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1장 사순절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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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의 유익 벧후 1:4~11 2000년
저희 교회당 앞에는 도랑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당 바로 앞부분은 저희 교회가 이곳으로 이전할 때 공사를 해서 복개를 했습니다.
교회 양쪽 부분, 오른쪽의 농장 앞이나 왼쪽의 삼성 쉐르빌 공사현장 앞에는
이 도랑이 그대로 드러나 물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도랑은 농수로(農水路)입니다. 저 위에 있는 낙생(樂生)저수지의 물을
논에 공급해 주는 일을 합니다. 전에 이 일대에 논이 많았을 때는
이 도랑이 매우 중요하고 유용한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젖줄이었을 것입니다.
3년 전 이 무렵, 저희 교회가 이곳에 입주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여기 와 보았더니 수리조합에서 나와 조그만 포크레인을 가지고
이 도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도랑에 맑은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수지가 문을 연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목양교회가 영혼의 생수를 담은 저수지가 되어
이 물을 골고루 공급해 주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저수지가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먼저 물을 담아야합니다.
댐을 만들면 처음 몇 해는 담수기간(湛水期間)이라고 해서, 수문을 닫고 물을 담기만 합니다.
물을 많이 담아야지, 풍족하게 내보낼 수 있고, 발전기도 힘있게 돌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담는 기간입니다.
저수지는 물을 담습니다. 저수지로 흘러 들어오는 여러 시냇물들을 담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도 담습니다.
저수지 밑바닥에서 물이 솟아난다면 그 물도 담습니다.
사순절에는 무엇을 담습니까?
오늘 본문 가운데 벧후1:5~7절까지는 사순절에 우리의 영적 생활이라는 그릇에
담아야할 것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①믿음 ②덕 ③지식 ④절제 ⑤인내 ⑥ 경건 ⑦ 형제 우애 ⑧ 사랑 여덟 가지입니다.
마5장에는 팔복이 나와 있는데, 베드로후서 1장에서는 팔덕(八德)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충(忠) 신(信) 효(孝) 제(悌)를 팔덕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의 팔덕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수지가 물을 담아서 봄과 여름에 논에 필요한 물을 대주는 것처럼
우리는 사순절에 이런 것들을 가득 담아서 저축했다가,
우리의 일년 영적 생활에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매일 매일 변화되고 깨끗해지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을 성화 sanctification 의 삶이라고 합니다.
구원과 성화는 신자의 생활에서 양대 기둥입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운전면허를 받았는데, 자동차의 시동을 걸어놓고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는 "내게는 매일이 구원의 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매일매일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 힘썼다는 뜻입니다.
매일 매일 앞으로 나갔다는 뜻입니다.
이 여덟 가지는 성화의 열매들입니다.
사순절은 이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어야 하는 절기입니다.
▲1. 사도 베드로는 먼저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은 모든 것의 뿌리요 기초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더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나머지 것들을 더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해서는, 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는... 성화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덕이 더해져야 합니다. 덕은 ‘도덕적 능력’을 말합니다. 주1) ‘덕’이란?
덕은 더해져도 좋고 안 더해져도 좋은 것이 아니라, 꼭 더해져야 합니다.
믿음에 덕이 더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믿음이 독선에 흐르고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며 교만에 빠집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자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설교만 좋아하게 됩니다. 영적 편식에 빠지게 됩니다.
믿음에 덕이 더해지지 않은 교인들이 모인 특히 교회는 고슴도치들과 같습니다.
가시가 있어서 찌르기 때문에 서로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됩니다.
믿음에 덕이 더해지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
전도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음이 있으니 구원받고 너는 멸망 받는다",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정죄의 대상으로 봅니다.
니느웨 성 동쪽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요나의 심보를 갖게 됩니다.
믿음에 덕이 더해지지 않으면 "나는 무조건 옳고 너는 무조건 틀렸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싸웠다가도 술 한 잔 마시고 화해를 하는데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한 번 싸우면 좀처럼 화해하지 않는다. 평생 화해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좀처럼 화해를 하지 못합니까?
술 한 잔을 안 마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덕이 더해지지 않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존재가 바리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도 바리새주의가 많이 흘러들어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믿음은 있는데, 덕이 없는 것입니다. (성화가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믿음에 덕을 더하려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용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에 덕이 더해져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합당한 성품을 갖출 수 있습니다.
▲2. 사도 베드로는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지식을 갖기를 원합니다.
믿음 위에 덕을 더했는데, 지식을 더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요4:14)
사마리아 여인은, 이 물을 육신을 위한 물로 잘못 알았습니다. H2O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라고 요청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얼른 '이 고역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한 번 마시면 평생 물을 마시지 않아도 목이 마르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울리는 일이 아닙니다.
목이 마를 때마다 물을 마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여인은 육신적인 것으로 잘못 해석했습니다.
동문서답, 또는 현문우답(賢問愚答)을 했습니다.
지식이 더해지지 않아서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잘못을 범하는 일을 가끔 봅니다.
구원은 무지로부터의 구원도 포함됩니다.
신앙은 지(知) 정(情) 의(意)가 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정적(情的)인데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일년에 몇 차례의 집회를 합니다.
신년축복성회, 부흥성회를 하고 남선교회가 주최하는 평신도신앙강좌와
여선교회가 주최하는 신앙간증성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4월에 열리게 될 평신도신앙강좌는 지식을 더하기 위한 집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지식은, 믿음에 덕이 더해지고, 덕 위에 더해진 신앙고백적인 지식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식을 더하는 일에도 힘쓰시기 바랍니다.
▲3. 사도 베드로는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고 가르칩니다.
절제는 자제하는 힘과 행동을 말합니다. 지식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식에 절제가 따르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절제된 지식이어야 합니다.
지식이 절제되지 않으면, 지적인 교만에 빠지고, 지적인 남용과 오류에 빠집니다.
한 때 사람들이 지식을 거의 절대시한 일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 그런 풍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계몽주의, 이성주의, 합리주의,
지적만능주의가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때가 있었습니다.
증명되는 것만이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신앙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문화가 발달하고 세상은 모든 것이 우리처럼 명확해져야 할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 혼란에 빠졌습니다. 세상이 냉장고처럼 냉각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위험은 오늘 다시 엿보이고 있습니다. 컴퓨터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합니다.
컴퓨터 만능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이런 모습을 2,500여 년 전에 이미 보고
다니엘서 12장 4절에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경고했습니다
머잖아 여기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일어나고
컴퓨터의 한계를 강조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지식만 절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화한 신학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신학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학문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 테두리를 벗어나서 ‘지식을 위한 신학’이 되어
불덩어리가 되어야 할 신학생들의 가슴을 숯덩어리로 만들어 놓는 일이
한국 신학교육의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절제가 더해진 지식’이어야 합니다.
▲4. 사도 베드로는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가르칩니다.
시험과 고통 중에서도 시험 안에서 견디는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는 꾸준해야 합니다.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잠시만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인내해야 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어서 금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금식을 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금식 끝난 다음에도 절제와 인내가 더 필요합니다.
아침 금식했다고 점심에 인내하지 못하고 마구 퍼먹으면, 거의 예외 없이 탈이 납니다.
금식한 다음에는 절식(節食)을 해야합니다.
▲5. 사도 베드로는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고 가르칩니다.
다시 금식을 예로 듭니다. 왜 금식을 합니까?
이유를 알지 못하고 금식하는 것은 힘써 달리면서도
방향을 정하지 않고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금식은 맹목적인 금욕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중세의 수도사들 가운데는 이 세상에서 고생을 많이 해야
천국에 가서 상급을 많이 받는다고... 힘써 금욕을 실천하고 고행한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서 상급을 많이 받으려면 봉사를 많이 하고 충성하고 선행에 힘써야지,
가만히 앉아서 고행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나 며칠 금식했다",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도 자랑하고 남에게도 내보이기 위한 금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유익한 금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득이 되지 않는 금식입니다.
저는 어제로 신년축복 대심방을 끝냈습니다. 앞으로는 이번 대심방에서 빠진 가정들을
한 주일에 하루 이틀씩 날을 정해 심방 하려고 합니다. *2000년 경 설교
심방을 하면서 처음에는 "아, 오늘은 열 집을 심방 했다" "오늘은 몇 집을 심방 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지역장이나 속장이 "목사님, 오늘은 심방 해야 할 집들이 많은 데요" 하면,
"아, 괜찮아요! 어제는 열 집을 심방했는 데요!"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루에 일곱 여덟 집 심방을 하고 나면, 몸도 피곤하고 머리도 마비되다시피 해서
그 다음 집에 가서 은혜롭게 예배를 인도하기가 힘이 듭니다.
예배가 끝나고 다과가 나오는 사이에 졸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많은 집을 심방하고서 흐뭇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로주의에 흐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방을 받는 가정을 위한 심방이 아니라
‘심방을 하는 사람을 위한 심방’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금식이 그런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금식은 경건을 위한 것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우리의 욕구를 꺾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금식입니다.
구태여 교회에 나갈 필요 없이,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면 그만이 아니냐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독교 윤리와 세상의 일반 도덕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는 세상의 도덕이 갖고 있지 못한 덕목을 하나 더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이라는 덕목이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에서는 이것이 중요하고 기초가 됩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근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은 "나는 하나님께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나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고 인정하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나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겠습니다" 약속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진실한 존경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내 위에 이런 것들이 더해져야 합니다.
▲6. 사도 베드로는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라’고 가르칩니다.
경건은 실천적인 것입니다. 형제 우애는 실천의 첫 걸음입니다.
형제 우애란 것은 사람들을 한 형제로 여겨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하나님,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형제들입니다.
이 점을 더욱 진하게 강조하고 있는 사도는 요한입니다.
요한 1서를 "사랑의 서신"이라고 부르고, 요한 1서 4장을 "제2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면서, 형제 우애를 강하게 말합니다.
또 요일5:1~2절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대등한 관계에 놓고 있습니다.
▲7.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을 더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완성하는 것이 됩니다.
옷을 다 입고 띠를 매는 것과 같습니다.
음식을 만들고 마지막에 소스를 곁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냉면을 먹을 때 마지막에 겨자와 식초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상품을 생산할 때 마지막에 포장을 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더하라"라는 말, 이전 개역 성경에는 "공급하라"고 되어 있는 말이
사실은 퍽 재미있는 말입니다. "에피코레게사테"라는 말인데
원래는 "합창을 지휘하다" 또는 "합창단의 비용을 기부하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합창"이 빠지고 기부하는 것, 공급하는 것이 강조되어
나중에는 그 뜻만 남게 되었습니다.
독창이 아닙니다. 합창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이 어우러진 합창입니다.
합창을 할 때는 우선 소리가 크게 나와야합니다.
사순절은 목을 가다듬어 소리를 크게 내는 절기입니다.
합창 연습을 할 때 어느 한 파트가 부족하면, 그 파트에 대해서 집중해서 연습을 시킵니다.
때로는 그 파트만 남아서 연습을 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하는 때입니다.
사순절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사순절이 어떤 절기입니까?
"사순절은 부활절 40일 전부터, 주일들을 포함하면 47일 전부터 경건에 특별히 힘쓰면서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4절 후반절에서 사순절에 대한 완벽한 정의를 발견하고 참 기뻤습니다.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개역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사순절은 세상에서 썩어질 것들을 피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힘쓰는 절기입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들이 하나님과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며
또한 장차 나타날 영광과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적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대단히 큰 영광입니다.
사람이 바라는 것의 절정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 같은 가축들이 생각이 있고 말을 할 줄 안다면
"주인님, 나도 주인님을 닮고 싶어요. 주인님의 고운 마음씨를 갖고 싶어요"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나누어 갖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사순절은 이 은혜를 누리는 기간이고 이 특권을 행사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 부담스럽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사순절은 봄철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야유회 가고 즐겁게 지내는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삼가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합니다.
저는 30년 전에 어느 읍에 있는 고등학교의 국어교사를 하면서
한쪽으로는 종교주임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교목 비슷한 일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거창)읍에는 극장이 둘 있었는데, 어느 극장에 좋은 영화가 들어오면
읍 전체가 들뜨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해 봄에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학생들이 꼭 보고 싶어하는 영화가 들어왔습니다.
학생들이 단체관람을 가게 해 달라고 하는데, 사순절이라는 이유로 브레이크를 걸어서
학생들에게 큰 원망을 산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고난주간에만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태도와 방침을 바꿨습니다.
사순절에는 금식과 철야기도에 힘쓰고, 각종 집회에 힘써 참석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올해는 부활절이 늦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습니다만
사순절이 시작될 무렵에 구정이 끼어있어서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순절은 언제나 수요일에 시작되는데, 작년에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수요일이
설 연휴 끝 날이어서,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수요일에 시작하지 못하고
목요일에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유익을 주는 절기입니다.
저수지에 물을 담아야 고여야 힘있게 흘러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하는 분들, 파도가 내려갈 때 같이 내려가야
또 힘있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커피를 매우 좋아하는 어느 성도는 "나는 올해 사순절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평소에 텔레비전을 하루에 네 시간 정도씩 보는데
이번 사순절에는 세 시간만 보겠습니다"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의 영성(靈性)이 자랍니다.
썩어질 세상의 것을 향해 있던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의 세계로 돌려지게 됩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머지 십분의 구를 축복해 주십니다.
사순절 기간 사십 일은 일년 365일의 십일조인데
사순절이라는 십일조를 잘 지키면 일년의 나머지 십분의 구가 축복 받을 것입니다.
금년은 2000년 대 첫 해의 사순절입니다. 이 사순절을 잘 지키기 바랍니다.
영적 생활이라는 그릇에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골고루
잘 담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농사가 풍요로워지기를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덕이란,
덕은 영어로 virtue, 헬라어로 ‘아르테’인데,
신약성경에 총 4번 나옵니다. 아래에 찾아놓았습니다.
본문 벧후1:5절의 ‘덕’을,
KJV는 virtue로,
NASB는 moral excellence로
NIV는 goodness 로 번역했습니다.
정리하면, 덕 virtue 은.. 선 goodness 과 비슷한 개념인데,
‘어떤 도덕적인 아름다움의 총체적인 개념’으로 봅니다.
도덕적인 표현들이 많지요. 깨끗함, 거짓말 안 함, 남을 도움, 바르게 살기 등등
이런 모든 개념들을 총체적으로 집합적으로 표현할 때 ‘덕’ 또는 ‘선’으로 부른다는 거죠.
그래서 ‘덕 virtue’과 ‘선 goodness’은 비슷한 개념으로 봅니다.
굳이 둘을 구분하면,
‘덕 virtue’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적인 측면이 강하고,
‘선 goodness’은.. 속으로 내재적인 ‘모든 도덕적 아름다움’이다.
이렇게 어떤 철학 전공자가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빌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1:5 '믿음에 <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