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6장 부활,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
https://www.youtube.com/watch?v=xH4VM27yaYA
◈부활,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 막16:12~15 2025.04.20.
※다소 변증적인 내용입니다. 청년 세대는 변증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막16:12~13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고
그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토요일에 안식일에, 무덤에 머무시다가
안식 후 첫날 주일에,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전혀 알지도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던 제자들은
여전히 낙심과 절망 가운데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이른 새벽 시간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무덤에
향품을 들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향품을 미처 바르지도 못하고,
보니까 무덤에 돌문이 굴려져 있고, 천사가 나타나서
'너희가 찾는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하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여인들 중에서 끝까지 무덤에 남아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이 누구죠?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과,
그리고 자신을 만나 주셨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것이 일요일 새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막16:12~13절은, 그 이후에 일어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시골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죠.
눅24장의 대조본문에 보면, '시골'이란 엠마오죠.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온천 휴양 도시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나서, 얼마나 절망과 낙심 가운데 있었어요?
그런데 첫 번째 부활절 이른 아침에, 여인들이 무덤에서 돌아와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전한 거예요.
그래서 '혹시나?' 했겠지만,
그날 오전이 시간이 다 지나고, 정오가 지나고, 오후가 돼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진짜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면, 나타나셔야 되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으세요.
그러니까 '그건 허무맹란한 소리지...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히 염원하니까
그런 헛것을 보았나?' 두 제자는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늦은 오후에
포기하고 거기를 떠나서 엠마오로 간 겁니다.
'이 스트레스를 주는 예루살렘에서 떠나서 좀 쉬러 가야겠다'하는 생각이었을까요?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게 된 거예요. *온천휴양도시
그런데 엠마오로 가는 여정에, 예수님이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in another form, in a different form
그런데 여러분,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못 알아본 것입니다. ↙
눅24:15~16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 하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장차 그리스도가 오시면 고난을 당하시고,
그리고 부활하셔서 영광 가운데 이르신다... 하는 것을 계속 (성경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랬더니 마지막에는 결국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예수님은 사라지시고,
두 제자는 '저녁이나 먹자' 그러고 앉아 있지 않고,
눅24장을 보면 즉시로 예루살렘으로 달려옵니다. 10KM니까 좀 시간이 걸렸겠죠.
게다가 밤이고, 산길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을 거예요. *약3시간
그래서 두 제자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했어요.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 때처럼 똑같이, 여전히 다른 제자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13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계속 반복됩니다. ↙
◑막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제자들이 혼란 가운데 빠져서 그날 (부활 당일) 하루를 정신없이 지낸 것 같아요.
사건의 재구성을 해보면, 위 14절은 좀 늦은 시간이에요.
'그 후에 after this'
두 제자가 엠마오에서 돌아온 후로 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돌아온 시간은, 이미 저녁이 지난 밤 시간이었습니다.
왜냐면 두 제자가 예수님과 엠마오에 도착해서 저녁 식사를 하려 했잖아요.
저녁 식사를 하려다가 관두고 달려온 거기 때문에,
3시간 걸려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른 제자들을 만날 때는 한밤중이었겠죠. :14
두 제자의 보고를 듣고 나서, 제자들이 그제야 저녁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제가 이렇게 상상을 해보면, 예수님이 꼭 식사시간에 자주 등장을 하시더라고요.
그리고는 '예수님이 나타나시자마자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14
두 가지를 책망하셨는데
-너희가 믿음이 없구나
-너희 마음이 완악하구나
이 두 가지를 혼내셨어요.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돌처럼 굳은 마음 이 hardened heart 인데
부활의 사실을 한두 사람이 전한 게 아니잖아요.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전했죠. 엠마오 길의 두 제자가 전했죠.
그러면 믿을 만도 한데... 이걸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복음서 중에 순서상으로는 마태복음이 제일 먼저 나오지만
기록 연대상으로는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봅니다.
마가복음은 마가요한이 사도 베드로를 좇아다니면서
'베드로가 집회 때 설교하는 것을 듣고 기록했다' 이렇게 보거든요.
그래서 마가복음은 일명 '베드로복음' 이라고도 합니다. 베드로의 특징이 많이 나옵니다.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냐면, 마가복음을 보면,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을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혼난 얘기를 많이 해요.
베드로가 좌충우돌 이런 스타일이었잖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계속 전해 들으면서도
11절에도 '믿지 않았다'
13절에도 '믿지 않았다'
14절에도 '믿지 않아서 혼난' 얘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활은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라는 것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문제 제기
제가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것은,
여러분, 죽은 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부활)이 쉬운 일인가요?
쉽다, 어렵다를 떠나서 이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불가능의 선을 넘어오셨는데,
이것보다 오늘 본문에서 훨씬 더 어려워 보이는 것은
불신에서 → 믿음으로 그 한 걸음을 옮기는 게 더 어렵더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마어마한 선을 넘어오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엄청난 선을 넘어 오셔서,
(부활을 믿으라고)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데,
그 믿음의 문을 여는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사람들은 그 선을 넘기를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성경 역사를 보면, 광야 1세대가 광야 40년을 도는 동안
일관되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성경을 읽다 보면 '징그럽다. 정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당시에 초강대국이었던 이집트에서
하나님이 강력한 능력으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그들을 탈출하게 하시잖아요.
홍해라는 바다를 가르시고,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40년 동안 인도하시고,
매일같이 6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만나를 내려서 먹이셨잖아요.
여러분, 이 정도의 기적을 체험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네, 다 고개를 끄덕이시는군요.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보면,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결핍의 순간을 맞이하면
마치 한 번도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왜 하나님은 나를 안 도우시지?, 왜 하나님은 나를 홀로 두시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이런 불신이, 우리 가운데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는 거예요.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조차 믿지 못했던 이 제자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을 해보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그 돌문 하나를 못 옮기시겠는가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죽은 자 하나를 살리시는 게 어려운 일이겠는가요?
예수님도 공생애에 죽은 자들을 살리셨잖아요.
그런데 그 기적을 봤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왜 못 믿었을까요?
이 모든 일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는 부활의 사건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가장 어려운 일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 자를, 그의 불신에서 → 믿음으로 그 한 걸음을 옮기게 하는 것,
이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기 어려워하시는 것은,
그분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자기 의지로, 자원함으로, 부활의 믿음을 고백하기 원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자마자, 왜 제자들을 다그치고 혼내셨을까요? :14
예수님은 지금 사망에서 생명으로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오셨잖아요.
천상에서 지상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엄청난 선을 넘으셨다고요.
그런데 제자들은 불신에서 → 믿음으로 딱 한 걸음만 넘으면 되는데,
그 선을 넘어오지 않고 있었던 거죠. 부활은 그들에게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어휴, 이거는 믿을 수 없어'
인생을 살다가 그런 얘기를 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요?
한 세 가지 정도로 원인을 분석해 봤습니다.
1) 첫 번째는 그게 사실이지만 너무나 나쁜 일일 때,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보이스피싱으로 정말 소중한 재산을 너무 많이 잃게 됐을 때,
-또는 오랫동안 갈망하면서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했는데 중요한 입시에 떨어졌을 때
-내 가장 소중한 가족을 잃게 됐을 때
우리는 '아니야, 이건 사실이 아니야, 난 믿을 수 없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되죠.
제가 2005년도에 캐나다 벤쿠버로 목회지가 결정돼서 가게 됐을 때,
그때 저희 어머님은 이미 근육계 질환으로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으신 상태였어요.
그래서 얼마 더 살지 못하신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그 이듬해 2006년도에 저희 큰형이 캐나다로 전화를 해서
'어머님이 소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분명히 형이 얘기를 했기 때문에 사실이잖아요. 그렇지만 제게 현실감이 없는 거예요.
제가 웬만해서는 잘 충격을 안 받는데, 그 날은 그냥 하루 종일 방에 주저앉아서
멍하니 있었던 것 같아요. 현실 인식이 돌아오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찾아보니까 '아주 어려운 일을 당하고 힘든 일을 당했을 때
현실 인식이 아예 돌아오지 않으면 정신질환이 생기는' 거예요.
PTSD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해리성 기억상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언제 우리는 '믿을 수 없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되는가 하면,
-이게 사실이라면 너무나 좋은 일일 때,
-또는 너무나 나쁜 일일 때!
-제가 이거를 여러분에게 권하지는 않지만 설명을 드리면
우연히 산 로또가 1등에 당첨됐을 때, 심장마비에 걸리시면 안 돼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너무나 어려웠던 사업이, 갑자기 대박이 났을 때,
-그토록 오매불망 짝사랑하던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겠다고 하는 날이 왔을 때
(기혼자들은 좋아하시면 안 돼요)
'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야,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때 자기 볼을 꼬집고, 자기 살을 꼬집어 봅니다.
이때 믿을 수 없는 반응을 보이게 되죠.
3) 세 번째는, 이게 사실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 불가능한 일일 때
사람들은 '믿을 수 없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거예요. *본문의 제자들의 경우
풍랑이는 바다에 예수님이 함께 배를 타고 가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날은 갑자기 너무 풍랑이 많이 일었고,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셔서 거의 기절하듯이 주무시고 있었잖아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우리가 죽게 됐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고 나서 제자들을 혼내셨어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막4:40
베드로는 주로 혼난 기억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른 대조본문을 보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약간 이렇게 좀 부드럽거든요.
근데 마가복음은... 어투가 직선적이고, 투박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혼낸 내용을 적나라하게 그대로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요!
(베드로가 마가복음을 구술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여튼 마가복음에는, 베드로가 혼난 기억이 자주 나와요. *자신이 구술하니까 솔직히 기술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서 그랬는지, 예수님이 혼내셨어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러나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풍랑이는 바다를 사람이 어떻게 잠재웁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걸 '너희가 못 믿는다'고 야단치시는 건 좀 무리수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부활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고,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은 너무나 나쁜 일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고,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일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부활은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사실이 되기에는 너무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던 거예요.
▲제가 어제 이 부활,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됐어요.
중요한 겁니다. 잘 들어보세요.
부활은 나쁜 일, 좋은 일, 어려운 일 ... 이 세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걸 넘어서서 '이미 일어난 일'이었어요.
우리가 이걸 뭐라고 얘기하냐면 '기정사실'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제자들을 보면서 책망하시고 안타까우셨던 것이
예수님은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잖아요.
그런데 늦은 저녁까지, 거의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도 안 믿어주는 거예요.
예수님 입장에서는 '야, 이거는 이미 사실이지 않니?
너희가 그것을 좋은 일이라고 해석하든, 나쁜 일이라고 해석하든,
어려운 일이라 해석하든, 해석은 너희에게 달려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 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미 살아난 예수님을, 막달라 마리아도 만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만났고, 그래서 그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했는데,
이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돌처럼 굳어져서 '기정사실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거죠.
▲제가 이번에 쓴 책의 제목을 정했는데 <새신자가 묻다> 이렇게 제목을 정했어요.
부제로는 '그리스도인이 꼭 알아야 할 기독교의 진리 이야기'
모든 내용을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을 했습니다.
저 자신도 워낙에 의문이 많았던 사람이고,
창조에 대해서, 기적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들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성경적으로
답변을 해놓은 내용이에요.
그중에서 「챕터 1 신론, Why God」 부분에서 제가 이런 내용을 써놓은 것을
한 가지 언급하겠습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무신론 철학자 중에 한 사람이 앤서니 플루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고전적 무신론의 대표적인 기수였어요. 무슨 이야기냐면
'충분한 과학적인 증거가 있지 않는 한 신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 라고 보는 거예요.
그는 고전적 무신론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이 사람이 반대로 유신론 진영을 보면서, 한 가지 비판을 합니다.
그 비판을 한 게 뭐냐면 '신이 존재한다면, 자기는 그걸 믿지 않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부활이 훨씬 더 있을 법한 일이 된다' 이 얘기를 했어요.
이 얘기를 왜 했을까요? 영국의 기독교인들이 '신 존재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런데 부활을 안 믿는대요.
'도대체 당신들은 뭐하는 거냐? 그건 모순이다.
나는 신을 안 믿으니까, 부활도 안 믿지만
당신들은 신을 믿는데, 어떻게 부활을 안 믿을 수 있느냐?'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는 2010년도에 돌아가신 분인데, 2004년 12월 9일에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는 과학적 증거에 근거에서, 신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을 한 거예요.
그리자 무신론 진영이 난리가 난 거예요.
이 사람이 이 고백을 하게 된 이유는,
유신론/ 무신론 논쟁이 최근에는 생물학, 바이올로지에서 →
지질학으로, 그리고 우주론으로 넘어왔거든요.
그런데 '우주론적 차원에서 볼 때, 어떻게 신이 존재하지 않고
이 질서정연한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느냐?
이 우주의 규칙성과 보편성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우주의 질서는, 신 존재의 가장 강력한 증거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이 광활하고도 질서 정연한 우주의 지적 설계자이신 신의 존재,
곧 하나님을 믿게 된 거예요. 할렐루야!
여러분, 천지창조는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을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라는 반응은 사람들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그것은 해석의 문제죠. 천지창조는 이미 일어난 일이다. 기정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이미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기정사실이죠.
다만 그것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인 거예요. ★
천국은 이미 다가오고 있는 실체입니다.
종말의 시나리오를, 게시록의 내용처럼,
이 시대에 그대로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것이에요.
물론 믿기 힘들겠지만,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라는
사람들의 반응과 해석의 차이가 있을 뿐인 거예요.
천지창조는 기정사실이고, 그걸 흔들려해서는 안 되고,
다만 믿느냐/ 안 믿느냐... 사람마다 그 차이는 있죠. *주제
그러므로 우리가 창조, 부활, 천국의 사실성을 믿든지/ 아니 믿든지 간에
하나님께 영향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사실 하나님의 현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어요.
자, '예수님이 살아나셨는가?'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도, 하루 종일의 시간이 지났지만, 제자들이 안 믿었잖아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는다고... 예수님의 부활이란 팩트가 사라지나요?
아니면 다시 무덤에 들어가시나요? No
아무런 변화가 예수님께는 영향을 미치지 못해요.
그러나 누가 문제가 되느냐?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결정한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볼 것인가요?
▲제가 어제 이 본문을 곰곰이 묵상하다가,
'아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것도 봤고,
정말 많은 기적을 봤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 이상하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니까, 이게 갑작스러운 태도가 아니라,
그 이전에도 받아들이지 못했더라고요. 부활 이전의 사건이 뭐였어요? 십자가잖아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부터 받아들이질 못했더라고요.
막8:31~3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님이 '십자가'를 너무나 명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 얘기를 세 번이나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알아들을 만큼 얘기하셨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막8:31~32
베드로가 도리어 '그런 십자가 지시는 일은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항변하다가,
이어지는 33절에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래서 베드로는 혼이 나죠.
여러분, 십자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가 되면,
부활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활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활 생명이 왜 내게 소중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사함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예수 그리스토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한 세트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잖아요.
그러니 부활도 더더욱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나의 영원한 구주가 되시는구나'
이걸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부활? 그걸 무슨 과학주의 시대에 믿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되는 거예요.
피트니스 운동하는 사람들이 구호처럼 외치는 말이 뭐냐면 No pain No gain 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그래서 구슬땀을 흘리고, 근육통이 와도 열심히 운동하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십자가와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가 없다면 면류관도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고백하지 않는데,
어떻게 의의 면류관, 천국에서 생명의 멸류관을 얻겠느냐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우리의 중심에 받아들일 때,
부활이 우리에게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고난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부활의 소식이 반전의, 승리의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 광야 같은 인생의 시간들을 지나갈 때
주저앉고 포기하지 말아야 될 것은,
이 광야를 지나서 우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고통의 시간을 지나갈 때,
이걸 외면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해야 되는 것은
그리고 이 십자가의 사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되는 이유는,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내 인생에 이런 십자가를 주십니까?
-때로는 내 사명이, 나의 십자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사람이, 내 인생에 내가 지고 가야 되는 관계의 십자가가 되기도 하죠.
이 힘든 것을 왜 내게 주십니까?
그 십자가가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십자가를 내려놓잖아요.
그럼 부활의 자리에 이를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사명의 십자가를 하나님이 왜 내게 주셨는지를 받아들이는 사람,
그걸 기꺼이 받아들여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가는 사람에게
부활의 영광과 승리가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4절과 15절을 이어서 보면, 14절에 방금 전에 혼내시고
15절에 갑자기 '너희는 온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니까
'주님, 진도가 너무 빠르십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하셨겠어요?
그 제자들이 불신에서 → 믿음으로 딱 한 걸음만 옮기면
놀라운 복음의 역사, 은혜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폭발적으로 흘러갈 것을
예수님은 아시는 거예요.
제자들은 이미 3년 반을 좇아다니면서,
복음의 정수이시고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됐잖아요.
그들에게 컨텐츠가 없는 게 아니라고요. 솔루션이 없는 게 아니라고요.
그런데 여기(부활) 대한 그들의 관점이, 또는 확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그 한 발만 넘어서면, 그들을 통해서 놀랍게 오버플로잉,
넘쳐 흐르게 될 것을 주님은 아셨던 거예요.
▲부활,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마지막 한 가지를 나누겠습니다.
인생은 동일한 구간을 지난다 할지라도,
관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체험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문학이나 역사학에서는 '해석학적 관점'이라는 말을 하는 거죠.
그럼 우리는 '믿음의 관점을 가질 것이냐' 아니면 '불신의 관점을 가질 것이냐?'
하나님을 '공의의 관점'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사랑의 관점'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서
하나님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멘!
자, 다윗이 시편 23편을 쓴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보겠냐는 거죠.
'아 난 죽었다. 내가 사망의 골짜기로 들어오다니...' 이렇게 생각할 것인가요? 아니면,
'나의 인생에는 소망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목자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테니까'
이런 관점으로 볼 것인가요?
여러분, 목자가 데리고 들어온 길이에요. 나 혼자 가도록 내버려둔 길이 아닙니다.
그럼 왜 목자가 여기로 인도했는가요?
이 구간을 지나야만, 또 다른 푸른 초장과 실만한 물가가 나오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목자에 대한, 믿음의 관점을 가질 것인가,
불신의 관점을 가질 것인가요?
제가 어제 이 짧은 본문을 묵상하다가, 오늘 계속 베드로 이야기 했잖아요.
베드로는 계속 혼난 것만 성경에 나오는데,
그런데 똑같은 사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장면에서,
사도 요한은 좀 다르게 봤어요.
본문 마가복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는 믿음도 없고, 마음도 완악하고...' 이렇게 엄청 혼난 걸로 기록했는데,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막16:14
반면에 사도 요한(요한복음)은, 끝까지 믿지 못했던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손에 못자국을 보여주시고,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주시고...'
예수님이 너무너무 친절하시잖아요. 그렇게 요한복음을 기록했어요.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믿을 수 있게 해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의 말씀을 하세요.
요20:19절과 22절입니다.
요20: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아멘
요한(요한복음)은 베드로과 (마가복음과) 기억(기록)하는 포인트가 달랐어요.
요한은 기록하기를, 예수님 나타나셔서 '너희들 많이 불안했지?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얼마나 그 평안이 놀라운 평안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불신에서 믿음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그들이 넘어올 수 있으려면,
성령이 임하시지 않고는 불가능하잖아요.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믿음의 확신을 주셔야만 가능한 일이고
성령께서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처럼 흘러나오는 그 샬롬의 평강을
주셔야만 가능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할렐루야! 우리 주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