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이 길이 내 길이 맞는가?

LNCK 2025. 2. 16. 08:2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꿈, 비전, 소명

이 길이 내 길이 맞는가? (사무엘상 10:10-27)2025.02.09   Youtube

이 길이 내 길이 맞는가?             삼상10:10~27            2025.02.09

드디어 사울이 온 백성 앞에서 왕으로 세움을 받는 그런 스토리입니다. 

◑삼상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사무엘이 알려줬던 징조가 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10절에 세 번째 징조가 이루어지는 내용인데, 
사울이 고향 기브아의 산지에 이르렀을 때,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나게 되고, 
성령이 사울에게 임하여서, 그가 예언을 시작합니다. 

사울에게 있어서는 매우 감격적인 장면이죠. 
사울이 사무엘의 기름부음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기름 부으심을 또한 받았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로서 국가사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에, 
그가 이런 성령의 감동하심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죠. 

사람은 영적인 전도체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 곁에 있으면, 나도 성령 충만해집니다. 
저는 여러분이 1516 교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만 가끔 보면 완전히 심신이 지쳐서, 이렇게 방전이 돼서 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은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또 마음 문을 여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0:11~12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고, 사울이 성령의 임재 체험까지 했어요. 
여기까지는 굉장히 감동적인데, 그럼 모든 사람이 사울을 환영했는가? 
모든 사람이 사울을 좋아했는가? ...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고, 사무엘도 그를 인정해서 세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의 반응이에요. 

본문 내용은 왕으로 세움을 받았던 사울에게는 감격적인 순간이지만, 
그러나 10:10~27절까지 계속 긴장감이 흐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이었어요. 

특별히 11절에 보면, '그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회의적 반응을 보였어요. 

사람들이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왜냐면 그의 부친 기스는 그렇게 무시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잖아요. 9:1
베냐민 지파에서 상당히 훌륭한 가문을 이룬 사람입니다.  9:2

게다가 그의 아들 사울도 전도유망한 준수한 청년이었다고요. 
그러면 그의 아버지를 봐서도, 그 본인을 봐서도, 
이렇게 사울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는 없지 않나요? 

근데 더 충격적인 건 세 번째 이런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이 
같은 고향 사람들인 기브아 사람들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다른 지파도 아닙니다. '기브아 사람들' 이란 표현을 썼어요. 

사울은 집안도 훌륭했고 본인도 훌륭했습니다. 근데 왜 이랬을까요? 
여러분, 사람들 안에 있는 심리가 있어요. 
'우리가 널 아는데, 너의 집안을 알고, 너의 과거를 아는데...' 
그러면서 그 사람의 긍정적 발전이나 변화를 인정해 주고 싶어 하지 않고, 
'남이 잘 되는 꼴이 보기 싫다...' 그런 심리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만 있는게 아니고, 우리도 다 있잖아요. 
사촌이 땅을 사면 잠깐이라도 배가 아프다느니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 볼 때, 마치 이런 거죠. 
'사울과, 그의 집안과, 그의 모든 것을 내가 다 아는냥...'
여러분 작가들에게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게 있잖아요.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부분 밖에 모르는데, 
마치 내게 '전지적 시점'이 있는 것이냥,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우리에게 있다고요. 

제가 성지순례 갔다가 한국에 돌아와보니까, 무슨 하얼빈 동계아시안 게임을 뭘 하더라구요.
'아시안게임에서 우리 동네 출신이 챔피언이 나왔다' 그러면 기쁘잖아요. 
우리 지역에서 장관이 나오고, 대통령이 나오면, 자랑스러운 거잖아요.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탔다... 그러면 자랑스러운 거잖아요. 
기뻐하고 축하해 주면 좋은데, 그것도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물론 균형 잡힌 평가는 필요하겠지만...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막6:4절에 보면 본인이 고향에 가셨다가 배척을 당하신 거예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기록을 합니다. 

근데 이런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거예요. 성경에서도 여러번 있었어요. 
여러분 다윗이 유다 지파거든요. 그런데 도망자 시절에, 
자기 동족, 자기 지파 사람들이 사울왕에게 '다윗이 여기 숨어 있어요. 저기 숨어 있어요'
하고 제보를 하는 거예요. 삼상23:19의 십 사람

자기 가족, 자기 동족에게 배신을 당할 때... 이건 너무나 뼈 아픈 거죠. 

또 예수님의 제자 중에 요1장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찾아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어. 
그런데 그분이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분이야' 그랬더니, 

상당히 경건했던 나다나엘이 삐딱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1:46

경건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못 알아보다니...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알고 보니까 나다나엘이 갈릴리 출신이에요. 
그럼 이게 뭐 하자는 얘기죠? (같은 고향 사람이, 예수님을 디스 disrespect 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사울이 집안도 훌륭하고, 인물도 준수하고, 성품도 꽤 괜찮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자기 고향 사람들이, 자기 그 고향 출신의 사람(사울)을 
끌어내리는 소리를 하는가요? 

'야, 우리 지파 사람은 안 돼' 왜 이런 자조적인 반응이었는가요? 
아니면 남이 잘 되는 꼴을 볼 수 없는 시기심 때문이었는가요? 

오늘 본문 가운데 또 보면,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사울이 선지자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될 수 없다는 거잖아요. 

'넌 영적 리더가 될 수 없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왕을 구했던 사람들이, 왕의 후보자를 처음부터 깔아뭉개는 소리를 한 거예요. 

▲제가 중등부 전도사 처음 시작할 때, 학생들은 많고 선생님들은 숫자가 적었어요. 
그래도 좋은 선생님을 선발하려고, 다 한 명씩 인터뷰를 했습니다. 

하루는 30대 후반에 한 여자분이 오셨는데, 얼굴이 너무 어두운 거예요. 
얘기를 쭉 들어보니까,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수간호사를 몇 년 동안 하셨는데,
직장에서 완전히 번아웃이 되서 온 거예요. 

제가 그분에게 '예배의 자리에 나가셔서 먼저 치유와 회복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교사는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돌려보냈어요. 

근데 저희 총무 선생님이 '그분이 진심이고, 보조교사로라도 받아주면 어떠냐?' 
계속 이제 고집을 부려서, 그분을 결국 교사로 받았어요. 

그리고는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이분이 은혜 안에서 많이 회복이 됐어요. 
이분이 얼마나 번아웃이 심했는지, 또 원가정도 상당히 역기능적인 가정이었기 때문에 
인생에 정말 은혜는 채우지 못하고 계속 방전만 하다가 온 거예요. 

그래서 2년 동안 직장 생활을 전혀 안 하고 쉬면서, 교회만 계속 나오시게 됐어요. 
새벽 예배부터, 낮에도, 저녁에도 집회만 있으면, 다 교회에 나오는 거예요. 

하루는 교회에서 만나는데, 제게 하소연을 하시더라고요. 
'목사님, 제가 이렇게 교회를 계속 나오는게 잘못된 건가요?' 

주변에 기도하시는 집사님, 권사님들이 
'너의 하나님이 너에게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하더냐? 
사람이 존 책임감 있게 살아야지...' 

그 분은 혼자 사시는 독신 분이었거든요. 
'네가 직장도 나가고, 돈도 벌고, 재정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지...'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누구에게 손 벌린 적도 없어요. 
근데 막 사람들이 혼낸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런 소위 기도한다는 사람들을 만나지 마십시오. 
그런 분들 얘기를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선생님에게 평생 그 시간을 가지라는게 아니라, 
인생의 정말 중요한 시점에 회복이 필요해서, 당신에게 이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회복되고 나면, 하나님이 또 다시 사명의 자리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2, 3년이 지났어요. 어느 날 교회 주차장에서 지나치다가 또 만났어요.
길에서 서서 그 분이 제게 '목사님, 제가 신학대학원에 가고 싶은데, 가도 될까요? 
주변에서 기도한다는 분들이, 다 저한테 가지 말라고 합니다. 넌 안 된다고...' 

사실 속으로 저도 그 분이 걱정이 됐어요. 그분이 신학교에 가신다고 해서... 
왜냐면 너무 상처가 많은 분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 분이 신대원을 가든, 아니면 목사가 되든, 
그건 하나님이 정하시는 거지, 내가 정하는게 아니잖아요. 
그거를 '가라, 가지 마라' 얘기하시는 분들은, 정말 매우 담대하신 분들이에요. 

제가 그래서 물어봤죠. '하나님의 부르심이 맞는가요?' 맞는 거 같대요. 
그러면 '사람들의 반대 때문에 오기로 더 가려는게 아니라, 진짜 부르심이라면 가세요.
그러나 신대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하나님이 여기까지다 그러시면 멈추실 수 있나요?'  
그러니까 자기가 멈출 수 있대요. 

이분이 신대원 3년 잘 마치고, '직장인 선교회'에 들어가셔서, 
직장인 선교 일을 열심히 하셨고, 
또 지역 교회에서 심방전도사님으로도 열심히 사역하셨어요. 

당신은 왜 당신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내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가요? 

여러분의 자녀에게 '야, 너는 커서 뭐가 될래?' 
애가 잘 되기를 그렇게 원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적어도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 불성실한 너는, 결코 그 이상이 될 수 없어!' 
왜 아이의 인생에 '하나님이 가능성'을 제한합니까? 

왜 배우자에게 '네가 그렇지 뭐,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어?' 
'좋은 배우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했으면서 '너는 거기까지야, 내가 너한테 뭘 더 기대하겠냐?' 
왜 그렇게 배우자를 한정 짓습니까? 

교인들끼리도 마찬가지죠. 서로가 아픔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아~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지!' 딱 자신이 그렇게 판단해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크리스천 공동체라는게 무엇입니까? 
서로의 장점을 격려해주고, 서로의 단점을 덮어주는 거잖아요.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뭐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에게서도, '하나님의 자녀'를 보신 겁니다. 

예수님은, 처음 예수님을 만날 때, 아무런 영적 기대감이 없이 찾아왔던 시몬에게 
그를 보자마자 하신 말씀이 있어요. '내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냐?'  요1:42

이게 무슨 말이냐면, '너는 대대로 어부다, 그냥 평범한 어부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렇지만 너는 장차 베드로, 즉 게바, 반석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이다.' 하고
인정해 주신 거예요.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요1:42 

왜 우리는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과거를 알고, 현재를 알고, 
'내가 너를 다 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의 미래 가능성을 함부로 제한하는가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우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가정과, 일터와, 교회 안에 존중의 문화와, 사랑의 문화와, 격려의 문화가 
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사울이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첫 번째로 동네 사람들, 자기 고향 사람들 반응은, 이렇게 매우 안 좋았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두 번째 대상이 등장합니다. 사울의 숙부입니다.

◑10:14~16 '사울의 숙부가 사울과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사울이 이르되 암나귀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므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하니
사울의 숙부가 이르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 하니라
 
사울이 그의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나라의 일은 말하지 아니하니라'

사울의 숙부 (작은 아버지)가, 사울이 암나귀들을 찾으러 나갔다가, 
그가 사무엘을 만난 것을 알고, '사무엘이 네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내게 말해달라' 했죠.

왜 그런 요청을 했을까요?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요? 
아니면 소문으로 뭔가들은게 있어서 그걸 물었던 걸까요? 

문맥으로 놓고 봤을 땐, 그런 건 없었던 거 같아요. 
숙부는, 사울을 평소에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보니까 사울이 뭔가 변한게 감지되지 않았나 싶어요. 

▲또한 사울은 사무엘이 그에게 '왕이 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던 것은 
말하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사울은 왜 숙부에게, 사무엘의 예언을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몇 가지를 정리를 해보면, 
1) 아직 사무엘이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는 굉장히 신중했던 것이죠. 

2)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느껴지는 것은, 

'내가 왕직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스스로 확신이 없었던 거 같아요. 

3) 숙부를 만나기 전에 자기 동향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숙부 또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차마 말을 하지 못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사울을 왕으로 결정하셨습니다. 
시대의 선지자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면 끝난 거잖아요. 

그런데 끝난게 아니에요. 하나님도 인정했고 선지자도 인정을 했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해 줄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 그 사람을 가장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이, 또 숙부가 나를 어떻게 볼 것이냐?' 
그의 마음이 굉장히 위축되어 있었던 거죠. 

여러분이 볼 때, 청년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소심한 사람이었을까요? 
저는 두 가지 측면이 다 있었던 거 같아요. 

▲제가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제가 20대 중, 후반까지의 삶이 기억났어요. 
정말 제가 사람들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이 가장 기뻐할 만한 
가장 좋아할 만한 말과 행동을 하려고 엄청 애를 썼어요. 

저는 제 자신이 상당히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람이라서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이 저에게 '참 예의 바르고 겸손한 사람이다' 
이렇게 칭찬을 많이 했어요. 저도 제가 그런 줄 알았어요. 

근데 어느 날 저의 내면을 보니까, 그것은 제가 다른 사람에게 예의 바르거나 
겸손해서가 아니라, 소심해서더라고요. 

이타심이 아니라, 이기심이더라고요. 
정말 그 사람들을 내가 사랑해서 잘해준게 아니라, 
내가 사람들에게 밉보이는게 싫은 거예요. 

내가 사람들에게 거절감을 당할까 봐 두려운 거예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길까봐 두려운 거예요. 
그 두려움 때문에 내가 남들을 잘해주고 있더라고요. 

외향적이고 주도적인 사람들만 자기애가 강한게 아닙니다. 
내향적이고 조용한 사람들도 자기가 굉장히 강하고, 
어떻게 보면 자기 주도적 성향이, 엄청나게 깨지지 않는 반석처럼 강해요. 

왜요? 자기 스타일을 절대로 바꾸려고 하지 않아요. 
'이런 사람들에게 앞에 나서라' 그러잖아요. 그럼 난리납니다. 죽는 줄 압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그렇게 감동적으로 만났는데, 
사무엘의 예언을, 사울이 못 믿었던 건 아닌 거 같아요. 

근데 안타까운 것은, 그가 겸손하면서도 소심한 사람이었다는 거죠.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자기애'가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상태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사명 감당 못 합니다. 
'그러면 내가 사명자가 안 되면 되지 뭐!'

여러분 그런데 이런 상태로는, 여러분이 꿈꾸는 가정, 행복한 가정도 세울 수 없어요. 
여러분이 꿈꾸는 행복한 교회 공동체도 세울 수 없어요. 

왜요? 하나님 앞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심하게 사람들의 반응에 휘청거리게 돼 있거든요. 

마치 그 식물과 동물들 중에도, 건드리면 움츠러드는 동식물이 있죠.
함수초라는 화초는, 건드리면 확 오그라들어요.
건드리면 껍데기 속으로 숨어버리는 달팽이 같은 거죠.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제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잘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울은 누군가가 당장 건드리면, 그 당장에 속으로 움츠러들고 
그리고 숨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마음 속에, 그게 사라지고 끝난게 아니라, 
속에 계속 쌓이죠. 이게 쌓이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단계를 넘으면, 
그의 절망과 분노와 공격성이 한순간에 폭발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내향적인 사람들이 폭발하면, 훨씬 더 무서운 거예요. 
여러분, 일터나 가정에서 이런 조용한 사람들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요. (폭발하면 무서워요)

아, 그러면 이렇게 조용한 분들은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여러분도 착각하시면 안 돼요. 

-내가 교양이 있고 겸손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기애가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껍질 속에 숨어 있는 건지... 이건 다른 거라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나의 이기심과 공격성이 치유되고 회복돼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게 치유되어야만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자유케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10:17~19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
18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19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의 지파대로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

사무엘이 중부지역 미스바에 12지파를 다 불러 모았어요. 
그리고는 왕을 뽑기 전에, 한 소리 (책망) 합니다. 

'하나님이 너희의 궁극적인 구원자가 되시는데, 
너희가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세워 달라고 하지 않느냐?' 

아니 그러면,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정을 실행하지 않고, 
이전대로 그냥 신정 체제로 가면 되는 거잖아요. 

백성들의 요구가 잘못됐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왕을 또 세우는 건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 이 길이 만나요. 저 길이 만나요?' 질문하죠. 
그럼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점쟁이처럼 '야, 이 길로 가야 100% 축복의 길이야, 저 길은 100% 화가 임하는 길이야' 
이렇게 답하시나요? 그건 우리의 착각입니다. 
어느 길로 가든지,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이 복된 길입니다. 

여러분, '신정체제냐, 왕정체제냐'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신정 체제였던 사사시대가 얼마나 엉망진창이었습니까? 왕정이 되면 다 잘못일까요? 

다윗은 왕정인데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잖아요. 
'신정이냐 왕정이냐?, 어떤 시스템이냐, 어떤 길이냐?'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정답'인 줄로 믿습니다. 

근데 우리는 알고 싶은 거예요. 100% 복이 보장되는 길을 가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 이 길이 정말 제 길이 맞나요?' 

그 질문을 하는 것은, '하나님, 확답을 하십시오. 확답을 해 주십시오!' 
'제가 이 길로 가면, 아무 어려움 없이 잘 갈 수 있나요?' 
이거를 자꾸 확인받고 싶은 거예요. 마치 점쟁이에게 길흉화복을 점치듯이...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든지, 물댄 동산으로 가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면 복된 길이 되지만, 
하나님을 떠난 길은, 여러분 어떤 상황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결국에 한 소리 (책망) 하고 나서 제비뽑기를 합니다. 
12지파를 불러서 제비를 뽑으니, 그 중에서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 중에서 마드리 가문, 마드리 가문 중에서 기스의 집안, 
기스의 집안에서 최종적으로 사울이 뽑혔어요. 

잠언 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우연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섭리하십니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우연도, 사람의 계획조차도,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섭리하십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그동안 중보기도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지중해성 기후는, 겨울에 비가 많이 오게 돼 있거든요. 

그런데 정말 비를 기적같이 피해갔어요. 
버스에서 내리면 비가 멈추고, 버스를 타면 다시 비가 오고... 
계속 비를 2주 동안 피해 다녔어요. 할렐루야! 이게 뭐 사람이 계획대로 되는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사울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제비뽑기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10:22~24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그들이 달려 가서 거기서 그를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는 순간, 사울은 왜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었는가요? 

정리를 해보면, 사울은 이미 자기가 왕이 될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던 거예요. 

게다가 이런 자신감의 결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죠. 
동향 사람들, 기브아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숙부의 질문 앞에 위축되는 자신의 모습, 

제비뽑기 과정에서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 기록은 안 돼 있지만,
이 마지막 결론 부분을 보면 '뭐야? 막내 지파? 사고 쳤던 지파? 저렇게 숨어있는 애가?' 

이런 반응들이 웅성웅성 일어나기 시작한 거예요. 

여러분, 사울은, 사람들의 평가와 반응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했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한쪽에서는 '왕이여, 만세 수를 하옵소서' 

NIV 성경에는 'Long live the king' 당신이 태평성대를 이루기를 바란다... 했죠. 
근데 또 한쪽 편에선, 불량배들이, 27절에 보면 
'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어? 저런 지파에서...' 

사울이 왕이 되는 순간에도 '숨어있는 저런 사람이 도대체 뭘 할 수 있겠어?' 
이렇게 불만과 조롱과 멸시를 쏟아부었다고요. 

▲제가 이 장면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최근에 스포츠 관심 있는 분들은 알 건데,
미국의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일본 외야수 이치로가 들어가게 됐거든요. 

근데 이제 투표인단이 몇 명이었냐면 394명이었습니다. (이치로의 진입은 당연한 거고)
투표하기 직전부터 관건은 뭐였냐면 '만장일치가 될 거냐, 말 거냐?' 그거 였어요. 

이치로 선수는, 우리 나라하고는 신경전을 많이 벌이긴 했지만, 전설적인 선수이거든요. 
그런데 결과는 393명이 찬성 투표를 했고, 단 한 명이 반대 투표를 했어요.

일본에서도 난리가 났고, 미국에서도 난리가 났는데 '도대체 누구냐?' 
반대 투표를 한 1명이 누구냐는 거죠.
'누가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짓을 했냐?' 이런 거죠.

제 말은, 누군가는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세상에 100% 찬성하고, 지지 받는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러니 사울이 그 정도 지지를 받은 것은, 대단한 일이라는 거죠.
    ☞소신과 인기  rfcdrfcd.tistory.com/15976502

또 한 경우는, 저와 친한 목사님이신데, 그분이 정말 목회를 잘하시는 분이세요.
말씀 사역도 잘 하시고, 리더십도 훌륭하고, 
그래서 정말 온 교회가 행복 바이러스로 충만한 그런 교회입니다. 

근데 이 목사님을 이제 위임 목사로 투표를 할 때, 
본인도 교인들도 모두가 '거의 만장일치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요. 
그런데 90%를 좀 넘겼어요. 여러분 90% 넘기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정도면 됐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정작 본인도 실망했고, 교인들도 놀란 거예요. 
'도대체 누가 제정신이냐? 반대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이걸 보면서 제가 또 한 번 깨닫는 진실이 있어요. 
그건 뭐냐면 세상에 완벽한 건 없어요. 인간에게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거를 기대하는 거 자체가 잘못이에요. 

그거를 기대했기 때문에, 실망하는 것도 잘못이에요. 
모든 사람에게 박수를 받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있나요? 그런 지도자는 없어요.

빨리 인정을 하셔야 돼요. 그게 자기 정신건강에도 좋고... 
완전하신 분, 우리의 완전한 구원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 길이 내 길이 맞는가?'  
여러분 진로를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길을 이미 선택해서 10년 20년을 갔는데도 ... 여전히 질문합니다.
'이 길이 정말 제 길이 맞습니까?'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진로에 대해서, 그 길에 대해서 
응답을 받기도 하고, 성경에서 또 하나님의 약속의 구절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응답을 받았는데도... 흔들리는 거예요. 
왜요? 사람들이 나를 흔들기 때문에!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너는 그게 네한테 맞지가 않아, 넌 그걸 할 수 없어!' 
나를 어려서부터.. 아니 나를 키워준 내 부모가, 내 형제가 
'넌 그거 못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이렇게 얘기하면서 기를 꺾어 놓습니다. 

'그냥 전망 좋은 과를 가라. 네가 할 수도 없는 거를 네가 하겠다고 하지 말고...'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어느 길로 가면 100% 복이 보장되고, 
성공이 보장되고, 형통이 보장된 인생의 길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100% 행복하고, 100%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길이 있을까요?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길로 가든, 주님과 함께 가는 인생과, 
주님과 함께 가지 않는 인생의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어제 제가 설교를 여기까지 썼는데, 갑자기 옛날 생각이 딱 떠오른 거예요. 
제가 신대원을 간다고 저희 집안 친척 여러분들에게 다 이야기를 했을 때, 
제 숙부 한 분이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상준아, 넌 목사가 어울리지가 않아!' 

저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소싯적부터 보신 분이잖아요. 
'너는 선동가 타입이 아니잖니?' 이 말씀을 제게 해주셨어요.

그게 너무너무 맞는 얘기였어요. 왜냐면 저는 어느 모임이 있으면, 
조용히 가서 저 기둥 뒤에 숨어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거든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거 제일 싫어하거든요. 

그러니까 저의 그 당시 현재의 모습으로는, 그게 너무나 맞는 말이었어요.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잖아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넌 그 길이 아니야, 넌 그거 못해, 넌 그게 안 맞아!' 
라고 다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 따라갈 수 있겠는가? 

지금 제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여러분들, 
'당신은 지금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이, 그 길이 여러분의 길이 맞습니까?'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길이 맞냐?' 면서, 
'성과는 왜 이렇게 안 나오느냐, 결과는 왜 이렇게 안 좋냐?' 
여러분, 끊임없이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그만 포기하라'고 이야기할 때, 여러분은 그 길을 가는게 여러분에게 맞습니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맞다면, 
내가 타협하지 않고 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 용기를 어디서 얻겠는가요? 

사울이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의 절반은 사울이에요.
이 사울의 불안심리가 우리 안에 가득 차 있다고요.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