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장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https://www.youtube.com/watch?v=cwIBYGW6feM 정리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고전1:18~25 2025.03.23. 고린도전서 4강
지난주 내용은,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 라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오늘 다루는 1:18~ 4장 끝 절까지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교훈"입니다.
1:18~4장 끝절 까지의 개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교훈" 주1)
................................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8절은 개역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문에는 '왜냐하면' 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헬, 가르
17절은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목적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라는 걸 밝혔고,
그리고 어떻게 복음을 전했느냐?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의 지혜로 하게 되면, 어떤 위험을 가지나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바울은 이야기한 다음에,
본문 18절에서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여기서 '도'라는 표현이
앞에 17절에 나왔던 '말'과 같은 헬라어 단어입니다. 로고스 죠.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그러니까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말씀이 미련한 것이지만,
또 한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우리'
이것도 현재진행의 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는 십자가 말씀은 무엇이냐? '하나님 능력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18절은,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십자가에 말씀(십자가의 도)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있지만,
그러나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렇게 먼저 이 단락의 주제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곰곰히 생각하셔야 되는 거는
'나는 어느 쪽에 있는 것일까?'
-멸망하는 자들 쪽에 있나?
-아니면 구원을 받고 있는 자들 쪽에 있는가?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어떻게 들려지고 있는가?'
십자가의 말씀이 내 귀에 미련하게 들리고,
'이건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이다' 라고 느껴지게 되면,
우리는 멸망하는 자들 쪽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말씀이 (십자가의 도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 사람들 쪽에 서 있다는 겁니다.
▲자 18절에서 주제를 밝힌 다음에,
19절과 20절은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18절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들 마음이 질문이 생기죠.
'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십자가의 도가),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들리는가?'
라는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19절과 20절입니다.
◑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기록된 바'
이것은 이사야 29:14절을 인용한 것인데,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사29:14
지금 성경에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 총명한 자들의 지혜와 총명을 폐하시겠다'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 19절은, 이사야 29:14절의 후반부만 인용되었습니다.
그럼 전반부는 무엇이냐면, 즉 사29:14a 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앞부분에 '기이하다' 즉 놀랍다 라는 표현을 세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그 내용이 (세 번이나 놀라운 일이) 뭔가 하면,
바로 '이스라엘 사회 가운데 지혜자의 지혜, 총명한 자의 총명이 사라지는
그 일을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다' 라고 교훈을 했습니다. 사29:14
이 말씀은 1차적으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이지만,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자기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적용을 시키게 됩니다.
그러면서 본문 20절에서 바울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대상만 바뀌면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지금 바울이 의도하는 답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과 세상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지혜자는, 선비는, 변론가는
어디에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질문하는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사의문문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세 부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당시는 두 개의 세계죠.
-전통적인 유대적 세계관의 세계, 헤브라이즘 세계
-헬라가 지배하는 세계, 헬레니즘 세계
당시 이 두 세계, 즉 유대적 세계와 헬라 세계의 지식인들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이 세 그룹의 사람들을, 바울은 거론합니다.
1) '지혜 있는 자 the wise'는 *헬, 소포스
헬라인들의 세계의 철학자들, 현자들... 헬라 세계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입니다.
'참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없다는 말이죠.
2) '선비 the scribe가 어디있느냐?' *헬, 그라마투스
이 말은 서기관이나 율법사, 율법학자를 칭하는 말입니다.
당시에도 구약성경을 필사했던 서기관들이 있었죠.
그러니까 유대 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죠.
3) '변론가 the disputer, the debater'
무슨 문제든지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을 가리키며,
본절에서는 지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둘 다 지칭합니다.
바울이 이러한 용어들을 번갈아가며 사용한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헬라적 개념과 유대적 개념을 같이 사용해야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를 대표하는 율법학자들, 그리스 세계를 대표하는 철학자들,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없다는 뜻이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가 미쳐 질 수 없는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겁니다.
19절, 20절은 '왜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의 말씀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겼는가?'
그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답변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셨기 때문이다'
자, 그 다음 21절을 보시면,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은
어떻게 알고, 어떻게 알려질 수가 있는가?'
여기서 '전도'라는 것은 선포 preaching 입니다. *헬, 케리그마
바로 '선포'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세상 사람들 선포하는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는 겁니다.
▲본문 21절 말씀이 제게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거는 성도님들한테도 던지는 도전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도, 한 번씩은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순간들이 아마 한두 번씩은 다 있으실 것 같아요.
하나님의 구원, 그 구원의 길을.. 우리가 갈급하게 알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통해서는 안 되는가?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는, 그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알리시는 방법은 무엇이냐?
선포된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알려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누가 되어야 되나?
연설가가 되어서 안 되고, 전령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령 herald', 무슨 말인가요?
연설가는, 원고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입니다.
똑같은 원고인데도, 연설가는 수사학과 기교를 써서, 원고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듣는 사람들이 감동 받게 하죠.
이것(연결가, 웅변가)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근래의 미국 대통령 중에, 버락 오바마는 연설을 잘 해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이 있고,
빌 클린턴은 '설득의 대가'라고 합니다. 그와 같이 대화하면, 그는 상대를 말로 높여 주고,
그래서 자기의 주장하는 바를, 상대가 쉽게 응낙하도록 만드는, 설득의 대가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이것은 뭔가 하면
연설가가 아니라, 설득가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전령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전령은, 상관의 명령을 정확하게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이 전령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원고에다가 생기를 불어 넣는 연설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이 구원의 길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그대로 전달해주는 전령들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정하신 이유는 뭔가 하면,
구원은 사람에게 의존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어디 속에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구원 방법 속에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거죠.
정리하면,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겐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라는 걸 밝혔습니다. 1:18
그는 이어서 두 가지 가능한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합니다.
1) 왜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말씀이' 미련하게 보이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2) 그 다음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알려지는가?
그것은 연설가의 방법이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거죠.
그런 다음 22절부터 보시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표적'은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은 종종 예수께 찾아와 표적을 구하였죠. (마12:38, 막8:11, 요6:30) *세메이온
그들은 항상 증거를 요구했고 현상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생각할때에도 역사 속에 표적과 큰 능력과 기사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혀 저주 아래 있게 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헬라인들은 이성적인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들에게 가장 큰 이상(理想)은 지혜, 곧 철학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때로는 무의미한 궤변에 빠지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행 7:21),
지적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런데 23절에 사도 바울은 무엇을 전했느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겁니다.
본 절은 앞 구절 22절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헬라어 본문에 있는 '데'('그러나')는, 본절이 앞 구절과 대조를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고,
주격 대명사 '헤메이스'('우리')가 사용되어, '우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란, 조국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존재케 할 영광스런 왕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행악자 취급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모욕이었죠.
따라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걸림돌만 될 뿐이었죠. (롬9:33, 벧전2:8).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당시의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가장 비천한 죄인들이나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십자가와 구세주는 서로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결국 본 구절을 통해 모든 인류가 빠짐없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거부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요.
여기서 '거리낀다'는 말은 스칸달론 입니다. 여기서 스캔들이란 말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했을 때,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거는 '하나님의 스캔들'로 들린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들려진다는 거죠.
◑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18절에는 '구원을 받는 자(우리)들'
24절에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 같은 뜻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부르심'의 사상을 강조합니다.
자연인으로 있을 때는 누구나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하나님의 부르심 effectual calling 을 입은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도에, 복음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게되며,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십자가의 도(로고스, 말씀)가, 구원을 얻게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8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인간이 교만하여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일축했지만,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비록 십자가가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패배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적용
저는 모태신앙으로 쭉 자랐고, 아마 어머님이나 어르신들한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씀이
'야, 교회 다니니까 착하게 살아야 돼요.
두 번째는 공부 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돼!' 그런 말을 제일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래서 제가 물리학과 들어갈 때는, 말도 안 되는 꿈이지만,
제가 노벨상을 하나 받아 가지고, 기자가 소감을 물을 때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러면 그게 최고의 신앙인줄 알았어요.
제가 어릴 때, 고등학생 때까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망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는 관심이 달라지게 되고, 전공인 물리학 공부는 의미가 없어지고,
또 사회학이나 정치학 이런 분야를 접하면서, 또 성경을 공부하면서
물리학 이라는게 저한테는 의미가 없어졌고,
그래서 그때부터 학교 성적이 바닥을 치게 되고...
그래서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학교 성적은 항상 바닥을 쳤어요.
(대구에서는 공부를 잘 했는데, 전국의 수재들이 다 모인 곳에서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했는데도,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학교 성적은 올라가지도 않고... 그러니까 점점 모든 사람이
제가 제 자신을 보는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정말 저를 욕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저를 욕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밖에 나가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욕하는 것만 같았어요.
사람들한테 제가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게,
'누구라도 멀리서 나를 보면, 좋아할 수 있겠지만,
나를 가까이에서 깊이 알면, 누구도 나를 용납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제 자신을 볼 때, 스스로 한없이 부끄러웠고,
그리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들이, 저를 욕하고 또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나하고 친한 사람들도, 더 깊이 나를 알면 다 떠나가게 될거다'
이렇게 혼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존감이 굉장히 바닥을 쳤던 거죠.
그래서 그 당시에 제가 '개똥벌레' 라는 노래를 자주 많이 불렀습니다.
'마음을 다주어도 친구가 없네. 사랑하고 싶지만 마음뿐인 걸
나는 개똥벌레 어쩔 수 없네 손을 잡고 싶지만 모두 떠나가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가시를 마라!'
그래서 저는 그런 가운데 있다가,
주님이 저한테 찾아오셔서, 저한테 주셨던 딱 한마디 말씀!
'야, 나는 너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내가 내 자신을 직시할 수가 없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손가락질 하는 것 같고,
'지금 하거나, 아니면 앞으로 손가락질 할거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저한테 찾아오셔서
'나는 너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날이, 뭐 청년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난 거 하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한테는 혁명적인 날이었습니다.
저의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이 그날 다 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날 하루는 정말 천국으로 천국처럼 보냈는데,
근데 그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생기는 질문이. 겉잡을 수 없는 질문이
'야, 어제 너의 경험은 가짜야.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고, 그분은 불꽃 같은 눈동자를 갖고 계시고,
너는 모순 덩어리인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모순 덩어리 너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보시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거는 말이 안 되지... 그거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마귀가 그렇게 제 귀에 속삭였어요.
저는 정말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그때 제가 하나님 앞에 이런 제 마음을 표현을 했을 그때,
주님은 제 인생에 잊을 수 없는 두 번째 말씀을 주셨어요.
'야, 내가 왜 너를 의롭다고, 너를 왜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줄 아느냐?
나는 너를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고 있다!'
이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씀, '나는 너를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너를 보고 있다!'
그때 제가 깨닫게 된게 뭔가 하면,
하나님과 저 사이에 중보자 예수님이 계신 것을, 그때 피부로 절실하게 알았어요.
저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애썼고,
최소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한 5년은, 제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쳐도
하나님과 저 사이에는 마치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두꺼운 벽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저 사이를 막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기도하고 고함을 질러도,
내 소리를 듣고 있는 하나님이 계신다 라는 것을, 저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제 질문을 들으시고, 말씀해 주셨어요.
'야, 내가 너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나는 너를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고 있다!'
라고 주님의 저한테 말씀하셨어요. '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다'
그때 저는 바울이, 지금 가르치고 있는 이 십자가의 말씀(십자가의 도 :18)이 무엇인지,
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나의 능력이 되시고,
나의 지혜가 되셔서,
이제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시켜주시고
바로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너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 하시고...'
저는 그때부터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하지만 제 삶 속에 흘러 들어오는 것들을 경험할 수가 있었어요. *회심의 체험을 한 거죠.
여러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세상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놀라운 표적을 구하고,
세상은 우리를 향해 놀라운 지혜를 구하지만,
교회가 가진 것은 무엇이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능력과 지혜의 하나님께
나를 연결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
그래서 25절을 다시 한번 보시죠.
바울은 이렇게 마지막으로 역설적인 가르침으로,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 하나님의 약하심'은 무엇이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승리를 우상화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고 약한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세 가지로 정리하면,
1) 첫 번째는,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더라도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바라보아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져 있든지,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이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바라봐야 되느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우리가 바라보는데,
바로 그분 입에서 '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이 흘러나올 때까지!
'야, 너의 믿음이 바로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을,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바로 그 예수님의 입에서
이 말씀이 흘러나올 때까지, 여러분은 그분을 바라보셔야 돼요.
2) 두 번째, 우리들의 삶에 정말 하나님의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 꼭 기억하셔야 돼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같은 말이지만, 우리는 내 지혜,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셔야 됩니다.
즉 전도 preaching 의 미련한 것으로, 선포 preaching 라는 미련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전도' (preaching, 케리그마)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1
'그냥 개인적으로 공부하면 되지.. 아니면 경건의 시간 가지면 되지...' 저도 그거 압니다.
그렇지만 '선포된 말씀'은 또 다른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의 삶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요청될 때,
정말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히 요청될 때,
선포된 말씀의 자리에, 여러분들이 앉기를, 여러분이 듣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3) 마지막으로,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돼요.
저와 같은 목회자는 무엇을 어떻게 전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볼 때, 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연설자가 되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전령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을, 목회자로서, 설교자로서
평생을 씨름하고 있습니다.
저도 지난 한 주간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그렇게 노트에 썼어요.
'하나님, 저도 예외 없이 점점 연설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자꾸 설교를 할 때마다, '내가 생기를 불어 넣어야지...'
내가 이 성경 본문으로 말씀을 전할 때 '내가 생기를 불어넣어야 돼!' 라는 강박관념이
끊임없이 저를 질식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는
저의 연설적인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어지는
바로 전령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
능력은 나에게 있는게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있는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어느새 우리 시대에 설교가 연설가로 바뀌어져 버리는,
점점 그런 시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교회에서 섬기는 많은 사역자들이
다시 한번 연설자의 자리에서 돌아서서, 복음의 전령으로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삶의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를 향해 달려가고,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 저들이 연설가가 아니라, 복음의 전령으로 충성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해 주시는 여러분들 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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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고전1:18~4장 끝절까지의 개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교훈"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분쟁을 극복하고, 우리가 하나됨을 지킬 수 있는가?
바울은 넉 장에 걸쳐서 교훈을 하게 되는데, 오늘은 첫 번째 시간이기 때문에
서론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바울은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를 합니다.
1:18~1장 끝절 :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는 어떻게 주어지는가?
위대한 영적 지도자를 통해서 주어지는게 아니라, 십자가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두 번 살피게 될 텐데,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를 통해서 주어지는게 아니고,
십자가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라는 것을 교훈을 합니다.
2:1~ 2장 끝절까지는 '깨닫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깨닫는 것, 이것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를 통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은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꼭 종이 한 장 차이 같지만, 잘 기억을 하셔야 됩니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를 통해 깨닫는게 아니고, 성령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라고
교훈을 합니다.
3장~ 4장은 사역자들에 대한 교훈인데
사역자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고,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사역자들은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이 이 땅에서 수고한 것을 평가하는 날이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들의 수고를 반드시 평가할 겁니다.
성도들은 그러면 사역자들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나?
자랑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이렇게 "지도자에 대한 교훈"을 3장과 4장에서 앞으로 교훈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전체적인 틀을 가지고, 오늘은 첫 번째 시간인데,
1:18~25절 말씀을 살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