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2장 세 가지 시험
https://www.youtube.com/watch?v=qdHc06wafGg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둔 제자들의) 세 가지 시험 눅22:24-38 2025.04.14.
※예수님이 '겉옷을 팔라 검을 사라'고 하신 말씀의 해석이 특히 많은 도움을 줍니다.(3대지)
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 <매일 성경> 순서에 따라서 고난주간 특새를 가집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 이면서, <매일 성경> 본문이 거기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굳이 다른 본문을 택하지 않고, 여러분들이 매일 읽는 <매일 성경> 본문 순서를 따라
특새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제목은 "세 가지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최초의 성찬을, 제자들과 함께 허름한 다락방에서 다 끝내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잔을 나누면서, 피로 새 언약을 이루십니다.
'피로 언약 했다'는 것은, 하다가 중간에 관둘 일이 아니고,
끝까지 완수하신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피로 언약을 세우고, 떡을 나누십니다.
그것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피 흘리시고,
살을 찢어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나누어 주실 것을 예고하는 중요한 싸인이었죠.
이렇게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눔으로써, 곧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그림으로 설명을 했지만, 제자들은 역시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그 이후에 벌어지는 세 가지 장면을
우리가 간단 간단하게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제자들이 만난 첫번째 시험, '누가 크냐?'
눅22: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이제 곧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으로 향하시는데,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크냐?'라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어떤 시험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에 대한 시험입니다.
우리도 말은 내가 신자이고, 또 예수를 믿는다고 얘기하고,
신앙생활을 오랜 세월동안 해 오지만, 여전히 이 문제는,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속에 여전히 제거되지 않는 욕망, 세속적 욕망이죠. '누가 크냐?'하는 다툼!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이 길의 의미를,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번 특새 주제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라)"
입니다. 근데 기도도 해야 되겠지만,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씨름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깊어지고, 예수를 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세계로 들어가는 싸움인데,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새벽에도 기도하시겠지만,
기도와 함께 더욱 '애쓰고 힘써 간절히' 주님을 알아가는
깊은 묵상과 씨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십자가를 지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제 곧 임박할... 그들이 꿈꾸는 나라의 높은 자리를 놓고 '누가 크냐?'
라는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이제 답변을 만나 봅니다.
눅2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세상의 통치 방식이 그렇잖아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역대 세계의 집권자들,
통치자들을 보면, 자기의 치적, 업적, 공로... 이런 거를 통해서
그 시대를 같이 살았던 백성들에게 '우리 대통령, 또는 우리 지도자가 최고다'
그런 평판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세속의 기준이, 세상에만 통용될까요?
기독교의 이름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의 명예를 드러내고, 사람의 공을 드러내서,
'내가 재임할 때 OO 교회가 어떻게 됐다'
그런 공치사의 매달리는 경향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오래전에 제가 존경하던 어느 목사님이
'목회자에게 세 가지 연습을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희미해지는 연습
-사라지는 연습
-작아지는 연습
그 분의 말씀이 제 기억에 오래 남아있어요.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젊은 자'
여기서 '젊은 자'라는 말이 생뚱맞죠. 이 말이 원문의 의도를 적절히 드러내지 못했는데,
'젊은 자'라는 말은, 당시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약한 자'라는 뜻이죠 *네오스: 젊은, 신입
사실 지금도 그래요. 오늘 새벽에 정말 보석처럼 찬란한 우리 젊은이들이
찬양을 했지만, 저분들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약자입니다.
뭐 기반이 그렇게 탄탄히 다져져 있는 시기도 아니고,
이제 대학생인데, 아직 부모님들 손을 빌려야 되고,
주거와 모든 문제를 부모님께 의존해야 되는 연령이란 말이에요.
근데 대학을 갓졸업 해서, 남자들이 무슨 기반이 있겠어요?
그들은 아직도 길게 기다려줘야 되는 나이란 말입니다.
더욱이 당시 시대에 '젊은이'라는 말은 '약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그러니까 세상의 공식과 전부 뒤집어진 질서를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다스리는 자냐? 누구란 말입니까?
'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자다' 그 뜻이에요.
세상에서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그런 지도자, 큰 자가 누구냐 말이에요?
'섬기는 자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이렇게 설명하셨어요.
눅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그러면 여기서 진짜 '큰 자'는 누굽니까? 섬기는 자입니다.
여러분, 이 마인드가 우리 뼛속 깊이 들어와 있어야 돼요.
여러분, 큰 자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러면 섬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삼일교회는, 성도들 개기인도 물론이지만,
이 섬김의 필요가 가득한 세상에서,
섬기는 교회로, 섬기는 자로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이고, 성도가 이 땅에 존재하는 양식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끊임없이 그 마음속의 욕망의 분출을 위해서
서로 뭘 놓고 다퉜어요?
세상 나라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했습니다.
똑같은 현상이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죠.
▲자리 다툼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사역'을 계속 맡기시다
눅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예수님과 제자들도 함께했던 세월, 즉 공생애를 서로 공유했었고,
지금 그렇게 질문하는, 서로 다투고 있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3년 반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입니다.
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이상하죠. 만약에 제가 스승의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고, 지금도 선생님의 가는 길에 대해서
뜻도 모르고 이해도 못하고, '누가 크냐?' 하는 자리다툼 하는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아이고, 저 한심한 사람들한테 어떻게 이 나라를 맡기겠나?
나도 생각을 좀 달리해야 되겠다' 예수님이 그럴 법하잖아요.
저 같으면 틀림없이 그랬겠어요.
'얘들은 도저히 안 되겠다. 뭐 3년 이상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쳤는데,
어쩜 이렇게 까막눈이냐? 이런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나라를 불안해서 어떻게 맡겨?'
근데 예수님이 지금 맡긴다는 얘기입니까/ 안 맡긴다는 얘기입니까?
맡긴다는 얘기예요.
22:29~30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왜 그러셨을까요?
지금 이런 맹꽁이 같은 제자들의 대화를 예수님이 들으면서도
어떻게 이런 부족한 제자들한테
'그 영광스러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고,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그 예수님의 이유를 알아야 돼요. 20절을 한번 볼까요?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이 여기서 잔에 포도주를 담아, 피흘려 이들을 위해서 죽으실 것을
새언약으로 설정하십니다.
근데 누구를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여러분 속에서 이렇게 뜨끈한 뭉클함이 올라오지 않아요?
저는 정말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 제자들의 참 어리석고, 한심하고, 답답한 대화를 들으면서도
예수님은 확신하는 거죠.
'그래도 내가 이들을 위해서 피흘려 죽는 만큼 이 일은 반드시 될 것이다!'
우리의 희망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믿습니까?
이게 주님의 사랑이에요.
오늘도 우리는 연약해서, 제자들과 매우 비슷한 속내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나를 볼 때는 절망 밖에는 없지만,
우리는 나를 묵상할게 아니라,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피로 새 언약을 맺어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해야 됩니다.
이번 고난주간이, 그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로 들어가는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두 번째 시험, '베드로의 자아의 겉껍질을 깨는' 시험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요구하였으나'
청구했다는 말이에요.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욥기에서 만납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어전 회의(소드 야웨)에 참석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종 욥을
제가 좀 건드려 봐도 되겠습니까?'
'왜 그러냐?'
'아니, 그 정도로 복을 주시는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탄이 내려가서
욥이 지녔던 모든 것들을 한 방에 날려버립니다.
이때 욥이 무너졌나요? 안 무너졌어요.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붉은 몸으로 왔으니, 붉은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고 무너지지 않았어요.
마치 그렇듯이 지금 사탄이 '너 시몬을 밀까부르듯 하려고'
이것은 키질(타작)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는 작업이죠.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적 의미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대표되는 베드로가 등장을 하는데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했다고 돼 있어요?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그러니까 베드로의 (즉 우리의) 약함을 예수님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고 계십니까?
알고 계세요.
그래서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어요.
'이들이 제발 흔들리는 세상, 요동하는 세상 앞에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구합니다'
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드리셨어요.
오늘날에도 우리 예수님은, 여전히 여러분들을 위해서
어느 날 여러분에게 불어닥칠 예기치 못한 돌발적 고난과 시험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실까요, 안 계실까요? 네,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그 뒤에 뜻 모를 문장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22:32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이제 그가 어떻게 되나?' 한 번 지켜 보자... 이런 의미가 아니에요.
'너는 돌이킨 후에' 라는 말은, 베드로는 장담하는데 명수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마26:35
유명한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가 대표로 욕을 먹지만,
마태 기자는 뒤에 이런 설명을 덧붙여 놨어요.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35
베드로만 그런게 아니에요.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변하는 대표격이지만,
다른 제자들은 더 나아서, 호언장담이 똑같아요.
도찐개찐이에요.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돌이킨 후에' 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너의 그 자기 중심적인 열심과, 장담과, 그 완고함,
즉 네 자아가 철저히 무너지고 부서져야... 예수님을 의지해서 새 사역을 할 수 있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볼까요?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22:32
그래서 요21장에 보면 디베랴 바닷가에 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똑같은 질문을 세 번 질문하셨어요. 전부 사랑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자꾸 주변에 걸려 있는 언저리 내용들, 부수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는데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에게 집중해 줄 것을, 제자들에게 원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께 몰입하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단순하게 답이 나옵니다. 네, 사랑이에요. 그게 맞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22: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자기를 확인한 자기 수준은,
'절대 나는 주님을 배반할 일이 없습니다!'
그거 베드로가 거짓부렁이로 한 얘기가 아니에요. 진짜 진심으로 얘기했어요.
그런데 그게 자기가 파악한, 자기 수준이에요.
인간의 제일 무지가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를 나 스스로 모른다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파악한 수준은 '너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한다'
온도 차이가 크죠.
그래서 베드로는, 형제들을 굳게 하고 돌이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교만한 자아가, 무지스러운 자아가 철저하게 무너져야(돌이켜야) 돼요.
그래야 진짜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붙들려 섬길 수가 있는 겁니다.
▲여기서 두 번째 시험의 본질은 뭡니까?
항상 세상은 우리를 이렇게 밀까부르듯 흔들어요.
'밀까부르듯' 이라는 말은, 요동치는 환란과 비바람을 통해서
진짜가 무엇이고, 내 안에 거짓부렁이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는 뜻이에요.
이게 폭로되어서... 내가 어떤 수준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이게 키질, 타작의 목적이죠.
그것이 십자가를 발견하는 방법이에요.
'아,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위해, 이 절망적인 존재, 방법이 없는 존재 때문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그 십자가는, 내가 누군지를 고발하는 도구예요. 믿습니까?
◑3. 세 번째 시험, 한심하고 무지몽매한 제자들의 속마음이 검을 통해 드러남
눅22:35~36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과거에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다니면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파송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너희는 전대, 배낭,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그러니까 제자들이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근데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더더군다나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
'검' 이게 무슨 뜻일까요? 앞뒤가 좀 안 맞죠?
'아,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에 죽으실 거니까, 그때는 니들이 알아서
너희들이 자기 살 길을 다 준비해야 된다...' 그 뜻일까요? No
예수님이 죽으시면, 이제 제자들을 도와줄 능력이 사라지니까...
뭐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만 능력이 있는 분인가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전에는 전대도 없고, 신도 안 주고 보냈지만
다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이 됐어요.
근데 이제는 심지어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 그래요.
이제 임박한 결전의 날을 위해서, 이제는 방법을 바꿔야 된다... 그런 얘기일까요? No
예수님은 일관성이 없는 분이 아니잖아요.
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22: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오늘 설교의 하이라이트가 38절이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칼을 즉석에서 꺼내 보였어요, 검을 가지고 다녔던가 봐요.
보시고 예수님이 '족하다' 하셨는데,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됐다' 그런 뜻일까요? No
경상도 사람들 사투리 중에 너무 한심할 때는 이런 말을 씁니다. '고마(그만) 됐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예수님이 '족하다' 하신 것은, 사실 그런 뉘앙스입니다.
너무 한심해서 '그만 됐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눅2:34~35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칼'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여기서 칼은 진짜를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진의를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낸다'고 하셨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검'은, 가짜와 진짜를 드러내는 어떤 수단이에요.
사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제자들이 내민 검은,
자기들이 누구를 따라다니고, 주님은 무엇을 위해서 십자가로 걸어가고 있음을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검'을 언급하신 이유는
1)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범죄자 중 하나로 체포되어 죽으셨습니다.'
그 이사야 53:12절의 예언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2) 그와 아울러, 그 검은,
제자들의 속내, 속마음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검으로 하려고 하는' 그런 세속적인 마음.
예수님은 불법으로 체포되어, 불법의 재판을 받고,
불의한 판결이 내려져서,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되어져서 죽으셨어요.
누구 때문에? 범죄자들 때문에! 역설이죠.
그런데 제자들은 검을 들고 와서, '검이 두 개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물리적인 검을 가지고 들이밀며,
무장을 해서 아직도 이스라엘을 전복하고 로마와 대항하여
물리적인 힘으로 무언가를 의도하고 있는 이 제자들의 아둔한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이제 족하다. 그만 됐다' 뭐가 드러난 거예요?
그 검이 뭘 드러낸 거예요?
제자들의 미련함과 완고함과 고집이 드러난 거예요. 그 세속적 욕망이 드러난 거예요.
왜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이 제자들이 실증적 증거들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을 증거로 보여 주었어요.
그 무지몽매한 제자들, 한심한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내 나라의 방식은... 그런 검으로 대항하여 성취하는 나라가 아니다.
오직 나는 섬기는 자로 왔느니라'
주님은 목숨을 던져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섬기셨습니다.
믿습니까?
이 땅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자꾸 그리스도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여전히 세속의 방식으로 걸어가려는 이 싸움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고,
우리 개인 안에 욕망으로 웅크리고 있는 거죠.
오늘 이 말씀 앞에 온 성도들이 다시 한번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게 되고,
또한 나를 알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현안인 우리 삼일교회 역사적 과제를 놓고 깊이 기도하고,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그 소소한 사연부터, 엄청난, 감당할 수 없는 사역까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이 시간 다같이 머리숙여 기도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붙들고, 이 세 가지 시험 앞에
모두 우리의 모습을 발견케 하여 주시옵소서!
......................................
▶예수님이 ‘검’을 가지라고 하신 이유
1) 비유적 의미 (상징적 해석)
예수님은 실제 무장을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어려움과 박해를 대비하라는 상징적인 말씀으로 해석하는 입장입니다.
"검"은 영적인 싸움 또는 박해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준비와 각오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제자들이 “여기 검 두 자루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이 “족하다”라고 하시죠. 실제 전투를 준비하는 데는 부족한 숫자인데,
“족하다”는 말은 더 이상 그 주제로 얘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2) 현실적 대비 (실제 검을 준비하라는 의미)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제 세상의 적대감 속에서 살아가야 함을 아셨고,
기본적인 자기 방어를 위해 무장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는 해석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고, 자기방어 수단이 필요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예수님이 곧 체포될 때 베드로가 검을 사용하자 오히려 그것을 꾸짖고
(요18:10-11),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고려하면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3) 예언 성취를 위한 상징
누가복음 22:37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법자들과 함께 헤아려졌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즉,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들 중 하나로 취급되어야 하는 예언(이사야 53장)을 이루시기 위해
제자들이 ‘검’을 가지는 장면을 일부러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검”은 실제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험한 무리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하려는
상징적 장치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전체 가르침과 조화롭게 보기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은 사랑, 용서, 원수 사랑, 평화입니다.
따라서 검을 가지라고 한 말도 그 전체 맥락 속에서 해석해야 하며,
폭력적 행동의 정당화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