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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LNCK 2025. 1. 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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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요나 1:4-12  | 목특새 | 25.1.2 - YouTube

 

나는 누구인가?        욘1:4~12          2025.01.02. 

자, 욥바 항구로 내려간 요나는,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요나는 어쩌면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준비시키셨나? 
그동안 내가 사역한다고 고생했다고, 하나님이 위로차 
이렇게 다시스로 가는 배를 딱 준비시켜 놓으셨구나' 하고 착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해서 도망을 치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소명을 거부했던 거죠. 다시스는 평소 요나의 로망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스로 가는 그 배는, 처음에는 순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1: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요나서에서 '큰 great' 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큰 바람, 큰 폭풍, 큰 성읍, 큰 물고기' 계속 '크다'는 단어들이 나오는데요.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바람과 폭풍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죠.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는 중입니다. 
그런데 바다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는 지중해 연안을 통과합니다. 
이 지중해 바다도 역시 하나님의 통제 구역입니다. 

 

시편 139:9~10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태가 이러해도, 요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빨리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할 때, 거래할 때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물건을 흥정할 때도 거기에 계십니다. 
길을 걸을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아니 부부의 침실 안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위기가 왔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광풍입니다. 
곧 배를 침몰시킬 것 같이 몰아부칩니다. 배의 침물을 막기 위해 모두가 사투를 벌이죠. 

1: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항해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입니다.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위기의 순간이 오니까 모두가 자기의 신들을 찾습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 혼란의 와중에 눈에 띄는 것은, 단연코 요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5 

요나는 처음부터 배 밑층으로 내려간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에서 매우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시사해주고 있습니까? 무슨 상황이죠? 
사람들은 지금 죽음의 위기에 빠져 있는데, 그는 깊이 잠이 들어 있습니다. 

배가 깨어질 정도로 몰아치고 있는데도, 깨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배 안에 있으면서도, 배 바깥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립된 상태입니다. 왜 지금 이런 풍랑이 몰아닥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가 보여준 모습은 무신경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무신경하고, 
자기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무관심합니다. 

요나는 꿈에도 이 풍랑이 자기로 인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는 배 안에서 어울리지 않는 단 한 사람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로 가는 그의 모습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한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었습니다. 
그는 배 밑층으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의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영락없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죄 속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요나처럼 철저히 독립적, 고립적입니다. 
자아에 몰두합니다. 자기애 라는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가족관계 안에 있으면서도, 그는 가족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바다에 바람이 불고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는 일은, 자연현상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은, 직접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큰 바람은, 하나님이 메시지를 보내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위해, 날씨를 조절하기도 하십니다. 
날씨만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든 임의로 조절하실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좀 더 자극적인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말씀을 하실 때와는 다르게, 자연세계를 동원해서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이 매섭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신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정작 요나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진짜 기도해야 될 사람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가끔 예배 시간에 피곤하여 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주일 예배 시간에 졸고 있다면, 
그것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고,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삶을 살면, 영혼은 깊은 밤을 맞게 됩니다. 
그때 영적 무감각증이 찾아옵니다. 영적으로 매우 무뎌집니다.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무심해집니다. 무감각해집니다. 

여러분 이런 상태까지 가면 정말 안됩니다. 너무너무 위험한 상태입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최악의 상황에까지 몰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는, 미풍에도 하나님이 흔드신다는 걸 느낍니다. 
작은 사건이라도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느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그러면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아이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사건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공동체 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큐티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심지어는 지나가는 사람의 말소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능한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세미한 음성으로 충분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다'라는 말에 다들 공감하는 거죠. 
우리에게 닥친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크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가능한 큰 바람이 아니라, 아주 약한 바람으로 메시지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이다'는 라틴 속담이 있습니다. 
불순종이란, 말씀을 잘 듣지 않을 때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가 탄 배에, 바람은 심하게 불고, 배는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요나는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스스로 깨어나지 못합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결국 선장이 요나를 깨웁니다. 타인에 의하여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1: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선장이 요나를 책망합니다. 선장은 위기 상황에서 배를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배 밑층에 죽은 자처럼 자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야말로 그는 '떡실신'입니다. 
선장은 어이가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는가? 

그래서 요나를 흔들어 깨웁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선장이 요나를 향해 질책하는 장면입니다. 
니느웨에서 그들의 죄악을 책망해야 할 선지자가, 지금 거꾸로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요나는 계속 잠을 자고 싶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잠 잘 때냐? 모두가 죽는다고 난리인데, 당신은 뭐하냐?' 

여러분 누가 누구를 책망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향해 책망을 해야 할 선지자가, 도리어 세상의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욕을 먹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흡사하게 닮아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교회의 존재감,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세상 속에 비치는 교회의 모습이 별로입니다. 

가장 심각한 위기는, 교회의 모습과 세상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차이점이 없습니다. 
배 밑창에서 자고 있는 요나는, 바깥에서 사투를 벌이며 노력하고 있는 선원들에 비해 
오히려 더 허약하고 방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소수였으나, 한국 사회의 존중을 받았습니다. 
다른 것에는 좀 밀려도, 영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신자를 막 대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가 거짓말 하겠느냐?' 
그때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존중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교회를 향해 충고하고 있습니다. 
선장에 의해 막 깨어난 요나에게서, 무슨 영적 권위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그에게 풍겨오는 이미지에는, 선지자의 기품이 전혀 없습니다. 
너무도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도주 중입니다. 
요나가 도망을 치는 순간부터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 빛이, 영광이 사라졌습니다. 

무엇인가 표현할 수 없지만, 기백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스 행 배를 타는 순간, 그는 이미 보통 사람들과 구별됨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선장이 요나를 향해 충고합니다. '일어나서 너의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6

요나가 오죽 기도를 안 했으면, 불신자가 요나보고 기도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요나는 기도할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는 중입니다. 
기도가 잘 나올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불신자들이 우리 보고 '기도 좀 하라'고 충고하면, 우리는 어떤 마음일까요? 
'너희들이 기도하지 않으니까 세상이 이 모양이지 않는가? 
너희들은 기도한다며? 요즘 기도는 제대로 하고 있냐?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며? 그런데 왜 세상은 이 모양이냐?' 이렇게 책망하는 거죠. 

도대체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그 존재의 가치가 잘 안 보인다는 거예요. 
배 밑층에서 잠이나 자고 있는 그는.. 현실 상황에 전혀 도움이 안 돼요. 
'세상은 혼란해서 죽을 지경인데, 지금 너희들은 뭐하고 있냐?' 

물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자기 방어를 하고 싶습니다. 
'교회가 그렇지 않다고...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도 역시 요나와 같습니다. 


이때 배 밑층 어두운 곳에 조명이 비춰집니다. 
요나는 숨고 싶은데.. 조용히 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요. 
요나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거예요. 
갑자기 덩달아 우리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거예요

요나의 얼굴이 확 비춰지는데,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여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얼굴이 화끈거리는 거죠. 

'당신들은 뭐해?'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죠. 
요나가 이런 상황에서 펄쩍펄쩍 뛰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거꾸로 된 것이죠. 

코로나19 때에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세상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통당하는데, 
교회는 의외로 잠잠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잠들면, 세상에 놀랄만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교회가 잠들면, 시대 전체가 어둠 속에 갇힙니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에 교회는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답을 주지 못하면, 세상은 결국 더 이상 교회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잠든 사람은 자신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깊이 잠들어 있는 교회들은, '지금 잠들어 있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잠이 들었어... 난 지금 잠들어 있어...' 그 인식이 없습니다. 

잠들고 있는 사람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인식이 없기 때문에 각성을 할 수가 없어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게 그렇게 어렵다는 거예요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는, 경고음을 못 듣는 거죠. 
하나님은 역사 속에, 언제나 경고음을 계속 울리셨습니다. 돌이키라고... 
그러나 그 소리를 듣지 못해서, 갈 때까지 가고 마는 것이죠. 

여러분 잠은 하루아침에 드는 게 아닙니다. 서서히 일어나는 일이에요. 
자신이 영적인 잠에 빠져 있는 줄 모르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흔드심에 대한 요나의 무심함, 무감각함, 
그는 지금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감각에 빠지면, 외부와, 세상과 단절되고... 혼자 고립을 좋아합니다. 요나처럼!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민감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 폭풍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소금이 그 짠맛을 내지 않으면, 그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세상이 썩어 있게 됩니다. 결국 그 소금은 쓸데없어 바깥에 버려져서 발에 밟히고 말죠. 

여러분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각성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잠이 들면 답이 없습니다. 

 

요나가 깨어있지 않으니까,  결국은 선원과 선장이 그를 깨웁니다. 
우리가 세상을 깨워야 합니까, 세상이 우리를 깨워야 합니까? 
스스로 깨어있다면, 하나님은 폭풍을 보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광풍을 보낼 필요 없이, 그냥 모든 상황을 종료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 큰 폭풍 가운데 그대로 두면... 그냥 모두가 끝장입니다. 
그러나 폭풍을 일으키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나를 깨우십니다. 요나는 깨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백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깨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 깨어있는 백성, 깨어있는 교회들을 원하십니다.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대대적인 각성을 일으키신 적이 있습니다. 
16세기에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이 그렇습니다. 

당시 그 시대가 잠이 들어 있어습니다. 깊은 어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마르틴 루터, 존 칼빈, 쯔빙글리 등 하나님의 사람들을 곳곳에 일으키셔서, 
그 어둠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신 거죠. 

18세기에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한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07년에 평양에서 일어났던 대부흥도, 우리의 어두움의 시대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워내시고 각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집회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깨워주시는 방식들이에요. 
하나님은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방향을 반드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련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들려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하고 세상이 아우성을 치는 거죠. 일종의 조롱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맞아? 그렇게 믿는 게 진짜 믿는 거야?' 
하나님은, 세상의 사람들을 통해, 성도들에게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영적으로 잠이 들어 있으면,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때로는 돌들이 소리를 지르게도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자가, 교회가 잠이 들면 어떻게 될까요? 지극히 사적인, 개인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배의 밑층에서 잠을 잔 요나처럼요)
공공성의 개념이 전혀 없어요. 나 혼자만 편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가능합니까? 
지금 요나가 탄 이 배는,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공동 운명체입니다.

배를 타는 순간, 광풍이 몰아닥치면, 어떤 사람에게만 배가 흔들리는 게 아니에요. 
그 배에 탄 모두에게 배가 다 흔들립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대한 '지구촌'이라는 공동운명체의 배를 타고 있습니다. 
배 밑층에 혼자 들어가 깊이 잠에 빠져서... 혼자 편안하게 살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세상이 혼란 속에 빠져서 고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구 때문일까요? 
누구를 비난하고 탓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 소동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왜 그 땅을 멸망시키셨어요? 
그 땅이 동성애가 심각해서 심판하셨습니까? 아니에요. 동성애 때문이 아닙니다. 
그 땅에 의인 10명이 없었어요. 롯과 그의 가족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그 땅의 백성들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세속화된 하나님의 백성들 (롯의 가족들) ! 

요나가 다시스 행 배를 타는 순간, 그는 그의 역할과 사명을 잃어버렸어요. 
그가 할 일이 없었어요. 

여러분 세속화의 과정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서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세상과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닮아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은, 설 자리가 없고, 전할 메시지를 잃어버린 것이예요. 
그것이 오늘 우리의 딜레마예요. 요나는 더 이상 주도권이 없습니다. 


1:7절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멈추지 않는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선원들은 제비뽑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누군가로 인하여 풍랑이 일어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어난 풍랑 사건이 누구 때문인가요? 언제나 그래요. 
문제가 생기면 '누구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는가?'를 사람들은 알고 싶어합니다. 

드디어 제비뽑기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가 뽑힙니다. 
우연일까요? 아뇨,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제비 뽑기가 아니라도 요나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뭘 해도 요나는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개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요나를 찾아내십니다. '추격자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존 스토트가 <천국의 사냥개 HOUND OF HEAVEN>라는 책을 써서
'추격하시는 하나님' 개념을 유행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도망한 자가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쳐놓은 그물망에서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하든, 요나는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잠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하나님의 작전은 완벽합니다. 하나님은 찾아내고야 마십니다. 

여러분, 이 요나의 생포 과정을 잘 보셔야 합니다. 
왜냐면 언제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폭풍을 통해 이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때까지는 요나는, 풍랑과, 배의 위기와 아무 상관없는 자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배 밑층에서 자는 요나를, 제비뽑기 과정을 통해 불러내십니다. 
이때까지는 아무도 그에게 죄를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요나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죄를 짓고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주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언제나 허술합니다. 인간의 법도 허술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억울한 일이 많아요. 
억울하고, 원통하고... 죄인이 죄인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고... 
죄인이 아닌데 죄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억울한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밝혀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실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부당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공의로우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숨어있던 요나가 걸렸습니다. 

 

요나는 폭풍 속에서도 배 아래층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겼습니다. 
아이덴티티, 정체성,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삶이 흔들리는 이유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삶이 흔들리는 거예요. 

요나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지금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떳떳하게 드러낼 처지가 아닙니다. 
그것이 배 아래 층으로 내려간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요나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고 숨겨질까요? 
성도가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면, 편리하기는 해요.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밝히는 순간, 불편한 일들이 벌어지니까요. 

 

손해 볼 수도 있는 일이 생기니까, 
때로는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얘기할 때,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우니까 
우리는 그냥 편안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살고 있습니다. 
편리하게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자기의 신분을 드러냅니다. 
정체성이 오락가락 하는 거죠. 

밝히지 않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하게 밝힐 용기가 없습니다. 
밝히는 순간부터 곤란한 일들이 닥칠 때, 자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성도'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태도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요나가 지금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업이 뭐냐?'라고 분명히 물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딴소리를 해요. 
다시스 행을 탈 때부터, 그는 이미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이 가장 중요한데, 당신의 정체성은 뭐냐는 거예요. 
내가 직업도 있고, 내게 다양한 게 있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하는 이 정체성,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 정체성, 

여러분 아무리 우리의 정체를 숨겨도, 드러나게 돼 있어요. 숨겨질 수 없습니다. 
내가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어져 있어요. 
들켜지게 되고, 들킴 바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요즘 동성애자들도 커밍아웃을 합니다. 
대중에게 알려진 유명인들도,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히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는 것이죠. 

이제 요나에게 집중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됩니다. 요나가 자원한 인터뷰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인터뷰죠.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계속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1: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1: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그러나 그의 자백 안에, 그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는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당당함도 없습니다. 자신이 드러날수록 더 부끄러워집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풍랑의 위기 상황에서 더 당당해졌던 행27장의 바울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 임을 봅니다. 

1: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이방 사람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바다와 풍랑은 거세게 몰아칩니다.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1: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바다가 더 흉용해졌습니다. 거센 파도에 배가 깨어질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무엇을 의미하죠? 
이 말은, 하나님이 요나를 더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는 거죠. 하나님의 압력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저 넘어갈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은 요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이 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죠? 
'요나 당신이 죽어야 이 풍랑이 그칠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당신을 바다에 던져야 되겠소!'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자비롭습니다. 위기 상황인데도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하겠느냐?'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요나를 살려내고 싶다는 거예요. 
요나를 존중히 여겨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존중히 여긴 받을 만한 게 전혀 없습니다. 
'이상한 인간이 하나 배에 타서,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 이렇게 말해야 맞잖아요. 

 

여러분, 요나서에서 발견하는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요나보다 나아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가끔 우리가 놀랄 때가 있습니다. 
비신자인데, 신자보다 더 신자같은 사람을, 직장에서 만날 때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숱하게 예배를 드리고, 훈련을 받고, 말씀도 듣고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하게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교회도 안 나오는 남편이, 교회 열심히 다니는 권사님보다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보면, 신자보다 더 나은 비신자들이 세상에 그득합니다. 
더 인격적인 것처럼 보이고, 더 매력적인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다. 

여러분, 신자가 세상 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신자가 훨씬 더 세상의 사람들보다 인간미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선택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니라 하니라' 

와~ 요나의 놀라운 고백이 나왔습니다.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어요. 
'나를 바다에 던지라!' 

요나는 그 배 안에 계속 있으면 안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처음부터 그는 그 배를 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타지 말아야 될 사람이 그 배를 탔습니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풍랑 속에 시달렸습니다. 
귀중한 재산들을 많이 날려버렸습니다. 

그 고통과 불행이 나로 말미암아 일어난 줄은... 요나는 처음에는 몰랐어요.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탓을 돌리고,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 그 가운데, 
그 일들이 바로 나로 인하여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남을 비난은 참 잘하는데요. 비난할 때는 조심해야 돼요. 
그 비난의 화살이 나를 향한 것인 줄, 내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 풍랑이 나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어쩌면 그 고통이, 그 풍랑이, 그 위기가... 나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요나는 처음에는 이걸 몰랐어요. 

이제 요나는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 그 말은 뭘까요?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죽어야 문제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길이 없어요. 요나가 바다에 들어가야 돼요. 

여러분,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죽어야 문제가 끝이 납니다. 
요나의 이 한마디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

'이 큰 풍랑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
요즘 이런 소리를 듣기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이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이걸 우리가 못하는 거죠. 

가정 안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서로서로 탓하기 바쁩니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바빠요.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다'하고 상대를 비난합니다. 
이렇게 서로를 바다에 빠뜨리려고 야단입니다. 

세상은 늘 그렇습니다. 여러분 '너 죽고 나 살자'는 거예요. 
'너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거예요. 자기 살려고,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최악의 상황이 오면 '너 죽이고 나도 죽는다' 모두를 망하게 하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미련한가를 보여줘요. 
여러분, 모두가 사는 길을 선택해야 돼요. 그것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바로 나 때문입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요나의 이름이 너무 멋져요. 한글로 '요 나 (때문입니다), 요 죽을 나!' 
'나를 바다로 던지십시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요. 

내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날 터인데, 기어이 죽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기어이 죽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는 게 대부분의 역사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선택이 중요합니다. 위기를 승화시키고자 한다면, 
위기를 피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장 큰 위기는, 본질을 놓칠 때 찾아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원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출발점으로 가보면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출발점이 어디에요? 1:1절이죠.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요나에게 주신 말씀! 그것이 요나의 소명입니다. 그 소명의 자리로 돌아가면 됩니다. 
(니느웨로 가면 됩니다)

모든 것은 임하신 말씀을 거부하고, 다시스 행 배를 탄 것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러분 그 말은,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풍랑은 불가피합니다. 
풍랑은 죽이려고 달려든 게 아니에요. 
이 풍랑은 요나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손길입니다. 

요나는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로 돌아옵니다. 요나가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왔어요.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은 나 때문이라' 하고 각성하죠. 
위대한 각성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두가 산다는 거죠. 

요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요나의 모든 게 드러난 것은,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이끄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소명자는 누구입니까?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있는 동안에는, 풍랑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기 전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깊이 숨고 도망을 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찾아내시고야 마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인가?' 
요나서는 계속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단순히 생존인가? 
그냥 먹고 살기 위해, 서바이벌 하는 게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인가?' 

나만 홀로 배 밑층에 잠을 잘 수 없는 존재로 우리를 부르셨어요.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 
그 여호와의 얼굴을 향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의 소명이요, 우리가 살아야 될 이유 임을 깨닫고 
살아가지 않으면 풍랑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계속 추격하십니다. 

마침내 항복을 받아내고야 마시는 그 하나님, 
빠르게 항복할수록 훨씬 더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다시 묻고, 
이 새해 첫 시간에, 우리의 삶의 방향을 가지런하게 돌려놓는... 
그래서 (뭔가 헝클어졌으면)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모든 목적이, 위로부터 주어짐을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결단하는 은혜가 
이 새벽에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이 연초에 여러분들 기도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요나서의 말씀이 내 인생에 중요한.. 그런 정리를 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