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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2장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LNCK 2025. 4. 1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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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U_h3EsI_Dw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고전2:1~9       2025.04.06. 

◑도입

고린도 교회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들과 관련해서 4개 파당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파당, 분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가? 
이것을 교훈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1:18~4장 끝절까지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교훈을 준 것은, "하나님의 미련한 지혜인 십자가의 도(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1:18~25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미련한 공동체인 교회에 대해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1:26~31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아무도 스스로 자랑하지 말고, 자랑하는 자는 주님을 자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오늘 다루는 2:1~5절까지는, 이 내용의 적용과 관계되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기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섬겼던 18개월을 돌아보면서  
그의 사역에 가장 중심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그들에게 기억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분쟁을 극복하고 하나됨을 잘 지켜가려면 
바울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이 세 가지의 교훈을  마음에 잘 새기셔야 됩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하나님의 증거'란 쉽게 말하면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나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했다'
'아름다운' 것은, 쉽게 표현하면 탁월함입니다. excellency, superiority

 

당시는 헬라 철학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가르침'들이 넘쳐났죠.

바울은 그런 유행과 시대 흐름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은 아니거든요.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기에 바울의 유명한 결심이 나옵니다. 
그가 결심했던 내용은 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내가 전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 
말과 지혜, 탁월함으로 하지 않았겠습니까? 대신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알기로 그는 결심을 했다는 거죠. 

결국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도(말씀)에 집중을 했다는 거죠.

*십자가의 도(로고스)란, 1:18, 십자가의 말씀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구약부터 시작이 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에는 누가 계시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그 절정, 크라이막스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사역에 있어서, 그 크라이막스는 무엇이냐? 
그분의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구원사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 
성경의 모든 계시의 크라이막스인 예수 그리스도,  
거기에만 집중하기로 그는 결심을 했다... 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제가 읽었던  주석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 결심이 나타내는게 무엇이냐? 
바울은  성도들이 누구에게 집중하기를 원했느냐?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설교자)에게 집중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설교자)이, 전하고 있는 그리스도, 
그 분에게 집중하기를 그가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 상황에서 보면, 정확한 분석입니다.

▲근데 아마 여러분들은, 그렇게 큰 차이를 못 느끼실 것 같아요. 
근데 아마 저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제가 설교말씀을 지금 전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전한 후에, 어떤 결과나 반응이 생길까?' 제가 기다리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가장 손쉬운 거는 성도들의 입에서 '목사님, 오늘 설교를 잘 하시네요. 
정말  목사님은 말과 지혜가 탁월하셔요' 이런 인정을 받고 싶은게 
저희 같은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 가지는 마음일 것입니다.

근데 바울은 그것을 내려놓고, 그가 기대한 것은 무엇이냐?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누구한테 집중하기를 원했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자가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집중하기를 바울은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이 이런 결심을 하고 고린도에 머물렀을 때, 그의 상황이 어떠했나요?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이 고린도에 거하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하기로 그가 결심을 했을 때, 그의 상태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는 것이죠.  

바울 당시 헬라 시대에는, 탁월한 연설가, 웅변가들이 있었습니다. 
탁월한 연설가들이 갖추어야 될 자세는 어떤 거였겠습니까? 
다른 것은 모르지만, 자신 만만하고 당당하고 여유가 있는 것...  
이게 탁월한 연설가가 보여주어야 될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저도  말씀을 전할 때 항상 저 자신한테 자주 이야기하는게 
'Come down! 야, 침착해!' 항상 저 자신한테도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볼 때, 설교자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고 여유 있는... 이런 모습들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의 모습을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던 이유는, 
1) 자기 설교가 사람의 지혜와 탁월한 지식으로 전달되어질까봐... 떨었던 거죠.

2) 그리고 당시 고린도의 상황도, 세속 이방 도시 가운데서 바울은 약하고 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 대해서 아주 우호적인 분들은, 
이것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 세 가지 단어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떪)를 해석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 가운데 있을 때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
하나님 앞에 그가 가졌던 자세를 묘사한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가 볼 때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행18:9~10절에 보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처음 전하고,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을 때, 그때 많은 반대, 핍박, 저항들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때  하나님께서 밤에 환상 가운데 찾아오셔서 바울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18:9~10

주님은 바울 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두려워하지 마라' 
첫 번째가, '두려워하지 마라  침묵하지 말고 말해라' 
이런 말씀을 보면, 당시 바울의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그가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겠죠.

바울로 하여금 입을 열어서 십자가의 말씀을 증거하기 힘들게 하는 
그의 입을 입을 침묵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그런 압박과 압력들이 정말 많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까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고린도에 그런 위협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바울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격려의 말씀을 주신 거죠.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1차적으로 핍박과 배척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이 주장하기를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약하고, 두려워하고, 떨었다'
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서, 고린도라는 도시를 보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아테네 보다도 더 부요하고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아가야 지방에 대표적인 두 도시가 아테네와 고린도였는데, 고린도가 그 대표 도시였죠.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그들은 무엇을 제일 귀한 것으로 여겼는가? 
지혜를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성공 스토리를 같은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성공에 대한 이야기,  
정말 그들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성공에 대한) 지혜에 대해서 자랑을 했던 도시가  
화려한 고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한다.,, 라고 할 때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야, 누가 지금 내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나타내는 그 반응 때문에도 
그가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이런 두려운 상황에서 바울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 4절을 보시죠.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여기서 '내 말'은, 가르침 message 입니다.
'내 전도함'은 케리그마, 즉 선포입니다. preaching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했다' 
이미 앞에서 1절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나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 했습니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 안에서 이루어졌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되는데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은 무엇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을 창조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죠. 

여기에 '나타나심'은 대부분 영어로 demonstration 입니다. 
헬라어로 아포데이시스 인데, '입증하다' 입니다. '진리임을 증명하다'

지금 바울이 말합니다. 바울이 전하고 있는 이 십자가의 말씀이 
진리를 증명하는 것은, 설득력 있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바울이 전하고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4절 말씀을 통해, 그가 십자가의 말씀(도)을, 
말의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의 말씀을 전할 때 
그가 기대하고 의지했던 것은 무엇이냐면 

성령께서 능력으로 나타나셔서 듣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이 선포되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깨달음과 확신을 주시도록 ... 이것을 의지하면서 그가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전하면서 그는 무엇을 의지했는가요? 
탁월한 웅변과 수사학적인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통해서, 
성도들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확신할 수 있기를... 그는 기대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그 '바울이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 이 말씀을, 제가 목회자로서 
오늘도 설교를 하고 있는데, 항상 제가 가졌던 그런 기본 태도요, 자세였습니다. 

제가 요즘 살이  빠지고 나서 생긴 긍정적인 것은 뭔가 하면, 고함을 못 지릅니다. 
이게 고함을 질르려면 뱃살이  뒷받침이 되어야 고함을 지를 수 있는데, 
요즘 뱃살이 많이 빠져가지고, 고함을 잘 못 지르겠어요. 

근데 과거에 제가 설교할 때는 진짜 고함을 많이 질렀거든요. 
아주 옛날에는 설교자들이 정말 고함을 많이 질렀습니다. 그게 어떤 설교 문화였죠.

제가 25살 때,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 처음 설교할 때는 
제 설교가 100M 밖에서도 들렸습니다. 얼마나 고함을 크게 질렀던지요.

그래서 집사람이 '당신 설교는 시끄럽고, 길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진짜 호러블하고 테러블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말을 듣었던 게 마땅했어요.

그래서 그때 가끔 저한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고성을 지르십니까?' 
그러면 저한테 대해서 우호적인 소수의 사람들은 
'목사님이 성령이 주시는 뜨거움 때문에 감당이 안 돼서 그러시나봐...' 

근데 제가 왜 그렇게 고함을 질렀겠습니까? 딱 한 가지 이유입니다. 
제가 너무 무서웠거든요. 설교하는게 너무 무서웠어요. 

지금 청중들이 설교하는 저를 쳐다보고 있는데,
많은 분들을 향해 제가 지금 설교를 한다는게, 너무 긴장했기 때문에 
이거를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뭐냐?
설교에 몰입하는 거죠. 무슨 여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고함을 질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바울이 표현했던 '약하고, 두려워하고, 정말 심히 떨었다'
저도 정말 처음에 설교할 때는, 그런 마음을 가졌어요.  

또 한 가지는, 성도님들 중에 가끔은 저보고 
'목사님이 혹시 책을 쓸 생각이 없습니까?'
 
그러면 '저는 뭐 그런 생각도 없고, 또 저는 책을 쓸 여유가 별로 없어요'라고 답합니다. 
왜냐하면 책이란, 성경을 설명하는 거니까, 성경말씀이 소중한 거지...
하는 생각으로, 이래 저래 책을 저는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신대원에서 신학을 전공했을 때, 꿈꾸었던 설교자의 모습이 있었거든요. 
그것은 한마디로 '있어 보이는 목사가 되는' 거였어요. 

뭔가 지혜도 있고, 지식도 있어보이는... 
그래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준비해서 설교를 하고나면 
'우리 목사님은 역시 뭔가  배운 사람이구나,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해서, 
들을 것이 있는 목사구나' 이런 식의 평가를, 저도 받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흉내를 내려고, 저도 나름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와 관련해서, 저한테 가장 충격적인 그런 변화는,
제가 난지도에서 사역할 때 였습니다.

난지도에서 한글을 잘 모르시는 어르신들 앞에서  
매주일 저녁마다 25명에서 30명 정도가 예배에 참석하셨고, 
제가 주일 저녁 예배 3년 동안 꼬박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낮예배는 담임목사님

제가 그분들 앞에서 설교할 때, 조금  뭔가 배운 티를 내는 거죠. 
발음도 잘 되지 않는 그런 저자들의 이름을 대면서, 
외국 서적의 내용들을 좀 소개하고 그렇게 하면 
정말 이분들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십니다. 바로 주무셔요. 

뭐 이상하게 혀도 잘 돌아가지도 않는, 이상한 외국 저자들의 이름을 대면, 
이분들이 곧바로 주무셔요. 그렇게 하다가 제가 다시 성경을 설명하면 
이분들이 또 다시 벌떡 일어나세요. 벌떡 일어나서 그 말씀을 정말 귀담아 들으셨어요.  

저는 내수동교회 대학부 전도사를 했는데, 소위 말해서 교계 쪽에서는 똑똑한 청년들이 
모여 있던 거기에서 제가 설교를 했으니까 
'야 이런 말씀은 이 똑똑한 애들도 깨닫고 이야기는 어렵다' 라는 그런 내용들을,

난지도에 계시는, 정말 한글도 잘 못 읽으시는 어르신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느낌이 이분들은 그걸 너무 잘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이분들은 그걸 깨달으시는 거 같아요. 그 말씀을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거 같았어요. 
(그러니 신학서적 내용은 잘 못 깨달아도, 성경말씀은 어려워도 잘 깨달으셨다는 거죠)

제가 그때 난지도에서, 설교와 관련해서  
하나님이 제게 주신 가장 귀한 깨달음 중에 하나는 뭔가 하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그들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본능적인 갈급함을 가지고 있다' 

저는 그곳에서 생생하게 이것을 느꼈어요. 
'야, 예수님 믿고 거듭나서, 그 속에 성령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본능적인 갈급함을 갖고 계신다... (교육 수준에 관계 없이)'

그래서 제가 설교 때 말씀을 설명해 드리면, 꼭 느낌이 
마치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는 것처럼 
이분들이 그 말씀을 정말 받아먹고 기뻐하는 것을, 저는 그분들과 같이 있으면서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결심을 한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이 시대에 가난한... 약자 편에서 있는 사람들,  
그분들도 내가 성도로 섬길 텐데, 
내가 목회자로서 그분들을 돕고 대접할 수 있는 길 중의 하나는 

내가 말씀을 전할 때, 다른 도구(책)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말씀을 깊이 내가 묵상하고 익혀서 
이분들에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분들에게 전해 드리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그때부터 결심하고 선택을 했습니다. 
도 뭐 여러 가지 책들을 보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가슴 가슴, 영혼 영혼에 깊이 새겨질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내가 목회자로서 해야 될 일이다...'  

저는  그렇게 선택을 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근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제일 큰 문제가 결국 무엇이냐? 

뭔가 한 번씩 있는 티를 내야 되는.. 배운 티를 내야 될 것 같은 상황이 오면.. 정말 힘듭니다. 
그러니까 회중들한테, 뭔가 있는 티를 내야 되는 그런 설교를 해야 되는데,
그런 설교는 제가 해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약하고 두려워하고 떨릴 수밖에 없는 거죠. 

저는 주님 말씀을 증거하면서 한 번씩은 
속으로 제 스스로에게 이야기합니다.

'야, 내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200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 말씀을 도대체 누가 믿을 수 있나?' 

그러면 제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을 한 가지 밖에 없는 거죠. 
성도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시킬 수 있는 것은 
'내 말의 탁월함이 아니라,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 되는구나...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만이, 사람들의 마음에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거구나' 

제가 지금까지도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는 분명하게 느낍니다.  
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저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깨닫게 하시는 일은 누가 하실 수 있느냐? 성령님만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위해서, 듣는 회중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 오늘도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님께서 올바로 깨닫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  마음에 확신을 주셔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바울이 이렇게 결단했을 때 그의 목적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을 의지한 이유가 무엇이냐? 5절입니다.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우리 성경에 번역이 잘 되어 있지만, 저한테는 뭐가 선명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바울의 꿈꾸었던게 뭔가, 기대했던게 무엇인가?' 

'이는 너희 믿음이... 있게 하려 한다' 라는 게, 제게는 모호한 표현이었어요.

그래서 킹제임스 버전에 보니까, 전부 다 stand 로 되어있어요.

'서 있게 하려 하였노라'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서 있게 하려 하였노라'

무슨 말인가 하면,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을, 하나의 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한번 보시죠. 이 나무가 어디에 지금 서 있는가?  
성도들의 믿음이라는 나무가, 사람들의 지혜 안에서 있지 않고,
어디에서 있어야 된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능력 안에 서 있어야 된다!' 

그래서 대부분 영어 번역은 'rest on 거하다'로 번역하고 있어요.  
너희 믿음, 그 믿음의 뿌리가 어디 속에 내려져야 되나? 

'사람의 지혜 속에 내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 속에 
너희 믿음의 그 나무 뿌리가 내려져야 된다' 

이것을 위해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의지해서 
그가 선포하고 전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저희 교회에, 때로는 성도님들이 이사를 오기도 하고, 
여러가지 사정으로 우리 교회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로부터 제가 그런 말씀을 한번씩 들어요. 
저도 정말 그 모태신앙으로 자랐고, 
또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제가 정말 사랑했던 교회가 있었는데, 
우리 부모님, 할머니 다 같이 섬기셨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서울로 학교를 진학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교회를  떠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새롭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데, 
정말 그 2년의 시간이 저한테는 너무너무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신게 하나 있었는데
'나의 믿음 생활이 관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익숙한 생활이 돼버렸어요.  

정말 거기에 가면, 주님이 계시는 교회이지만, 
저를 사랑해 주고, 저를 환영해 주는 분들이 너무너무 많이 계셨어요.

그러니까 그분들 때문에 제가 교회를 가기도 했고, 
또 거기에 가면 저의 히스토리가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었는지... 제 모든 것이 교회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를 떠난다'는 거는, 너무너무 고통이었죠. 

근데 제가 조심스럽지만, 바로 그때, 
'내 믿음이라는 뿌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다른 것에 두고 있을 수도 있었겠다...' 
라는 생각을, 제가 그때 비로소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 대학교 신입생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그 교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저한테 관심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이분들이 나한테 잘해주나/ 못해주나' 그게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이 이것을 원하시면 
내가 이 공동체 모든 활동에 참여하지만,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익숙한 관성, 사람들의 환영 때문에 내 신앙생활을 내가 결정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그 뜻에 따라서 
내 신앙의 나무가 다시 한번 세워져야 되겠다...' 
저는 그래서, 그런 노력 가운데서 저는 주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뭔가 하면,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 적지 않은 분들이 
그 믿음의 뿌리가, 탁월한 목회자의 리더십에, 탁월한 목회자의 지혜에, 
우리의 믿음의 나무 뿌리가 놓여져 있으면... 이것은 정말 위험한 거죠. 

만약에 저도, 교회를 마무리(은퇴)해야 될 때가 올 텐데, 
그때  제가 마무리를 하고 나서, 만약 이런 소리가 들린다면... 
'목사님이 떠나시고 나서, 목사님을 좋아했던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만약에 이런 어떤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러면 저는 무엇을 한 거죠? 
저는 우상숭배의 잘못을 성도들에게 강요한 거죠.  

여러분, 그들의 믿음의 뿌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있지 않고, 
사람을 존경받게 만들었던 그 잘못을, 하나님은 저에게 책망을 하시겠죠. 

이제 우리 한국교회가, 성도들이 
탁월한 목회자들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에,
여러분의 믿음의 뿌리가 놓여져 있으면, 그 나무는 반드시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떤 영적인 지도자들을,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잘 사용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셔야 되나? 

여러분의 믿음의 뿌리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속에 내려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그것을 감당해야 된다는 거죠. (하나님만 주목해야 된다는 거죠)


정리하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세 가지 도전을 합니다.  
1) 바울의 결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복음에 
우리 설교자의 마음과 영이 집중해야 되고, 

2)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나누어야 되나? 
말과 지혜의 탁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통해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3) 우리 믿음의 그 나무의 뿌리가, 사람의 지혜에  내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 속에 뿌리 내리는 역사들이 나타날 때  
교회는 다툼과 분쟁을 극복해 갈 수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고전2:6~9절까지는, 다음 주에 살필 것인데,
바울이 온전한 자 중에 하나님의 지혜를 이야기하는데 
이거는 비밀이다. 감추어진 것이다...

원래 이 내용은 2:6~9절까지 계속 이어지는 한 단락으로 살피면 좋은데,  
2:1~9절까지 한 단락!
우리는 오늘 2:1~5절까지만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실 때는, 2:1~9절을 한꺼번에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