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4장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사도행전 강해 (21) 사도행전 4:32~34 /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 YouTube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행4:32~34 2022.04.03.
지난 시간 우리는 이제 '교회 바깥으로부터 불어오는 핍박'을 살펴봤습니다.
오순절 성경 강림으로 시작된 교회에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은, 세상의 핍박이었습니다.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핍박이 찾아온 거죠.
그러나 바깥으로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온갖 핍박이 불어 닥치는데,
막상 교회 안은 어떻습니까? 교회 안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외부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와해 되지 않은 거죠.
계속해서 누가는, 교회 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요.
바깥 외부로부터 온갖 핍박이 몰아칠 때, 교회 안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그 모습을 누가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누가의 시선을 따라서, 교회 안의 모습을 함께 들여다 보겠습니다.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one heart and one soul'
교회의 바깥으로부터 핍박이 몰려올 때, 성령 충만한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그럴수록 교회는 하나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분열이 아니라 하나됨을 이루어가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섬기는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죠.
그러니 그분을 섬기고 닮아가는 교회도, 하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의 하나됨을 보십시오. 이들의 하나됨은 단순한 구호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나누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무엇까지 나누었죠?
◑4: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4절에 '이들은 자신들의 밭과 집까지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웁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오해하면 안 되는데,
첫 번째는, 이들이 소유한 재산을 한꺼번에 다 판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이 동사의 시제들이
32절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을 가져다가'에서
'팔다'가 두 번 나오는데, 둘 다 현재(진행)시제로서,
'계속 팔아서 계속 가져왔다'는 뜻이 되죠. 34절도 마찬가지고요.
이로 볼 때, 한 번에 자기 재산을 싹 다 판 것은 아니라는 거죠.
필요에 따라 점진적으로 팔았다는 뜻입니다.
그 외에 나머지는 자신들의 소유로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쉬운 말로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있는 거죠.
두 번째는, 모든 성도들의 나무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나눔이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자기 소유를 내어 놓은 거죠.
그러니까 오늘날 공산주의 체제와는 전혀 다른 거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더 놀라운 일입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인 나눔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32
자신들의 집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웁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죠?
34절에 보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는데요.
여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표현은 누가의 창의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에 '가난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엔데에스 라는 단어인데요. lacked
이 단어가 구약의 이미 나온 적이 있습니다.
바로 신명기 15:4절에 이미 사용되었는데요.
신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15:4절의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라는 구절이,
본문 34절에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에 그대로 사용되었죠. 주1)
자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가난한 자가 없다'는이 사도행전의 표현은
신명기 15:4절의 약속이 초대 교회에서 드디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신명기의 약속, 이 복은 어떠한 복인가요?
먼저 이 구절의 배경을 우리가 좀 알아야 하는데요.
그 배경이 바로 위에 있는 신명기 15:1절에 나옵니다.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신15:1
매 칠 년 끝은 구약의 안식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안식년에는 지켜야 할 규례가 있습니다.
'매 7년 끝에는 면제하라' 그러면 무엇을 면제하죠?
신15: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안식년에는 빚을 면제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 말씀을 잘 지킬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복에 대한 약속이, 바로 신명기 15:4절에 말씀이었던 거죠.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가 없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보면 당연한 복이죠.
빚이 있는데, 그 빚을 면제해주면, 누구도 가난해지지 않았겠죠.
당연한 복이고, 약속이죠.
이것이 매 7년 안식년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례였습니다.
빚을 면제해주는 규례였고요.
그럴 때 가난한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한 사람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규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가운데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누구 하나 가난한 사람이 없는, 서로의 섬김이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를 추적해 보십시오
이들은 이 말씀을 한 번도 제대로 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이웃의 빚을, 제대로 면제해 준 적이 없습니다.
말만 제사장 나라이지, 그들의 의식과 삶의 내용은
이방 사람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안식년과 희년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건 아닙니까?
그것을 우리는 구약성경 곳곳을 통해, 그 하나님의 책망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죠.
그런데 자 이들이 이 말씀을 지키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죠?
바로 탐심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오랜 문제가, 사실은 탐욕입니다. 내 것이 아닌데 탐내는 마음이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것을 보고,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 그게 탐욕입니다.
이 탐욕은, 십계명의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이죠.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그런데 이 열 번째 계명 전에, 다른 계명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들이 있습니다.
이 계명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계명들은 하나 같이 몸으로 짓는 죄입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탐욕은 뭘로 짓죠? 마음으로 짓습니다.
탐심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서 일어난 탐심이, 행동으로 옮겨진게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간음이고, 그것이 도둑질이고, 그것이 살인입니다.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냐? 바로 탐심이라는 거죠.
'내 것이 아닌데 갖고 싶은 마음' 그게 탐심입니다.
이 탐심에서, 사실 모든 죄가 시작됩니다.
문제는, 모든 죄인들이, 이 탐심에 붙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갖고 있으면서도 더 갖고 싶은 거죠.
자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탐심을 해결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초대교회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모두가 더 갖고 싶어하는 세상 나라에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성경은 말합니다. :32
오히려 자신들의 밭과 집을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죠?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34
그러니까 여기에는 누가의 의도가 담겨 있는 거죠.
여기에 담긴 누가의 의도가 무엇이죠?
구약에서 실패한 하나님의 나라가, 초대교회를 통해 드디어 회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 동안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누누히 실패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초대교회를 통해, 지금 세상에 증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오늘 본문의 누가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쓰고 있는 누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누가는 굉장히 흥분되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실패가, 신약에 이루어졌으니까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이들은 탐욕에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는가?
어떻게 이들은 구약에서 실패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었는가?'
그 대답이 바로 본문 33절에 나옵니다.
33절은 오늘 본문 전체를 지배하는 구절과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사도행전 전체를, 초대교회 전체를 지배하는 핵심 구절과도 같습니다.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여러분 오늘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땅의 탐욕에 붙잡히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죠?
그들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33
그런데 그들이 은혜를 받은 신학적 교리적 내용이 무엇이죠?
주 예수의 부활입니다.
부활이라는 교리가, 그들의 삶을 뒤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부활이 있다는 건 무엇이죠?
우리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땅의 나라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죽음 이후에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이 죽음에서 구원했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분을 믿는 우리 또한, 주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사람이, 부활을 믿으면, 새로운 세상에 눈이 떠집니다.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갑자기 내 삶에 뚫고 들어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물질 세상보다,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훨씬 더 중요해집니다. 그로 인해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영원한 나라임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고 나서 결국에 가게 될 곳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다르게 살아가는 거죠.
이 세상을 살아가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위해 이 땅을 살아갑니다.
거꾸로 살아가는 거죠.
모두가 이 땅의 것을 쳐다보고 살아갈 때, 부활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갑니다.
여러분,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그는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자신도 하나님 나라의 들어갈 것을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요, 더 이상 이 세상을 위해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안일과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리는 일에, 결코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요.
고후6:8~10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물질 세계만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는 바울이
마치 속이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속이는 자같으나 참된 사람입니다' :8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냐, 영원한 천국 어디에 있느냐?'
바울은 속이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자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바울이었다는 거죠.
왜냐하면 그가 믿는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이죠.
이어서 바울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바울은, 모든 명예와 부를 버렸습니다.
세상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한 자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9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9
그에게는 육신적인 목숨이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육신적인 죽음보다, 하나님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죠.
이어서 그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10
바울은 세상적으로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보다 훨씬 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빌4:18
여러분, 이런 고백을 누가 드릴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역설적인 고백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할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눈에 보이는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육신의 목숨은 한순간에 꿈이라는 믿음,
그렇게 온 세상을 다 가진 사람들이 있어도,
하나님을 가지며 그분을 만나면 아쉬울 것 없다는
믿음이 있어야 이러한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보는 눈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부활을 통해서요.
▲그래서 부활의 안경을 쓰면, 세상을 뒤집어 보고, 거꾸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안경을 쓰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목숨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육신이 전부가 아니고, 물질이 전부가 아님이 분명해집니다.
죽음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 있고, 영원한 세상이 있음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 땅에서의 몇 십 년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의 단계를 지나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계속될 것이 보여집니다.
그래서 인생의 성공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다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부활을 믿으면, 이렇듯 세상의 거꾸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으면, 뒤집어 보고, 거꾸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부활의 교리가, 참으로 믿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통해, 새로운 나라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눈이 떠지니, 거꾸로 살아갑니다.
탐욕에 붙들린 세상에서, 오히려 자신의 것을 내놓습니다.
여러분, 새로운 눈이 떠지지 않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것을
절대 내놓지 못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닌다 할지라도
이 새로운 눈이 떠지지 않으면, 절대로 다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로 물질을 제대로 드리지 못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드립니까, 어떻게 번 돈인데요? 이 세상에 전부인데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수 없이 듣지만, 자신과는 결국에는 무관한 나라인데요.
그런데 그 중에는 자신의 소유를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물질을 모으고 불리려는 세상에서
거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눈이 뜨여졌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 영적인 나라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나라가, 한시적으로 (유한하게) 보이는 거죠.
이 세상 나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거죠.
이 세상 나라에 더 이상 가치와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가는 거죠.
그러니 이 세상의 것을, 더 이상 악착같이 추구하지 않는 거죠.
더 이상 물질에 매이지 않는 거죠.
여러분 사도행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은 사실 전부 돈에 붙잡혀 있습니다.
돈에 얽매여 있죠.
그러나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자, 땅에 매여있지 않습니다. 탐욕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물질마저도 나눌 수 있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부활을 만난 성도들의 힘입니다. 거꾸로 살아가는 거죠.
▲그러나 반대로, 이 땅에 나라가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 땅의 것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하죠.
그것을 우리는 빌립보서 3장 19절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은 이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첫 번째 '그들의 신은 배요'
자기의 배 (먹는 것)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풍족한 삶, 넘쳐나는 먹거리, 풍요를 최고의 목표로 두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관심이 자기 배를 채우는 일,
육적인 것에 있는 거죠.
그들의 관심은, 이 땅에서 좀 더 배부르고, 좀 더 모으고, 좀 더 편안하고,
좀 더 누리고 살아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나와도, 전부 다 어떤 기도만 하겠어요?
'조금 더 달라'라는 기도 밖에 없는 거죠. 전부 다 기도가 달라 라는 기도입니다.
자기 삶에 만족이 없는 거죠.
2) 두 번째,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말합니다.
쉬운 번역으로 '자기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죄를 자랑하고 선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타락한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죠.
오히려 그런 자신들의 삶을 자랑하고 다닌다는 거죠.
3) 세 번째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현세적인 것을 전부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 눈에 보이는 것이 유일한 관심이고, 유일한 목표이고,
유일한 삶의 가치라는 얘기죠.
여러분 왜 그렇죠? 이 땅의 나라가 전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걸 모르니까,
결국에는 이 땅의 나라를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가치와 질서를 따라, 같이 똑같이 살아가는 거죠.
그래서 가장 많이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그렇게 하고요.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은밀하게 하는 차이만 있을뿐
모두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목적을 위해, 같은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뜰 때,
우리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다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새로운 눈이 떠질 때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세상을 뒤집어 보고, 거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곳이 여러분 바로 이 땅의 교회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세상을 뒤집어 보고, 거꾸로 살려는 그런 열심과 노력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런 열심과 노력 때문에,
세상과는 전혀 다른 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이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불행하게도, 세상의 가치관과 원리와 질서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일들이, 세상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는, 세상에서 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세상적인 복을 조금 더 누리기 위해 교회로 모이는게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 늘 잊으면 안 됩니다. 성도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위해 이 땅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부활을 믿는 자들이죠.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뒤집어 보고, 거꾸로 살기 위해
날마다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배가 있고요. 그것을 위해 여러분이 모이는 다락의 교재가 있는 거고요.
그것을 위해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연습하기 위해 교회로 모였다는 사실을
늘 우리가 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역차별의 공동체'입니다.
즉 세상에서는 똑똑함이 차별의 기준이라면
교회에서는 똑똑하지 못한 사람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부자가 행세를 한다면
교회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도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모두가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한다면,
교회에서는 서로 낮아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름이 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자랑이지만,
교회에서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소명을 찾아
상대적으로 이름 없는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도, 자랑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용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로 모여서 교제를 나눌 때,
세상적인 자랑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자랑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의 실력이 드러납니다.
만일 믿는다는 우리가, 모여서 주고받는 자랑이
자녀가 명문대학에 진학한 거, 유명한 직장에 취직한 거,
최고급차를 소유한 것, 호화로운 여행을 다녀온 것,
값비싼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많이 배운 것,
혹은 화려한 이력을 가진 것... 이런 것들이 대부분이라면
여러분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뒤집어 보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실력이 형편 없고,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으로 자꾸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을 차별화라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 그 사람의 믿음은 더욱 형편없다는 뜻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그런 사람으로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의 실력은 무엇이고, 교회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도 교회를 통해 이루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교인의 숫자와, 교회의 건물과, 재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관심이 있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관점을 따라가 보십시오.
초대교회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3천 명이 단번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5천 명이 회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숫자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펴보았던 사도행전을 다시 복기해 보십시오.
숫자에 대한 기록은, 딱 그 두 군데가 전부입니다.
그것도 그냥 숫자만 달랑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누가는, 사도행전의 기록 분량을 조금도 할애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계속해서 누가가 그려내고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들 안에 달라진 삶의 변화입니다.
구약에서 실패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냐?
그들은 주 예수의 부활에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의 부활의 참으로 눈을 뜬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진짜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영적이고 영원한 나라임에
눈을 뜬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 땅의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가를 통해 보여주고 싶어했던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일한 자랑은, 세상과 다른 가치관과 원리가
얼마나 우리 안에 실천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실력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얼마나 삶 가운데 보여주며 사는가에 있습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진짜로 뒤집혀져 있는가에 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 보고 거꾸로 사는 실력이, 우리 안에 얼마나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혹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살지는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전부라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믿을 것은, 여전히 이 세상의 것들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여전히 탐욕에 붙들려 살지는 않습니까?
물론 이 세상을 거꾸로 사랑하는 것은, 절대 쉬운게 아닙니다.
때로는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고요. 손해보는 일이고요. 어렵게 사는 일입니다.
또한 왕따를 당하고요. 가족으로부터까지도 미움을 받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타락한 욕망이, 사실 이것을 거부합니다.
자 그렇게 뒤집어 보고 거꾸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확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 우리의 부활에 대한 확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
그리고 영원한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런 확신이 있을 때, 타락한 이기심을 극복하고
이 세상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거꾸로 살 용기와 의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있는데요, 날마다 바로이 확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세상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나라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 확신의 눈을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우리의 심령 가운데
날마다 새롭게 믿어지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곧 있으면 부활주일인데요. 정말 바라기는 우리 안에 참된 부활의 신앙이
열리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특별히 바울의 기도를,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나 기억했으면 좋겠는데요.
바로 에베소서 1:18절의 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향한 간절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여기서 기업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너희의 마음 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하는 거죠.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그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의 풍성함을
날마다 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나라니까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사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셔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바라기는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부활의 큰 은혜와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에, 날마다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시는
이 거룩하고 참된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로 인해 이 땅을 살아가되,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위해 이 땅을 거꾸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행4:34절처럼 '가난한 자가 없었다'는
이 하나님 나라의 나타남이 초대교회를 통해 회복되었듯이
우리의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증거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올 한해 우리 교회의 표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증거하는 교회'
이 표어가 그냥 단순한 구호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정말 여러분의 삶과 그런 여러분들이 모인 우리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참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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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행4:34의 '가난한 자 (엔데에스)' 가
신15:4의 헬라어 70인역에도 그대로 '가난한 자 (엔데에스)'로 사용했음
내용도 똑같지만, 워딩도 똑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