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특별한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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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특별한 초청 사1:1~20 2025.01.05.
'하나님은 암울한 상황 가운데서도, 언제나 남은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므로
거기에 희망을 두고 살 수 있으며,
우리가 남은 자, 거룩한 씨로 부름을 받고, 헌신해야 한다는 내용이, 아래 설교 중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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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2025년도 새해 신년 예배를 맞이했습니다.
작년에는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덕담으로 '2024번의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랬어요.
금년 2025년도에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올해 인데,
'주여, 2025번의 지혜와 명철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원하게 됩니다.
올해는 2025번의 지혜와 명철을 주셔 가지고, 금년 한해 여러분들 가정 가정마다
하나님께서 지혜의 주머니, 명철의 주머니를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다사다난이 아니라, 다사다지혜, 다사다명철, 다사다은혜의 한 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사야서 서론
금년에 저는 <이사야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이사야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전체 주제를 어떻게 정할까?' 기도하다가,
"앙망하라.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새 길이 열리게 하여 주십시오.
이사야서에 '반드시'란 말이 여러번 나오거든요.
그런 마음으로 여러분,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반드시!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열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이나 저가 이사야서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이사야서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가만히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참 쉽지않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것인데,
수많은 말씀들이 위로가 되었지만, 최고의 말씀이 뭐냐면, 이사야 와 시편이었어요.
어려울 때마다 최고의 말씀이 시편과 이사야였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좀 삶의 짐이 무거울 때마다,
시편과 이사야서가 여러분을 살릴 것입니다. 살릴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사 적으로 볼 때, 이사야서를 해석하는 두 개의 창이 있는데,
-하나는 신약의 창이 있고...
이 말은, 신약성경에 제일 많이 인용된 구약성경이 이사야와 시편이에요.
그래서 신약에 인용된 말씀들로 구약의 이사야서를 해석한다는 뜻이죠.
-또 하나는 교부들은 이사야서를 어떻게 해석했던가요?
어거스틴, 이그나티우스, 이레니우스 등 수많은 교부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사야서를 어떻게 해석했는가요?
이 두 가지 창을 제가 늘 마음을 갖고
그 두 창 사이에서 이사야서의 진리의 빛이 환하게 비춰 들어오기 바랍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쭉 놓고 볼 때, 이사야서가 좀 독특합니다.
여러분, 신구약 성경이 모두 66권이죠. 구약 39권, 신약 27권이죠.
근데 너무 놀랍게도, 이사야서도 66장까지 있어요.
근데 전편 부분이 39장이고, 후편 부분이 27장이에요.
이사야서 40장부터 후반부가 시작이 되는데,
마치 구약이 끝나고 신약이 시작되는 것처럼,
이사야서도 40장부터 '회복'의 말씀이 시작돼요. 마치 성경의 신약처럼요.
여러분 신약이 시작될 때, 누가 신약의 문을 열었습니까?
세례 요한이 신약의 문을 열었거든요.
이사야서도 똑같아요.
사40:3절에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위 구절이, 신약의 세례요한의 메시지와 너무 똑같잖아요.
구약 39권은 아시는 대로 심판과 경고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이사야서도 1~39장까지는 심판과 경고가 주로 나오고,
신약 27권이 북음과 회복의 메시지인 것처럼,
이사야서도, 40장부터 마지막 66장까지는 복음과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주를 이루죠.
그리고 신약의 마지막이 계시록인데, 거기서 새하늘과 새땅의 예언으로 끝나는 것처럼,
이사야서도 보면, 마지막 66장이, 계시록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으로 끝납니다.
참 신기하죠.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이사야서를 통하여,
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사야 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이 구원자이시다'
그래서 이사야서가 우리에게 구원 초청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구원의 말씀으로 초대받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서론으로, 이사야 선지자 개인을 좀 살피겠습니다.
사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를 관통해서 사역한 선지자예요.
BC 740~ 680년까지 약 60년간 오랫동안 사역한 선지자인데
1절에 보니까 이사야의 아버지가 아모스예요.
이 아모스 는 누구냐? 아모스는 아마샤 라는 왕의 형제 였어요.
그러니까 이사야는 아마샤 왕의 조카였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이사야는 소위 로얄 아카데미, 왕립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를 한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왕족이었죠.
그러니 이사야가 쓰던 언어, 행실, 문체... 이런 것들이 너무 기품이 넘치고, 세련되고,
그리고 그 이사야서 한 절 한 절이, 아주 문장이 수려합니다. 즉 빼어나고 아름답습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의 대선지서를 얘기할 때, 에스겔서도 대단한 성경인데,
에스겔서 길잖아요. 그런데 에스겔서에 나오는 새로운 단어는 1천5백 개 정도를 쓰고 있고,
시편 같은 경우는 150편까지 길잖아요. 2,170개의 새로운 단어를 쓰고 있고,
근데 이사야서는 2,186개의.. 성경에서 가장 많은 새롭고 기품있는 세련된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사야는 그의 언어, 비유적 표현, 그의 시적 천재성은
실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불꽃 같은 영감을 가진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한 마디로 '구약 시대의 사도 바울' 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면 그의 메시지는, 바울 처럼, 강력한 복음적 언어로 선포되었어요.
그래서 이사야서를 읽다 보면, 마치 갈릴리와 유대와 베뢰아와
마지막 갈보리를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걸음과, 예수님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신약에도 자주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바' 이런 내용들이 많이 나아요.
제가 지금 전체 성경, 특별히 신약의 창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새해, 특별한 초청"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이사야서의 문을 여는데
이사야서에 나오는 3가지 초청을 살펴보겠습니다.
◑1. 비관적 현실에서 '낙관론자가 되라'는 초청
이사야서는 전체적으로 독자들에게 몇 가지 초청을 하는데
이사야서의 소중한 특징 중에 첫쩨는 뭐냐면,
결코 낙관론을 펼칠 수 없는... 참으로 우울하고도 비참한 상황에서도
그는 거룩한 낙관론을 놓치지 않는 놀라운 선지자였어요.
낙관론을 펼칠 수 없는 어두운 상황 가운데서도,
강력한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이사야가 선포한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서 앞부분에 보면, 곳곳마다 어두운 멸망, 수치, 고난, 끔직한 죽음, 질병,
상실, 노예, 복역의 때... 이런 가능성 없는 절망의 단어들이 수 없이 나오지만,
동시에 최상급의 수려한 언어로, 영원한 약속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그게 우리의 마음을 막 파고드는 거예요.
이사야서에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복음성가 가사도 많이 나오는데요.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사11:9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사2:2~3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사40:31
이사야서에 나오는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해 가지고 찬송을 하는 것이에요.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1:9
그러니까 낙관론을 펼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복음의 능력으로, 말씀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혼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사야는 현실을 낙관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신약의 복음의 낙관론과 같은 맥락이죠.
▲이사야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낙관론을 담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갈릴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주님께서 소위 '사명선언문'을 발표하십니다.
'나사렛 선언'이라고도 하는데, 눅4:17~19절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이 어디서 비롯됐는가요?
이사야 61:1~2절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적이라고 볼 때,
출처인 이사야서도, 미래에 대해 하나님의 낙관론을 담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 가지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이 '나사렛 선언'이 우리 사회에 역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이사야의 말씀을 제대로 초청하고, 듣고, 깨달으면,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가 치유되어, 수치 되신 복음적 환호성을 지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고, 우리의 삶의 영적인 장막터를 넓히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면,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 아멘
이것은 단순히 그냥 새로운 길이 아니에요.
▲자, 우리가 이사야서를 통해서 거룩한 낙관론을 가져야 되는데,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
'회복되고 다시 구원의 복음이 온다'고 그랬을 때, 그 사람들의 생각은
'아, 예루살렘 성이 회복되고, 우리의 땅이 복을 받고, 우리가 좀 잘 살것 같다'
이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회복'을 이 세상에서 잘 되는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근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어요.
옛날의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의 영광을 회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과 환상을 주신 것이에요.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회복)가 아니라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경탄할 만한 회복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바로 복음의 회복이죠.
우리나라가 지금 어렵지만, 이때 잘 하면,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통일도 주실지 모르 는 거예요.
그래서 금년에 여러분과 제가 이 이사야서를 공부하면서
다시 한 번 개인적으로, 교회 적으로, 민족적으로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했던 새예루살렘,
예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비전과 환상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걸 오늘 제가 이사야서를 통하여, 이사야서 전체를 통한 초청을 하는 것입니다.
어려워도 말씀을 통해 우리가 거룩한 낙관론을 갖게 되는데,
나사렛 선언을 하신 예수님을 본 받아 사61:1~2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예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사명과 은혜를 물붓듯 부어 주시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가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뭔가하면,
오늘 사1:3~8절까지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탄식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깨달아야 되는 거예요.
◑2. '남은 자'가 되라는 초청
본문 이사야서가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초청은,
우리가 어떤 범죄를 했는지, 우리의 상황이 어떤지, 우리의 현실이 어떤지
그것을 분명히 깨닫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네 왕을 거쳤다고 했습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이 네 왕의 통치 시기에 이사야가 사역을 했는데,
이사야가 얼마나 고생할 많이 했느냐면,
처음에는 멋있게 잘 사역했는데, 나중에는 그가 순교를 당하는데
유대 전승 미쉬나에 의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톱으로 켬을 당해서 죽었다'고 나오는데, 히11:37
그렇게 톱으로 켬을 당해가지고 순교한 사람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므낫세 왕 때, 그렇게 순교했죠.
이사야가 활동하던 그 시기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암울한 시기 였어요.
얼마나 어려운 시기냐 하면, 1:4절에 보니까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1:4
자, 보세요. 국가적으로는 '허물진 백성이요. 범죄한 나라'입니다.
본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나라다'
그래서 거룩한 나라와 제사장의 사명을 주신 나라였는데,
어떤 나라가 되었냐? '범죄한 나라가 되고 허물진 백성이 됐어요.' 1:4
하나님이 주신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 되었다'는 거죠. 1:4
기가 막힌 거래요. 너무나 마음 아픈 얘기예요.
죄악을 씨앗이 뿌리 내려져가지고, 죄가 계속해서 대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져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소위 '기독교를 저주하고' 오늘날처럼 기독교를 멸시하고, 모욕하고,
기독교를 함부로 욕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행악의 종자들' 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너무나도 생생한 범죄의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5~6절입니다.
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기가 막힌 말씀이에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성한 곳이 없고, 터진 것 뿐입니다.'
온 몸이 병 들었다는 거예요. 마치 오늘날의 에이즈를 묘사한 것과 비슷해요.
인체의 면역 체계를 망가뜨리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영적인 면역 체계를 망가뜨린 것과 비슷한 것이에요. 너무나 리얼하고 실제적 묘사입니다.
1:7~8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하나님을 등지면 일어나는 끔찍한 일을 묘사하는데,
한마디로 방호막이 없어지고, 방어 기재가 사라지고, 보호막이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 가지고 3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요?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무슨 말이냐면? '너희들은 소나 당나귀 보다도 못하다' 하고 질책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이 국가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이런 면이 있다면,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으로 이사야는 애통하는 것입니다.
'탄식하노라 범죄한 국가의 참상이여!'
이런 기가 막힌 어려움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주님이 이사야서를 통해 두 번째로 초청을 하시는데,
1:1~8절까지는 이런 기가 막힌 어려움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암울한 상황 가운데서도 빛을 보여 주십니다.
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1~8절의 어려움과 범죄한 나라의 참상이 있지만
해결 방법은 '그 폐허 가운데서 생존자를 남겨두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씨를 남겨주시는 방식으로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9
9절의 '생존자'는 다른 말로 하면 '남은 자'입니다.
이사야서 곳곳마다 '생존자, 남은 자, 거룩한 씨, 그루터기'의 신앙이 나타나고 있어요.
이 '남은 자'는 이사야서 곳곳마다 수없이 많이 나오는데,
10장, 11장, 37장, 46장 등, 지금 제가 대표적인 곳만 말씀드렸지만,
더 많은 곳에서, 이사야서 곳곳마다 '남은 자, 하나님의 백성이 남아 있다,
거룩한 그루터기가 있고, 생존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완전히 망한 상황 가운데서도, 초토화된 상황 가운데서도,
그러면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느냐?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새로운 미래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 남은 자가 거룩한 씨앗이 되어 가지고,
그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기가 막힌 상황을 이겨 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남은 자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이스라엘은 (우리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걸 깨닫고 '남은 자가 없으면 해결이 안 되겠구나..
주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남은 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이사야는 오죽하면 자기가 첫 아들을 낳고
그 첫 아들의 이름을 '스알야숩'으로 지었는데,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7:3
오죽하면 아들의 이름을 '남은 자, 남은 백성이 돌아 오리라'
그러니까 '남은 자'는, 먹구름 위에 은빛 광채 같은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 하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를 같고 다 망했을 것이라'고 했는데, 1:9
하나님은 '다 망하더라도, 남은 자를 조금 남기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패턴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누가 있을 때까지는 안 망했습니까?
롯이 있을 때까지는 그 성이 망하지 않았어요.
롯이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롯이라도 있으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안 망했고,
롯이 그 성을 나오자 말자, 소돔과 고모라는 불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그러니 범죄한 나라, 면역 체계가 사라지고, 방어기재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오늘 '남은 자 신학, 남은 자의 사명, 남은 자의 환상'을 우리 것으로 알고,
그 제목으로 기도하고 집중할 때,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방향을,
'그 남은 자로 통해' 구원의 역사로 새롭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은 자가 누굽니까? 대표적으로 노아의 홍수 때는 노아가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에 대한 신구약의 얘가 많습니다만, 대표적으로 사도바울은
롬11:4절에 '남은 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롬11: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사6:13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저는 이걸 보면서 '그렇구나, 아무리 어려워도, 남은 자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시는 구나'
지금 우리 한국 사회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가 '남은 자'가 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이 민족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경탄할 만한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흔히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를 얘기할 때,
책망 받고 잘못된 교회 중에 하나인 사데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마치 사데교회 같이,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지고는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하는 말씀을 종종 인용하기도 합니다. 계3:1
그런데, 그 실상은 죽은 사데교회이지만, 그 속에서도 '남은 자'가 소수 있었습니다.
계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교회가 실상은 죽은 그런 문제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사데교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그 속에 소수의 '남은 자'가 있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데교회를 구원하시겠다는 겁니다.
사데교회는 이제 완전히 망한 줄 알았는데,
그러나 거기 사데교회에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의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이에요.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남은 자를 일컬어서 '교회 안의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오늘 우리가 이사야서 강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모두가 다 교회 안에 교회가 되게 해 주셔서,
이 민족의 새로운 길을 여는데, 우리가 쓰임 받아야 될 줄로 확신합니다.'
'교회 안의 교회'인 우리의 남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 아직 살아남은 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굳건히 하라'고 했죠.
계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죽게 된 것을' .. 이것은 사데 교회가 부분적으로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줍니다.
'굳게 하라' .. 아직 남아있는 영적 생명을 견고히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 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종종 '굳세게 하라'는 권면을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은혜로 남은 자가 된 줄로 믿을 진데,
'교회 안의 교회'로서, 내가 굳건히 설 뿐만 아니라,
주위의 형제 자매들도 굳건히 세워주는 사명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와 한국 교회는, 이 시대의 남은 자로서
세계 복음주의 교회의 쇠퇴를 막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 시대의 대한민국 교회 성도들은, 이사야 첫째 아들처럼 스알야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3. 이사야서가 주는 세 번째 초청은, <보혈 복음으로의 초청>입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이 말씀은 놀라운 초청입니다. 남은 자들에게 이렇게 초청합니다.
주님의 보혈의 복음 속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오라'는 말씀은, 출애굽기에도, 이사야에도, 계시록에도 계속 나오는데
소나 당나귀 같이 어리석은 우리를, 그냥 내어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오라고 초청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인 것입니다.
여기서 '변론하자'는 말씀은, 법정 용어예요.
이걸 가지고 기소를 한다든지, 고소를 하기 위한 변론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변호하기 위한 변론입니다.
이 '변론하자'는 초청은, 이치를 따져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목자의 심정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한 것은, 언제부터 용서한 것이죠?
탕자가 돌아온 이후에 용서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그가 집을 나설 때부터 아버지는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미 집을 나설 때부터,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 탕자가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는 이 말씀은,
용서를 전제하고 우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장 위대한 진리가 뭐냐?
가장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에요.
우리가 망하게 된 존재라는 걸 깨닫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 1:3~8절까지 나오는 참담한 이런 현상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에요.
그런데 더 위대한 진리가 있어요. 그 더 위대한 진리는 뭔가 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에게 수많은 부족함도 있고, 인생살이를 살아오면서 얼룩진 것들도 많고,
누더기 같은 이런 부족함도 많이 있어요.
근데 주님은 우리에게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여기에 하나님의 자비가 포함되어 있어요.
소나 당나귀 처럼 이해력이 부족한 우리를,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시면서, 설득 하시면서, '오라'고 초청하시는 거죠.
제일 미련한 사람 중에 하나가 요나 였어요.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리시기 원하시는데,
니느웨가 회개하니까... 요나가 너무 열받아가지고 막 화가 났어요.
그럴 때 소나 당나귀 같은 요나가
그 하나님의 심정을 못 깨닫고,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하나님께 대들었는데,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인내하시고, 그를 설득하시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어요.
주님의 세번째 초청의 핵심이 뭡니까?
이사야서에 내내 나오지만, 가장 핵심 구절은 아래입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1:18
주홍과 진홍 색깔은, 죄의 깊이를 말해주죠.
피와 폭력을 상기시키는 색이에요. 끔찍한 죄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에요.
근데 이 끔찍하고, 죄의 깊이를 말해주고,
이 기가 막힌 이 더러움과 오염됨과 이 처절한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오. 진홍 같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뭘 통하여? 또 다른 보혈인 피의 복음을 통하여!
교부 어거스틴 해석의 창으로 볼 때,
'예수님 자신이 먼저 이 피의 복음을 통해 해처럼 찬란하게 빛나서,
그 주님과 부딪히는 수많은 영혼은 치유 받고,
그래서 어거스틴 나 자신부터 치유 받고, 바울이 완전히 치유 받고,
주홍, 진홍이이 눈, 양털 같이 되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초청 받아 용서 받고 변화 받은 사람들이,
결국은 또 '남은 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보혈의 능력은, 주홍 같은 죄, 진홍 같은 죄를 해결하는
그런 능력이 있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보혈 복음의 능력에는, 사각 지대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나오는 것처럼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 히9:22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혈 복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한 줄 알고,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인 거예요.
우리의 죄를 눈보다 희게할 것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이 보혈 복음의 능력은, 사각지대가 없다고 그랬어요.
만약에 우리가 파란색 안경을 끼면, 다 파랗게 보이고
붉은색 안경을 끼면, 다 붉게 보일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색깔로 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 렌즈로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 모두를 보시기 때문에
깨끗하고 순수하고 용서 받은 모습이 되는 것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가 계7:14절입니다.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희게 하였음이라'
우리의 옷은, 누더기 같이 더러운 옷들인데,
그 옷을 어린 양의 피에 씻은 거예요. 보혈 복음에 씻은 거예요.
그 은혜를 우리가 받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사야서를 읽음을 통해
위 세 가지 초청에 응답하는 복된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