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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기억

LNCK 2025. 2. 1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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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기억 - YouTube

 

기억의 기억                시56:1~13           2025.02.09.       

 

*'기억의 기억' : 하나님이 나의 고통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내가 기억해야 한다는 뜻


▲여러분 한국 TV 드라마 중에서 최장수 드라마, 가장 오래 방영된 드라마가 뭔지 아십니까? 
네, <전원일기>입니다.  

'일기'라는 말에서 보듯이, 이 드라마는 대단히 극적인 전개나 반전이 있어서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막 불러 모으는 그런 드라마는 아니었습니다. 

'다음 편에 어떻게 될까?' 시청자를 궁금하게 해서, 기다리게 하는 내용도 아닙니다. 
TV 켜면 그냥 나오니까... 보고 있었던 그런 드라마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하루, 소소한 에피소드로 22년이나 이어졌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 드라마에 나왔던 김수미 배우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많은 신문들이 '일용 엄니'라는 타이틀을 뽑았습니다. 

끝난 지가 20년도 넘은 드라마의 배역인데, 
국민들이 아직도 그를 '일용 엄니'라고 하는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이 드라마에 묘한 매력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요. 

당시 함께 출연했던 배우 중 한 사람이 지금 문화부 장관입니다. *유인촌
그는 '스타를 잃었다기보다는 가족을 잃은 것 같다'라고 말했죠. 

아마 국민들도 이 배우가 세상을 떠나는 걸 보면서, 
'가족 혹은 우리 마을 사람 한 분을 잃은 것 같다' 라고 여기는 느낌이에요. 

가족, 마을이란 무엇입니까? 기억이 쌓여가는 공동체입니다.  *'기억'이 키워드
서로 서로 다 아는 사이인 거예요. 한 마을에 태어나서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유치원 다니고, 청소년 시절을 거쳐서 성인이 된, 청년이 된 사람들... 
서로 다 보면서, 기억하면서, 성장해 갑니다. 

'쟤는 어릴 때 참 개구장이었는데, 네가 이렇게 컸구나. 
너희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면서, 
너희 집에 출입하면서 반찬도 해주고 그랬는데...' 

'너희 아빠 돈 번다고 중동에 갔을 때, 우리가 이래 저래 도왔는데...' 
다 알잖아요. 그게 가족이고 마을입니다. 

◑시56:8 에서 다윗은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셨나이까'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내가 방황하고 쫓겨다니는 것을 카운트하셨다는 거죠.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내 눈물을 병에 담으시고 기록하신다.. 
내 아픔을 아실 뿐 아니라, 소중히 여겨실 뿐 아니라,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기억하시고 기록해 놓으셨다... 라고 노래합니다. 

여러분, 내게 아픔이 있지만,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쓴 게, '나의 유리함을'
즉 쫓겨 다닐 때, 도망자로 다닐 때의 시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국에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하니까 도망갑니다. 
나중에는 다윗이 쫓기는 중에, 다윗 일행에게 밥 한 끼 준 사람들까지 
다 찾아내서 죽여버립니다. 삼상22:19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떻게 고국에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도망가다가 가다가 안 되니까 블레셋까지 갔습니다. 삼상27:2

놀랄만한 일이죠. 이해가 안 됩니다. 적국입니다. 원수입니다. 
치떨리도록 싫은 나라 블레셋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을 좋아했겠습니까? 
다윗을 가장 경계해야 될 원수 같은 인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블레셋은 사울과 대치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다윗을 받아준 거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들을 많이 죽였는데, 
선조 임금이 핍박하니까 일본으로 도망갔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 말이 안 되는 일이 성경에 나오는 겁니다. 

블레셋 사람들 중에서 '다윗 저 사람 조심해야 됩니다' 
이런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그런 위험 가운데서, 다윗과 그 일행은 변방 시글락에서 거처하게 됩니다.

그때 흘린 눈물을, 고향을 떠나 살아야 했던 그 기억을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면에서 현대의 도시인들은, 모두 유리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을이 없습니다. 옆집에 누가 이사를 들어오거나 나가도
그냥 힐끗 보고 '저 사람 오네, 저 사람 가네' 하고 말할 뿐입니다. 

오랜 이웃이지만,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웃집 어른이 돌아가셔도, 한참 후에 '아휴 어쩐지 안 보이신다 했더니...' 합니다.

고향의 상실은 서사의 단절, 즉 이야기의 단절이라고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내 삶의 내용과 이야기를 알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에 
우리 삶은 그것이 기반이 됩니다. 그것이 없을 때는 고립감을 느끼죠. 

사람이 아프면 고립감이 심해집니다. 사회활동이 예전같지 않죠. 
또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린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문화도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관계들이 많이 끊어집니다. 특별히 연세 드신 분들보다 젊은 사람들이 아프면,
만성질환에 걸리면, 외로움은 훨씬 더 깊어진다고 그래요. 

연세 드신 분들은 주위에, 고만고만하게 아픈 분들이 많잖아요. 
동네 어귀에 앉으면, 이런저런 질병에 대한 정보도 교환하고 그렇게 하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이 아프면, 완전히 '세상에 나 혼자다' 라고 하는 
아주 심각한 고립감을 느끼게 됩니다. 

몸의 아픔이 외로움으로 이어지고, 
그 외로움이 미래의 불안으로 발전합니다. 
내 인생이 캄캄해지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으로, 어두운 상황으로 몰려갈 때 
우리가 본문 시56편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유래했지만 
대부분의 시편들은 바벨론 포로 시기에 모아진 겁니다. 그때 애송된 시라는 겁니다. 
포로 신세인 그들에게 의미가 있었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벨론에 포로를 잡혀갔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유리하고 방황하던 때, 
그래도 고국에 있을 때는 오손도손 서로 기억해주고 살았는데, 
이제는 누구도 우리를 그들떠 보지도 않는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이 시를 읽으면서, 다윗이 유리하던 그 시를 읽으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바벨론 포로들의 삶의 중심에는 
'나를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신뢰가, 포로 시기를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소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픈 사람의 삶에는 긴 스토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저자 아서 클라인먼은,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고 
의료인류학, 사회의학이라는 분야의 소셜메디슨 연구를 많이 했던 분입니다. 

저자인 의사가 환자를 정밀하게 진단하고, 
검사결과, 지표에 나타나는 모든 걸 다 잘 치료했는데 
환자가 호전되지 않는 거예요. 병이 악화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아픈 것은 비슷해 보여도, 전부 다 다르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그 환자의 가족 관계, 인간 관계, 감정, 신앙, 정서 등이 치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인듯)

이 분 스스로가 평생 천식을 앓으면서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는 50대 후반에, 아내가 조발성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서 
10년 넘도록 아내를 간병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대만에 가서 환자들을 돌보면서 
문화권에 따라서, '어떤 사회적 요인이 환자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일례로, 중국의 한 여성은 우울증, 편두통에 계속 시달리다가, 
딸이 대학 입시에 실패하자, 건강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여러분 딸이 대학 입시에 실패하는 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엄마가 완전히 그냥 사람이 폐인이 될 정도로 무너지는 거는 너무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그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환자가 아주 유복한 집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고이 잘 자랐어요. 공부도 잘하고... 

그런데 모택동 문화혁명 때, 그때 많은 지식인들을 강제로 시골로, 공장으로 보냈습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삶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느낌을 갖고 살다 보니, 
'내 딸이라도 좀 잘 컸으면 좋겠다' 그랬는데, 

딸의 대학 입시에 모든 소망을 걸고 있었는데, 
딸이 낙방하니까 이게 완전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무너지는 게 편두통으로, 우울증으로... 몸이 아픈 걸로 나타나는 거예요. 
이거를 의학자들이 "신체화 - 소마티제이션" 이라고 말합니다. *소마 : 몸

우리의 질병엔, 우리의 삶이 담겨있다는 거죠. 
우리는 망가진 신체가 퍼붓는 공격을 이겨내기 위해 매일같이 분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은, 침묵 속에서 처참히 외면당합ㄴ니다. 
우리의 질병엔, 자기 만의 의미와 삶의 서사,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오롯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표현하는 정당한 수단입니다. 

이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게 ... 정당하다는 거예요. 
그래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호소를, 몸이 밖으로 (질병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라는 거죠. 
여기서 문제는, 몸이 아닌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분의 주장은 '치료는 의사의 대처가 아니라, 
(의사가 청진기대고, 초음파, MRI 찍고 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이야기를 귀 기울이고 듣는 데서 시작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삶의 이야기, 우리 눈물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여러분 그런 경우 있잖아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사나?'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삶의 이야기를 차근차근히 들어보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나 같으면 그만큼도 못 버텼겠다.' 

다윗이 적국에 가서 몸을 의탁했다는 것..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죽었으면 죽었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삶의 서사(긴 이야기)를 보면요. 
다윗이 하나님께 받았던 응답들, 비전들, 그가 품은 꿈들을 보면, 
일단 살아남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할 때, 
'뭘 그것 가지고 그렇게 힘들어하냐?' 
그런데 그 집안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면, 이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를 치유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은 
우리 삶의 이야기를, 우리 삶의 모든 눈물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내가 잠 못 이루고 눈물 흘리던 그날 밤, 
큰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어떻게 해야 되나?' 
그 환자의 서사뿐 아니라, 그 환자 가족의 서사... 

중환자실 앞에서, 수술실 앞에서, 병원 복도 앞에서 
망연자실하던.. 눈물 글썽이던 그날의 눈물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계신다는 겁니다.  시56:8

예수님의 치유도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5장의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막5:25~27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예수님의 치유의적을 복음서 저자가 기록하는 방식을 가만히 보면,
그 증세와 치료 과정만 아니라, 환자의 삶 자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픈 것은, 그 삶 전체, 
오랫동안 고민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또 실망했던 그러한 수많은 날들의 
눈물과 아픔을 예수님이 알고 계신 거예요. 

지금 내 앞에 와 있는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든 날들을 거쳐가면서 
여기까지 겨우겨우 왔는지 ... 예수님은 헤아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끔씩 치유를 위한 기도할 때, 치유 집회할 때, 
'여러분 아픈데 손을 올리십시오'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어디가 아프다 해서, 아픈데 손 올릴 수 있으면, 괜찮은 거예요. 

아직 살 만한 거예요. (경증이에요)

그런데 온 몸이 아파요. 때로는 어디가 아픈지, 왜 아픈지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오늘 시56편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아주 중요한 묵상의 포인트가 많이 있습니다. 

◑56:1절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절에도 '내 원수가 종일'  

5절에도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악한 생각을 가지고,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비틀어서 공격하는 거예요.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종일 나를 짓밟고 공격하는데,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쉴 새 없이 언제나 공격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시도 때도 없이 아픔이 찾아오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 여러분 이 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무거운 숙제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니 선생님(하나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요?'
 
그런데, 공부할 생각이 없는, 필요를 모르는 아이들은 선생님을 피해 다닙니다. 
'너 숙제했니?' (쉬지 말고 기도했니?) 할까봐 

그런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요. 큰일 났어요. 
내가 시험 봐야 되고, 이거 통과 안 하면 큰일 나요. 
인생이 힘들어지겠다는 걸, 이제야 학생이 깨달았어요. 

그런데 공부하려니 힘들어요. 문제 푸는데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선생님이 내 곁에 계셔서,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과외 선생님을 붙여서, 모른 거 있으면 다 물어보면,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언제든지 나에게 가지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문을 열어놓을 테니, 언제든지 내 방문을 두드리라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힘들어지면, 탄식할 때가 되면, 
그러니까 누가 종일 괴롭히면, 종일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시도 때도 없이 아프면,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쉬지 말고 기도는, 숙제 받은 게 아니라 특권입니다.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거고요. 
'내가 언제든지 너의 기도에 귀 기울이겠다'는 하나님의 특별 서비스인 줄 믿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하여튼 '너의 모든 눈물을 기억하시고 병에 담으시는,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이라는 말이 담겨있는 거예요

여러분 아프면 외로워져요. 기도해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아프면 '나는 혼자'라는 생각이 너무 심하게 듭니다. 
'아무도 내 아픔을 몰라준다' 싶죠. 
그게 몸이 아프고, 외로움에 젖어들고, 그게 미래의 불안으로 가는 거예요. 

◑56:9절 '내가 아뢰는 말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언제 원수들이 물러가나요? 언제 하나님이 내 편이신지 알아요? 
'내가 아뢰는 날에!'
쉬지 않고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에 나라에 참 어려운 일이 많은데 
특별히 서부 지방법원에 사람들이 난입해가지고, 폭력사태가 벌어진 것을 보고, 
많은 분들이 걱정합니다. 

그 중에 라이터 들고 와가지고 불을 지르려고 하다가 붙잡힌 남성, 
몇 번이나 TV에서 보여주던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가 19살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제 마음이 아픈지요... 

'누가 저 젊은이들을, 저 청소년밖에 안 되는데.. 저렇게 만들었나?' 
가면 뭐 징역 살겠죠? 그 인생 누가 책임집니까? 

법원에 들어가서 그렇게 난동을 부린 많은 분들, 
물론 여러분 정치적 견해가 다를 수 있고,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법부를 마음으로 불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막 분노해가지고 하는 분들의 그 분노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정치적 분노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게 다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본래 그 속에 삶의 분노가 있는 거예요. 
본래 그 안에 삶의 스트레스와 불만이 있는 거예요.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서... 
내가 열심히 하는데, 잘 풀리지 않는 내 인생에 대해서... 
나를 무시하는 친구들, 혹은 나를 정말 부당하게 대우하는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그 중에 많은 이들이, 부모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어요. 
분노가 가득 차 있는데, 어떤 사건이 터지니까, 그냥 그쪽(난입)으로 나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노리나 허즈 라는 학자가 <고립의 시대>라는 책을 썼는데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덜 연결되어 있을수록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고, 
차이를 적절히 조율하고, 서로를 시민답게 협력적으로 대하는 연습이 부족해지며, 
동료 시민을 좀처럼 신뢰하지 못하고, 
그 결과 포퓰리스트, 막 선동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배타적이고 분열적인 형태의 공동체의 매력을 느끼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이 외로울수록 정치적 극단주의에 흐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국사회가 좌든 우든 자꾸 양극화가 되고 있는 그 중간에, 진짜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외롭다는 거죠. 
누구도 내 아픔을 몰라준다는 거죠. 
그 분노가 쌓여있다는 겁니다. 한국사회에 지금 분노가 너무 높아져 있습니다

이거는 정치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쪽이 되든, 문제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쪽 저쪽 한편에 서서,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중심(중립)에 서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돌보는 거예요. 
우리 주위에 만나는 사람들 한 명, 두 명, 세 명이라도...
'아무도 혼자 울지 않는 교회',   *교회 슬로건
나아가 아무도 울지 않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고,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어줘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인생에 다가와서 그걸 하시는 거예요. 
다윗을 보세요. 유리하고 방황하면서 억울한 일을 너무 많이 당했어요. 

지금 말도 안 되는 고생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충성했는데, 
원수로 갚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왕이 되었어요. 뭐 할 차례입니까? 
그렇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는데, 왕이 되면 뭐 할 차례입니까? 정치 보복!

사울이 나에게 행했던 거 10분의 1만 해도, 사울 가문은 남아나지 않아요. 
온 나라에 피비린내가 날 거예요. 
당한 사람은 또 가만히 있겠습니까? 또 칼을 갈죠.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거죠.

이스라엘 역사가 그런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다윗의 인생이 그런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56:10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힘주셔야 
하나님을 의지해서 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내 마음대로 기도하고, 내 마음대로 믿고, 내 마음대로, 내 힘으로 찬양하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 찬양하는 것도, 하나님이 힘 주셔야 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찬543장

그래서 믿음은 나의 의지력으로 버티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나는 약합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력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믿음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송대관 가수, 분당에 있는 교회 집사님입니다. 
돌아가셔서 신문에 크게 나왔던데, 여러분 <쨍하고 해뜰 날> 기억하십니까? 

1976년입니다. 저도 그때 송대관 씨가 상 받는 장면이 기억이 나는데요. 
당시에 나라가 난리가 났습니다. 어른이나 전부 다 '쨍하고 해뜰 날' 노래를 불렀죠.

여러분 가요대상을 받으면 노래하잖아요. 
어떤 가수들은 너무 감격하니까, 노래가 쫙 클라이막스 쯤 가면 살짝 눈물 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송대관 씨는 상 받으러 올라가서, 전주가 나오는데 펑펑 울어버린 거예요. 
너무 고생을 많이 하면서 살다가... 갑자기 그 노래로 떴어요.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의 가사

이 노래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줬는지 모릅니다. 
송대관의 인생이 그랬죠. 

상 받기 전에 어디 가서 한 번 노래 부르면 5만 원 받았대요. 
상 받고 나니까, 노래 한 번 불렀는데 3천만 원 주더래요. 

그런데 이 송대관 집사님이, 그렇게 뜨고 나서, 더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수백 억 사기당하고요. 사업에 실패해가지고...

재산이 한때 500억까지 갔는데, 전부 다 날아가고요. 
70대 나이에 다니면서 노래 부르면서, 차에서 자고, 삼각김밥으로 밥 사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송대관 자살'이라는 가짜 뉴스까지 나왔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맞아요, 틀려요?
'노력하자'는 마음은 좋은데, 진짜 여러분, 노력하면 안 되는 일 없습니까? 

어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애들한테 그랬대요. 
'여러분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Nothing is impossible!' 
그랬는데 아이 하나가 손을 들어요. '선생님 진짜입니까?' 

치약을 짜다가 너무 많이 짜버렸어요. 도로 집어넣으실 수 있어요? No
우리가 '하면 된다' 하면서, 
열심을 가지고, 내 의지력을 가지고 달려가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너희 목숨을 일각이나 더 할 수 있느냐?' No

우리는 골리앗 앞에 당당하게 선 소년 다윗, 그 용기 있는 모습은 좋아하지만 
고국에서 쫓겨나 울면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라고 하는 
이 다윗의 시름도 배울 수 있어야 됩니다. 

10절의 한국 성경에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n God' 하나님 안에서! 
'In God' 이 더 맞는 것 같아요.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거죠. 
지금 다윗이 블레셋에 가 있어요. 적국에 가 있어요. 

주위에 보면 전부 다 하나님 인정하지 않는 적들이 득실득실해요. 
'그러나 여전히 여기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땅이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줄 믿습니다.'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가 있지만, 바벨론이 최고인 것 같지만, 
'여전히 이 바벨론 땅에서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줄 믿습니다.' 
*시편 편집 시기가 바벨론 포로기

여러분 이아파서 어디 수술실에 가든지, 중환자실에 가든지 
그런 실패의 자리에 가더라도, '여전히 하나님 안에 내가 있다'는 고백의 기도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송대관 씨가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그걸로 떴지만요. 
국민일보 기사를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이분이 다니면서 간증하면서 최고 많이 부른 노래가 뭔가 하면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주님 안에 있을 때에, 우리의 모든 염려 근심을, 주님께서 맡아 주신다는 고백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In God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0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이것도 굉장히 독특해요. 
그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합니다' 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했잖아요.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러면, 
그냥 마음의 위안, 눈물 닦아주는 그것만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한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아주 구체적인 뜻이, 그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 안에 구별되는 가치관이 있고, 삶의 방향과 목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는 것은 좋은데, 
잘못하면 아기 같은 신앙이 됩니다. 어리광부리는 신앙. 

'우쭈쭈 우쭈쭈' 해주는 거죠. '그냥 괜찮아 괜찮아 다독여주고 하는...'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하는 분명한 원리와 하나님의 뜻이 '말씀 안에' 있어요. 

 

그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견고한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시56편의 결론이 13절 말씀입니다. 

◑56:13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생명을 사망에서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실 뿐 아니라 
생명의 빛에 실족하지 않고 당당하고 담대하게 전진하는 신앙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줄 믿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받아들이고, 
위로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우리가 순복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할 때, 

우리가 내 감정에 따라서 '좋았다가 다시 그냥 막 죽겠다 했다가' 이런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견고한, 든든한 신앙으로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핵심은 그것입니다. '기억의 기억' 
하나님의 기억을 내가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내 눈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기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기억을 통해서 일어나는 신비한 일들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한강 작가가 스웨덴에 노벨 문학상 받으러 가서 했던, 수상 연설이 있습니다. 

「8살 때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주산 학원의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기세여서 20여 명의 아이들이 
학원 현관 처마 아래 모여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도로 맞은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보는 듯, 
그 처마 아래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발을 보며,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느끼며 기다리던 찰나,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에서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같이 비를 맞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죠.

'내가 저 비를 보듯,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비를 보고 있다. 
내가 얼굴에 느끼는 습기를 저들도 감각하고 있다.'
 
그건 수많은 1인칭들을 경험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문학을 읽고 써온 모든 시간 동안, 
이 경이의 시간을 되풀이해 경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의 폐부까지 흘러들어가 내면을 만나는 경험, 
내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그 실에 실어 타인들을 향해 전류처럼 흘려 내보내는 경험...」 

여러분 이 '기억'이라는 걸 통해서, 인간의 마음 속에,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 궁극적으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얼마나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배워가야 됩니다. 

망각은 목적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망각은 '잊어버리자. 덮어 놓자' ... 그게 가능하지도 않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이 끈질긴 저항은 바로 기억입니다.  

그게 다윗의 삶이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계속해서 되새기면서, 
그 고난의 광야 시간을, 다윗은 버텨냈던 것입니다. 

그 다윗의 시를 통해서, 바벨론 포로들은 
그 포로의 긴 시간을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버텨냈던 것입니다. *기억의 기억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8         ☞ <눈물>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표현을 썼을까요? 다윗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네요. 
하나님이 특별히 예뻐하셨네요. 

뭐 그럴 수 있습니다. 다윗이 정말 남다른 영성, 민감성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인생에 기막힌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고난의 날들, 눈물의 날들을 다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붙들고 살면서, 마침내 이런 깨달음에 이르렀고, 

그것을 탁월한 문장력으로, 표현으로 하나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나의 눈물을 병에 담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는 이 다윗의 고백보다 훨씬 더 놀라운 주님 사랑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 말씀이신 그리스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합니다' 할 때  :10
그 말씀의 핵심이 그리스도시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사랑보다 
그 어떤 하나님 사랑의 표현도 더 선명할 수 없습니다. 

이 십자가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모든 절망, 우리의 모든 그 비참한 처지, 
비통한 마음을 다 안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든 아픔에는 서사가 있다, 즉 사연이 있다.' 그랬잖아요. 
내 짧은 인생의 이 긴 사연이,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의 이야기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예요. 

내 삶의 이야기를,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 담으시고, 
그 모든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그 십자가 사랑 안에서, 

'아, 내 모든 눈물을, 내 모든 아픔을, 하나님은 헤아리고 계시고, 
당신의 마음에 담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걸 기억해야 하는 거죠.

내가 아픈 순간에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주님이 나와 함께이시구나. 
내 미래도 하나님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굳건히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