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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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2:15-18 2007년 07월 22일
※내가 사람들에게 파급효과를 주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다이빙 종목에서 전부
여덟 개의 금메달 중에 중국 선수들이 여섯 개를 휩쓸었습니다.
다이빙 종목은 전통적으로 우리 동양 사람에게는 별로 적합지 않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신체적으로 키가 작고 유연하지 못한 뭐 이런 저런 이유로
다이빙 종목은 아무래도 아시아 사람에게는 적합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 선수들은 메달에 근접도 못합니다.
그런데 중국 선수가 다이빙 종목을 휩쓸었어요. 금메달을 여섯 개나 땄습니다.
그래서 다이빙 강국의 위용을 자랑하게 됐습니다.
사실은 1984년 LA 올림픽 때, 아시아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다이빙에서 금메달은 딴
여자 선수가 하나 있습니다. 저우지홍이라고 하는 아가씨인데요,
이 사람이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면서부터 가능성을 열어 놓아서
줄줄이 중국에서 다이빙 선수들이 나오게 되었던 겁니다.
저우지홍 에게 기자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왜소한데도 어떻게 그렇게 유연하게 다이빙을 잘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기자의 질문에 아주 흥미 있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어머니 때문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에 100m 경주를 좋아했습니다.
이 100m 경주에 나갔는데 이상하게 나갈 때마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뛰니까 물론 입상은 못했지요.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그걸 지켜보고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1등은 못했지만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뛰는 네가 너무 아름답고
나의 마음을 뿌듯하게 했느니라. 나를 너무 기쁘게 했다.'
그래서 열심히 뛰었고, 또 다이빙으로 바꾸어서도
어머니가 지켜보면서 번번이 실수를 해도
그 실수하는 게 더 재미있고 더 예쁘게 보인다고 그렇게 칭찬해주셔서
마음 놓고 다이빙을 하게 되었고, 스탠드에 설 때마다
저를 바라보시며 웃고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언제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뛰어 내립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한 소녀가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기쁨 속에 뛰어들 듯이 그 높은데서 뛰어내리는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요. 아름다운 관계입니까?
▲여러분,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얻든, 못 얻든지 간에 인간은 행복을 찾아 헤매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략 말하자면 세 가지 행복이 있습니다.
1) 하나가 생리학적 행복입니다. 배고플 때 먹고, 목마를 때 마시고, 졸릴 때 자는
그런 거 말입니다. 이런 생리학적 행복이 있는가 하면
2) 철학적인 행복도 있습니다.
역시 인간은 생각하는 데서부터 인간이니까요.
그래서 철학적 욕구, 이성적 욕구를 충족해 나갈 때 모르던 것을 깨닫고
잊어버렸던 것을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생각하고 좋은 세상도 생각합니다.
생각 속에서 얻어지는 철학적 행복이 있습니다.
3) 세 번째는 신학적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영혼이 깨끗해지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순간에서 오는 영적
그리고 영원한 그런 행복입니다.
행복을 좀 더 구조적으로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 Taking Happiness입니다. 취하는 것입니다. 얻는 것입니다.
뭐든지 얻는 것, 깨닫는 것, 보는 것, 가지고 싶은 것을 갖는 것,
뭐 그런 행복이 있고
2) 다음에는 Becoming Happiness입니다. 성취감입니다. 무엇인가 되는 겁니다.
나의 인격도 되고, 나의 능력도 되고, 나의 지도력도 되고,
무언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루는 성취감, 이런 것들을 행복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3) 세 번째는 Giving Happiness입니다.
역시 사람의 기쁨은 이기적인 게 아닙니다.
남을 향해서 무언가를 줄 때, 그 주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면서
내가 먹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주어서 아이들이 먹는 것을 볼 때가 더 행복하죠.
나 자신의 기쁨보다는 남에게 주면서 얻어지는 기쁨, 이 Giving 아주 귀한 것입니다.
이걸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참 불행한 사람이죠.
다음에 네 번째, Making Happiness입니다. 무엇인가를 만들어 갑니다.
환경도 만들고, 물건도 만들고, 창조해 갑니다.
그 중에도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을 만드는 거예요.
시원치 않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가 세월이 가면서 사람이 되가는 것을 봅니다.
나로 인해서 사람이 됩니다. 나로 인해서 그 사람이 점점 밝은 사람이 되고
진실한 사람이 되고 아니 행복한 사람이 될 때,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때,
아니 행복하게 했다고 느낄 수 있을 때... 그 행복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자랄 때, 아 그 꼬무작, 꼬무작할 때 예쁘죠?
조금 더 커서 말 배울 때 예쁘죠? 말 배울 때는 실수하는 말이 더 재미있어요.
아, 그것도 예쁘죠. 조금 더 크면서 학교 다니고 성장하고 저들도 사랑을 하고…….
뭐 이렇게 자녀들이 성장해 나가는 걸 볼 때 행복합니다.
특별히 바르게 아름답게 또 행복하게 성장해 나가는 걸 볼 때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걸 보는 기쁨, 이것이 차원 높은 겁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고 하고
또 그들이 덕을 나타내서 그 인격의 영역을 넓혀가는 걸 보면 아주 행복합니다.
그런고로 물질을 만드는 게 아니고, 환경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을 만들어 가는 그런 행복, 이것이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사실 자기 자신으로 볼 때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키도 뭐 넉자 밖에 안됐다고 하고, 뭐 그저 옛날 사람들이
그린 그림에 보면 하나같이 그 사람은 대머리에다가 코는 우뚝하고 못 생겼어요.
외모로서는 볼 게 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평생 나그네로 살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무슨 칭찬만 받고 산 게 아니에요.
고린도서를 비롯해서 여러 편지에 나타난 대로 사도 바울은 비난을 많이 받았어요.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감옥에 투옥되고 여러 가지 오해 속에서 그대로 순교까지 당하게 됩니다.
신체적 조건, 환경적 조건 등 조건으로 보아서도
그리고 흔히 말하는 명예와 지위 이 모든 면에서 그리 행복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큰 행복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8)"
함께 기뻐하라.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기쁨이란 혼자의 것이 아니에요.
절대로 이기주의자는 행복이 없어요. 아니 거꾸로 말하면 행복이 없을 때마다
스스로 살펴보세요. 원인은 이기주의에 있어요. 이기심을 빼 버리면 다시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동안,
그는 영영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게 우울증이 되기도 하고, 사람의 인격과 운명을 망가뜨리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몸도 성할 수가 없어요. 그런고로 행복이 중요한 겁니다.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함께 기뻐하는 곳에서 행복이 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기뻐해야 돼요.
내가 기뻐해야 또 상대방을 기쁘게 할 수 있어요.
가끔 우리는 그런 경우를 좀 봅니다. 아이들에게 음식을 줄 때,
자기는 안 먹으면서 너는 먹으라, 자기는 수저를 놓으면서 많이 먹어라.
이게 문제입니다. 내가 먹으면 따라 먹게 돼 있어요.
그래서 대부분 외아들, 외동딸이 밥을 안 먹어서
어머니들이 그릇가지고 다니면서 먹이려고 애쓰잖아요.
그런데요, 자식이 일곱 이상 되는 집의 아이 보고는 먹으라는 말 할 필요가 없네요.
서로 뺏어 먹느라고 바빠요.
이 놈 먹으면, 저 놈 먹어요. 맛이 있고 없고가 없어요.
사실 말하면 아이들의 입맛은 어머니가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솔직히 말하면 입맛이 없어요.
어머니가 맛있게 먹으면 따라서 먹는 거예요. 그러면서 입맛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행복하면 저들도 행복하고
내가 맛있게 먹으면 저들도 맛있게 먹게 돼 있어요.
사도바울의 말에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함께 기뻐하라. 내가 이렇게 기뻐하고 있다. 너희들도 기뻐하라.'
자, 왜 일까요?
오늘 성경을 자세히 살피면 먼저는 내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기쁘다.
▲여러분, 세상에 사람을 제일 피곤하게 하는 것이 수고가 헛된 것이죠.
땀을 흘리는데 결실이 없어요. 많은 시간 애썼는데 성적이 부진해요.
많은 수고가 있었지만 그만 사업에 실패해요.
이 헛된 수고, 수고가 물거품으로 돌아갈 때에 괴로운 거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자기는 지금 감옥에 있지만 빌립보교회를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수고가 헛되지 않았어요.
그 수고의 결과로 그들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고 있어요.
어그러지고 거스러진 세대 가운데에서도 빛을 나타내고 있어요.
소위 말하는 빛과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어요.
빌립보 교회가 이렇게 신앙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는 걸 보면
비록 감옥에 있으면서도 '나는 기쁘다. 너희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쁘다.
나는 행복하다. 너희들은 나의 면류관이다.' 이렇게 행복해 하고 있어요.
자기 처지를 돌아보는 게 아니에요. 빌립보교회의 행복을 자기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 차원 높은 행복이 바울을 끝까지 행복하게 만든 거예요. 이건 흔들림이 없으니까요.
▲바울은 또한 은혜를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했어요.
빌4:15절에 몇 번을 거듭 읽어보면 좀 마음 아픈 부분이 있습니다.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주고받는 일에 참예한 교회는 너희밖에 없었느니라.' 발4:15
Give & Take. 가만히 보세요. 바울이 너무 수고했어요.
그 많은 생명을 걸고 수고와 수고를 했지만 다 받기만 하고
다소라도 그 은혜를 보답한 사람이 없어요.
'오직 너희만 주고받는 일에 참예했느니라.' 그 바울의 심정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여러분, 주는 사람은 그냥 주기만 하는 거죠. 하지만 그래도 뭐 고맙다고 하든지
좀 웃기라도 해야 좋은 거 아니에요?
또 내가 주고 싶은 분에게 준다하더라도 그리고 무슨 인사 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다시 되돌려 받으려는 마음이 없어도 그래도 조금은 있잖아요. 조금 알아주면 좋잖아요.
사도 바울은 온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도 주고받는 일 없었어요.
오직 빌립보 교회만이 Give & Take.
복음을 받고 또 무언가 선물을 바울에게 주었어요.
그 뿐만 아니라 지금 로마 감옥에 있을 때도 '또 감옥에 갇혔구만,
‘에이 저라다 죽겠구만……' 다 그 정도이고, 위해서 기도하는 정도에 끝났지만
빌립보 교회는 안 그랬어요.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어려울까? 얼마나 고독할까?
그래서 자기 교회의 목사님에게 성금을 모아서 드리고
한 겨울 동안 가서 사식을 넣어 드리고 불편한 생활을 도와드리도록,
에바브로 디도를 로마로 파송했어요.
바울이 마음에 너무 감동해서 너무 감격해서
'주고받는 일에 참예한 교회는 너희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 읽어볼수록 참 마음에 무언가 깊은 느낌을 줍니다.
보세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쁜 거예요. 뭘 얼마나 보냈는지 얼마나
사도 바울을 위해서 위로를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빌립보 교회만은 그런 교회예요. 주고받는 일에 참예한 교회예요. 빌4:15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보세요. 은혜를 아는 사람,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거든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애들에게 어렸을 때
뭐 과자라도 이렇게 넣어주면, 아이들이 맛있게 먹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가 입을 벌리면
저도 자기 먹던 것, 코 묻은 것 입에 갖다가 넣어줍니다.
요것이 요만큼 은혜를 아니까 그렇게 합니다. 은혜를 안다는 게 이렇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은혜에 행복한 거예요.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2:16
그리스도의 날에……,
사도 바울은 늘 그리스도의 날을 생각하며 살았어요.
고린도서에도 보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그리스도의 날에…….
주님 오실 때 우리 다 같이 주님 앞에 갔을 때에
그때 가서 거기서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 이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리스도의 날에 아마도 그러겠지요.
빌립보 교인들이 천당 가서 '사도 바울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아, 그의 편지를 받고 우리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분이 있어서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할 때
사도 바울이 그때 가서 정말로 행복하겠다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기쁩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그들의 믿음생활, 그들의 교회생활, 성숙한 교회생활, 그리고 그들의 사회생활을 생각하며
기뻐서 하는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의 기쁨과 행복의 클라이맥스가 이렇게 표현됩니다.
'너희 믿음과 봉사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 빌2:17
참, 내 일생 이 말씀을 참으로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관제로 드릴지라도…….' 관제라는 것은 피를 쏟아 붓는다는 뜻이에요.
양을 세워놓고 그대로 칼로 목을 쳐서 목이 떨어져 나갈 때에 선지피가 솟아납니다.
이걸 받아다가 불붙는 제단에 갖다 부으면 그 피가 지글지글 타면서 올라갑니다.
이게 관제 제사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라. 그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행복의 클라이맥스라고. 클라이맥스가 뭡니까? 이대로 죽어도 좋다. 그거예요.
이 시간 이대로 죽어도 한이 없어요. 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바로 그런 행복.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이 행복을 감당할 수 없으니
그런고로 이대로 죽어도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라.
그러고 나서 다시 말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기뻐하리니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2:17~18
기뻐하라. 기뻐하라. 함께 기뻐하라. 함께 기뻐하라.
나로 인해서 열매 맺고 수고가 헛되지 않는 그 결과를 보면서 기뻐합니다.
이건 종말론적 행복입니다. 함께 기뻐하는 겁니다.
파급적인 행복입니다. 파급 효과에서 오는 큰 행복입니다.
▲여러분, 잘 아는 소련 공산주의를 붕괴시킨 보리스 옐친(Boris N. Yeltsin)이라고 하는
대통령을 알고 계실 겁니다. 참으로 역사를 바꾼 위대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자유사상을 가지고 이런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폴란드 바웬사( Lech Walesa)의 수기를 읽다가 큰 감동을 받고
오늘과 같은 일을 하게 됐습니다.'
또 바웬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공산주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깊은 역사를 하게 됐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의 수기를 읽다가
거기서 깨닫고 용기를 냈습니다.'
또 마틴 루터 킹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인권운동을 하게 됐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로사 팍스라고 하는 재봉틀과 함께 사는 그 재봉사 아주머니 때문입니다.'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그 당시에는 버스에 앞자리는 백인이,
뒷자리는 흑인이 앉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 팍스 여사가 백인들 있는 사이에 떡 앉았어요.
운전사가 목소리를 높여서 뒷자리로 가라고 검둥아 뒤로 가라고 난리를 쳤지만
태연하게 똑바로 눈을 뜨고 빙그레 웃으면서 앉아 있어요.
'하나님 앞에 다 동일한 것이다. 피부색 가지고 판단하지 마라.' 이러거든요.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이 아주머니를 보면서 생명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음성이
속으로 강하게 들려왔어요. 그래서 인권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하는 일 하나가 이렇게 파급 효과를 가져오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한 말 한마디가 이렇게 귀한 열매를 맺는 겁니다.
아, 그건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이제 나이가 드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부흥회도 인도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참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들어요. 나도 모르게 한 말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 때 목사님 이런 말씀 하셨는데 그것으로 내가 일생을 삽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조금 더 죄송스럽기도 해요.
어떤 때는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싶기도 해요.
여러분, 여러분의 생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나의 하고 있는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영향을 받고 감동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갈 때,
그것을 언젠가 깨닫고 보고 느낄 때마다 '아 나의 생은 헛되지 않았다.
참으로 아름답다.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행복이 가장 크고 위대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써서 세상에 알려진
스펜서 존슨이 최근에 베스트셀러인 「멘토」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인생에는 멘토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자기 혼자 사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 나를 도울 수 있는 멘토가 필요합니다.
멘토를 향해서 우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충고합니다.
소위 1분 멘토를 요구합니다. 1분 멘토.
하루 종일 사는 가운데 단 1분이라도 잠깐 멈추고 멘토를 향해서 마음을 열어요.
나는 지금 바로 살고 있는가? 내 목적이 무엇인가?
그 다음에는 이어서 목적을 따라 생각하는 것, 그것 하나를 칭찬해 줘야 된다는 겁니다.
네가 이만큼 멘토를 생각하는 것, 아름다운 일이라고,
그 다음에는 이 멘토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가를 성찰해야 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까? 아니면 슬픔을 줍니까?
나로 인해서 용기를 줍니까? 나로 인해서 행복을 줍니까?
나 자신이 성숙해지는 성취감, 큰 것입니다만 그건 아직도 작은 것입니다.
이보다는 Becoming 보다는 Making입니다.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구원하는 그런 아름다운 일들,
이런 참 기쁨을 보면서 함께 기뻐하는 바울처럼 '나와 함께 기뻐하라.
아,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렇게 사는 행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