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39장 최후 심판을 맞는 네 종류의 사람들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 애가 ▣종말, 내세,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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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심판을 맞는 네 종류의 사람들 렘39장 2008년
◑서론
본문의 주제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난 40년 동안 계속해서 경고했던 ‘최후 심판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의 완전한 함락입니다.
본문 렘39:1절에 “유다 왕 시드기야의 구년 시월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주전 589년에 시드기야 왕이 느부갓네살을 배반함으로 바벨론이 쳐들어 와
1년 6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습니다.
2절에 “시드기야 제 십일년 사월 구일에 성이 함락되니라”
주전 587년 예루살렘성이 함락된 날은 대재앙의 날이었습니다.
성의 수비대가 싸워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또 애굽과 동맹을 맺고 뇌물을 주어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아무 쓸데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주지 아니하실까?
1백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던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쳐들어오자 히스기야왕이 기도하니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십팔만 오천 명을 하룻밤에 다 죽이신
그런 기적은 혹시나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해 봤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성이 함락된 이후의 공포는 이루 다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바벨론왕의 방백들과 군인들이 예루살렘성으로 몰려 들어왔습니다.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르보와 살스김이 예루살렘 성의 중문(Middle Gate)에 앉았습니다.
군인들의 살인과 방화로 곳곳에 통곡소리가 끊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비극은 예레미야애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애가 2:2~3절에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 같이 야곱을 사르셨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 애가4:10절에 보면 심지어 “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
자기 자녀를 삶아 식물을 삼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신28:57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다백성 가운데 자비로운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삶아먹었다는
아무도 상상치 못할 엄청난 고난과 슬픔이 임한 것입니다.
이제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끝나버렸습니다. 솔로몬의 아름다운 성전도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다윗왕가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도, 하나님의 언약도 끝나버렸습니다.
적어도 세상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이날은 유다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약 최대의 심판의 날은 앞으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닥칠
“최후 심판의 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최후 심판의 날에 대한 그림자요 예표(type)에 불과한 것입니다.
행17:31절에서 사도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최후 심판의 날을 작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마음대로 살아도, 하나님은 최후 심판의 날을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날 심판주는 하나님이 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마귀는
“심판주가 죽었구나”하고 좋아했겠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심판주이신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시되 자의로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남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지은 죄 때문에 심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달력에는 그 날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날이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국가와 모든 문화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거부한 불신자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자는 상급을 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심판을
대신 다 받아 주셨으므로 면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분리의 날(Day of Separation)”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영원히 분리됩니다.
지금은 섞여서 서로 인사하고 살지만
최후 심판의 날 이후에는 영원토록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가, 알곡과 가라지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눅6:43
그날에 불신자가 받는 형벌은 예루살렘 멸망의 고통보다도 억만 배 고통스러운 형벌이
될 것입니다. 그날 심판과 형벌에 참여하지 마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축복의 선고를 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 39장은 최후심판을 맞는 “네 종류의 사람”의 운명을 그리고 있는데
네 종류의 사람이 겪는 심판의 결과는 다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네 종류를 살펴보면서 최후심판에 대한 교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1. 말씀을 들어도 믿기로 결단하지 않는 (Undecided) 사람(4-7절)
운전해서 부인을 교회에 차로 데리고 오느라고 예배당에 앉아 10년 동안 설교를 들어도
예수 믿기로 결단하라면 항상 “내일 할께요”라며 결단을 미루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알기는 해도 결단하지 않는 사람으로 시드기야 왕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왕이 되어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예레미야로부터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려운 말을 쓰지 않는 설교자로, 그의 언어는 분명했고 직접적이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머리로는 하나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던 사람으로
성경을 칼로 잘라 불태워버린 여호야김 같은 류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죽지 않도록 배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했습니다.
우유부단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결단하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면 산다”고 해도
“국방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내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외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들은 죄다 항복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시드기야는 하나님 말씀에 따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말에 휘둘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바벨론에 항복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이 불태워져 멸망하게 되는 경지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후회해도 때는 늦었습니다. 그의 최후 운명은 도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에 도망다닌 도망자였습니다. 현실로부터 도망하고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도망하다가
예루살렘 성이 망하자 샛길로 빠져나가 도망했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그를 쫓아가 아라바(사해)로 내려가는 길 평원에서 그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서 북쪽으로 240Km 떨어진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시드기야왕은 자기 목전에서 아들들이 죽는 것을 봐야 됐습니다.
이때에 죽였다는 동사는 영어로 단순히 "kill"이 아니라 “slaughter”를 씁니다.
즉, 짐승 잡을 때 쓰는 도살이라는 말입니다.
시드기야의 아들들은 짐승을 잡아 도살하듯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의 두 눈은 뽑혀버렸습니다.
손톱하나 뽑힐 때도 말할 수 없이 아픈데 두 눈을 뽑히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시드기야 왕의 두 눈에서 피가 나고 두 눈이 썩었을 것입니다.
그가 눈으로 본 마지막 세계의 장면은 아들들이 짐승처럼 도살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인생은 슬픔과 어두움과 쇠사슬에 결박된 노예생활 뿐이었습니다.
▲그는 “왜 내가 그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했던가?
왜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의 권면을 듣지 아니했던가? 그러나 이제는 늦었도다.”하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시드기야 왕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으셨습니까?
내일 하실 것입니까? 내일은 영원한 내일입니다.
“왜 내가 그때 목사님이 예수 믿으라고 할 때 믿지 아니했던가?
그때 믿고 결단할 것을 그러나 이제는 늦었도다.”하고 후회할 것입니다.
시드기야의 운명보다도 억만 배 더 무서운 심판이 입을 벌리고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시드기야의 치명적 실수를 되풀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하심을 받아 의인이 되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미루지 마시고 오늘 믿고 결단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 말씀에 무관심한(uninterested, unconcerned) 사람들(8-10절)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사람들입니다.
9~10절에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바벨론으로 잡아 옮겼으며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렘52:29절에 “느부갓네살의 십 팔년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옮긴 자가 팔백 삼십 이인이요”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832명이 사슬에 묶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빈민이 아니었습니다. 빈민은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비웃던 귀족들입니다. 예레미야를 핍박했던 방백들이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악한 여론을 조성하여
시드기야 왕에게 압박을 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힘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지만, 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레미야가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라. 심판이 다가온다.”고 아무리 외쳐도 무관심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모든 말씀이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실현되는 것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으라면 시간이 없어 못 읽는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수 믿으라 하면,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라고 하면,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헌금을 드리라고 하면 돈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No time for God. No Money for God. No concern for God.”
하나님을 향해서 시간도 돈도 안쓰고 노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냥 놀러 다니는 것입니다. 피상적이고 공허한 사람들입니다.
영원과 죽음 이후의 세계와 자기가 저지른 죄와 사단과 심판과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얘기하면 당신은 목사님이므로 그런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유다사람들처럼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한마디도 빠짐없이 모두 현실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 구더기를 불에 소금 치듯 하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때 내가 왜 말씀에 무관심 했던가?
그때 내가 그 말씀과 경고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일 것을”하고 후회할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결정적인 실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 말씀을 흔들리지 않고 믿는 사람들 (unwavering believers)(11-14절)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심판의 날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레미야의 이름과 그 한 일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정보수집기관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예레미야라는 선지자가 왕에게 항복하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드기야가 말을 듣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정확하게 정보보고를 올린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심판의 날에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명령합니다.
11~12절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대로 행하라”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대제국의 황제가 예레미야를 지목해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고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고
시위대장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시위대장은 그를 감옥에서 건져냈습니다.
예레미야 40장을 보면 예레미야가 노예로 끌려가고 있던 때에 그를 불러들여
사반의 손자 그다랴의 집에 안전히 거하게 했습니다.
사반의 손자들도 예레미야처럼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순종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무관심하고 불순종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슬픔과 고통과 심판으로
울부짖을 때에 예레미야와 사반의 손자들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와 명예로운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40년 동안 인기 없는 메시지를 증거 하며 외롭고 어려운 길을 걸어갔으나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했습니다. 그 결과 약하고 멸시받고 조롱받던 예레미야는
안전한 보호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졸지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강한 자는 약해지고 부자는 거지가 되었으나
조롱받고 멸시받던 예레미야는 안전하고 높인바 되어 명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믿음 있는 사람들을 역전시키시는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높아졌다하지만,
그들은 다 고꾸라지고 믿음 있는 사람들이 올라갈 것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무시와 조롱을 받아도
하나님이 높여주시고 안전하게 하시며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날이
곧 올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세상에서 멸시 받아도 믿음의 확고한 결단을 내리고 증거를 보인 사람 (15-18절)
에벳멜렉이 그런 사람입니다. 에벳은 종이라는 말이고 멜렉은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왕의 종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냥 “야, 왕의 종”하고 불렀습니다. 이름도 아닙니다.
그는 흑인이요, 노예요, 환관이요, 왕의 종이었으나
렘38:7~13절에 보면 모든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 할 때에
방백들에 대항해서 목숨을 걸고 예레미야의 생명을 건져냈습니다.
예레미야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서 물도 없이 굶어 죽어 갈 때에
에벳멜렉은 자기 목숨을 걸고 예레미야를 건져냈습니다.
진흙 구덩이에서 밧줄로 끌어올릴 때에 겨드랑이가 상처날까봐
헝겊과 낡은 옷을 함께내려 보내 그것을 겨드랑이에 대고 밧줄을 묶으라고 한
사려 깊은(considerate) 위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 많이 벌고 출세했다 해도 참으로 비루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에벳멜렉은 비록 외국인이요, 종이지만, 그의 정신이 고귀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특별히 심판의 날에 주목해서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신경 쓴 것도 아닙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심판의 날에 에벳멜렉 한 사람을 주목하셨다는 말입니다.
39:17~18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되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에벳멜렉을 구원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에벳멜렉이 심판의 날에 죽지 않고 살아서 구원받으리라고
다섯 번씩이나 확인하고 강조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왜 이 보잘 것 없는 에벳멜렉에게 이런 특별한 구원의 메지지를 주셨을까요?
그가 친절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예레미야에게 헝겊을 내려주고
그를 구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18절 후반에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네가 나를 믿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완전히 동일한 원리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기에 로마가톨릭이 구원론을 가지고 온갖 거짓교리를 가르치던 때에
마르틴 루터라고 하는 위대한 종교개혁가는
사람이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하나님 입장으로 보면 이신칭의, 우리 입장으로 보면 이신득의의 복음을 발견해 낸 것입니다.
에벳멜렉도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예레미야처럼 위대한 선지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요
사반의 가정 같은 위대한 가정도 아닌 평범한 가정입니다.
그러나 믿음 하나만큼은 확고하게 가진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 값을 갚으시느라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나를의롭다 하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복음을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심판 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망신과 고통과 멸망으로 갈 때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행정착오로 지옥에 던져지는 법은
아주 없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옥가기 다 틀렸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결론
평범한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의롭게 하기 위해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심판 날에 우리를 건져, 영원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무시할 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피 값을 주고 살 만큼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존재요
하나님의 보물(jewel)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셨습니다.
아무도 아버지의 사랑의 손에서 이 축복을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그네로 외국에 잠깐 나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국이 요동하고 배가 조금 고프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들을
예비해 주셨으므로 기죽지 마십시오.
시드기야처럼 결단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무관심한 대중들처럼 되지 마십시오.
말씀에 헌신하고 에벳멜렉처럼 믿음으로 그날 큰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절별 해석
39:1 유다의 시드기야 왕의 제 구년 열째 달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시드기야의 구년 열째 달에'
이곳의 연대적 서술은 52:4과 연결지어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이달 10일째라고 날짜를 덧붙이고 있다.
본절과 2절은 52:4-6의 내용을 축약시킨 것이다.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애 의해 함락된 것은 B.C. 586년 7월이었다(52:5 이하 참조).
성이 함락되고 한 달 후 느부갓네의 경호 사령관인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예루살렘 포위 공격은 B.C. 588년 1월에 시작되어 B.C. 586년 7월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사이에, 즉 B.C. 588년 여름에 일시적으로 포위 공격이 풀렸었다.
물론 그것은 애굽 원정군의 등장으로 인한 것이었다.
39:2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이 함락되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매
39:3 바벨론의 왕의 모든 고관이 나타나 중문에 앉으니 곧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네부와 내시장 살스김이니 네르갈사레셀은 궁중 장관이며 바벨론의 왕의 나머지 고관들도 있더라
'바벨론 왕의 모든 고관이 중문에 앉으니'
본문은 시드기야가 바벨론 방백들이 중문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보고
달아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마 왕은 어떤 방어 조치가 취해질 것을 기다리지 않고
성이 파괴되는 그날 밤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여기서 '중문'은 구약에서 오직 이곳에만 언급된다.
어쩌면 이것은 성을 두 구역으로 갈라놓던 벽의 출입구(중간문)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두 개의 언덕, 곧 남쪽의 시온과 북쪽의 아크라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있었다. 중문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쉽게 짐작되다시피,
이것은 아마 예루살렘의 두 언덕 사이의 계곡 한가운데에 있던 통로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언덕은 때로는 상 예루살렘, 하 예루살렘으로도 불리었다.
갈대아 군대는 북쪽 편에서 성을 파괴하고 진입해 들어왔을 것이고 진군하여
이 중문을 장악함으로써 성 전체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시드기야는 이 사실을 알고 그 반대편에 있는 남쪽의 문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네르갈사레셀...박사장 네르갈사레셀'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은 바벨론 군대의
주요 지휘관들이었다. 과거 한글개역 성경에는 환관장과 박사장이라는 두 직명이 소개되는데,
이들도 역시 인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가 하면 블레이니(Blayney)박사는 이를 세 사람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명한다.
즉, 직행명과 그 뒤에 이름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는 '네르갈사레셀'이 두 번 언급된다. 바벨론군 총사령관은 느부사라단이었는데,
아마 첫 번째 네르갈사레셀은 느부사라단이었는데,
아마 첫 번째 네르갈사레셀은 느부사라단에 대한 오기에 의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동명이인의 다른 군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39:4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 길을 따라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와...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어쩌면 성문을 통하지 않고도 성밖으로 빠져나가는 비밀통로나 지하통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들키지도 않고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성에서 상당히 멀리까지 달아날 수있었다.
'아라바로 갔더니' '아라바'란 요단 계곡을 망라하는 지역을 가르키는데,
사해 남쪽에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리고 지역인 요르단 계곡을 가리킨다.
클라크는 이를 광야길로 번역한다. 아무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감람산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산을 넘는 것은 시간을 지체할 것이기 때문에 시드기야는 다른 길인 광야길,
다시 말해서 아라바를 택했던 것이다.
아마도 시드기야는 요단을 건너 애굽으로 도망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39:5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하맛 땅 립나에 있는...느부갓네살에게로'
'립나'는 팔레스틴 지역 북쪽 변방에 위치해 있었으며
'하맛' 역시 수리아에 속해 있던 대도시였다(창 10:18 참조).
이 도시는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직통으로 연결시켜주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느부갓네살은 수리아의 심장부인 립나의 사령부에 머물러 있고
그의 군장은 유다에서 전쟁을 수행했었다.
포로들은 느부갓네살에게 심판을 받기 위해 압송되었다.
39:6 바벨론의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39:7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39:8 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니콜슨은 왕궁과 백성의 집 사이에 ‘여호와의 집’이란 말을
덧 붙이고 있다. 물론 본절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52:13에는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여호와의 집이 파괴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날 남아있는 예루살렘 성벽 남쪽 지역의 동쪽 비탈을 발굴한 결과
그 당시 백성의 개인적인 집들에까지 파멸이 미쳤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서 '헐었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추'는 성을 헌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예레미야의 소명받는 장면에서도 나타났다(1:10).
39:9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잡아 바벨론으로 옮겼으며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본문은 예루살렘내의 백성을, 또 본절 말미의 '남은 백성'이란
유다 지경내의 백성들을 포함하는 말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39:10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그들에게 주었더라'
여호야긴 당시의 예루살렘 함락때와 같이(왕하 24:10-14),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사로 잡아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는데,
특히 유력한 인사들이나 재능있는 장인들을 잡아갔다.
반면에 빈민들은 유다의 땅을 할당받아 포도원이나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는 바벨론의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39:1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39:12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바벨론 왕이 예레미야에 대해서 특별한 배려를 하고 있는 내용이 언급된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정부에 어떻게 해서 알려지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예루살렘 멸망 전에 바벨론에 투항한 유대인들에 의해서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즉 느부갓네살은 그들로부터 이 선지자가 예루살렘 함락을 예언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또한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바벨론에 반역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유하곤 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이 있었을 것이다. 에벳멜렉처럼.
39:13 이에 사령관 느부사라단과 내시장 느부사스반과 궁중 장관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39:14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서 데리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가운데에 사니라
느부사라단과 환관장 느부사스반, 박사장 네르갈사레셀 등을 포함한 바벨론 왕의 주요 관리들
이 시위대 뜰에서 예레미야를 데려다가 그를 그다랴에게 넘겨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사람은 '그달리야'라고도 불리우며 유다에 남은 자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왕하 15:22-24).
한편 기자는 여기서 예레미야를 '집으로 데려 가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다소 불명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의 집이라고 표현되지 않고
그냥 '그 집' 즉 정관사가 사용된 '집'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집'이라고 표현되는 것은 흔히 성전을 뜻할 때 쓰였으며,
때로는 왕궁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집은 예레미야의 집이나 또는 그다랴의 집인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이는 바벨론 군대가 사령부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정부 청사,
곧 그다랴 행정부 건물이나 또는 총독 관저 정도되는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와 관련된 기사가 40:1-6에도 나오는데 그 내용이 다소 다르다.
40장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8km 가량 떨어진
라마의 포로 행렬 중에서 예레미야를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느부사라단은 그를 포로의 사슬에서 풀어주고 솔직하게 담화하고 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본장의 11-14절의 내용은 사건의 세부 사항을 생략한 채
그 결과만을 간단히 기록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아마 그는 1차 심문을 당한 후에 석방되었다가 그 후 다시 병사들에게 붙잡혀서
사슬에 묶이게 되었을 것이며, 그런 다음 바벨론으로 압송되기 위해 라마의 수용소로
보내졌을 것으로 추론된다.
39:15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39:16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 앞에 이루리라
앞으로 다가올 예루살렘 파멸에도 불구하고 에벳멜렉이 살아남게 되리라고 하는 약속이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38:13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아마 이 내용이 이곳에 기록된 이유는 예레미야 자신과 함께 예레미야를 구출한 에벳멜렉
역시 예루살렘 함락에서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 같다.
39: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에벳멜렉이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아마 38:1에 언급된
유다 고위층 인사들을 말하는 것 같다. 예레미야를 구출했던 자는 바로 이 에벳멜렉이었고
또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큰 죄를 저질렀다고 왕에게 고발하였던 자가
바로 이 용기 있는 에벳멜렉이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유다 방백들의 위협에 늘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39:18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공감을 표했던 사람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믿었던 다른 관리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결국 에벳멜렉의 목숨을 건 대담한 행위는 왕이나 방백들 보다 여호와를 더욱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그는 선지자의 편에 서서 중재하였고
그로 인해 여호와의 보호하심이 함께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