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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4장 질그릇 속의 보배

LNCK 2025. 4. 10. 18:1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린도후서         ▣ 십자가

고린도후서 특강(4) - 질그릇에 담긴 보배(고후 4장) - YouTube
*위 동영상 29:40초~ 녹취

◈질그릇 속의 보배           고후4:6~18          2025.03.26. 


◑고후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 마음속에 빛이 임하면, 우리는 그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 
얼마든지 성도를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13장에 보면, 가룟유다까지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게 섬김이죠. 

내가 섬길 수 없는 사람까지 섬기고, 아끼고, 돌보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사역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자기가 쓴 서신서 첫머리에, 자기 정체성을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롬1: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바울은...' 그랬죠. 

지금 고후4장을 보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뿐 아니라, 
성도들의 종으로도 섬겼다는 뜻입니다.
4: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여기서 '질그릇'은 바울뿐만 아니고, 사역자들 뿐만 아니고, 
성도들까지 같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예요. 
'질그릇'은 우리 사람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질그릇입니다. 왜 질그릇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이 아니고, 질그릇은 깨어지기 때문에... 깨어지는 게 숙명입니다. 

질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랩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자꾸 물에 이렇게 씻다 보면, 문양도 예쁘게 그리고
유약을 발라서 구워놔도, 세월이 가고 시간이 지나면, 색이 옅어지고, 물이 빠집니다. 

그리고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다 보면, 질그릇에 이가 빠지겠죠. 금도 가겠죠. 
나중에는 깨어져서 박살도 납니다. 그게 질그릇의 숙명입니다. 

우리는 원래 흙으로 빚어진 육체 아닙니까? 원래 우리의 원재료가 흙이었습니다. 
무쇠가 아니고, 강철이 아니고, 흙으로 빚어진 육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금이 가고, 깨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집니다. 

앉았다가 일어설 때도 '끙'하는 신음소리도 나고, 아프고 피곤해서 드러눕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니고, 너무너무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이 육체에, 보배 대신 예수께서 들어와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초기 교회에서 논쟁이 꽤 됐습니다. 
어떤 논쟁이 되었냐? 이런 식의 명제들이 있었습니다. 
'유한이 무한을 품을 수 있는가?' 

집합관계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연수가 실수를 포함할 수 있습니까?' 
실수가 더 크기 때문에, 실수가 자연수를 포함합니다.
자연수가 실수를 품는 것은, 집합관계에서는 불가능한 계산입니다. 

인간은 유한하잖아요. 그럼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가요?
라는 명제였습니다. 품을 수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없잖아요. 

그런데 지금 여기 보세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그랬습니다. 
나는 유한하고, 그것도 못나고, 깨어지고, 부서진 질그릇 같은 유한한 존재인데,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었습니다. 이게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초기 교회에서는 이게 말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서신을 쓴) 바울을 굉장히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단히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철학과 수학적인 데는 능통하고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성경을 몰랐습니다. 
요15:5절 말씀을 한번 봅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예수님 말씀이거든요. 예수님께서 '그 안에 거한다' 그랬습니다. 
'거한다'는 말이 산다 dwell 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 내 안에 산다... 그랬어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거예요. 

'(그렇게 거하시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건데요. 
이거 예수님이 직접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합니다. '유한이 무한을 품을 수 있습니까?' 네, 있어요. 
이게 역설이에요. 이게 초대교회의 굉장한 역설이고, 이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리고 또 이건, 인간이 품고 싶다고 품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께서 성육신 하셨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품을 수 있는 거지, 

예수께서 결단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걸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나 같은 모자란 질그릇 안에, 무한하신 예수께서 보배로 좌정해 계십니다. 
이게 은혜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면 나는 '이도 빠지고, 금도 가고, 색깔도 다 퇴색되어버린,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질그릇'입니다. 

만약 그 속에 보배가 없다면, 그 질그릇 속에 예수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거죠.
정말 반려견 밥 줄 때나 쓰임 받는, 낡고 금이간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 예수를 품으니까, 예수님 그 분을 내가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시니까, 사람들이 날 어떻게 봅니까? 
'빛나는 보석을 품은 그릇'으로 보는 거예요. 

그럼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해요? '저 사람 참 잘 한다고 칭찬하고, 훌륭하다고 하고, 
열심히 주의 일 한다고 격려해주고, 수고한다고 하고 등 두드려 주잖아요...

그러다 보면 인간이 어떻게 돼요? 자기가 보배인 줄 알아요. 
이게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이 보배인 줄 안다니까요... 그게 선을 넘으면! 

사람들의 칭찬이 계속 이어지고... 잘 한다고 격려해주고, 수고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건 사람들이 '보배'를 보고 나를 칭찬하는 건데, 
'질그릇'을 보면 칭찬할 게 하나도 없는데, 

질그릇 모양 그대로, 내가 예수 없이 산다면, 
어디 가서 사람 대접받고, 어디 가서 사람 구실하고 살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예수를 보배로 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내 속에 좌정해 계시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주의 일을 할 수 있고, 사람 대접을 받는데... 그런데 내가 그걸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질그릇이 박살 나는 거죠. 혼나는 거죠. 예수님한테.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결단코 안 됩니다. 

그래서 그 뒤에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에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그 다음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통하여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보배이신 주님이, 나를 통하여 그 능력이 나타나잖아요. 그렇죠? 
나를 통하여 보배가 빛나잖아요. 

그러면 '나를 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그 이름을 우리가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되지....' 
자기가 중간에서 영광 다 가로채고, 자기가 예수님인 척, 자기가 보배인 척,
그러고 살면, 하나님이 절대 가만히 안 둡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거 꼭 기억해야 됩니다.     주1)

그래서 바울은 '나는 성령으로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고,   *'새 언약의 일꾼' 고후3:6 
나 같은 이 육체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았고, 
그래서 나는,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거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하고 맨날 바울이 자기 간증하잖아요. 

'나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나는 과거에는 사람을 잡아다가 옥에 넘기는 
죄인 종의 괴수였다'고, 자기 질그릇 시절의 자기를 맨날 얘기하잖아요. 

그거 기억하셔야 됩니다. 고전1:26~29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6

질그릇들이니까요. 질그릇이 거기서 거기지요 뭐! 
질그릇 중에 학벌이 좋다 해봐야, 그것도 질그릇이에요. 
질그릇 중에 권세가 좀 있다 해봐야, 조금 더 예쁘게 잘 색칠된 질그릇입니다. 

솔로몬은 질그릇입니까, 아닙니까? 그도 질그릇이죠. 
요즘 우리가 새벽기도 때 전도서를 나누는데,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이, 
'지혜자나 우매자나 다 똑같다' 그래요. 솔로몬의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질그릇인데, 이제 늙어서 색깔 다 바래고, 이 다 빠지고 나니까 
가문 좋고, 문벌 좋고, 재산 많고, 처첩이 천명이나 된 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 하나님 앞에 가야 되는 질그릇인데...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그거 자랑하는 건, 정말 헛된 것 중에 헛된 일입니다. 전도서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이걸 바꿔서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질그릇들을 택하사

'질그릇 중에 정말 연약하고 모자란 그릇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습니다' 고전1:27~28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9
질그릇들은 자랑하면 안됩니다. 자랑해봐야 질그릇인데요. 

자 이제 보배를 품은 질그릇이, 어떤 강력한 힘이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4: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보배를 품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질그릇으로는 답답하죠. 힘들죠. 못 견딥니다. 
그러나 내 속에 보배 되신 예수님이 친히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도 아무런 염려나 걱정이 없습니다.                   

시23: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 번 다니셨겠죠. 하루는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마8:24~25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잘한 게 뭡니까? 예수님을 깨운 거예요. 예수님은 풍랑이 일어도 걱정 없습니다. 
주무시는 거예요. 제자들은 죽겠는 거예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게, 예수님이 타신 배도, 제자들과 함께 탄 배가, 풍랑에 휩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탔다고 해서, 그 배가 그냥 편안하고 안전하고 무사히 가는 게 아니에요.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 모시고 사는 가정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겠습니까? 
갈등도 있고, 문제도 있고, 사건 사고 터지고, 자녀들 속썩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는 질그릇인데, 내 속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워야 돼요. 그게 기도 아닙니까!

'내 속에 계시는 예수님, 
이 유한한 인간, 질그릇 같은 인간 속에 함께 내주하고 계시는 예수여, 
일어나셔서 저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해주십시오...' 하고 예수님께 부탁해야 됩니다.  
왜 그거 부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마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곧'이라는 말을 보십시오. 
'곧 일어나사!' 
우리가 기도하면, 예수님이 곧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풍랑과 바람이 아주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풍랑 하나 없는 잠잠한 바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가정, 우리 개인... 다 살다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 가운데 우리는 보배 되신 예수님을 항상 잘 활용하셔야 됩니다. 

엎드려 구하고, 기도로 깨우고, 
주님 일하여 달라고.. 움직여 달라고.. 
날 위해서 지금도 일어나서, 우리 인생의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해달라고.. 부탁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결론은, 보배 대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질그릇은 
(풍랑에) 흔들릴지언정 난파하지 않습니다. 
본문 버전으로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람과 풍랑이 우리를 아무리 세게 흔들어도 
우리가 기도하면, 절대로 배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그거 기억하고 계속해서 깨어서 기도하셔야 됩니다.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가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여기서 '죽음'이라는 말이 참 특별한데요. 

'죽음'에 두 가지 헬라어가 있는데, 네크로시스 와 싸나토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크로시스는 점진적으로 죽어가는 겁니다. 과정으로서의 죽음입니다. 
계속해서 죽어가는 거예요. 지금 10절에서 '네크로시스' 라는 말을 썼습니다. 
 being put to death, putting to death

-싸나토스는, 한 번 딱 사건이 일어나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자, 싸나토스가 쉽습니까, 아니면 네크로시스가 쉽습니까? 

싸나토스가 훨씬 깔끔합니다. 한 번에 그냥 딱 가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라고 할 때, 
이 죽음은 '네크로시스' '과정으로서의 죽음, 죽음에 넘겨짐' 즉 서서히 죽어가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고 서서히 죽어가는 거예요.
롬4:19 '사라의 태가 죽은(네크로시스) 것 같음을 알고도'

이런 예를 여러분 들어보셨을 거예요. 끔찍한 예이지만, '네크로시스'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흉악범을 사형에 처할 때, 이런 사형법도 있었어요.
그를 시체하고 같이 묶어뒀어요. 상온 상태에서 사람이 죽어서 시체가 되잖아요. 
부패하잖아요.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을 시체와 함께 밧줄로 묶어둡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그가 시체와 같이 죽어가는 거죠. 점점 죽어갑니다. 
일단은 끔찍하고, 일단은 그의 피부 세포 세포마다, 
그 벌레와 그 미생물이 함께 나에게 들어오고, 그래서 같이 점점 죽어가는 거예요. 
그걸 표현한 겁니다. *네크로시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와 같이 점점 죽어가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죽기 위해서 오셨잖아요.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오셨어요. 
죽는 건 예수님의 일이에요. 살리는 건 누구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에요. 

예수님은 스스로 부활할 능력을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건, 죽기 위해서 오신 거지, 
내가 부활하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십자가 지고 죽는 것까지가... 예수님의 몫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이 말은, 우리도 예수처럼 죽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한 번에 그냥 딱 죽는 게 아니고, 한 번만 내 자존심 꺾고, 
한 번만 내 욕심 꺾고, 한 번만 내가 저 사람 앞에 딱 숙이고 사과하고... 
그렇게 죽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날 동안 계속해서 
예수의 죽으심을 따라서, 나도 매일매일 죽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여러분, 그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습니까? 
새 언약의 일꾼(3:6)으로서, 성령께서 내 속에 계셔야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사람의 힘으로는 못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내 속에서 일하셔야, 성령께서 함께 움직여 주시고, 
성령께서 나의 주인 되어 주셔야, 
그래야 나는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우리가 죽었어요. 이렇게 우리가 매일매일 죽어요. 
매일매일 죽는데 예수의 생명이 내게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게 신비예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살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일매일 못 박고, 
자기 의지를 부인하고 죽는 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내가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십니다. 

자기 부인을 해보십시오. 자기 십자가를 져 보십시오. 
오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고...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께 생명이 나타나게 한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도 '다시 살리시는 역사가 일어날 겁니다.' 

◑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같은 맥락이라서, 설명은 생략합니다.               주2) '관련 예화'
그 다음 12절이 참 신비롭습니다.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는 여기서 사역자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역자들. 바울, 디모데, 실라 등
그 사역자들이 항상 죽었잖아요. 항상 네크로시스 했잖아요. 

매일같이 예수님처럼 죽는 훈련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생명이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너희 안에서 역사했어요.  
'너희'가 누굽니까? 고린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역사했다고요. 

사역자가 죽으니까,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과 일꾼들이 매일 예수님 닮아서 죽으니까, 
공동체가 생명으로 살아나더라 ... 지금 이 말씀입니다. :12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은데, 예수님이 요12: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네크로시스 하면, 
즉 매일같이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면,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열매 맺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가정이, 
내가 죽으면 우리 자녀들이 그 열매를 누리게 되고, 
목사가 죽으면 교회와 성도들이 그 열매를 누리게 되고, 
교회 중직들이 죽으면 교회가 그 열매를 누리고, 생명이 거기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의 도'이지요!

그러면 생명이 나타나지 않는 공동체는, 
아무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 생명이 안 나타나는 거죠.

아무도 손해보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죽는 사람이 없고, 
'내가 보배'라고... 자기 목 뻣뻣하게 쳐들고, 
자기가 영광 받으려고 하니까, 거기는 생명이 당연히 안 나타나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공동체가 부흥하고, 
기쁨이 넘쳐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는 공동체가 되는 이유는 
'매일같이 죽는 자가 있다'는 뜻이에요.

사람 눈에는 잘 안 보이죠? 
우리 교회에도 매일같이, 예수의 죽으심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름도 없이 빚도 없이 십자가 지고 죽는 사람들... 그러니까 교회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가 되는 거죠.
우리는 항상 이런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나를 보고, 공동체를 봐야 됩니다. 
이게 '새 언약의 일꾼'의 사역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이란, 성령으로 일하는 사역자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안됩니다. 성령 충만해야 가능합니다.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제가 그랬죠. '죽는 건 예수님의 몫이고, 살리는 건 하나님의 몫이라고요.'
여기 14절에도 그게 나오잖아요.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그분은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우리도 예수를 닮아서 항상 예수의 죽으심 그 네크로시스(죽음)를 몸에 짊어지고 살면 
우리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는 것까지만 잘하면 됩니다. 잘 죽어야 돼요. 
매일같이 성질 죽이고, 매일같이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매일 죽어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도 살리십니다. 예수님을 살리신 것처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아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반열에 놓아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큰 형님'이 되시는 셈이지요. 우리는 '양자'들이고요.
이거 탐나지 않습니까? 그거 욕심내야 됩니다. 

 

세상에 썩어 없어질 건 욕심내지 말고, 
예수님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열심히 죽읍시다. 잘 죽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순절인데 열심히 잘 죽어야 됩니다.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낙심'이 또 나오죠. 앞서 4:1절에서 우리가 살펴봤습니다. 

'새 연약의 일꾼'된 분들은 낙심하지 않는다... 그랬어요. 
왜냐하면 내가 죽어도 살리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그렇죠. 우리의 겉사람은 점점 낡아집니다. 

바울이 고생을 워낙 많이 해서, 바울이 복음 전한다고 하도 많이 맞아서 
40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아서, 항상 매맞고 항상 감옥에 갇히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겉사람은 낡아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왜요? 하나님이 살리시니까! 
내 영혼은 날로날로 새로워집니다.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란에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합니다.'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걸 봐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봅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 큰 영광을 바라봐야 됩니다. 

이 땅의 것, 보이는 것, 기껏해야 돈 몇 푼 아닙니까? 
기껏해야 넓은 집 아닙니까? 넓고 좋은 땅 아닙니까? 
그거 누리고 천년 만년 삽니까? 

저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걸 마치 보는 것처럼 붙들고 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 잘 기억하시고, 새 은약의 일꾼으로 성령 충만해서 잘 죽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새 언약의 일꾼은 성령으로 일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일하는 자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잘남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주를 그리스도로 부르고, 예수의 종 되고, 성도를 섬기는 종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그런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는 질그릇같이 모자라고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보배되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친히 내주하여 주셔서 
우리를 빛나게 하심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한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저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덕보고 사는 존재이니 
신령하고 놀라운 하늘의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자로 
항상 겸손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한 번 죽고 끝내지 않게 하시고, 매일같이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네크로시스의 삶을 살아가기에 부족함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그리하여 우리는 잘 죽고,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역사를 
우리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게 하여 주시고, 
내가 죽어서 가정이 잘 되고, 내가 잘 죽어서 교회가 잘 되며,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생명이 나타나는 공동체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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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질그릇 속의 보배 관련 예화

지난주간에 매우 슬픈 일이 이었습니다.   *2004년
'슈퍼맨' 영화배우 크리스토퍼 리브(Christopher Reeve)가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52세 나이로 심장마비로 끝내 사망했습니다.

1952년 9월 25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퍼 리브는 
어릴 때부터 연기에 관심을 가졌고, 코넬대학과 줄리어드에서 연기를 공부하였습니다.

9년 전 1995년 낙마사고로 전신마비로 중증장애인이 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얼마나 건강했으며, 192 cm 의 큰 키에 
온몸의 근육이 잘 발달된 참으로 멋있는 남성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다 이러한 존재입니다.
강해 보이지만 한없이 약한 존재입니다.
튼튼해 보이지만 너무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성경은 질그릇과 같다고 합니다.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요?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하고 믿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물질, 권력, 우리의 건강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루아침에 안개와 같이 사라집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것은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뉴욕 센츄럴 파크에 풍선 파는 사람이 등장을 했어요. 
여러 색깔의 아름다운 색깔의 풍선에 헬륨 가스를 넣어서 아이들에게 팔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흑인 아이가 조금 떨어진 곳 나무에 숨어서 이걸 지켜보고 있었어요.
풍선 파는 아저씨가 그 아이가 눈에 들어왔는데 
'왜 그럴까?' 하면서 마음에 의문을 좀 품고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풍선 사가지고 이리저리 흩어져 가고 
아마 이 풍선 장사가 생각하기에 
'이 흑인 아이가 돈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얼마나 풍선 갖고 싶을까?'

그래서 아이들이 좀 이렇게 조용해진 틈에 
이 흑인 아이에게 눈을 돌려서 이렇게 불렀어요. 
풍선 선물로 주고 싶으니까 불렀습니다.

근데 이 풍선 장사 아저씨 생각과는 다르게, 이 아이가 동전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이 아이가 동전을 내밀면서 아저씨에게 질문 하나를 했어요. 
'아저씨 까만색 풍선도 있나요?' 

이 풍선 장사 아저씨가 바로 알아차렸어요.
이 흑인 아이가 슬픈 마음으로 자신의 피부색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이 아저씨가 알아차린 거죠. 

그래서 이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아저씨가 대답을 해줍니다.
'얘야 풍선이 빨갛고 노래서 예쁜 색 이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야 
풍선이 하늘을 나는 거 이건 풍선 안에 공기보다 더 가벼운 가스가 있기 때문이란다.
겉의 모습이 아니야 그 안에 가스 때문에...' 

이 이야기를 들은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어요. 
그래서 풍선을 사서 너무나 기뻐 달려갔어요. 집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아이가 훗날 미국의 아주 유명한 민권운동가로 쓰임받은 
침례교 제시 잭슨 목사님이에요. 
아마 여러분 한 번쯤 들어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제시 잭슨 목사님은 진짜 인권과 민권을 위해서 참 많은 일을 했죠.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무엇을 품고 사느냐? 
우리의 질그릇 같은 인생, 보배되신 예수의 생명으로 사느냐?' 
이게 중요한 거죠. 여러분, 겉으로 드러나는 삶에 묶여 살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주2)  △진리를 얻는 대가
앤소니 드 멜로, ‘종교 박람회’ 중에서   

「간판을 보고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진리를 팝니다. 각종 진리 일체!”

판매원 아가씨는 매우 예의발랐다.
“무슨 종류를 사시려고요? ‘부분 진리’를 원하세요, 
아니면 ‘전체 진리’를 찾으세요?”

“전체 진리, 그럼요. 전체 진리를 보여 주시오.
속임수는 필요 없소. 변명도, 합리화도 아닌,
쉽고도 명료한 전체 진리, 그게 내가 바라는 거요.”

아가씨는 가게 안의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그쪽이 ‘전체 진리’를 파는 곳이란다.

그곳 판매원은 걱정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가격표를 가리켰다.
“값이 몹시 비싼데요, 선생님.”

값이야 얼마든, '전체 진리'를 얻고야 말리라는 마음으로, 나는 물었다.
“그게 얼마요?”

“이걸 가져가시면, ‘여생의 모든 평안을 잃는 값’을 치르시게 됩니다.”
(일단은 평안을 잃죠. 물론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되지만요)

나는 슬픈 마음으로 가게에서 나왔다.
싼 값으로 ‘완전한 진리’를 얻을 수 있을 줄로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직도 나는 진리를 위하여 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있기는커녕
걸핏하면 평온과 안일을 갈구하고 있고,
아직도 나 자신을 두둔하고 합리화하여, 조금씩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있으며,
아직도 의문의 여지없이 ‘확고한 나의 믿음들’이라는 은신처를 찾고 있다.
(*대가 치름 없이 얻는 진리, 그러나 내가 ‘전체 진리’라고 확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