘에서 형식에 치우쳐서 나와 진짜 교제를 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 포로생활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이제 성전이 아니라, 예배 형식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을 구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줄 것이오, 내가 너희를 회복시킬 것이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예배와 형식과 절기와 절차와 율법이 아니라, 너희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게(발견하게) 될 것이고,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가장 큰 축복은,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제사장이 있었던 예루살렘에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려고 하는 그 계획을 이야기 하시면서,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구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바벨론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기간보다 어쩌면 더 길 수도 있고요.
더 짧을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하나는 우리의 생각이,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을 받지 못하고
'지금 이 상황은 재앙이다'라고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내가 바벨론에 있다 할지라도, 내가 지금 고통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고 하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11
그러므로 그 바벨론의 삶이 무료하고, 힘들고, 의미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이집트에서 나라를 만들어 내신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자기 자녀를 만들고(성숙시키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여러분이 오늘 하루를 사시고,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 인에게 주어진 길, 즉 그리스도 인 답게 사시되
하나님을 구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래서 목표가 바벨론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결코 바벨론을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바벨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전쟁을 준비 하기도 하고, 군사를 만들기도 하고, 힘을 만들어 내려고도 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다...
사업의 실패, 건강의 문제,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진정한 회복은
내가 하나님과 회복되면, 이것은 그 이후에 온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9:14절이 우리에게 엄청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바벨론에서 너희를 만나 줄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만나고, 너희가 나를 향하여 마음이 회복되면
내가 너희를 거기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멍에를 지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오늘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다시 영광을 회복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소망의 성취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하루를, 재앙이 아닌 평안을 주시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지 말아야 할 거짓선지자의 메시지 렘29:15~32
20181023새벽-믿지 말아야 할 거짓 메시지-예레미야 29장15~32절
우리가 바벨론에서 유대인들이 살아야 했던 삶을
자세히 살펴본 이유 중 하나는,
바벨론에서 포로로 잡혀가서 살아야 했던 그들의 삶의 방식이나,
천국을 눈앞에 두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천국)으로 다시 되돌아갈 것을 바라보며
이 땅을 살아야 되는 우리의 삶이,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각자가 계획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이 (포로같은) 상황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우리는 오늘 하루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것이고,
또 이곳에서 우리는 오늘 이 하루를,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내야 하는 것이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이 하루를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구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그분께 부르짖으며,
그분과의 교제에 힘쓰며 살아가야 되는 이런 삶은,
예레미야 당시 때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살아야 했던 포로민의 삶과
비슷한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일생 전체가 바벨론 포로입니다. 세상은 바벨론이고요;)
우리에게도 그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성경은 계속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경계해야 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세요.
'바벨론에서 이렇게 살아야 된다'라는 그분의 정착 명령과 함께
바벨론에서는 이거는 반드시 경계해야 된다 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거짓 선지자, 거짓 메시지를 조심하라" 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는 끊임없는 거짓 메시지가 너희를 속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따라 가서는 안 된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분별 해야 된다"
라고 말씀합니다.
자, 그러면 거짓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거짓 메시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우리는 어떻게 분별 하느냐? ... 하는 것입니다. *문제 제기
사실 오늘 이 본문은, 그것(거짓 분별)에 대하여서
구체적인 지시를 우리에게 준다기보다는
일반적인 법칙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결코 믿어서는 안 되는 거짓 메시지를 어떻게 구별하시겠습니까?
본문은 먼저 '그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우리는 위하는" 메시지는,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29:15절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
바벨론은 언제나 영적이고 육적인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계시록에서) '큰 성 바벨론'이며,
바벨론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을 상징할 때, 신약에서 '바벨론'이라는 단어를 써요.
그런데 오늘 이 거짓선지자들은 바벨론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 땅에서 일어난 거짓 선지자들이 전하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15
그들의 메시지가 거짓인지 아닌지가 분별되는 시금석은
거짓 선지자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언제나 "우리를 위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기복주의적 메시지를 늘 전한다는 거죠.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우리를 위하여" 말씀을 전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 예배 드리라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 하셨기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이 땅을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틀린 것이죠.
이 땅에 모든 창조된, 피조된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라고
우리를 창조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날은 6일이 끝이 아니고, 그 절정은 7일 입니다.
6일은 우리가 창조된 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셔서
'봐라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것들을 다 준비하시고,
이제 우리를 창조하셔서 이걸 누리게 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안식일로 넘어가는 거예요.
7일 안식일로 넘어가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예배 받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다... 는 말입니다. 그게 창조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의 메시지의 내용은
"우리를 위하는" 메시지가 일색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또 이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이렇게 얘기해요.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구원받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구원받지 못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구원을 하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하신 거예요.
인간의 구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구원도 우리를 위하여" 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선교와 전도를 왜 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보라.
예수 이름의 예 자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은 불쌍하니까
우리가 가서 그들을 살려야 되고, 고쳐야 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선교를 하는 이유는,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불쌍해서 그들을 살리기 위한 우리의 동정과 열정,
그것으로 시작해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곳에 우리를 보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이 땅 끝이든지, 옆나라 든지 상관없이
그분이 우리를 보내시기 때문에... 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하는 데도
"우리를 위하여" 하기 때문에
자랑과, 자기가 했던 고생에 대한 연민과...
이런 모든 것들이 가득 차 있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칠십 년을 견디라!' .. 이거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칠십 년은 언제나 중요한 의미입니다.
7은 안식과 관련 있는 단어이고, 10은 만수입니다. 가득 찼다는 의미죠.
거짓선지자들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28:3~4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니 '2년 안에 우리의 멍에가 꺾일 것이라'는 거짓선지자의 내용과,
반대로 '70년을 견뎌야 한다'는 예레미야의 편지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편에서 보면 '2년 만에 돌아가는' 게 좋아요.
근데 하나님 편에서 한 번 살펴 보십시요.
그 완전한 시간, 70년 동안 우리를 고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빨리 2년 만에 속히 돌아가서 우리가 속히 회복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회복도 원하지만,
우리를 완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쳐지는 걸.. 더 원하십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들려지는 메시지의 내용을 볼 때,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선지자가 메세지를 전하는 그 내용은
언제나 하나님을 담고 있어야 되고, 하늘의 뜻을 담고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므로 수많은 거짓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겠지만
'그 내용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거짓 메시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메시지가 "우리를 위하는가?"
"하나님을 위하는가?" 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는 거죠.
▲2.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원리 중에 하나는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29:3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
자 바벨론에게 있는 포로 유다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데,
왕의 사신인 엘라사와, 그마랴가 시드기야 왕의 특사로 보내질 때,
예레미야가 그 인편에, 자기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 메시지(29:1~14, 21~23)를 기록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늘과 연결된 예레미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한 사람(우체부)을 소개하는데, 누구입니까?
-사반의 아들 엘라사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한 마디로 말하면, 위 두 사람이 선하기 때문에, (선한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바벨론의 유다인들에게 전달했고) 그래서 그 메시지는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도 참 중요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받아서 예언을 편지로 기록했고,
엘라사는 '사반의 아들' 인데,
사반은 거룩한 왕 요시야와 함께 성전에서 율법서를 찾아냈고,
성전을 대청소 했던 사람입니다.
예레미야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살려줘요. 26:24
그러니까 엘라사는, 아히감의 형제요, 사반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계보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힐기야도, 요시야 왕때 요직을 차지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거룩하게 개혁하는데 쓰임을 받았던 사람이고,
그마랴는 그의 아들이었죠. 그도 거룩한 계보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메시지, 편지의 내용이 진짜인가/ 아닌가 분별하기 어려울 때는
이 내용을 전하는 사람을 보면서... 분별 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이름도 등장을 하는데 21절에 나옵니다.
- 골라야의 아들 아합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
-스마야 :24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거짓 선지자의 이름이
아합, 시드기야
즉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했던 왕의 이름과 동명이인 인 거예요.
1) 거짓선지자 아합
아합.. 이세벨의 남편
시드기야..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데, 예언을 무시한 악한 왕이었죠.
거짓선지자들의 이름이,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시드기야 왕과 똑같았다는 것은,
어쩌면 성경의 저자(예레미야)가,
거짓선지자들을, 악한 왕의 이름을 가명으로 빌려와서 쓰고 있는지도 몰라요.
아합 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합은 영적 간음을 한 사람이에요.
북왕국에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숭배를 아주 유행시킨, 영적인 간음자의 대표예요.
그가 지원하고 기른 거짓선지자들이 최소 850명이나 있었어요.
그러니 이들 거짓선지자들을 23절이 또 보여주는데,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게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모습, 그 특징이 보여지는데,
23절에 이웃의 아내와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아합 왕의 영적 간음과 매치가 되죠.
거짓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니까,
거짓되고 간음하는 삶을 살더라는 것이고, 그래서 그의 메시지를 신뢰할 수 없는 거죠.
2) 또 한 사람의 거짓 선지자는 시드기야 입니다.
그럼 동명이인 시드기야 왕의 특징은 어떻습니까?
렘29전체를 살펴보면, 시드기야가 아주 간교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29:3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
시드기야 왕은, 자기가 보내는 사신 두 명이,
자기가 느부갓네살에게 편지 (아마 조공도 포함)를 가져갈 때,
예레미야가 쓴 서신도 같이 가지고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사신들이 그런 걸 숨겼다가는, 나중에 큰 일 날 것을 알고,
사전에 미리 왕의 허락을 받았을 거예요.
그래서 시드기야는 (사전 검열을 해서)
'하나님께서 70년 포로 생활을 성실히 하라'는 예레미야의 편지, 메시지 내용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의 편지가, 왕을 거쳐서 갔다고 해도 되는 거죠.
그러면 시드기야 왕은,
그 편지가 자기 통치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편지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았던 겁니다.
지금 바벨론에는,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이 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거짓 메시지가 유행하고 있었어요. 28:3~4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에 반하는 '70 년 포로 생활을 성실히 하라'는 내용이 적힌
편지를 보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가, 왜 시드기야 왕에게 도움이 되었을까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2년 만에 포로 생활이 끝나서,
유다인들이 귀환하게 된다면, 가장 곤란한 사람이 누굴까요? 시드기야 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여호야긴이 왕이 된 지 3개월 만에 바벨론에 잡혀 갔는데,
그가 귀환을 하면, 자기가 대신 앉아있던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되는 거예요.
여호야긴에게 왕좌를 내어주어야 되는 입장인 거죠.
그러니까 시드기야가 지금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 편지 내용이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이것을 보내도록 허락했다 라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시드기야 왕이 교활하다는 거죠.
동명이인 같은 이름의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그 이름이 똑같음을 유추해서 볼 때,
거짓선지자는 그 메시지 내용에 거짓을 담을 수도 있고,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거짓된 말들을 쏟아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가끔씩 진리를 섞어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잘 살펴 봐야 됩니다.
'저 진리를 지금 왜 얘기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유리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거짓선지자 그들의 특징은
-하나님께 거짓을 말하는 특징도 있지만
-그들의 더럽고 추악한 동기, 자기 욕심을 담아서
늘 말하고, 예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살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렇게 일부는 진리를 섞어서 이야기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그 메시지를 사용하고 이용해 먹는 것 뿐이지,
그 메시지가 정말로 적용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라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24절에 보니까 느헬람 사람 스마야 입니다.
그에 대한 정보가 성경에 그리 많지 않지만
여러 사실들을 추측해서 종합해 보면,
그는 아주 명문가의 레위 지파 사람 중 하나 였을 것이고,
정치적으로나 여러 가지 영향력을 (포로로 잡혀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데 그가 어떻게 합니까? 이 거짓 선지자인 스마야는
지금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편지를 보내요.
25절에 보니까, 예루살렘의 편지를 보내는데, 그의 특징은
지금 예루살렘에서부터 진리가 바벨론으로 전달 되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듣고, 지금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거짓을 전달하고 있는데,
진짜 선지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초점이 있어요.
그래서 누가 잘못 했니?, 누가 잘했니? ...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합니다.
그런데 스마야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뭡니까?
(성전 책임자 스바바에게 편지해서) 예레미야를 죽이라는 거예요.
예레미야를 왜 그냥 놔 두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 거짓선지자의 특징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거짓을 관철시키기 위한 내용, 편지, 말로 가득 해요.
그들의 메세지는.. 진리, 하나님의 뜻..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어요.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은 자들' 이었습니다.
자기들이 그런 수준이니, '하나님이 보내신 예레미야 같은 자가 있다'는 사실도
모를 뿐더러, 설령 알았다 해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자기보다 신령하니까!
반면에 참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언을 통해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순종해야 된다'는
그야먈로 (우체부처럼)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있는데,
예레미야는 그래서 그냥 자기 길을 묵묵히 가요.
그런데 이들은 어떡합니까?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지금 거짓(자기 생각)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리를 막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이단에 관한 책을 읽어 보니까, 읽기에 힘들어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읽었던 책보다, 지금 훨씬 더 내용이 많아지고, 복잡해졌어요.
그만큼 세월이 흐르면서, 이단들이 더 많아지고 나름 발전한 거예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뭐가 거짓인지... 이걸 찾는 것보다,
이단의 원리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위에서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바벨론의 삶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 바벨론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 되기 위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곳에서 진짜 경계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믿지 말아야 될 거짓 메시지가 난무하고 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분별하여서,
거짓선지자들의 거짓 메시지를 따라가지 말라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1) 그래서 메시지 내용을 보면서, 거짓선지자를 분별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이 땅에 속한 "우리를 위한" 것인지?
거짓 메시지는 악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주 달콤하고 기분 좋은 메시지들입니다.
그러나 그게 거짓인 것은, 그저 "우리를 위할" 뿐입니다.
우리 귀에 솔깃한 메시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정적인 것으로, 거짓 메시지가 잘 분별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게 뭐가 잘못됐는데?'
왜냐면 듣기 좋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요!
2)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잘 살펴 보십시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합과 같이, 부도덕한 사람이지,
시드시야와 같이, 진리 까지도 자기 자신을 이용해 먹는 사람인지,
스마야와 같이, 자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참 선지자의 진리의 입을 닫으려 하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서
고매하게 서 있다면... 그는 정확하게 거짓 선지자 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바벨론 왕이 (거짓선지자 시드기야를) 불살라 죽일 것이다.' :22
이런 거짓 선지자는, 반드시
속히 오든, 더디 오든 영원한 불에 탈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공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32절에 보니까,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그의 눈은 결코 복된 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하는 것처럼 남유다의 가장 악했던 시드기야 왕은
마지막에 자기 아들이 자기 눈 앞에서 죽는 것을 보고 나서, 눈이 뽑혔습니다.
거짓을 따르는 것은, 이런 무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나, 거짓 선지자를 따르는 자들은... 이렇게 함께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의 상태는,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서, 조금만 성숙한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먹으려고 하는 음식의 성분이 무엇인지, 출처가 어딘지,
얼마나 꼼꼼이 따져보고 먹게 됩니다.
우리 몸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건강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동일하게 우리의 영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 영적 건강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 영의 메시지의 출처를 잘 살피시고, 그 내용을 잘 점검하시고,
또한 그것을 전하는 메신저, 그 사람을 잘 살피셔서
거짓을 따라가지 않고
이 바벨론에 남겨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절별 해석
29: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보내었는데'
그리고 본절의 '남아 있는 장로들'이란 표현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장로들 중에 일부가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처형의 이유는 본장에서 언급 된 바벨론에서의 선동과 폭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29:2 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예레미야의 서신이 바벨론으로 보내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왕하 24:12-16).
'환관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리심'은 아마도
궁정 내에서 활동하던 관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52:25, 삼상 8:15 등 참조).
창39:1에는 보디발이 이 단어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내시와 같은 결혼할 수 없는 관리를 뜻한다고만 볼 수 없다.
물론 이 '사리심'으로 명명되고 있는 직책이 원래는 왕궁의 내실을 관리하는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가서 차츰 그 기능이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방백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레'는
아마도 왕가의 귀족들을 포함한 관리들의 또 다른 명칭이었을 것이다.
29:3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
시드기야가 외교 문서를 느부갓네살에게 보내는 편에,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1, 2차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에 대해 편지합니다. (1-14, 21-23절)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어떤 학자는 본절의 엘라사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26:24)
사반의 아들 그마랴의 형제였을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는 요시야 왕 때의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대하 34:9-22)의
아들일 것으로 설명하나 분명한 증거는 없다.
아무튼 예레미야가 편지를 보낸 경로는, 외교적 임무를 띤 자들의 손에 의해서였다.
이들 사신들은 요시야의 개혁 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설교에 아마 큰 감동을 받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느부갓네살에게 보내진 임무는, 단순히 연례 행사로 바치는 조공 문제 이상의
보다 더 복잡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여호야긴이 유다 주변 국가들과 반바벨론 음모를 계획하였다가
조기에 실패로 끝나고 만 일이 있은 다음에,
느부갓네살에 대한 시드기야의 충성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보내졌을 공산이 더 크다(27장).
그렇지 않고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그들은 봉신과 군주 간의 통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보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고대 세계에 비교적 먼거리에 떨어져 있었으면서도 *1천 킬로
외교적 문서가 자주 왕래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기록되어 애굽의 바로 왕에게 전달된
B.C. 14세기의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은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
29: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만군의 여호와...이같이 이르노라'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자기 종 느부갓네살을 대행자로 사용하여서
유다 포로들을 그곳으로 옮겨놓으셨다는 내용이 다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3인칭에서 1인칭으로 화법이 바뀌는 것은 예언적 서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
29: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예레미야가 제시하고 있는 충고는
바벨론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곧, 집을 짓고 열매를 심으며 포로지에서 정착하라는 권고이다.
에스겔서에서도 암시되고 있다시피, 그들에게는 정착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공동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겔 8:1, 14:1).
어쨌든 정착 생활에 대한 예레미야의 권면은,
포로기가 2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였던 낙관적인 거짓선지자들의 말과는 28:3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유다 땅이 아닌 포로지에서라 하더라도 정착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했고
성전과 희생 제사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7:1-15, 21, 22).
29: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거기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예레미야의 이 같은 당부의 말은 포로로 잡혀 간 곳에서
그들이 이제 오랫동안 체재(滯在)할 것이므로, 그에 대해 준비를 갖추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일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땅에서 번성하여 강한 민족이 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비교적 자유가 보장된 포로 생활이었지만 이에 대한 예외도 있었다.
예컨대 여호야긴은 갇혀서 지내야 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에윌므로닥의 즉위 때,
곧 B.C. 562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2:31-34, 왕하25:27-30). 약 35년 뒤였다.
(감옥이라 해도, 가택연금 일 수 있었다. 왕족에 대한 예우로)
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본절에서는 또한 그들이 체재하고 있는 나라 바벨론의 번영과 평안을 위해 노력하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바벨론 왕권의 번영을 구하고 또 그들의 평안을 기도하라는 예레미야의 충고는
포로민들에게 납득되기 힘든 말이었다.
이것은 유다 민족이 자신들의 행복과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
다시 말해서 국가, 왕권, 군대, 국경, 성전 등을 내버리고 표류하라는 것과
사실상 동일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더라도 여호와에 대한 바른 신앙을 확보한다면,
여호와께서 이 민족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줄 것이며
그들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곳에 있는 자들은 바벨론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끌려왔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 충고에 대해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그러나 이 충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긴 하였으나, 실제적이고 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사건의 결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백성들로 하여금 어떤 과정을 거치게 한 다음에
회복시키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29: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29: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거짓선지자들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머무는 것이 잠시 잠깐일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예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아니며,
그들이 주장하는 예언이 거짓임을 확신시켜주고자 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앞장에서 살펴보았던 하나냐(28:15)와 같은 자들로서
그는 이들 부류의 대표자였었다.
그들은 꿈꾸는 자, 복술, 술사, 요술객들과 접맥이 되어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어떤 헛된 예언의 정보를 받았던 것 같다(27:9 참조).
이러한 선지자들 중에 몇몇은 반란을 주도하였으며, 민족에게 재앙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본장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21-23절).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와 의도가 무엇인지가 언급되고 있다.
바벨론에서의 70년이란 기간이 차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한편, 근동의 패자로 급부상하였던 바벨론 제국의 권세가
불과 70년만에 몰락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본절의 예언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잘 믿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니느웨의 멸망이 B.C. 612년에 일어났고 이때로부터 바벨론 권세가 시작된 것으로 한다면
바벨론 멸망이 B.C. 539년이기 때문에 그 기간은 73년간이 된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즉위하던 때(B.C. 605년)로부터 *갈그미스 전쟁에서 승리한 해
바벨론 멸망 때까지로 계산하면, 바벨론 제국의 지속 기간은 불과 66년 된다.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 장래에 소망(아하리트 웨티크와)'
이에 대한 직역은 미래와 희망이란 의미이다.
이는 두 개의 비슷한 말을 겹쳐 씀으로써 그 내용을 강조하는 증언적 표현법이다.
따라서 이 말은 결국 너희가 바라던 미래, 대망하던 미래,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란 뜻이다.
29: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자기 백성을 위한 여호와의 생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곧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고통과 재앙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래에 이 백성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여
이전에 누리던 특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아마 예레미야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는
여호와를 향한 원망과 그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또 그에게 기도하며
그에게 나아갈 때에는 여호와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다(암 5:4-6, 호 2:16-20).
반면에 여호와는 패역한 길에서 돌이키지않는 백성에 대해서는
언약의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겔 2:3-5, 33:17-20).
여호와의 축복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에는 순종과 충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우선적으로 요청되었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에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겔 33:10)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 백성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의 죄악을 깨닫는 백성에 대해서 여호와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여기서 '온 마음으로'(베칼레바브켐)라는 말은
'네 마음을 다하여'란 뜻으로서 감정적인 면보다는 의지적인 측면에 더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29: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들을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 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돌아오게 하리라'
13절에 제시된 약속이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다.
즉 언약의 축복이 유용하게 될 것이란 내용으로서 신 30:3-5에 언급된 약속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결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여호와를 거부하고 그의 언약을 저버리는 자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저절로 허용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29: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메시지의 자연스러운 진행 과정은 15절에서 21절로 넘어간다. (편지가 21절에서 다시 이어짐)
본절만을 가지고 살펴보면 16-19절은 회복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여호와께서 유다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70인역에서는 16-20절의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16~20절은 삽입절이라서)
29:16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과 이 성에 사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본절에서는 메시지의 대상이 바벨론으로 잡혀가지 않고 유다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 당시 다윗 계통의 왕인 시드기야와 이들 백성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설사 그들이 B.C. 597년의 심판에서 벗어나고 화를 모면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은 여전히 심판 아래에 놓여 있었던 것이며,
그들에게 임할 비참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것이다.
2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하겠고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여기 언급된 징벌 수단들은 본서의 다른 곳에서도 누차 발견된다.
(17, 18절, 15:2, 3, 24:10, 42:17, 44:12 등)
그리고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란 표현은 24장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
24장과 이곳은 둘다 아직 유다에 살고 있는 자들을 공격하는 논쟁이며
그와 함께 B.C. 597년 이후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격려하는 내용의 말씀이다.
또한 선지자는 현재 다윗의 왕자에 앉아 있는 시드기야를 부러워하지 말고
더군다나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의 운명을 부러워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왜냐하면 현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자들은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바벨론에 있는 그들의 형편보다
더 참혹한 운명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9:18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낸 나라들 가운데에서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29: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꾸준히 보냈으나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B.C. 597년 이후에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종을 통하여서
말씀하셨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자기들의 행위를 고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끊임없이 그들을 설득하고 재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고집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심판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29:20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낼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
여기서는 다시 화제가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블레이니 박사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가 두 개였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에게 사신으로 보낸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가 귀환했을 때
예레미야는 자신의 충고가 그들에게 적절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바벨론의 포로들이 예레미야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포로들 중에 있는 거짓선지자들의 허황된 설교에 속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두번째 서신을 기록해서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21-23절 내용을 14절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다.
29: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이 두 사람은 바벨론의 포로들 중에 있었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예레미야의 설교에 반기를 들고서 유다의 번영과 평안을 주장하였던 허황된 예언이
B.C. 597년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인한 파멸에도 불구하고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낙관주의는 엄청난 고통을 자초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계속해서 거짓을 예언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생활 역시 악하고 죄악에 물들어 있었다(23:9-15).
그들은 동료, 이웃의 아내들과 간음을 행하였다(23절).
29:22 바벨론에 있는 유다의 모든 포로가 그들을 저줏거리로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를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두 거짓선지자)'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불살라 죽였는데, 이러한 화형은 바벨론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시행되었던 처형법이었다(함무라비법전 25, 110, 157, 단 3:6).
이 두 거짓 선지자의 죽음은 저주를 나타내는 하나의 속담같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저주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로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을 것이다.
29:23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게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라 나는 알고 있는 자로서 증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예레미야는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의 처형을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거짓 예언에 대한 징벌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처벌한 것은 단순한 도덕적 범죄 때문이 아니라
국가 반란과 선동죄로 처벌하였을 것이다.
29:24 너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라
본절을 26-28절에 포함시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예레미야가 스마야 개인에게 보낸 경고 서신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예레미야의 서신을 보고서, 포로지에서는 심한 반발이 일었으며
그 반발을 부추킨 중심 인물이 바로 스마야였던 것 같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스마야에게 경고조로 개인 서신을 보내었다고 이해할수 있다.
이 서신의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되어 있으며,
곧바로 스마야가 예레미야를 고발하는 내용의 편지가 이어진다(26-28절).
한편 스마야란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스마야를 수식하는 말인 '느헬람 사람'에 대해서는
1)출신지로 보는 견해
2)가계명 family name 으로 보는 견해
3) '꿈꾸는 자'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으나 1)이 보다 무난한 듯하다.
29:2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네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글을 보내 이르기를
예레미야는 여기서 스마야가 스마야 자신의 이름으로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유사(관리)이기도 하였던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비난한다.
스마야가 마치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처럼 가장했지만
실상은 자기 임의대로 편지를 썼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난은 31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그 뒤에는 이곳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결과가 언급되고 있다.
29:26 여호와에서 너를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아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로 세우심은 모든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예레미야 겨냥)들을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과 목에 씌우는 쇠 고랑을 채우게 하심이어늘
29:27 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29:28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오래 지내야 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셨다 하니라
여기서부터는 스마야의 편지의 내용이 요약되어 설명된다.
스바냐는 당시 여호야다의 직위를 물려받은 성전의 제사장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 자리를 바스훌이 차지하고 있었다(20:1-6).
바스훌은 B.C. 597년에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것이 분명하다.
한편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는 시드기야의 특사로서 예레미야를 방문하여
두번씩이나 그의 조언을 구한 바 있다(21:1, 37:3).
그는 예루살렘 멸망 후인 B.C. 586년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52:24-27, 왕하 25:18-21).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들이 확실하게 발생되었고 또 성취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여전히 '미친자'로 취급당하고 있다.
29:29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서 들려 줄 때에
스마야의 지적은 스바냐가 아나돗사람 예레미야를 자유 상태로 내버려 둠으로써
성전 유사로서 해야 할 바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예레미야는 거짓선지자이며 미쳤고 또 자칭 선지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차꼬에 채워져야 하며, 목에 칼을 씌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 드러난 스바냐의 행동으로 볼 때
그는 예레미야에게 오히려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다만 예레미야가 스마야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던 점에서
어떤 특별한 경고 조치는 없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29:30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9:31 너는 모든 포로에게 전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를 두고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스마야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에게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 스마야에 대한 여호와의 메시지를 포로민들에게 써 보낸 내용이 소개된다.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상대로 했던 말과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여
거짓 선지자 스마야에 대한 예언을 포로들에게 편지로 써 보냈다(28:15, 16).
즉 스마야는 거짓을 예언하였으며 또 그것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는 그를 처벌하실 것이고 또 그의 후손들도 징계하실 것이다.
29: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백성 중에 살아 남을 그의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스마야에 임할 저주로 끝맺고 있는 본장의 마지막 절은
본장의 끝일 뿐만 아니라 26-29장에 달하는 하나의 단락의 결말이기도 하다.
26-29장의 각각의 장들은 여호와의 종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이 백성이 거부하고 있다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장 내에서는 이러한 거부에 대한 심판 선언의 내용이 뒤따랐다.
당신의 백성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하고 또 언약에 순종치 않는 것은
언약의 파기였으며, 그 결국은 언약에 명시된 저주 조항의 가동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