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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9장 찾으면 만나리라

LNCK 2025. 4. 15. 18:0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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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으면 만나리라             렘29:11~14      2004.04.25.

톨스토이의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톨스토이는 말합니다.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일이 하나있다. 우리는 항상 완벽을 추구한다. 
그리고 평안만을 원한다. 형통만을 바란다. 그러나 실패하지 않는 인생은 없다.”

여러분, 실패하지 않는 인생은 없다. 실패할 때마다 조용히 힘차게 일어나면서 
무엇인가를 우리는 깨달아가고 어떤 사람으로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해결책은 있습니다. 찾는 자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림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빛(해결책)이 있다." 
그림자 혼자 있지도 않고 빛만 있지도 않습니다. 
그림자가 있는 곳에는 빛이있다 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렘29장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여기 나옵니다. 
유대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엄연히 범죄입니다. 
엄연히 하나님 앞에 잘못해서,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유대백성을 바벨론으로 포로 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다 진멸됐고, 그 거룩한 성은 무너지고, 
쓸만한 사람들 수만 명은 바벨론으로 옮겨갑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습니다. 

자 그 포로 되어 가서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낙담하고, 절망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려나? 언제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스라엘에 향하신 은혜는 여기서 끝나는가? 이 민족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이때에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해준 메시지입니다. 
놀랍습니다. 초조해하지도 말고, 불안해하지도 마라. 
'거기서 (바벨론에서) 결혼하고 살아라. 여기서 생업에 종사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아주 터잡고 살아라.' 

(※본문 렘29장은,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보낸 편지입니다.
아직 남유다가 완전히 패망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1차, 2차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런 배경에서,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렘29:4절, 6~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집을 짓고, 정원을 만들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기르라”
 
남유다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에 있는데, 이게 어떤 메시지입니까? 
빨리 포로에서 풀려나서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냥 거기서 잘 적응해서 말뚝 박고 살아라는 절망의 메시지입니다.

그것만이 아네요. 더 놀라운 것은 7절에 보면 
“그 성읍이 평안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그랬어요. 

바벨론에게 포로 되어 잡혀간 백성들이 
가서 모진 고생을 하고 있는데 
“너희는 바벨론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리고 평안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날을 기다리라. 
초조해 하지마라. 그리고 현실에 충실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는 그런 예언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싫은 예언을 한 거죠)

▲A. W. 는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현대인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집착에 매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생각을 버리고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여러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자기 생각, 자기 감정에 매인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예레미야가 보낸 편지)입니다.   29:1

바벨론 포로 되어 간 이 사람들에게 “여기에 당분간 머물 생각을 하라. 
그리고 이 성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렇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오늘 본문에서 해답을 줍니다. 
'이 사건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요.'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간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요. :11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존재입니까?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험을 연단으로, 시련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제 

지금 현재 내게 주어진 불행이.. 결코 저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이건 저주가 아니요, 
이건 재앙이 아니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11
그걸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오늘 현실에 불만하십니까? 그러나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버리신 것도 아닙니다. 
잠시잠깐 내 생각에 집착한 나머지, 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눈을 떠야합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1:2~4 “내 형제들아,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즉 '이 시험을 당한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우리가 어려운 사건에 부딪칠 때, 조용하게 우리 인간의 생각, 자기 집착에서 떠나서, 
그 높은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당한 난처한 일은) 내게 큰 사건이요, 모순적인 사건이요, 부조리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깊은 곳에 평안이 있습니다. 

결국은 평안으로 지향하는 오늘의 시련이요, 사건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성도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제 우리 앞에 있는 정치, 경제, 문화, 복잡한 문제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이제 cool down 하세요. 냉정함을 되찾으세요.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1

이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런 긍정적인 면에서 생각해봅시다. 
좀더 적극적으로 현실을 보십시다. 
놀라운 역사가 조용하게 벌써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능히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말합니다. “장래에 소망을 주려함이니라”  :11 과거 개역
'소망을 주려함이니라' 
여러분 현실보다 무서운 것은 소망입니다. 
현실보다 강한 것은 소망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그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 에서 물을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소원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을 평가해야 합니다. 

내 소원이 무엇이냐? 그런데 놀라운 것은,
형통할 때는 소망이 세속적입니다. 
잘 살고 평안하고 행복하면, 소원자체도 아주 추잡합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세요.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게 되면... 소원이 정리가 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사랑이란 게 무엇이냐?' 이제 보다 궁극적인 질문을 스스로 묻게 됩니다.

▲저는 아주 어려운 형편에 있는 가정을 한번 상담했는데, 뭐 복잡한 얘기하더라니 
제가 한마디 물어봤어요. “왜 결혼했소?” 
“제가 그걸 모르겠어요.” 
“이제부터 알아보세요.” 제가 그랬어요. 

왜 결혼했느냐고요? 도대체 결혼의 목적이 뭐였냐고요? 
이것도 생각 없이 출발한거예요. 

이제 한번 흔들어놓으니까, 이제부터 생각을 해요. 
'나는 왜 결혼을 했던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나?' 
인생에 찾아온 고난이 ... 소원을 바로 정리해주십니다.
 
그래서 고통의 날에는, 우리 소망이 순수해 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종말론적 소원으로 소원이 정화가 됩니다.

병 걸리고 나면, 사람은 생각이 달라집니다. 
아주 임종이 가까워오면, 더 달라집니다. 

그러면 사람마다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임종이 가까워오면. 
코 앞에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이제 생각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베풀고 살걸 너무 인색했다... 그 많은 욕심이 별 필요가 없었는데...” 

또 하나는 '좀더 참을걸...' 참지 못한 것들이 이제 막 후회로 몰려옵니다. 

또 한 가지는 '좀 더 즐겁게 살 걸...' 

마지막 평가는 '나는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진정한 소망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 모든 사건 속에서 진정한 소망, 내 스스로 지향하는 참 소망, 
영원한 소망으로... (과거의 세속적 소망에서) 소망의 의미를 바꾸게 됩니다. 

단순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하게 됩니다. 
simple mind로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절망이 아니라, 보다 나은 소망으로 나를 인도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욥은 얼마나 어려운 고난을 겪었습니까? 
그러나 욥이 그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올 것이다” 욥23:10
나를 단련하신 후에... 
이 모든 사건은 내 영혼을 단련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 단련 후에 정금 pure gold 같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혼다 켄 이라는 사람이 쓴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매력적입니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 어떻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닙니까? 

부자에게 점심을 얻어먹으면 몰라도,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니… 뭘 말하는 것입니까? 
부자를 미워하지 말란 말이에요. 
부자를 미워하고 비판하면, 그 사람은 앞으로 부자가 못 돼요. 

자기 마음을 열고, 부자에게 점심을 사고,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자세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때 이제 내가 부자 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진 토대위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고, 
(부자 같은)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일을, 나도 기뻐하게 되고, 비판이 아니라 칭찬해 주고, 
거기에서 삶의 변화가 온다고... 그렇게 책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 바벨론 포로... 이는 큰 사건입니다. 
이 괴로운 현실, 이 모순 된 현실 속에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요 메시지입니다. 
'오늘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마라. 
이것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란 걸 잊지 마라'  :11

오늘 여러분의 현실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이건 저주가 아니요, 이것은 소망을 주려 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 속에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가에 왔을 때, 홍해가 가로막혔다고 해서 아우성을 칩니다. 
그때에 주어진 유명한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46:10

'Cool down, calm down 제발 들끓지 말고 쉽게 절망하지 마라. 
조용하여 내가 하는 행동을 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모든 생각을 잠깐 멈추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현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조용히 들어야겠습니다.

이것은 재앙이 아니요 평안이요 이것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라고… 
우리가 날마다 겪는 크고 작은 많은 사건을 통해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는 주님의 약속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어떤 때는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절망도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되어 가는 그 사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엄청난 사건 속에서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이것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라고…' 

주여! 그 메시지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고 
이 현실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며 
주께 가까이 가며 우리의 소망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이 이루시는 그 위대한 역사를 바라보며 기뻐하며 
이 모든 시련을 이기고 나갈 수 있게 믿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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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대가를 치른 후에 깨달은 제 신앙의 노하우

언젠가 젊은 시절, 제 하늘만 온통 잿빛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마치 깎아지르는 낭떠러지 사이로 난 좁은 외길을 걷는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하던 시절이었지요.

저는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상황을 반전시켜보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여건은 더욱 어려워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제게 남은 것이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런 나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데서 오는 두려움,
"나 자신을 나도 잘 모르겠음"에서 오는 두려움,

시시각각으로 죄어오는 듯한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
너무나 무거울 것만 같은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
모든 것이 다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러다 내가 제 명대로 못살지"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기진맥진해져 자포자기한 상태에 도달해서야,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까지 내려가서야
하나님께서는 제게 한 가지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 깨달음은.. 대가를 톡톡히 치른 후에 얻게 된 깨달음이었기에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깨달음이었지요.

그것은 다름 아닌 "모든 것은 지나간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다"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사랑도 지나가고 미움도 지나간다. 행복도 잠시 지나가고 불행도 잠시뿐이다.
영원할 것만 같은 우리의 인생도 한 순간이기에
견딜 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도 잠시면 지나간다.
만사가 지나가지만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다"는 진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서
천천히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 존재란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다를 바 없이
어느 순간 이 세상에 왔다가 어느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돌아보니 세상 모든 것이 지나가는데,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다들 자취를 감추는데 나만 영원히 살겠다는 이기심이 두려움의 근원이었습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약해져서는 안 되고, 병들어서는 더욱 안 되며,
그로 인해 죽어서는 죽어도 안 된다. 자존심 상하는 일은 내 사전에 있을 수 없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결국 두려움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약해지는 모습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일출의 장엄함이 아침 내내 계속되지 않으며 일몰의 아름다움이 한밤중까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요소 중에 가장 두드러진 요소 가운데 하나가
자기 존재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 자신의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변화인데,
결국 우리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화를 초래하지요.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그 결과 심신이 약해지고 삶은 고통 그 자체가 됩니다.

이런 우리 인간들의 근본적인 취약점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두려워하지 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오늘 하루 하루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최선을 다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면 더욱 좋겠습니다.

나 역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세월에 묻혀 바람에 날려 흩어져갈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마음 편히 먹고 겸손하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매일의 성서 말씀을 충실히 묵상하면서 말씀 안에서 살고자 노력할 때,
말씀에서 나오는 생명의 에너지는
우리가 담대하게 두려움에 맞설 수 있도록, 충분한 힘을 주실 것입니다.

▲고뇌의 시간에, 구원의 주님을 만납니다.
내가 풍랑 속을 지날 때, 예수님(방주)에 올라타야 되는데..
종종 그 때는, 고난과 고뇌와 환난의 시간에.. 그런 은혜가 임합니다.
 
복음이.. 정말 나에게, 구원의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아닌 누구에게는 구원이 발생하는 복음이지만
나에게는 전혀 구원이 발생하지 않고 지나쳐가는 소리일 뿐이지요.

저에게도 20대 중반까지는 복음이 전혀 구원의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술 지상주의적이었던 제 20대 초반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책이 저를 사로잡았고,

도스토예프스키, 괴테, D. H 로렌스 같은 소설가들이
그때그때 새로운 물줄기를 싱싱하게 저에게 대 주었습니다.

사상, 종교 면에서도
저는 (성경보다) 세속의 철학자들의 책을 더 많이 읽었고
노자 류의 책을 더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복음이 정녕 ‘구원의 복음’이 되게 된 것은
고뇌의 젊은 시절 그 중에서도, 절망의 3년을 거치면서입니다.

제가 추구하던 것들이 제 욕심만큼 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완전한 인간을 꿈꾸던 제가 군대 생활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고 나에게는 어림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군 생활 3년을 절망 상태에서 보내고 제대를 하였습니다.

제대하고도 한 동안 그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그때 복음은 저에게 구원의 복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불이 꺼졌을 때, 하늘의 별이 빛을 내듯
세상에 대한 희망도
나에 대한 희망도 모두 사라졌을 때..
그 어두운 심연에서 하나님의 빛이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때가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시작되는 때요
나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때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시작되는 때인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때가 있습니다.
밤새도록 풍랑과 싸워 기진맥진해 있을 새벽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그 새벽녘,
예수님은 꼭 이때 나타나십니다.

왜 더 일찍 나타나시지 않고, 이렇게 새벽녘에야 나타나시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을 때,
있는 힘을 다 쏟아 기진맥진, 더 이상 아무 힘도 없을 때,
이때가 갈망의 때요, 영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시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의 하나님의 개입을 체험하고도 3년여가 흘렀지만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그래서 “내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소서.”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을 때
복음을 듣게 됩니다.

이 복음은 이때 처음이 아니라 전에도 많이 듣던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 복음이 구원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거룩한 프란치스코는
즉시 하나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혹시 겪고 있을지도 모를
그 절망의, 캄캄한 암흑의 시간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광명의 주님을 만날 시간, 야곱의 얍복강의 체험이 곧 다가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