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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9장 십자가와 변화의 길

LNCK 2025. 4. 19. 22:2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십자가       <자아>

십자가와 변화의 길 | 눅 9:23-25 |  화고난주간특새 | 25.4.15 - YouTube

십자가와 변화의 길            눅9:23-25              2025.04.15.    

제가 이제 특새를 십 몇 년 동안 인도했는데 
초기에 여기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벌써 대학도 졸업했어요. 
그래서 '특새 키즈'라고 그러더라고요. 

아마 이제 앞으로 우리 수영로교회의 백년을 이끌어갈 인재들이 
여기서 (이번 특새에 참석한 어린이들 가운데) 다 나올 거예요. 
백년을 이끌어갈 미래의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2대인데, 한 5대 담임 목사가 여기 있을 거예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데 아이들이 새벽에 일찍 나오는 게 어려운데, 
부모님들 만에 의하면, 새벽에 나오는 걸 그렇게 좋아한대요. 

부모님이 '저녁에 안 자면 내일 새벽에 안 데려간다' 그러면, 딱 방에 들어가서 잔대요. 
신기한 일입니다. 

◑도입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하고, 또 예수를 따라가는 길, 고난의 십자가에 묵상을 하다 보면 
이 메시지들이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좀 센 말씀이잖아요.
 
어제도 얘기했지만 레디클 radical 하며, 아주 우리 삶을 전복적이 뒤집어 놓기 때문에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게 어려워요. 이렇게 사는 게 어려운 겁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았다면, 여기 있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되는데, 그 좁은 길을 가는 게 어려운 거예요. 

근데 이런 고난주간을 통하여 십자가를 묵상하고,
좀 세지만 이 말씀을 소화해내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우리 몸도 그렇잖아요. 운동을 안 하면, 우리 몸이 다 굳어있어요. 
그 굳어있는 걸 풀려고, 그러면 요즘 공(짐 볼)위에 몸을 굴려서 풀기도 하죠.

그래서 안 쓴 근육을 쓰면 통증이 와요. 
지금 이런 '십자가 메시지'는 우리에게 통증을 가져다 줘요. 아파요. 힘들어요. 
그래도 십자가 말씀을 받아야 돼요. 그게 내가 사는 길이고... 생명을 줍니다.

우리가 그렇잖아요. 알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몸에도, 건강에 좋은 걸 먹으면, 그게 건강에 이로운 걸 아는데,
우리는 그런 건 잘 안 먹고, 브로콜리 같은 거는 잘 안 먹고, 
좀 맛있는 걸 먹고 싶어 하잖아요. 입에 즐거운 거... 

그런데 그런 거를 찾아 먹다보면, 이제 몸을 망가뜨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 귀에 듣기 좋은 메시지는, 우선 위로는 되는데,
그게 내 영혼의 깊은 세계에 위로를 못 주는 거거든요.

이 세상이 주는 것들이 다 그런 거잖아요. 
박카스를 마시면 금방 피로회복이 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십자가 메시지는, 듣기는 힘들어도, 우리가 잘 소화해내려고 애를 쓰다 보면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거부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변화예요.  transform       ☞ <변화>

변화가 가능한가요? 겉껍질, 겉모습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변화가 진짜 가능한 건가요? 
이게 목회의 숙제 중에 하나예요. '진짜 사람이 변하는가?' 이 질문을 늘 해요. 

'30년 40년 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저 정도인가?' 
'내가 목사로, 또는 직분자로 사는데도 이 정도인가?' 이런 고민을 하는 거잖아요. 

'변화가 된다면, 그 변화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 변화를 얘기할 때,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를 가져올(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 신앙의 변화는, 십자가와 정면으로 부딪혀야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다른 거로는 뭐 아무리 도덕적인 내용을 적용하려고 해도,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산상수훈을 아무리 이해해도, 그렇게 변화가 안 돼요. 

그러니까 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도덕률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고,
2000년에 죽으셨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인카운트 encounter 가

일어나야,비로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는 거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라고 하는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 
무미건조한 이론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바꿔놓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루는 십자가의 길은, 이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과는 
완전 반대의 길입니다. 정 반대의 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하면 '이건 우리가 평소에 사는 방식이 아니구나'
이걸 깨달아야 되는 거죠. 

▲본문 눅9: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리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리라' 

제자도의 아주 핵심 구절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첫 번째로,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는 자아 Ego, 또는 자아중심성 Ego-centric 입니다.
죄성을 가진 내 자아는, 언제나 자기애로, 자신에게로 기운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삶에 늘 부딪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에게로 향해 있어요. 
자기 만족, 자기 기쁨, 자기 성취, 자기 성공, 자기 확대, 자기 증명... 

여러분, 이것이 왜 문제가 되며, 왜 자기를 부인하라고 그러는 겁니까? 
그 자아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아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독자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면, 자신을 더 부각시키는 일에 몰두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더 극대화시키는 작업, 거기에 모든 걸 다 쏟아넣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열심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종교적 열심을 내는 이유가 '자기를 드러내는' 거예요. '자기 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사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열심을, 오늘 우리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 열심의 동기가 뭐냐는 거죠. 
그 열심을 통해서 자기 의를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의를 주장하면 어떻게 돼요? 자기 의를 주장한다는 말은, 
그들에게는 예수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의를,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화 있을진저' 하고 예수님이 그들의 외식을 공격하셨죠. 

왜 그렇게 예수님이 분노하셨습니까? 그들의 의, 그들의 열심이 
하나님의 십자가를 대적하고, 십자가 신앙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죠. 

결국은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열심이 만들어낸 의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말죠. 이렇게 인간의 열심이 무서운 겁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그 말씀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눅9:23절은, 그들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그들과 같이 그렇게 하지 말라' 
'바리새인들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을 걷지 말고 다른 길을 걸어라'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 자신을 먼저 부인해야 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우리가 걷고자 하면 '자기 부인'이에요. 
이게 주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너희가 멋진 뭔가를 증명해내기 위한 삶이 아니고, 너를 부정해야 된다. 
그게 바로 십자가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죽을 수 없어요.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이겨야 되고, 밟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는 전혀 다른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오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첫 번째로 <십자가의 길,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뭐냐? 
이기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아 중심적인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이기심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죄를 규정하기를 '자기 자신에게로 심하게 휘어진 상태, 
자기에게로 구부러진 상태' 그걸 죄라고 규정했습니다.

이사야53:6절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게 죄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여기에는 기준이 없고, 기준이 하나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아이들 말로는 '제 마음대로' 하는 거죠. 

'내가 원하는 것' 그게 기준이에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둬' 입니다.
비틀즈의 유명한 노래가 Let it be '내버려 두세요, 나를' 이죠. 

눅12:16~21절을 보면, 소출이 풍성하여 창고를 더 짓는 한 어리석은 부자가 나옵니다.
이 단락에서 '나'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세어보세요.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무엇이 눈에 띕니까? 나, 내가, 내 영혼에게, 내 곡식, 내 물건...  
영어로 I, MY, ME 라는 말을 계속 써요. (영어성경에 보면 '나'가 더 많이 나옴)

이 부자는 자기의 세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주의 중심에 자기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다른 사람들, 그의 이웃들은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나'라는 세계, Ego-centric, 자아 중심성,
모두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로 끝납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계시는 거지,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기심, 겉으로는 그럴듯한데, 뭐 성공한 사람이라고 칭송도 듣겠죠.

사람들은 겉으로는 '나라를 위한다'고 그러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자기 이기심 입니다.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이 자기를 위한 탐욕... 이게 우리가 늘 고통스러워 하는 거잖아요.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예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겉으로는 훌륭한 종교적 삶을 살지만, 속으로는 세상적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에게 집중합니다. 

이걸 가르쳐서 심리학적 용어로는 '병적 자기애' 라고 얘기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어느 때보다.도 이런 이기심이 극대화된 시대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사는 거죠. 

내가 남자로 살든, 여자로 살든... 내 성 정체성을 내버려 두라는 거죠. 요즘 그렇잖아요. 
'내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살든 말든, 관여하지 말라'는 거죠. 
자기 만족,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있는 겁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거죠. 

왜 돈을 벌죠? 왜 권력을 가지려고 합니까? 나를 위하여! 
힘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래서 자아 만족, 자기 성취, 자기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성공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나의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는 것을 위해서 성공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성공할수록, 다른 사람들은, 나의 만족을 위한 도구화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기적인 사람이 돈을 가질수록, 더 이기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힘을 가질수록, 수많은 사람들을 학대하고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이기적인 사람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순간... 정의는 무너집니다. 
이기적인데, 어떻게 정의가 가능합니까, 공의가 가능합니까? 
공의는 이미 깨진 겁니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러면 세상이 혼란에 빠지는 거죠. 

세상이 혼란에 빠지고 고통 속에 있는 것은, 결국은 인간의 이기심에서 출발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예수를 따라가는 삶은, 철저히 자아 중심에서,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이기적인 삶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기적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뼛속까지 깊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결혼한 신혼 부부가 왜 그렇게 힘들어합니까? 이기심의 충돌입니다. 딴 게 없습니다. 
딱 한마디에요. 이기심의 충돌입니다. 신랑 신부가 각자 나 중심적이에요. 
모든 해석을 나 중심적으로 하니까, 두 사람이 어떻게 안 싸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확대되면, 사회로 나가면, 그냥 이게 뭐 다양한 논리로, 이념으로 나아가는데 
이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이기심이 있습니다. 뼛속까지 이기심이죠.

그래서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 일평생의 작업이죠.
내 자아, 자기 자신에게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을 끊고, 
이웃을 향해 의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가는 이 과정, 
즉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우리 일평생에 걸쳐서 끊임없는 노력을 하면... 비로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내가 나를 기쁘게 할 때와 비교가 안 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걸 경험해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죠. 

여러분, 내가 나를 위하여, 내 만족을 위해서, 내 기쁨을 위해서 추구할 때 
찾아올 수 있는 기쁨이 있죠. 그런데 그 기쁨은 질이 낮은 거라고요. 세상 기쁨입니다.

그래서 빌2:4절에 보면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나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한 것들은, 허접한 세상 기쁨들이에요. 
금방 사라져버리는 거죠.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질 낮은 즐거움에 빠지면, 결국은 그게 중독으로 가잖아요. 

여러분, 이 자아라는 것은 괴물입니다. 괴물이에요. 
자기를 섬기라고 아우성을 치는 겁니다. 내면에서 이 괴물이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너 자신을 스스로 만족시키라고, 너가 원하는 걸 지금 빨리 해결하라고'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와, 모든 열심과, 정성을 다 쏟아서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아라... 라고 그냥 보채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일평생 몸부림치며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나를 기쁘게 하고, 만족하려고 하면 할수록... 불행해지는 거예요. 
내가 나를 만족시킬 수도 없어요. 밑 빠진 독이에요. 

▲결혼생활이 왜 불행해지는 겁니까? 돈이 부족했어요? 아니에요. 
집이 좁아서? 아니에요. 핵심은 지독한 이기심이에요. 

사실 들여다보면, 남편과 아내가 그 이기심을 해체만 한다면, 
여러분 어디서 살든 상관없습니다. 

그 지독한 이기심이라는 독성을 해독시키는, 디톡스 시키는 길은 십자가밖에 없어요. 
상대를 위해 죽어보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요? 

여러분, 사업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돈만 벌려고 하면 될까요? 아니에요. 
요즘 소비자들은 매우 똑똑해요. 보통 똑똑하지 않아요. 지갑을 함부로 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의 희생물이 되고 싶지 않아 합니다. 

사업가들도 '남을 위해 내가 죽는' 원리를 적용해야 돼요. 이건 어디나 마찬가지예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삽니다.' 이 원리를, 아는 사람은 아는 거죠. 

여러분, 이 자아의 죽음, 그래서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이 삶!  갈2:20

그래서 내가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기뻐하게 하려고 하는 삶, 이 이타적 삶, 
그 중심 이동, 자아에서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내 삶에 중심이 이동될 때,
즉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갈 때,
그때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2:4

여러분, 단기 선교도 가면, 돈 들죠, 시간 들죠, 고생해요, 
그 더운 지역에서, 모기에 물려요, 몸도 아파요, 샤워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그냥 물병 하나 줘서 물병 하나로 샤워하라고 그럽니다...

그냥 고생하는데 왜 그렇게 기쁨이 있죠? 그 기쁨은, 이건 말로 못해요. 
섬기는데, 희생하는데... 그 기쁨이 오는 거예요. 퀄리티 높은 기쁨!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안달복달 하는 삶이 아니라요. 

이 자아중심적 삶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고쳐지기 전에는, 
삶의 기쁨도, 삶의 행복도, 삶의 보람도, 진정한 만족도 없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첫 번째는 '자기를 부인하라' 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좇을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핵심은 자기 부인이에요. 
이 자기 부인 self-denial 이 안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자기 부인이 안 되는데, 뭘 하면, 할수록 위험한 거예요. 
자기 부인이 안 됐는데 봉사하고, 
자기 부인이 안 됐는데 무슨 직분을 받고, 
자기 부인이 안 됐는데 뭐 나라를 위해서 봉사한다... 그건 다 거짓말이에요. 

나중에는, 그건 하면 할수록 위험한 일이 되고 말죠. 
'십자가에 거치는(걸거치는) 자가 되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게 되고 맙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첫 번째는 '이기심을 버리라', 이기심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매 순간 매일 매일 우리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주제예요. 

여러분 주차를 할 때도 한번 싸워보세요. '내가 좀 더 가까이 대야지' 
이러면 집에서도 열 받는 거예요. 주차도 희생하는 거예요. 
'내가 좀 멀리 대면, 다른 사람이 좀 편하겠네...'                 주1) 

여러분 이기심은 이건 무서운 거예요. 
우리의 일상에 그냥 딱 붙어 있어가지고 안 떨어져요. 아무리 해도 안 떨어져요. 
근데 그게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거예요. 끊임없이 나를 힘들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내 삶을 얼마나 구속시키는지 몰라요. 
그런데 일평생 예수를 믿어도, 이기심이 해결 안 되면 
십자가는 나와 상관없는 거예요. 

십자가에 이기심을 어디 볼 수가 있어요? 
십자가에서는 이기심을 눈꽃만큼이라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위해 무엇을 챙긴 게 있습니까? 
완전한 희생, sacrifice 잖아요. 

여러분이 이기심을 해결하면, 오늘도 여러분들은 천국을 맛봅니다. 
매사에 모든 영역에 나 중심으로 생각하면 갈 길이 멀어요. 

모든 생각도, 모든 행동도, 모든 말투도... 나 중심이에요. 우주의 중심에 내가 있어요. 
여러분, 그런 삶은 얼마나 불행하겠어요? 불가능한 것을 자꾸 가능하게 하려니 말이죠.
우주의 중심이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순리요, 평탄한 삶입니다.
그게 가능하려면 '자기 부인'이 전제 되어야 하는 거죠.

◑2. 두 번째, <십자가의 길, 자기 부인의 길>은 
결국은 자기의 가지고 있는 힘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을 가지라고 말해요. 힘은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권력지향적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도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다 머리가 되려고 하니까, 박 터지는 거죠. 

언젠가 과거에 리더십의 열풍이 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리더십, 리더십' 얘기하니까, 리더십만 다 얘기하는 거예요. 
팔로우십, 따르는 자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그럼 다 리더가 되면, 따르는 사람은 없으니... 리더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다 대장 되려고 하니까. 

그러니 리더십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팔로우십이죠. 
먼저 잘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후에 그가 훌륭한 리더가 되는 거지요. 

잘 따르는 경험이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되면, 사람 잡는 거잖아요. 
모두가 주인이면, 종은 누가 하는 겁니까? 

십자가는 철저히 힘을 내려놓는 거예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예수를 잡으러 왔어요. 예수님은 순순히 자신을 
이미 개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내려놓으셨어요. 끝난 거죠. 자신을 순순히 내어주십니다. 

근데 베드로가 갑자기 칼을 빼가지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잘라버려요. 
마26:51~52절을 보십시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칼은 뭐예요? 힘이에요. 
힘을 가지고 힘을 쓰는 자는, 그 힘으로 망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걸 기억해야 돼요. 

힘이 좋아 보여요? 위험해요! 
그 다음에 주님이 하신 말씀은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3

예수님은 12군단이 더 되는 영도 동원하실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십자가 얼마든지 안 질 수도 있어요. 
아니, 십자가 지우는 자들을 다 멸하실 수 있어요.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4

베드로는 힘으로 주님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줄 아느냐?' 
주님이 만약 힘을 사용하셨다면, 구원사역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똑같아요. 세상은 힘을 추구합니다. 권력지향적이에요.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건 예수님을 돕는 게 아니죠. 예수님의 길을 방해한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여러분, 어디에서 사고를 칩니까? 내 힘이 들어갈 때에요.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할 때... 실패합니다. 

우리는 힘을 모으는데 익숙합니다. 내 힘을 과시하려고 하죠. 
내 힘이 약하면, 사람들을 모아서 연대를 합니다. 어딜 가나 힘을 자랑해요. 

예수님의 방식은, 전혀 달라요. 예수님은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힘으로 하셨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무리는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제 우리는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예수님에게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힘을 통해서 좀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여러분, 힘으로 승부하는 이유는 뭘까요? 힘이 있으면 효율적이잖아요. 
생산적이고, 눈에 띄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잖아요. 그것도 빨리. 

힘은 금방 효과를 드러내요. 빠른 승부를 보려고 하면, 힘이 필요합니다. 
권력을 가져야,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힘을 모으려고 하는 거죠. 힘을 쌓으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늘 우리가 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지배하려고 하고, 군림하려고 하는 욕망이 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자기 부인'은 뭘까요?
이 세상의 힘의 방식을 내려놓는 거예요.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언제에요? 
힘이 없을 때가 아닙니다. 반대죠, 힘이 많을 때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계속 뭐죠? 너의 힘을 가지고, 너의 힘을 사용하라는 거예요. 
이것처럼 매력적인 게 없어요. 힘은 엄청난 매력이에요. 

무슨 매력이에요? 너가 힘을 가지라는 말은, '네가 하나님이 되라'는 말입니다. 
힘을 가지면, 마치 내가 하나님이 된 것 같아요. 오~ 기분 좋죠.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힘은 인간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이란 거예요. 
힘 때문에 다 망해요. 로마도 힘 때문에 망한 거예요.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가 물리적, 세속적인 힘을 가지는 순간 부패했어요. 

교회는 힘을 모아서 과시하려고 하면 안 돼요. 
기독교는 수의 논리를 가지고 승리주의, 정복주의에 도취해서는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언제나 우리의 기준은 십자가이기 때문이에요. 
십자가를 놓치면 안 돼요.                       

훨씬 더 빠르고, 효율적이고, 유용한 방법이 눈에 띌 때가 위험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식을 언제나 붙들어야 돼요. 

이거는 기독교 역사 속에 늘 있어 왔던 반복된 실수예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힘의 추구가 아니라, 힘을 내려놓는 방식입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우리 교회가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면, 당장 십자가와 반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힘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교회죠. 
재정력도 있고, 사람도 꽤 있죠. 

그러나 그 힘을 자랑하는 순간, 세속적인 힘을 자랑하는 순간,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등지게 됩니다. 

가진 힘으로 겸손하게 섬기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 힘을 해체해야 돼요. 
힘을 모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십자가의 징표가 사라진 곳은, 기독교 신앙은 없는 거예요. 
기독교의 이름으로 하지만, 기독교는 아니에요. 

왜 하나님께서 십자가 라는 방법을 사용하셨을까요? 무능해서 그러셨습니까? 
여러분,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사랑하신 방식은, 힘이 아니라, 십자가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강요와 무언의 압력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힘 있는 하나님, 백마를 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하늘에서 팡파레를 울리면서 오셨습니까? No, 베이비, 아기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너 아프리카에 안 가면 죽인다' 해서, 그분들이 거기에 선교하러 갔습니까?' 
하나님이 '너가 봉사 안 하면 다리를 부러뜨려 놓겠다'고 하시니까 
겁이 나서 우리가 봉사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디베라 바닷가에 찾아오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 사랑하려고 하면 힘을 빼야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려고 하면, 아버지가 힘을 빼야 돼요. 
선배가 후배를 사랑하려고 하면, 힘을 빼야 돼요. 

능력이 많은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것을 줘요. 돈도 줘요. 
자녀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줍니다. 

그런데 자녀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능력이 아니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 사랑을 줄 수가 없어요. 
힘은 상대를 컨트롤하려고 합니다. 힘을 가지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대체물이 힘이에요. 왜요? 힘을 가지면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되는 거죠. 
오늘날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 경제적 성장이 일어나니까 기독교가 약화되잖아요. 
하나님을 안 찾는다니까요. 

우리는 경제적 성장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경제적 성장 이후에 찾아오는 인간의 태도는 돌변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매달렸던 자가, 힘을 가지니까 건방을 떠는 거예요. 

힘을 가져야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자꾸 오해해요. 내가 힘이 있어야, 하나님이 사용하실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힘을 빼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쓰십니다. 
우리가 쌓은 힘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 방해가 되기 쉽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힘을 우리가 스스로 안 빼니까,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방식을 통해 
힘을 빼실 때가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 힘을 완전히 빼신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어요.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어요. 그 주님의 모습은, 완전히 힘을 뺀 상태예요. 

십자가의 길은 힘을 빼는 길이예요. 십자가 자실 때, 주님이 무슨 힘을 준 게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힘을 통해 상대를 이용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힘을 쌓아 올립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독점합니다. 그 힘을 통하여 약자 위에 군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보십시오. 
당신의 모든 가지신 권리와 특권과 힘과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다 내려놓으셨어요. 
우리를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힘을 뺴셨는데, 우리는 그걸 실패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그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자꾸 힘을 쓰는 이유는 
힘으로 일이 된다고 생각하는 논리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힘을 빼면 상대가 나를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때는 죽어야죠. 

내가 힘을 빼야, 그때 하나님이 나를 살리시지요. 
내가 힘을 빼야,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 있는 거죠.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이 하시는 걸 보여주는 거잖아요. 

십자가는...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그 힘을 완전히 해체하셨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가 주장하고 싶은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3. 세번째, <십자가의 길, 자기 부인의 길>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상향성의 삶이 아니라, 하향성의 삶입니다. 
이것도 세상과 완전히 반대잖아요. 
여러분, 십자가는 세상의 가치를 전부 다 뒤집어 놓는 거예요. 

세상은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게 올라가는 구조예요. 
경쟁사회예요. 모든 사회 구석구석이 치열한 경쟁사회 예요. 
이겨야 사는 것입니다. 총성 없는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회는 특별히 그렇잖아요. 우리는 경쟁에 길들여져 있어요. 
이런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는 영웅들이 만들어져요. 
내가 영웅이 되거나, 영웅을 만들어 추앙하거나... 사람들은 영웅을 원하는 거죠. 

▲여러분, 왜 오늘날 사람들이 이렇게 외로움 속에 살고 있습니까? 
경쟁이 치열하면 이웃은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은 고립되는 겁니다. 
너와 나 사이에 경쟁해서 이겨야 내가 사는데, 
그 경쟁이 치열하면 고립될 수밖에 없고,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병이 드는 겁니다. 

높아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가치에 쩔어있습니다. 
그게 십자가의 방식은 아니에요. 십자가는 낮은 곳을 향하는 것입니다.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은 십자가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끊임없이 내려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 문만 나가면 경쟁의 치열한 사회에 우리는 직면합니다.
서로 높아지고자 발버둥치고, 성공의 욕망을 부추기는 문화 안에서 
아주 어린아이들까지도 그냥 공부에 내리몰아가고 있는데... 

그런 세상 가치는, 십자가의 원리와는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 겉도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 가서는 십자가 신앙을 말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사회의 가치관대로 살고...
말씀은 말씀대로, 삶은 삶대로... 이렇게 따로따로 이중적으로 신자들이 살아갑니다.

그 사회 통속적인 가치와 기독교 십자가 신앙간의 괴리현상을 이겨내기 힘든 거예요. 
정신 분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성경적 신앙과, 현실의 우리의 삶이 너무 갭이 크니까... 그냥 포기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고난주간에나 필요한 거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난주간용으로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고난주간인데도 십자가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1년 내내 십자가를 언급하지 않다가... 그럼 고난주간이라도 십자가를 언급해야 되는데,
고난주간에도 다른 주제로 집회를 가집니다... 심각한 현상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 신앙으로 세상 속에서 낮아지려고 한다!'
이거 미친 짓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은 다들 올라가려고 하는데, 스스로 낮아지려고 하다니...
자, 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구절 중에 하나가 빌2:6~8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비하 humiliation 와 승귀 exaltation 를 잘 설명하고 있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케노시스)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humiliation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9~10  Exaltation
 
여러분. 이거는 어마어마한 거예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그 시대의 종은 노예입니다. 
종(둘소스)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안 보입니다. 어느 정도로 내려가셨는지를 안 보입니다. 
어디에 계셨던 분인지도 우리는 잘 모릅니다.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지... 그런데 일단은 하나님의 본체세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지 아시지요? 이게 간단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높으신 리스도의 자기 비하, humiliation

예수님의 성육신, 어떻게 낮아지셨어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셨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복종하셨는데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곧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를 통한 메시지의 선명한 이미지는 
휴멀리에이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 

그리스도의 고난 주간에 우리가 경험하는 게 
자기 부인을 할 때, 그 자기 부인은 결국은 자기 겸손으로 나타나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특정한 일에만 겸손하신 분이 아닙니다. 
때때로 겸손하신 분이 아니고요. 
어떤 때는 좀 많이 겸손하셨다가, 어떤 때 겸손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우린 가끔 그러죠. 겸손이 대상에 따라 자꾸 바뀌어요. 
자기보다 좀 높은 사람 앞에서는 겸손하는데, 
조금 자기보다 직급이 떨어지면 막 대하죠. 그건 겸손이 아니죠. 
그건 이중적인 인격자예요. 

겸손의 수준을, 언제든지 이렇게 바꾸는 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에요. 
여러분 '향나무는 어디를 잘라도 향냄새가 난다'고 그러죠. 

겸손한 사람은 언제 만나도 겸손합니다. 누구에게나 겸손합니다. 부하 직원에게도 겸손합니다. 
근데 그게 어려워요. 존재 자체가 겸손한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필요에 의해 겸손한 경우가 많아요. 
자기 필요를 이루고,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
그건 겸손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겉으로는 겸손하게 보이지만, 가장 교만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겸손이 진정 무엇인지를 보여줘요. 
그래서 여러분, 내 안에 교만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십자가 앞에 딱 나아가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겸손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어거스틴은, '우리 신앙인의 생활 원칙은 
첫 번째는 겸손, 두 번째는 겸손, 세 번째도 겸손이다...' 라고 말하며 겸손을 강조했어요.

앤드류 머레이 (영어 명칭은 '머리') 는 <겸손>이라는 유명한 책을 저술했어요. 
이 책을 안 읽은 분은 간첩이에요. 꼭 이 책을 읽으셔야 돼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 십자가는 그걸 말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나'라는 존재를 봐야 돼요. 

여러분 우리에게는 내세울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게 하나도 없어요. 
잘난 게 하나도 없어요. 십자가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소망이 없는 죄인에 불과했어요. 
그래서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고 
바울이 고백한 거죠.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교만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어디까지 내려가셨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십자가는 단연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내려가고 내려가고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삶!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뚜렷한 발자국인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고 했다면, 
이제는 세상 사람들처럼 '위로 오르기 게임'을 끝내야 돼요. 

문제는 쉽지 않아요. 우리가 쉽게 넘어집니다. 왜요?
교만은 인류의 원죄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이 교만의 죄는 사라지지 않아요. 

마귀가 얼마나 강력하게 교만으로 유혹합니까? 마귀의 속성이 뭐죠? 교만이죠.
사14:13~14절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이게 마귀의 근본적 속성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범한 죄는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뚜렷한 속성이 드러나는 게 언제냐?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핵심 사역이 뭐냐? 신자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 자기를 부풀리라는 거죠. 
더 높은 곳으로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찾아와 똑같이 유혹을 하잖아요.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보세요. 높은 곳! 

그처럼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는 그 높은 곳,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라!' 
여러분 마귀는 계속 우리더러 올라가라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어요. 
여러분, 높은 곳으로 가는 건 쉽습니다. 박수 쳐주고, 인기가 치솟고, 사람들이 환호하고...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내려가신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더 내려가실 곳이 없는 지경까지! 

여러분, 우리는 교만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교만을 가볍게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살다보면 교만할 때도 있지...'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살인과 간음, 도둑질, 때로는 마약 중독 같은 것을 심각하게 여기는 건 뭐 맞죠. 
그것들은 심각한 죄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들에 비해, 교만이 작은 죄가 아닙니다. 

살인, 강도, 간음.. 그것보다 교만이 약한 죄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강력한 범죄가 교만입니다. 

교만은 원지의 핵심이라고 그랬잖아요. 
여러분, 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까? 
그 교만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그 교만이, 그리스도를 죽인 거잖아요. 
교만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겁니다. 
교만하면 무슨 죄도 지을 수 있는 상태예요. 

여러분 교만은 일상에서 늘 고개를 듭니다. 
누가 나보다 더 멋져 보일 때, 그를 축복해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내 마음에 배가 아파해요. 나보다 더 능력이 있을 때, 
나보다 더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때, 
나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이 나보다 더 탁월함을 보일 때,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을 때, 내 감정이 상하거나 위축되거나 헐뜯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교만이 그 안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 상황도 그래요. 

나보다 좀 못한 사람을 보는 순간,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거는 교만한 거예요. 
나보다 멋있는 사람이 있으면 인정해주고 축복하고 칭찬해주고 하면 되는데 
비위가 상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우월감이 찾아온다면... 그건 교만이 작동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자존심 싸움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거죠. 
은근히 나를 높이려고 하고, 누가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열을 받고...

여러분, 사고가 어디에서 터집니까? 내가 교만을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경쟁하고, 시기 질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다루십니다. 
교만하면 반드시 그 교만 때문에 사고가 나거든요. 

우리의 고통의 원인은 교만입니다. 상처를 왜 받습니까? 교만하다는 뜻이에요. 
왜 화를 냅니까? 언제 유혹을 받습니까? 
내 교만을 처리하지 않으면, 내 삶은 계속 꼬이게 돼 있어요. 

왜 관계가 자꾸 뒤틀립니까? 교만한 겁니다. 
그러니까 내 주변에 사람이 자꾸 떠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이에요. 

교만은 쓸데없어요. 교만을 환영하는 곳은 아무 곳도 없어요. 
교만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겁니다. 거부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인 우리는 올라가는 길이 아니고,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눅14:11절에 '무릎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여러분, 내려가면 불편하십니까? 아니면 거북하십니까? 
여러분이 마음을 높이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일을 맡길 수도 없습니다. 맡기면 사고치는데요. 
자기의 왕국을 세우고,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맡기시죠?

여러분, 교만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겸손해 보세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겸손하면 사방에서 막 나를 불러요. 마음을 낮추면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여기저기에서!
광야에서 그냥 꼭꼭 숨어있어도 불러내세요. 

그런데 진짜 겸손한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를 불러서 쓰고 싶은데, 진짜 자기의 왕국, 자기의 비즈니스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일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많지 않아요. 


정리합니다. 자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은 '자기 부인'이에요. 
자기 부인의 첫 번째는 이기심을 버리는 거예요. 이기심과 싸우는 거예요. 
이기심을 내려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자아가 죽고, 힘을 빼고, 내려가는 삶을 살면... 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자아를 포기하면, '누가 내 인생을 이제 막 덮칠 것 같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내 자아가 죽고, 힘을 빼고, 내려가면... 세상에서는 그걸 '망한다'고 얘기해요. 
'너 그러면 망한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얘기해요. 
그러나 세상의 논리에 속지 말라고요. 
그건 세상에서 너무 오랫동안 배워왔던 거기 때문에, 
힘을 안 빼려고 그러니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끊임없이 힘을 쌓으려고 하고, 자기를 확대하려고 하고, 
자꾸 기를 쓰고 올라가려고 그래요.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데도... 기를 쓰고 올라가려는 거예요. 
이렇게 이 십자가의 길은, 패배자의 길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데 그 길이 승리의 길입니다.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다. 그 길이 복된 길입니다. 
그 길을 걷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승리의 삶으로, 풍성한 세계로, 
우리를 아름답게 들어 사용해 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십자가를 드러낸 증인으로 사용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자 우리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겠습니다. 
'주여!' 크게 한번 주여 외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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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말씀의 원리 대로 양보하며 살았던 사람의 예

 

필라델피아에 가면 유펜 대학이라고 있습니다. Univ. of Pennsylvania

그 대학교 학생들이 몇 백명 안되던 옛날에 초창기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학생들이 전부 기숙사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어있었는데

개학이 되면 보따리를 들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방을 정하게 됩니다.

 

방을 정하게 될 때는, 언제든지 먼저 온 사람이 우선권이 있습니다.

먼저 와서 좋은 방을 가지고, 그런데 기숙사 방이 다 똑같지가 않잖아요?

계단 밑에 있는 방도 있고, 화장실 옆에 있는 방도 있고,

시끄러운 문간에 있는 방도 있고, 여러 방이 있는데

 

먼저 온 사람이 언제나 제일 좋은 방.

그 다음 사람이 와서 그 다음으로 좋은 방을 선택하고, 방을 이렇게 얻게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학생 하나가 가방을 가지고 와서 내려놓고 “제게 방을 하나 주시죠.”

그러니 총무처장이 “그래. 어떤 방을 원하는가?” 했더니,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겁니다.

 

“다른 학생들이 다 가지고, 남는 방이 있으면 제게 하나 배정해 주세요.”

 

총무처장은 수십 년 동안 일을 했지만, 이런 학생은 만나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아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아니, 다른 분들 다 방을 정하고, 뭐 계단 밑이라도 좋습니다. 남는 방을 제게 주세요.”

 

그러니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또한 이웃을 존중하고 배려하라는 성경말씀을, 실천하고 사는 젊은이였지요.

 

그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 옆에서 대학 총장이 이 대화를 들었어요.

‘내가 이 수십 년 대학 총장 경력에 이런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그래서 그 학생 이름을, 총장은 자기 수첩에 딱 적어놨어요.

‘이 학생이 장차 어떻게 되나 보자...’

 

오랜 세월 후에 그는, 그 대학의 총장이 됐어요.

여러분, 이런 양보, 이러한 친절을 베풀어 보신 적 있습니까?

‘다른 사람 다 좋은 거 갖고, 그저 남는 거, 굳은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 자세를 갖고 산다면, 이런 신앙 철학을 갖고 일평생 산다면,

그는 장래에 큰 인물이 되는 길로 점점 나아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