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겔37장 마른 뼈에 생기가

LNCK 2025. 4. 24. 10:4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부활

https://www.youtube.com/watch?v=sKqzZcQ6IvQ
4:40초 부터 녹취


마른 뼈에 생기가                겔37:1-14                   2025.04.20

오늘은 에스겔서 47장을 통해서 부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본문 에스겔서 37장은 부활의 장면을 아주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멈춘 곳, 절망과 사망이 가득한 곳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서 
마른 뼈들이 다시 살게 되는 이 위대한 장면을 부활의 장면을 
에스겔 선지자가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도 마른 뼈가 살아나고, 다시 생기가 돌아오고 
여호와의 큰 군대로 일어나게 되는, 부활의 역사가 충만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겔37:1~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여기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지나게 됩니다. 
여기서 '뼈가 말랐다'고 하는 건 무슨 의미냐 하면, '죽은 지 오래되었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부활은 여러분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나사로가 다시 살 때도 그렇고,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것도 그렇고, '죽은 지 사흘이 지나서' 라고 하는 
'사흘'을 꼭 집어넣습니다. 즉 완전히 죽었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가끔 있지만, 죽은 줄 알고 이렇게 안치했는데 
살아나시는 일들이 가끔 있죠. 고대 사회에는 더 많았을 겁니다. 
왜냐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서 오진도 많았을 거고요. 

그러다 보니까, 사흘까지 기다리다가 매장하는 문화가 생겼어요. 
사흘까지는 혹시 살아날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는 거죠.

그러니까 부활은, 사흘이 지나서 일어났다는 거예요.
기절했다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거죠.

오늘 본문에도 '마른 뼈들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마른 뼈는 뭐냐면 '죽은 지 오래됐다'는 거죠.
뼈가 말랐다는 것은 이미 죽은 지 오래 지났다... 이런 뜻입니다.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죠. 
더구나 그런 뼈들이 하나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했대요. 심히 많았대요. 
무슨 얘기냐면, '완전한 절망이 가득한 곳이었다'는 거예요. 

완전한 절망과 죽음이 가득 덮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예요.      *주제

완전한 절망이 가득한 곳, 소망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한 그 곳 
'이제 끝났어, 더 이상 해 볼 게 없어. 다른 길은 없어!' 하고 모든 가능성을 내려놓는 곳, 
그곳이 부활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아멘! 

▲맞아요. 우리가 가치를 두고 의지하던 육체의 소망이 완전히 무너져야 
비로소 영의 생명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영적인 원리예요. 

우리 안에 뭔가 육의 힘들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아, 저렇게 하면 될 것 같아, 
내가 이것을 조금만 더 하면 그게 (내 소원, 내 야망 성취가) 가능할 것 같아' 
이런 것들이 남아 있을 때는, 영의 생명이 역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영은 언제 역사하냐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육체가 다 무너질 때,  
'이건 해봐야 안 돼,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 사실 이게 교만이거든요. 
세상의 어떤 가능성... '이렇게만 하면 될 것 같고, 조금만 더 하면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이런 것이 완전히 무너질 때... 그때가 하나님이 역사하신 때라는 거예요. 
그때가 부활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의 시작점은 '사흘이 지난' 때입니다. 
그래서 나사로 같은 경우에는 '이미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그때 예수님이 오신 거죠.

또 에스겔서 본문의 경우에는 '뼈가 완전히 마른' 그런 곳에서 시작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완전히 절망스러워 보이는 상황들이 있다면, 
어쩌면 지금이 부활이 시작될 때인지 몰라요. 
완전히 절망스러운 가운데,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는 법입니다!

그런 절망적 상태에 빠져있는 분에게, '할렐루야! 챤스가 왔네'하고 외치라고는 
제가 말씀은 못 드리겠어요.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요. 

그러나 절망하지는 마십시오. 완전히 끝난 것 같은 그 때가, 
영이 새롭게 시작되는 때일 수도 있어요. 

우리의 육체의 소망이, 나의 힘이, 세상적인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때가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때일 수 있어요. 영의 역사는 항상 그렇게 일어나요. 
그러므로 여러분, 절망이 아니라, 소망과 믿음을 붙잡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오늘 본문이 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부활은 하나님께 속한 거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물으십니다. '이 마른 뼈들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게 여러분, 물어보나마나죠. 상식적으로 마른 뼈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오래되어서 메말라버린 뼈가, 어떻게 다시 사람으로 살겠어요? 

이 땅의 원리로는, 상식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런데 에스겔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서 '아시나이다'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히브리어 '야다'입니다. 
단순히 정보를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 야다는 항상 경험적인 지식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히브리어를 그대로 뉘앙스를 살려서 번역하면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뜻이 돼요. 

에스겔이 뭐라고 고백하냐면 '상식적으로는 안 돼 보이지만,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속한 일이에요.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도, 예수님의 어떠하심이나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부활이 일어난 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일이에요. 

그래서 이 부활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얘기하고 있나를 들어보십시오.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부활의 역사에는, 주어가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부활은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일으키시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힘과 의지로 행하신 일은 십자가까지예요.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사 십자가에 오르시기 까지가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요. 
그 이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게 여러분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까지예요. 
겸손하게 더 낮아지고, 죽기까지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기까지가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고, 그 뒤의 일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육체를 허무는 일, 
내 육신을 의지하고 세상적인 힘들을 의지하고 하는 것들을 
십자가에서 다 내려놓는 것까지가... 우리가 하는 일이에요. 
거기까지가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고, 부활은 누가 하시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부활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함께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보이는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 아무리 참담해도 
부활은 그 눈에 보이는 상황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라 하더라도 부활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부활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부활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능력에 속한 것도 아니고, 이 땅의 방법에 속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이 하시겠다' 하면, 행하시는 것이 부활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부활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이게 부활의 원리예요. 

땅에서 우리가 해야 되는 사명은 어디까지라고요? 십자가까지, 죽기까지 순종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기까지가... 우리가 하는 일이고요.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혹시 지금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지나고 계십니까? 
아마 그러신 분들이 계실 거예요. 낙심하지 마십시오. 

목회자인 제가,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들한테, 
'할렐루야를 외치십시오!' 이렇게는 차마 얘기를 못하겠어요. 
힘든 시기를 통과하는 거를 알거든요. 맞아요. 힘들고 괴로워요. 

그러나 낙심하지는 마십시오. 보이는 상황이 절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거예요.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이 낙심스러운 것은, 
보이는 상황과 '내 능력'을 자꾸 비교하는 거예요. 그러면 낙심하기 마련이죠.

세상 방법으로 '이걸 해결할 수 있을까? 이걸 극복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낙심이 찾아오는 건데, 크리스천이 살아가는 방식은 그게 아닙니다. 
내 힘으로 이것을 극복하는 게 아니에요. 내 힘으로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하나님 옆에 겸손하게 무릎 꿇고, 내 육신의 힘을 내려놓고 
십자가에 오르는 것까지... 그건 할 수 있거든요. 

그게 (십자가)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고, 
그 이후의 부활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소망을 잃지 말고 끝까지 부활의 소망 가운데 걸어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반전의 역사가 반드시 있을 겁니다. 

◑37:4~6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세 번째 메시지는, 부활에는 대언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들을 향해서 대언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요. 여러분, 부활은 분명히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마지막 때 우리 부활은 하나님께서 하실 거예요. 
그러나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며,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는 부활의 역사들에는 
대언자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부활에는 반드시 대언자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 우리가 부활할 땐 누가 대언하실까요? 예수님이 하시는 거죠. 
하여간 부활에는 대언자가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대언하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끌어서, 마른뼈 골짜기의 한가운데 세우세요. 
그런데 그렇게 세워놓고는 '잘 봐, 내가 마른뼈들을 일으킬 게' 
그리고 하나님이 마른 뼈들을 직접 막 살아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을 통해서 마른 뼈가 살아나게 하시죠. 에스겔에게 대언하게 하세요.

이것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 또 부활의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부활은 맞아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그 일의 통로, 대언자로 사용할 사람을 찾으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크리스천은 끊임없이, 이 부활을 대언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주위에 여러분, 마른 뼈들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부활을 선포하십시오. 

마른 뼈와 같은 상황이 보이십니까? 부활를 선포하십시오. 
'생기야 들어가라, 생기야 사방으로부터 불어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들을 살아나게 하라'
하고 선포하십시오.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지나고 계십니까? 부활을 선포하십시오. 
'생기야 들어가라, 마른 뼈야 살아날지어다!'
이 대언, 이 에스겔의 믿음의 대언을 통해서, 마른 뼈들이 살아나게 됐잖아요. 
이게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이게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부활에는 대언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마른 뼈들을 향해서 선포할 사람, 
세상의 기준으로는 소망이 없고, 세상의 기준으로는 절망적이고,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미 죽어버린 마른 뼈지만, 

그 절망적인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봄으로써  
대언하는 사람을 통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이 에스겔의 외침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이 땅의 교회들 가운데, 이 나라와 민족 가운데, 
우리 가정 가운데... 마른 뼈들을 향해서 외치는 사람! 

'생기야 불어와라' 하고 대언(기도)할 사람, 
'마른 뼈야 살아나라' 이렇게 선포하고 외칠 사람, 이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시고요.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마른 뼈를 살아나게 하세요. 

이 외침은, 어떻게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외침입니다. 마른 뼈가 어떻게 살아나겠어요?
그러나 믿음으로, 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을 향해 외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대언될 때, 에스겔서 37장의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크리스찬은, 이 세상의 힘으로 살아가거나 
이 세상의 방법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대언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된다고 했으면, 되는 거고,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시면, 되는 거고, 
그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대언함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37:7~8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에스겔이 대언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소리가 나면서 뼈가 맞춰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뼈 위에 힘줄이 생기고, 힘줄 위에 살이 덮이고, 살 위에 피부가 덮입니다. 
몸이 살아난 거죠. 육체의 회복입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상황이 바뀌는 거예요. 외적인 회복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8절에 보면 '가죽이 덮이나 그러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하나님께서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부활의 역사를 행하십니다.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에서 육체의 생명을 부활시키십니다. 

이건 뭐냐면, 보이는 외적인 상황을 변화시키신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병이 나아요. 
외적인 변화가 일어난 거죠. 

또 사업이 어려워서 사업을 위해서 기도했더니, 거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사업이 다시 회복이 돼요. 맞아요. 외적인 부흥입니다. 
힘줄이 생기고, 살이 덮히고, 피부가 덮히는 거예요. 

또 우리가 뭔가 불가능한 일들을 위해서 기도했더니, 상황이 바뀝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더니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하여간 뭔가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요. 
우리는 그것에 그냥 감격하고 감탄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그러냐면, 8절에, '그러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그게 부활의 끝이 아니에요. 
육신의 생명이, 부활의 끝은 아니예요.
눈에 보이는 변화가 부활의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회복된 육체를 향해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진짜 부활은 뭐냐면, 몸이 다시 사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상황이 변화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기가 돌아오는 거예요.

'생기야 돌아오라!' 그렇게 태어나라는 거예요.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생기가 돌아오는 것, 이게 진짜 부활의 완성이라는 거예요. 
진짜 부활의 완성은, 단순히 보이는 외적인 상황이 회복되는 게 아니에요. 

그 외적인 회복도 물론 부활의 과정이긴 하지만 
부활의 마지막 완성은 뭐냐면,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돌아오는 거예요.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겔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새언약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이 말씀을 인용하거든요. 히8:10참조

새언약이 뭐예요?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게 새언약이잖아요. 
그러니까 부활은 뭐냐면, 에스겔37장이 얘기하고 있는 부활의 완성은 뭐냐면, 
영이 돌아오는 거예요. 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아멘! 

이 마른 뼈의 골짜기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은, 
뼈가 다시 붙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히면... 다 회복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격하고 감탄하고 감사할 거예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몸을 다시 살리는 것, 
눈에 보이는 외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뭐예요? 그 안에 하나님의 생기가 돌아오는 거예요. 
그 안에 하나님의 생기가 돌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 요20:22

부활은 여러분, 회복된 마른 뼈들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육신의 생명으로 살았을지 몰라도 
그래서 사망에 이르렀을지 몰라도, 
부활한 생명은 더 이상 이 땅의 생명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하늘의 생기, 하늘의 생명,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거예요. 
그게 부활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3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나요? '영으로써' 즉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입니다.
진짜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새언약', '부활'의 핵심에는 '성령'이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강조가 빠지면, '새언약의 신약복음', '부활신앙'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죠.

물론 '성령, 성령' 말하면서도, 성령의 인격적인 인도를 못 받기도 하고, 반대로
'성령'을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게 성령의 인도를 받기도 하겠습니다만,
확률적으로는 '성령'을 언급하고 강조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기가 쉽겠습니다.
그 가운데, '새언약의 신약복음과 부활신앙'을 좀 더 본질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37: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다섯 번째 부활에 대한 메시지는 위 10절입니다. 
마른 뼈들이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부활에는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부활에는 방향성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땅의 마른 뼈들을 다시 살리시는 것은, 
죽기 전 상태로 되돌리시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부활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도 보십시오.
부활하셨을 때, 십자가 지기 전 상태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요. 
부활체라고 하는 전혀 다른 몸을 입으셨잖아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된 몸을 입으시잖아요. 

그러니까 '부활'이란, 죽음이라는 큰 위기와 슬픔이 우리 삶 가운데 덮쳤는데, 
막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싹 회복해서, 이전 상태로 돌리셨다... 이게 아니에요.

부활은, 부활체를 입고, 더 영광된 존재가 되는데,
부활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큰 군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른 뼈가 부활할 때 여호와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던 마른 뼈가 
오히려 여호와의 큰 군대가 되는, 이 반전의 역사가 부활인 거예요. 

여러분, 부활을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큰 군대로 일어날 준비를 하셔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소원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위기가 있고, 절망이 있고, 사망과 같은 어두움이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소망합니다. 

'하나님, 내 삶을 반전시켜 주십시오. 하나님 구원해 주십시오. 
하나님, 이 위기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그런데 많은 경우 그 기도의 동기가 뭐냐 하면 '위기를 넘어서게 해주십시오' 
즉 '그냥 이 위기가 있기 전의 옛날 그 편안한 삶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거 예요. 

 

그런데 여러분, 그런 부활은 없다는 거예요. 
부활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부활을 여러분들이 소원하신다면, 
무엇을 품으셔야 되냐면 '여호와의 큰 군대로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 마음이 함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육신을 좇아 살던 삶, 그래서 마른 뼈가 되어버린 삶, 
거기로 되돌아가는 부활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가 되어버린 자들을 살리실 때는,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으로 살아가는 (성령의 충만과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육신의 생명이 충만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빛과 어두움의 전쟁에 담대히 나아갈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시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 이 상황으로부터 회복시켜 주시면, 제가 여호와의 큰 군대로 살겠습니다. 
내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고 헌신, 결단하는 것.. 이게 부활이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단순히 '살려주십시오!' 
'살려주면 뭐 할 건데?' 
어차피 인간은 다 죽잖아요. 살려줘도 결국 다시 죽을 건데... 
그렇다면 이 부활은 왜 필요한 거예요?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육신의 생명이 무너지고, 영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나를 위해 살던 삶이 무너지고, 여호와를 위해서 살게 되는... 이게 부활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에는 여러분, 명확한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여호와의 큰 군대'로 부활하십시오! 

◑마치는 말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지나는 듯합니다. 
여러분 아담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의 역사는 '마른 뼈들의 골짜기'입니다. 
인생은 참 위험합니다. 곳곳에 함정이 있고요, 
가다 보면 곳곳에 우리가 생각 못했던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고, 
그 깊은 웅덩이가 우리를 빨아들이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직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금방 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게 훨씬 많고요. 
계획한 대로 되는 것보다, 예상 밖의 변수에 의해서 좌절되는 게 훨씬 많고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세상은 결국 마른뼈가 가득한 골짜기인 거예요. 
사방에 그냥 죽어 널브러진 마름뼈들, 내 삶도 그렇고 내 주변을 봐도 그렇고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마름뼈 골짜기를 지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만 봐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은 여러분 한 세대 전에 큰 부흥을 경험한 나라입니다. 
세계적인 부흥이었고요. 그래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그랬고 

전 세계에서 교단마다 가장 큰 교회는 한국에 다 있었고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것이 불과 한 세대 전인데, 
지금 우리의 영적인 상황은, 부흥을 얘기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그런 피폐한 상황을 지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혼율 세계 1위, 자살율 세계 1위, 출산율 세계 꼴찌, 
이 모든 부끄러운 기록들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 
이런 정말 마른 뼈들의 골짜기와 같은 상황을 지나고 있습니다. 

또 혼돈스러운 국가의 위기, 그리고 그 위기 앞에서 
제대로 기도할 수도 없는 교회의 모습... 
마른 뼈들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 모습 같지 않습니까? 

본문 11절은 이런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37: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꼭 우리를 묘사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7:12 '그러므로 너는 태어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37: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37:14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부활을 선포하고 계신 거예요.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리라' :14참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 전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능력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심이나 연민은 더욱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향하여 선포하시는 부활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선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활의 약속과 소망입니다. 

이 소망과 약속을 믿음으로 대언하는 거예요. 
'생기야 이 땅에 돌아올지어다. 생기야 우리 가정 가운데 돌아올지어다. 
생기야 이 땅의 교회들 가운데 돌아올지어다. 
생기야 내 무너져버린 건강 위에 돌아올지어다.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 이 죽음을 당한 자들을 살아나게 할지어다.' 
이 대언(대언의 선포, 대언의 기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일어나서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 날, 우리 한번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믿음으로 대언하며 선포합시다. 

내 개인의 삶 속에 있는 마른 뼈들을 향해 
우리 가정을 향해, 이 땅의 교회들을 향해,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해, 믿음으로 대언할 때 
'생기야 불어올지어다. 생기야 불어와서 마른 뼈들이 살아나게 될지어다. 
여호와의 큰 군대로 일어나는 반전이 있을지어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