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4장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사도행전 강해 (17) / 행4:1~4 /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 YouTube
◈말씀을 들은 사람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행4:1~4 2022.02.13.
지난 시간 우리는 사도행전에 첫 번째 기적을 살펴봤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이었죠.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자입니다.
그것도 40년 동안 한 번도 자기발로 스스로 일어난 적이 없던 자입니다.
그런 그가 베드로를 통해, 단번에 일어나 걷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순간 이 기적을 일으킨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베드로를 향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향한 모든 시선을 조금도 지체 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가 시작이 되었었죠.
자 그런데 설교 도중에 갑자기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죠?
◑행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1절에 보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라고 말합니다.
세 부류가 찾아온 거죠. 예상치 못했는데, 마치 불청객처럼 들이닥친 것입니다.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
자 그런데 사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전부 다 사두개인입니다.
사두개인들 중에서 제사장을 맡았고, 사두기행들 중에서 성전 맡은 자를 정했으니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그냥 전부 사두개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1) 사두개인은 다윗 시대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예로 봅니다.
2) 제사장은 다 아시죠.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제사장은 사두개인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인들 중에 아론의 후손들
3)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 중에 대장을 뜻하죠. the captain of the temple
옛날 구약 때부터 성전 경비들이 있었습니다. 레위인들이 주로 맡았죠.
성전은 거룩한 곳이니, 거룩한 성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죠.
예를 들면, 도둑이 몰래 들어와서 성전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갈 수도 있었고,
또 밤에는 술 취한 사람이 들어와서 사고를 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전을 지키도록, 성전 경비대를 세웠습니다.
성전의 치안과 질서를 담당하게 했던 거죠.
그 중에 우두머리, 대장이 바로 본문의 '성전 맡은 자'입니다.
본문 보시면, '성전 맡은 자'만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 복수이죠. '사두개인들'도 복수이죠.
그런데 '성전 맡은 자'만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성전 맡은 자' 성전 경비대 대장, 우두머리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이 성전 맡은 자는, 복음서에도 등장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 등장합니다.
그때 '성전 맡은 자'가, 성전 경비병들과 로마 군병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한 자입니다.
눅22:4절과 52절에는 '성전 경비대장'으로 나옵니다.
본문 4:1절의 '성전 맡은 자'와 같은 말입니다.
(다만 누가복음에는 복수로, 사도행전에는 단수로 나옵니다)
이 사람이, 자기 부하들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가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거기엔 로마 군병들도 일부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안나스와 가야바, 이렇게 대제사장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을 체포하러 갔던 성전경비병들이 ('아랫 사람'으로 나옴 요7:45)
예수님의 가르침에 설득되어 빈손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하고 돌아온 성전경비병들을 무섭게
저주했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요7:49
당시는 로마가 예루살렘 치안을 맡고 있었지만,
성전 경비는 유대인들에게 자치적으로 맡겨둔 것으로 여겨집니다.
과거부터 그렇게 내려왔으니까요.
이 '성전 밭은 자', 즉 성전 경비대장은, 상당한 권력을 가졌던 자입니다.
로마 통치 아래에서, 사도들을 체포할 수 있는 자치 경찰권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시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교 서열에서 2인자가 '성전 맡은 자'였다고 합니다.
그럼 유대교 서열에서 1인자는 대제사장이었죠. 그 다음 2인자가 바로 '성전 맡은 자'였죠.
그만큼 권력이 막강했던 자리죠. 이 '성전 맡은 자' 직위도, 사두개인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행4:1절에 세 부류가 나오지만, 결국은 다 사두개인들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죠.
이 사두개인들이 베드로가 설교하는데 찾아옵니다.
설교가 다 끝나가는 시간에 찾아 온 거죠.
자 그런데 이들이 성전에 찾아온 이유는, 베드로의 설교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온게 아닙니다.
여러분 1절 하반절에 보시면 맨 끝에 '이르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4:1
여기서 '이르러'는 단순히 그들이 도착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 번역이 좀 미흡한데요. 헬라어로 보면 '갑자기 들이닥쳤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어떤 분위기가 느껴지죠?
현장에서 뭔가 불안하고 살벌한 기운이 감돌지 않습니까?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아니나 다를까 3절을 보면,
이들이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그 자리에서 체포합니다.
그리고서는 사도들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면 사두개인들이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체포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이유가 2절에 나오는데요.
◑4: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여기서 '싫어하여' 라는 말은, 그냥 듣기 싫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헬라어로 '디아포네오마이' 라는 단어인데, 'greatly disturbed 크게 불안해했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16:18절에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바울이 귀신으로 인하여 '심히 괴로워하여' 이 말이, 본문에 '싫어하여'는 말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의 메시지를 얼마나 싫어했느냐?
마치 바울이 귀신을 싫어해서 '심히 괴로워할 정도로'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권력이었던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의 설교가 너무나 듣기 괴로워서, 사도들을 아예 감옥에 잡어넣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특별히 듣기 싫어했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듣기만 해도 엄청 열 받는 메시지가 있었는데요. 자 어떤 메시지죠?
'예수 안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2
그러니까 '부활'에 대한 교리가, 심히 싫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문제 제기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두개인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본문의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캐치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두 부류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파(평신도 지도자)이고, 또 하나는 사두개파(제도권 지도자)였죠.
그런데 이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더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숫자는 작았는데 파워는 훨씬 더 컸습니다.
왜냐면 이들은,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모든 권력의 요직을 다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에 모든 부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들이 권력을 가진 기반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전에서 드리는 성전 제사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그룹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 주로 무엇이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죠.
이 제사 때문에, 엄청난 부를 누렸던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이 당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려오던 전통에 따라 제사를 드리며 살았습니다.
제사를 드리려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직접 와야 했습니다.
그때 빈손으로 오지 못하죠. 제사를 드릴, 소나 양 같은 제물을 갖고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멀리 사는 사람들이, 제물을 데리고 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를 끌고 오다보면, 중간에 여물도 계속 먹여야 되고, 중간에 길이 험할 때는,
소를 억지로 끌어서 산도 타야 되고요...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
또 문제는, 드리는 제물에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짐승을 끌고 오는 과정에서, 제물에 상처와 흠집이 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뭐 중간에 소의 다리가 삘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 그렇게 흠이 난 제물은, 힘들게 끌고 와도 번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흠이 있다고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제도를 만들었느냐 하면, 성전에 와서 제물을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굉장히 편한 제도이죠.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성전 마당에 두고 팔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성전을 주관하는 자들이 누구죠? 사두개인들이었죠.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가 다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성전 안에 장사치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장사치들이 장사를 하도록 허용한 거죠.
그런데 이 장사치들이, 제물을 팔면서 폭리를 취했습니다. 바가지를 씌운 거죠.
평상시에는 소 한 마리를 100만 원에 판다면, 성전 마당에서는 훨씬 비싸게 파는 겁니다.
그러면 장사치들만 돈을 벌었을까요? 아니죠.
그들의 배후에 있는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에게 상납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뒤에서 봐주고, 대신에 수수료를 떼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겠습니까?
그러니 당시에 굉장한 부자들이었죠. 완전히 성전 제사를 독점하고 있었으니까요.
경쟁 그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지 않았습니까?
이들이 사악한 방식으로 폭리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는 거룩한 예식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엄청난 부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들이 가졌던 권력과 부의 기반에는 로마제국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친 로마파'였습니다. *일제시대 친일파처럼
로마 제국의 비호 아래서, 모든 권력과 부를 누렸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자치 권력 기구가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에 해당하는 곳인데요.
이 산헤드린의 주요 요직도 사두개파들이 거의 다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막강한 힘과 권력을 소유한 자들이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종교계 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모든 권력의 윗선을 타고 올라가 보면
사두개인들이 앉아 있었던 거죠. 고대는 제정일치 사회였으니까요.
쉽게 말해, 로마 권력의 비호아래서 사두개인들이 다 해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종교적인 기득권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기득권을 누렸습니다.
한편으로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종교 귀족들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로마 권력을 등에 업고, 그 당시 모든 자치 권력의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삶이 반영되어서, 사두개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특징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크게 두 가지 교리적 특징이 있었는데요.
그들은 모세오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습니다.
모세오경을 제외한 모든 구약의 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경제적인 부를 누렸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죠?
성전 제사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그들이 유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를 가장 많이 강조하는 구약의 책들이 어디죠? 바로 모세오경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렇게 인정한 이유가, 그들이 모세를 존경해서가 아닙니다.
이 다섯 권의 책에서 '제사'를 가장 많이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을 시작해서 족장들이 얘기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그들은 어디를 옮겨가서든지 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기 위한 성막 건축의 매뉴얼을 주십니다.
이어서 레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레위기는 그 만들어진 성막 안에서 드리는
거의 다 제사의 이야기입니다. 아예 1장부터 제사 이야기로 시작 되죠.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제사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 레위기입니다.
민수기, 신명기에도 제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세오경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아, 제사를 열심히 드려야겠구나'
그래서 백성들이 제사를 열심히 드리면, 여러분 결국 누가 이익입니까?
제사장 그룹이었던 사두개인들이 모든 이익을 다 가져가죠.
그러니까 이들은 모세오경을 너무 좋아한 겁니다.
△그런데 구약의 다른 책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서나 시가서, 선지서를 보면, 제사에 대한 부정적인 구절들이 있습니다.
물론 제사 자체를 부정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타락한 제사'를 책망하는 구절들이 종종 나옵니다.
예를 들어 역사서를 한번 볼까요?
삼상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구절을 읽었어요.
자 그래서 제사는 안 드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만 힘쓴다면,
사두개인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경제적인 부를 더 이상 누릴 수 없었겠죠.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이런 구절들이 있는 역사서를 싫어했습니다.
그 다음 구약의 시가서는 어떻습니까? 한 구절만 볼게요.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자 여러분, 사두개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씀은 '성전 제사를 열심히 드려라'인데,
그러나 시가서에서 다윗이 뭐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그런 제사가 아니고,
상한 심령, 즉 회개하는 심령의 제사'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죠?
사두개인 자신들의 윤택한 삶에 위기가 닥칩니다.
그래서 이들은 시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서는,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선지사들은 '헛된 제사'에 대한 맹공을 퍼붓습니다.
특별히 말라기 선지자는, 이 사두개파들에게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일격을 가합니다.
말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런 말씀은, 사두개인들에게는 아주 극혐하는 구절이죠.
만일 성전 문을 닫으면,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먹고 살겠습니까?
그러니 이들은, 모세오경을 제외한 모든 구약 성경은 다 버렸습니다.
오직 모세오경 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고, 인정했습니다. 왜 그렇다고요?
그래야 비즈니스를 잘 할 수 있었으니까요.
결국 이들의 중심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마저, 취사선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누구라고요? 성전을 중심으로 살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들이었고요.
▲또 하나 이들이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 당시에 사회적인 성공과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오경을 보면, 그런 자신들의 삶을 정당화 시켜주는 구절들이 많거든요.
모세오경에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면에서, 물질의 복을 받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도 굉장히 부자였죠. 야곱도 부자였고요. 이삭도 부자였고요.
요셉은 사회적으로 총리까지 크게 출세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성경을 읽을 때, 자신들이 감정이입 되는 거죠.
사두개인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큰 부자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갔더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라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를 가니까 '하나님을 잘 믿으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다.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런 말씀을 종종 전합니다.
자 그러면 이 부자가요. 어느 교회를 선택하겠습니까? 어느 교회를 나갈까요?
당연히 후자이겠죠. 전자의 교회에서는, 자신은 대단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한 거죠.
그러나 후자의 교회를 나가면 어떻게 돼요?
자신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복을 받았고요.
그러니 말씀이 불편하지 않은 거죠.
그러니까 당시 사두개인들이 딱 그랬던 겁니다.
모세오경을 읽을 때는,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긍지를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고요. 그 말씀이 불편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책들을 읽을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욥기는 의인의 고난을 말하고요. 그러니 또 듣기가 싫은 거죠.
선지자들은 맨날 죄에 대한 심판과 회개를 외칩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지들이, 사두개인들은 듣기 싫었던 거죠.
그래서 오직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이 가지고 있던 두 번째 교리적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이 다 소멸된다고 믿었습니다.
내세가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신기하게도 종교 지도자들 임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현세적 삶이 전부이고, 끝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만 보면, 부활을 직접 언급하는 구절들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활에 대한 암시는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부활'이라는 단어 자체를 언급하는 구절들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핑계로, 부활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막12:18, 눅20:27, 행23:8
자 그런데 이들이, 부활의 교리를 믿지 않은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경제적으로 유복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서 원없이 낙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밑바닥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정말 입에 풀칠하는 것도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천국을 사모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루하루 이 땅을 어렵게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유복하게 누릴 것을 다 누리면서 사는 사람은, 오히려 여기가 천국일 수 있습니다.
부족한 게 없으니까요. 사두개인들도 딱 그랬던 거죠.
그들은 지금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부족한 게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천국을 소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 그래서 이들은, 진짜 실제로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메시아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부족한게 없는데요.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사는데요...
그러니 그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신념은 주로 율법의 문자적인 해석에 집중했기 때문에,
내세와 관련된 개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에 안 나온다는 이유로.
자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몸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내세가 없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겠어요?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이들의 모든 관심은,
영원이 아니라 현세적인 가치에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니까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게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한마디로 현세의주의적 삶이었습니다.
내세를 거부하고 오로지 현세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현세적인 가치에 자신들의 생애 전체를 투자하며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 그래서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삶이 아니었죠.
말로는 그런 말을 했었겠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사실 이 땅에서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을 통해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이 체제를 유지하고,
어떻게든 안락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 이것이 그들의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부유한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뒷받침해주는 성경이, 바로 모세오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오경을 제외한 모든 성경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거죠.
그러니까 이들이 모세오경만을 인정하고, 부활을 인정하지 않은 그 뿌리는
결국 어디에 있는 거예요? 말씀의 가치관이 아닌, 현세적인 가치관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마저, 자신이 선택적으로 고르고, 취사선택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말씀에 대한 경외함이 하나도 없었던 거죠.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뭐가 지금 내 삶에 당장 유익이 되느냐에 있었습니다. 그걸로 말씀을 재단 cutting하는 거죠.
말씀과 삶이 충동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밀어냅니다. 왜 그래요?
자신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현재 체제를, 현재의 편안한 삶을 흔드는 거니까요.
이게 무너지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데,
이들이 부활의 교리를 싫어했다는 것은, (그래서 사도들을 체포해서 감금시켰죠. :3)
단순히 교리적 차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인정하고 믿었죠.)
교리적 차이 때문에, 그들은 사도들을 감옥에 집어넣은게 아닙니다.
이들은 그런 교리 자체에 아예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 그런데 왜 사도들을 집어넣어요?
그 말씀이, 자신들의 삶(기득권)을, 통째로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들이 자신들의 삶을 저격하고,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이 사두개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폭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누가가 갑자기 슬쩍 끼어넣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본문 4절인데요.
◑4: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여러분, 이 구절을 읽으실 때, 4절의 위치가 좀 애매합니다.
제가 본문을 읽을 때는, 4절에 위치가 잘 이해가 안 됐습니다.
원래 이 4절은, 문맥상 여기에 없는게,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여러분 3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그들을 잡으매 날이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그러면 다음 장면이 '이튿 날'로 넘어가야 맞습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이튿날'로 시작됩니다.
4: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그러니까 3절에서 5절로 바로 연결되는게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4절이 빠져야 ,훨씬 더 문맥이 자연스러워요.
자 그런데 4절이 중간에 슬쩍 들어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4절은, 여기보다 3장 마지막에 있어야 맞습니다.
3장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다 끝날 즈음입니다.
그러면 곧바로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이렇게 4절이 연결되면, 문맥이 훨씬 자연스럽고 이게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저자 누가가, 이 4절의 내용을 왜 지금 이 자리에 끼워 놓는 것일까요?
그러면 여기에는, 누가의 의도적인 배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지금 의도적으로 대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조예요?
-말씀을 듣지만, 말씀을 가두는 자와, *사두개인들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고 따르는 자 *믿는 자들, 남자들만 5천명
이 두 부류를 지금 대조하는 것입니다.
자 특별히 여기서 '믿었다'는 말은, 지적인 동의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헬라어로 보면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맡기다' 라는 뜻입니다. *피스튜오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대로, 말씀에 아멘 하며, 자신의 삶을 던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자신의 삶과 부딪히면, 말씀을 선택적으로 고르고 순종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 말씀에 온전히 던지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과 정반대인 거죠.
그러니까 지금 누가는, 이걸 대조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둘 중에 하나인 거죠.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을 내 소견으로 재보고 재단해서 버리는 자,
-혹은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따르는 자
여러분, 한 주간 우리가 또 세상에 나갑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붙잡히는 싸움은, 결국 다 이겁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은, 사실 다 여기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게 아니잖아요. 내 이익과 말씀이 부딪히는 겁니다.
내 소견에 옳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히는 거고요.
내 상황과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칩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의 가치와, 말씀의 가치가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느 편에 서느냐? 그때 우리는 무엇을 따르느냐?
-현세적인 가치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고 버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현세적인 가치를 내려놓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맛대로 선택하는 선택적 순종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나 자신을 맡기는 온전한 순종이냐?
결국 전부 다 이 싸움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의 신앙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반응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다는 거죠.
2절에, 사두개인들의 반응이냐?
아니면 4절에 '믿는 자들'의 반응이냐?
여러분,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처음 교회가 시작이 되자마자 찾아온 것은 핍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행전의 첫 번째 핍박이 시작되죠.
첫 번째 기적이 끝나는 동시에, 첫 번째 핍박이 시작됩니다.
교회가 출발하면서 바로 핍박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핍박은, 다른게 아니라 말씀에 대한 핍박이었습니다.
말씀대로 믿고 전할 때, 세상은 교회를 핍박합니다.
세상에서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모두가 하나같이 붙잡고 살아가는 삶의 모든 가치들을,
송두리째 말씀이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가만히 듣지를 못하는 거죠.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 마저도요.
그러나 그 핍박 가운데도, 말씀대로 믿고 따르는 자가 여러분 '성도'입니다. *본문에 '믿는 자'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 땅을 살아가는 유일한 진리요,
삶의 유일한 규칙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믿고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계수하실 하나님 앞에
반드시 그 말씀대로 서는 날(심판받는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의 관점으로 이 땅을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
그것이 바로 교회요, 성도입니다.
여러분, 바라기는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살아가는
순전한 믿음이 우리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내 삶의 유일한 기준이고 규칙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내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선택적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대로, 믿고 살아가는 온전한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가라 하면 갈 수 있고,
말씀이 멈추라 하면, 때로는 내 삶의 흔들릴 것 같은 아픔이 있지만,
내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멈출 수 있는
순전한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경외가, 우리 안에 진실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도, 2절의 사두개인들의 반응이 아니라,
4절의 '믿는 자'의 반응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그래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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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원리 대로 살았던 사람의 예
필라델피아에 가면 유펜 대학이라고 있습니다.
그 대학교 학생들이 몇 백명 안되던 옛날에 초창기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학생들이 전부 기숙사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어있었는데
개학이 되면 보따리를 들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방을 정하게 됩니다.
방을 정하게 될 때는, 언제든지 먼저 온 사람이 우선권이 있습니다.
먼저 와서 좋은 방을 가지고, 그런데 기숙사 방이 다 똑같지가 않잖아요?
계단 밑에 있는 방도 있고, 화장실 옆에 있는 방도 있고,
시끄러운 문간에 있는 방도 있고, 여러 방이 있는데
먼저 온 사람이 언제나 제일 좋은 방.
그 다음 사람이 와서 그 다음으로 좋은 방을 선택하고, 방을 이렇게 얻게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학생 하나가 가방을 가지고 와서 내려놓고 “제게 방을 하나 주시죠.”
그러니 총무처장이 “그래. 어떤 방을 원하는가?” 했더니,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겁니다.
“다른 학생들이 다 가지고, 남는 방이 있으면 제게 하나 배정해 주세요.”
총무처장은 수십 년 동안 일을 했지만, 이런 학생은 만나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아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아니, 다른 분들 다 방을 정하고, 뭐 계단 밑이라도 좋습니다. 남는 방을 제게 주세요.”
그러니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또한 이웃을 존중하고 배려하라는 성경말씀을, 실천하고 사는 젊은이였지요.
그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 옆에서 대학 총장이 이 대화를 들었어요.
‘내가 이 수십 년 대학 총장 경력에 이런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그래서 그 학생 이름을, 총장은 자기 수첩에 딱 적어놨어요.
‘이 학생이 장차 어떻게 되나 보자...’
오랜 세월 후에 그는, 그 대학의 총장이 됐어요.
여러분, 이런 양보, 이러한 친절을 베풀어 보신 적 있습니까?
‘다른 사람 다 좋은 거 갖고, 그저 남는 거, 굳은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 자세를 갖고 산다면, 이런 신앙 철학을 갖고 일평생 산다면,
그는 장래에 큰 인물이 되는 길로 점점 나아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