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45장 성령님께 묻다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숨어계시는 하나님> ▣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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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께 묻다 사45:15 2025.02.09. [성령 안에서 6강]
사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도입
오늘은 "성령 안에서" 시리즈 설교 6번째 시간으로, 주1)
"성령님께 묻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로버트 프로스트 라는 사람이 유명한 시를 하나 썼죠.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입니다.
그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오죠.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우리의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죠.
아마 지금 여러분들의 삶에도 '무엇을 선택해야 될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늘 다른 길을 포기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선택과 포기는, 제가 생각할 때, 반대말이라기보다는 동의어라는 생각이 들죠.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나면, 우리가 아직 가지 않은 그 길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기대가 있어요.
그런가 하면 반대로, 우리들이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 때문에, 후회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끊임없는 기대와 후회, 그리고 선택과 포기 가운데서
우리들이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선택한 인생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우리들이 제대로 선택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성령님께 묻다>입니다.
우리들이 매사에 성령님께 물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개 '남자들은 결혼할 때 한 여자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결혼할 때 다른 모든 남자를 포기한다'고 그래요.
아무튼 선택하고 포기해서, 우리는 같이 만나서 살게 되는 거죠.
프로스트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가지 않은 길'
그 길을 우리들이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들이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론1 / 숨어계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에 이사야는 하나님을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사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은 왜 숨어 계실까요?
이것의 해답을 찾는 것이, 오늘 설교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한 번쯤은 숨바꼭질을 해보셨을 거예요.
술래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하고는, 술래가 사람을 찾습니다.
이 숨바꼭질의 목적은, 끝까지 못 찾는 게 목적일까요? 찾는 게 목적일까요?
아마 끝까지 못 찾는다면, 그 놀이가 재미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숨어 있는 그 아이를, 술래가 어렵게 찾을 때,
이 숨바꼭질 놀이는, 그 긴장감과 재미가 최고조에 달하죠.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지 못하도록 숨어 계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내도록.. 원하시는 마음인 것입니다. *술래잡기 예
<메시지 성경>에서 유진 피터스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어요.
You are a God who works behind the scenes.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데, 저 뒤편에 숨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분', '일하시면서 숨어계신다'는 뜻이죠.
▲오늘 그런 이야기들을 하게 될 텐데, 우리 인생에 참 힘든 게 그런 거잖아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그런 불평도 하잖아요.
'하나님, 저한테 왜 그러세요?'
내 인생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숨바꼭질처럼
부지런히 찾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성령님께 물어야 되는 거죠.
왜 성령님께 물어야 될까요?
요14:26절에 보니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 약속을 해주세요?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오늘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이, 추상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들이 성령님께 묻는 것, 그것이 오늘 예배 시간에도 우리들에게 일어나야 되겠죠.
◑본론2 / 우리들이 성령님께 물어야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1. 첫 번째는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 그 길이 맞는지 성령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번에 "성령 안에서" 시리즈 설교 말씀을 나누면서
제가 제일 많이 이야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우리의 인생이 순조로울 때, 성령님께 물어야 된다.'
그러면서 몇 주 전에 요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서 도망가려고 다시스에 갔을 때, 거기 어떤 일이 있었죠?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요나의 인생이 순조롭게 잘 풀려가는지 몰라요.
그런데 순조롭게 풀려간다고, 그것이 꼭 옳은 인생은 아니었어요.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가고 있는데, 일이 잘 풀렸다고요.
그래서 진짜 무서운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데도,
우리들의 인생이 순조로울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몰라요.
그래서 혹시 여러분들의 인생이 지금 잘 풀리고 있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이때 우리들이 물어야 되는 거죠.
'하나님, 이 길이 맞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그들은 그 광야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몰랐어요. 늘 두려움 가운데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움직였는가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고, 그들이 나아갈 때는
법궤(하나님의 말씀)를 앞세우고 그들은 움직였어요.
왜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이 불확실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들은 살 수가 없었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아니 그들이 가나안 땅의 첫 관문을 맞이하게 됐을 때,
여리고 성을 통과해 들어가야 됐어요. 여리고 성 전투에서 이겨야 했어요.
근데 여리고성은, 그 당시 근동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성읍이었어요.
그들은 묻죠. '하나님 이제 어떻게 해야죠?'
하나님이 전략을 다 알려주셨어요.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점령합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겼어요?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나서, 아간은 죄를 짓기도 하고
또 그들이 그 다음에 점령해야 될 성이 아이 성인데,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그런 작은 성읍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갔다가' 처참하게 깨지게 되죠.
△아이성 전투는, 우리 인생의 중요한 진리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하는 그 상황들 가운데서 실패하게 돼죠.
우리들은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의 길을 묻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성경에 나오는 그들의 실수와 실패는, 다른 게 아니었어요.
'그들이 여호와께 묻지 않을 때마다' 그들의 실수가 반복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은, 미처 준비되기 전에 성공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의 성공이, 그렇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있어요.
그 성공이 우리들의 삶에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 줄 수 있어요.
'하나님께 묻지 않는 인생', 그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혹시 여러분들 인생이 무지무지하게 잘 나갈 때, 그런 기도 하셨어요?
'하나님, 왜 저를 축복해 주시는 거예요?
왜 사업이 이렇게 잘 되는 거예요?
우리 애가 왜 이렇게 잘 되는 거에요? 하나님 왜 그러세요?'
혹시 그렇게 기도하신 분 있으세요?
우리는 별로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인생에 고난의 시기를 지나갈 때만,
우리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왜 그러세요?'
'고난이 축복'이라는 것은, 고난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께 길을 물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들에게 축복인 거예요.
여러분들의 인생이 잘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성령님께 길을 물어야 될 때'인 것입니다.
▲2. 반대로 삶이 고달파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도, 우리가 물어야 되는 거죠.
오스월드 챔버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셔도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 그분과 친밀한가?
우리들의 인생이 고난의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데, 삶이 고달픈데.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될 만큼, 하나님과 친밀하고 여러분은 그렇게 담대한가?」
여러분, 우리 인생이 제일 고달플 때가 언제인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사실 우리 인생에 고난의 시기를 지나갈 때도,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과 선명한 비전이 있으면, 우리가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제 인생을 돌아볼 때,
저도 젊은 시절에, 경제적으로 좀 어렵고 힘든 시간을 지나갈 때.. 참 힘들었거든요.
근데 저는 그때,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면 제 안에 선명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어려움들은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우리를 제일 힘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숨어 계셔서, 우리들 가운데 선명한 비전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때가 우리들을 가장 힘들게 합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5:15절에서 이사야가 이야기하는 '숨어 계신 하나님'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45:15
하나님이 스스로 숨어 계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숨어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영적 집중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순간에, 우리들이 영적 집중력을 가지고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고 우리들이 물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그 물음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깨달음이 있고,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우리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묻기 시작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그 마음 상태를 우리들은 발견하게 됩니다.
C S 루이스는 이런 얘기를 해요.
「그리스도 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모두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집중해 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들이 알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그 용서 가운데서,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거예요.
△오늘도 저는 이렇게 말씀 준비하고, 예배 시간에 나와서 같이 찬양하고 하면서,
제 마음속에는 계속 그런 기도가 되어집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오늘 여기 나와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예배합니다.
하나님,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마음,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우리들이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성령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얼마나 고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마음과 정말 얼마나 동떨어진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우리들이 성령님께 길을 묻고,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고 싶은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요.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여기 모였잖아요.
◑본론3 / '성령님과 동행'에 대한 오해
그런데 우리들이 성령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을,
혹시 우리들이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에만,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조금 잘못된 생각이에요.
이번 설교 시리즈를 지나면서 여러분들이 참 많이 들었던 게
'성령의 기름부으심, 성령님의 임재' 였어요.
그리고 지난 주에는 그런 말씀을 나누었잖아요.
'우리들이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우리들이 구해야 한다.'
우리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구하고,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그러면 우리들이 임재를 구한다고, 우리들이 24시간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그것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 경우겠지만, 저는 그런 자신이 없어요.
성령님의 임재가 필요하지만, 내가 매 순간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 아니에요.
만일 제가 설교자로서 여기 서 있는데,
'하나님, 성령님께서 저에게 임재하여 주셔서,
제게 기름 부어주시지 않으면, 제가 설교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설교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임재 가운데만 설교한다면, 제가 1년에 몇 번쯤 설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어느 날은 제가 설교 준비를 하면서 말씀을 보는데,
딱 앉자마자 정말 이렇게 부으시는 은혜를 경험해요.
그런 때는, 책상 앞에 앉아가지고, 제가 보통 A4로 10장 정도를 타이핑을 하는데,
정말 한두 시간 안에 다 타이핑이 끝나요. 그때는 막 가슴이 뛰어요.
빨리 주일이 와야 되는데... 이걸 빨리 설교를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런 순간은 가끔이에요.
얼마 전에도 설교 준비를 하는데, A4 한 페이지를 제가 못 넘어가는 거예요.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런 순간에 설교를 해야 되는 그런 때가 되면,
여기 강단에 나와서, 앉아서 고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제가 임재를 느끼는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그때가 하나님의 동행이 필요한 순간이에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이번 시리즈 설교를 하면서도, 제가 지난 두 주 동안 설교를 하고,
교인들의 얼굴을 못 보겠는 거예요.
'어휴, 내가 왜 이렇게 설교를 했을까?' 너무 부끄러운 거예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제가 부끄러운 것과는 별개로, 은혜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어떤 말씀이, 그 사람에게는 그게 자기에게 부딪히는 거예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충만한 기름부으심이 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기름 부으심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도,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임재가 느껴지지 않아도)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경험,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달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묵묵히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역들을 감당하고, 우리들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성령님과 통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죠.
딤후4: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이 말씀을 보다가 '아 이게 이런 뜻이구나'
'때를 얻은 때'가 언제예요?
나에게 확신이 있는 때, '이건 분명해, 하나님이 함께 하셔!' 하는 때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야, 네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상관없이 힘쓰라'
네 인생의 불확실성 가운데서 '하나님,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거 따지지 말고, 항상 힘쓰라'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든지/ 안 느껴지던지 힘써라!)
▲제가 젊은 목회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종종 해요.
'참어, 참아!'
우리의 삶에는 참아야 되는 순간들이 참 많아요.
언제?
하나님이 숨어 계신 것 같아요. 하나님 안 보여요.
하나님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때는 우리들이 믿음으로 '참아야 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반대로 우리들이 힘써야 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성령님과 동행하고 싶다는 열망은 있지만, 동행함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때 우리들의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지어서 전도하러 보내셨던 일 아시죠?
제자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평소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의 기적도 경험하고,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도 경험하고 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제 너희들이 가서 전도하고, 너희들이 사역을 해라' 하시고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어요.
흩어진 제자들에게는
주님과 함께 했었던 때 가졌던 믿음, 주님이 함께 하셨던 역사, 그것을 기억하며
그들은 사역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에요.
그러자 제자들은 승리하고 돌아온 것이죠.
마찬가지로 성령의 기름부으심, 성령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도,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셨던 그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계속 성령님께 물으며, 성령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 ...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우리들이 성령 안에서 하는 모든 행동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성령님의 일을 하겠다는.. 우리 마음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거예요.
저는 그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게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포인트라는 것이죠.
◑본론4 / 자기가 답을 정해놓고, 성령님께 물어보면 안 됩니다
자, 우리들이 성령님께 물을 때
혹시 잘못된 물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많이 참조했던 캔달 목사님의 책 <내일의 기름 부음> 중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들어보세요. 재밌어요.
「문득 켄터키에 있던 한 목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교회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는, 갑자기 하와이에 있는 한 교회로부터
담임 목사로 와달라고 하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 목사는 사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짐을 싸요. 나는 기도해 볼 테니...'
이렇듯 이미 우리의 마음이 정해진 상태에서, 주님의 마음을 알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이미 내 마음을 정해놓고 기도해요.
내 마음을 정해놓고 기도하면... 우리들에게 응답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정해놓은 것에 대한 확답을 얻을 때까지, 기도해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평생을 신앙생활하면서,
왜 그렇게 고집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경험하는가요?
왜 그는 평생을 기도하는데, 그의 삶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가요?
그는 평생을 기도하고 있는데, 왜 그 사람의 삶은 변하지 않는가요?
그들 속에 자기 확답을 가지고 기도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한 확답을, 재가(허락)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경우가 많아요.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포기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되는데,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포기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들이 입으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우리들이 되뇌고 있지만,
우리들이 기도할 때, 내 결정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나라 직업군 중에, 점을 제일 많이 보는 직업군이 어떤 사람들일까요?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 중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점을 봅니다.
그리고 경제인들, 사업하는 사람들이, 점을 참 많이 봅니다.
정치인들은 선거철이 되면 '어디에서 출마해야 내가 당선될까?'
그거 물으러 점보러 다니는 거예요.
또는 '이번에 나가야 될까? 말아야 될까?'
정치인들이 점을 볼 때, 한 사람에게만 묻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묻습니다.
언제까지? 내가 원하는 답을 해줄 때까지!
확률은 반반입니다. 그리고 그게 맞으면 '그 점쟁이는 용하다'고 이야기를 하죠.
경제인들, '내가 여기 투자를 해야 되는데, 이거 잘못하면 다 잃어버릴 수도 있고,
이거 투자가 잘 되서 돈을 벌까요?' 그래서 묻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하나님께 우리들이 물어야 되는 것은 '내가 여기 투자를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것이 아니죠.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정치인으로 살아가는 소명이.. 제가 맞습니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분명하다면, 우리들이 어디로 가서 출마를 해야 되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그 자리에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나를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을 버느냐, 벌지 못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업가로, 이 돈을 통하여 하나님 나에게 어떤 일을 하고자 원하시는가?'
그것이 분명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하나님 앞에 묻는 것은, 우리의 확답에 대한 허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물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을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거죠.
켄달 박사의 책에 나오는 또 하나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읽어드립니다. 주2)
◑본론5 / 이제 우리들이 물어야 될 또 하나의 질문이 있어요.
'내가 성령 충만한가?'
성령 충만이 뭘까요?
옛날에 보면, 그게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이 좀 불경스러웠던 적은 있은 것 같아요.
옛날 기도원이나 부흥회에 가면, 강사 목사님들이
약간 쉰 목소리로 '불 받아라 불 받아라!' 이런 거 많이 했잖아요.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뭔가 이렇게 받는 걸로 생각해서,
'능력 받아라 능력 받아라' 그러면,
내가 능력 받아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성령님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들이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왜요? 저는 제가 제 삶에서도 체험한 일이니까요.
제 인생에 가장 힘들었던 일은,
목사로서 설교 준비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 저에게, 제가 은혜를 받고, 이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는 경험을 했으니까,
저에게는 그게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경험이었는지 몰라요.
성령 충만하면, 우리들이 능력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능력을 받는 것에 대한 의미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은 '성령님의 지배, 성령님의 다스림 가운데 내가 있겠습니다' 라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예배 가운데 나와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성령님께 묻는 내가,
'성령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은,
'내가 어떤 능력을 받겠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성령님께 제가 다스림을 받겠습니다. 성령님 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게 성령 충만인 거예요.
▲지금 한국 교회를 보면서, 많은 교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으며 예배 드리는데, 우리 교회에서
이 나라와 이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하나님의 다스림의 흔적이 어디 있는가?'
오늘 이 교회에서,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애드리안 로저스 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성령충만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반역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불순종은, 연약함이 아니라, 사악함이다」 무서운 말이죠?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는데, 성령의 다스림이 없으면,
예배하는 우리가 반역자로 사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이 없을 때, 우리는 연약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악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어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것은 어미 징계해야 할 죄악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어떤 교회의 장로로부터, '술 취한 채 예배에 참석한 교인을 제명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그러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채, 예배 드리러 온 교인들은 어떻게 징계했나요?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도 있는데,
전자의 계명을 어긴 이를 제명 했다면,
두 번째 명령을 순종하지 않은 자, 즉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도
마땅히 징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것을 심각한 죄악으로 생각하지 않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부분의 교인들은 충만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다.
이렇게 성령 충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별 문제의식 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대변해 준다.」
성령 충만이 뭐라고요? '제가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눈에 보이는 다른 죄악에 대한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들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될 질문은,
'내가 성령 충만을 원하는가? 내 안에 갈급한 마음이 있는가?
우리들에게 가난한 심령이 있는가?'
성령 충만이 성령의 다스림을 우리들이 구하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이 가난하여, 갈급한 마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는 것이 복이구나'
'우리들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복이구나!'
▲박영돈 교수는 이런 글을 썼어요.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 충만한 이유는,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때로 실패하고 넘어져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이 성령 충만 입니다. ... 그런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온전함으로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갈급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구하는 거예요.
'성령님, 우리들에게 충만함을 주시옵소서.
숨어 계신 하나님을 우리들이 찾으며, 은혜로 채워지기를 갈급하는 거예요.
마치는 말
하나님이 숨어 계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깨워지도록...
너희들이 교만이 아니라,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하나님은 오늘도 숨어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약하게 만드셔서,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도록,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숨어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이 숨어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들이 겸손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숨어 계신 하나님을 계속 찾아야 될 때입니다.
저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면서,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마이크 어 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놀라다> 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서 야곱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출발해서, 저기 삼촌 하란의 집으로 가죠.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도망가는 와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요.
그 책에 보면, '야곱이 한 곳에 이르러' 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창28:11
그 말씀 가운데는 '한 곳' 그리고 다른 어떤 설명도 없다는 거예요.
'야곱이 한 곳에 이르러' 그가 돌베개로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깨어났을 때,
'여기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창28:16
야곱이 하나님을 발견한 곳은, 어떤 특정한 곳이 아니었어요.
어떤 곳인지 알려져 있지 않은 그 한 곳에 이르러, 야곱이 하나님을 발견해요.
거기서 야곱이 단을 쌓고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 부르게 돼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장소도 특별한 곳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을 만난 그 곳이, 후에 특별한 곳으로 구별되는 것이었어요.
우리들의 성령님께 묻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한가운데서, 그곳이 어디든지 상관 없이, 하나님께 물어야 되는 것이고,
성령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거예요.
하나님께 맞춰진 삶을 살기를 우리들이 결심할 때,
옳고 그름,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이 분별하게 될 거예요.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옳은 일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문제는.. 옳고 그름이 늘 내 기준에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내가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틀렸다'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이 옳고 그름으로 다 갈라져 있어요. 굉장히 흥미롭죠.
'늘 나는 옳고 상대방은 그른(틀린) 편에 서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건 뭐냐면,
성령님께 우리들이 물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의 소망이 한국교회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왜요?
성령님께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서,
그 곳에 설 수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다면...
여러분, 우리가 구해야 될 것은,
여러분, 사단이 하는 일을 우리가 그렇게 모르지 않잖아요.
진짜 중요한 것은, 성령님을 인식하고, 성령님을 감지할 수 있도록
우리들이 구해야 돼요.
성령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어떻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지,
우리들이 두려움과 불안도 구별할 줄 알아야 돼요.
두려움은 대상이 있어요. 무엇 때문에 두렵습니다.
그런데 불안함은 대상이 없어요.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그냥 마음이 불안한 분이 있으세요?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하지?' 그 때는 성령님께 물어야 될 때입니다.
'하나님, 제 마음이 왜 이렇게 불안할까요? 제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나요?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간 것이 무엇인가요?'
불안할 때는, 성령님께 구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성령님께 물을 때에,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성령님께 물었을 때에, 성령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다.
내가 성령님께 물었을 때, 성령님이 나를 이렇게 포기하게 하셨다.
성령님께 물었을 때,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에 돌아가서 한 주를 살아가는 동안,
'성령님께 물었더니 내게 말씀하셨다'는 그 간증을 안고,
다시 감격과 간증을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주께 물으며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왜 하나님은 내 인생에 보이지 않나요?
하나님, 제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일 가운데,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 제 선택이 올바른지.. 하나님 제가 분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 묻습니다. 성령님, 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하게 하여 주옵소서.
한 주간을 살아가는 동안, 이 고민 속에 우리들에게 답을 주시는 하나님,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다시 믿음으로 모일 수 있는 우리 귀한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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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성령 안에서" 설교 시리즈
1강 성령 안에서 예배하기
2강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령님의 인격)
3강 혹시 우리들이 그 성령님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잃어버린 성령님을 찾으라!
4강 우리들이 성령님을 찾는 이유,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라
5강 성령님과 친해지려면
6강 오늘입니다. '성령님께 물으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주2)
켄달 박사의 책에 나오는 또 하나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읽어드립니다.
「오래전 이야기다. 나는 매우 엄격한 환경에서 자랐다.
우리 집에서는 극장이나 서커스 관람을 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몸담고 자란 교단에는 혼탕,
(남자와 여자가 함께 수영하는 것을 혼탕이라고 불렀대요)
혼탕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유독 아버지만은 혼탕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영복 입은 여자들과 함께 있으면, 내가 유혹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영장에 가게 해달라고 한참이나 졸랐다.
마침내 아버지는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그것은 '수영을 가도 되는지 하나님께 기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한 뒤, 기도해 보았다.
하나님은 내게 '가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아버지는 내가 혼탕에 가도록 허락해 주셨다는 것,
그리고 내가 주님께 받은 응답을 신뢰해 주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아버지께 평생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는 순간,
정말 하나님께서 '가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가면 안 된다'고 나를 설득시키려 하셨다면,
하나님이 꽤나 힘드셨을 것 같다.
당시 내 마음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마음을 정해놓고 기도했던 적은, 이때 만은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정말 열린 마음으로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듣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진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은, 함부로 제 기호에 맞게 추정, 예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으라는 거예요.
성령님께 물으라는 거예요.
'내 생각이 맞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 맞는 것인지.. 물어보라는 거예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지.. 그것을 내가 감지하고 있는 바가 올바른 일인지를,
우리들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라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