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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53장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LNCK 2025. 4. 2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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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3 26 고난 받는 종 (2)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 YouTube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사53:1~3            2024.03.26.

지난 시간 우리는 이사야서 53장의 서론을 살펴봤습니다.   ☞사52:13~15

오늘부터는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예언은, 매우 우울한 논조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이루실 구원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불신앙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

◑사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로마서에서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롬10: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바울은 본문 이사야서 53:1절을 인용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한탄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길이, 바로 복음을 듣고 믿는 일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1절에 '우리가 전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메시아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쳤던 구원의 진리입니다.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그 메시지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끊임없이 구원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1)  먼저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내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내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자의 후손'은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죠.

 

2) 이후에 하나님은 제사 제도를 통해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죽어갔던 수많은 양과 짐승들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영원한 대속 제물로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포합니다. 

 

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은 놋뱀을 바라보는 자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높이 들렸던 놋뱀은 십자가에 달릴 그리스도를 예표했습니다. 

4) 그리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난에 들어갈 때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해 들여보내셨습니다. 

여호수아(예수아)는 예수를 예표하는 구약의 이름입니다. 
율법의 수여자인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구원자)를 통해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5) 그리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누렸습니다. 
그 약속의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6)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원주민들과 싸워 거둔 승리는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영적인 승리를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7) 구약의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메시지도,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끊임없이 보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메시아(=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지극히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1절에서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책망한 게 아닙니다. 
훗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우리의 불신앙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끊임없이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들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이야기가, 그분에 대한 이야기, 즉 예언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메시아를 믿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는 다소 엉뚱한 방식으로 밝힙니다. 

▲그는 되묻습니다. 1절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여기서 '팔'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우리와 같은 팔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팔은 '힘, 권능, 능력'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하나님의 팔이 나타났다'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권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뜻의 반어법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은, 실제로 '여호와의 구원의 권능이 누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가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구원에 있어서 여호와의 권능을 알아볼 자가 누구인가? 
인간은 그 누구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의 모습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세상에 오실 때, 그 메시아의 모습이 본문 2절에 나오는데요. 
정말 쉽게 못 알아볼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1) '그는 주 앞에서 자라기를 연한 순 같고'
'연한 순'은 쉽게 말해 '잔 가지'를 뜻합니다. 
잔 가지는 경작하지 않아도 예기치 않게 불쑥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잔 가지에 대해 할 일은, 
그것이 다른 가지들의 생명력과 비옥함을 빼앗아 가지 않도록 잘라내는 것입니다. 
쓸데없고, 또 작고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며, 하찮은 가지... 그것이 '연한 순'입니다. 

그래서 정원사가 잘라내 버리는 무가치한 순, 그게 '연한 순, 잔 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연한 순'은, 단순히 연약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무가치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여겨진다는 표현입니다.   주1) 

실제로 그분은 보잘것없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출신이었죠. 
그리고 보잘것없는 태생이셨습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하찮은 마을 나사렛에서 
하찮은 여관의 마굿간에 있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의 탄생에 함께한 사람들은, 당시 가장 낮은 사회 계층이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위엄있는 탄생도 아니었고, 또 사회적 지위도 없었고, 
귀족 가문도 아니며, 정규 교육도 받지 않았습니다. 

30년간 나사렛의 목수였고, 또 엘리트나 주요 인물들 어느 누구와도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는 무가치한 '연한 순, 잔 가지'였습니다. 

2)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오는 뿌리 같아서' :2 
중동 지역에는 저녁에 해가 지면, 땅은 바싹 마르고 건조해집니다. 
낮에 물이 증발하면서 땅이 수축하면, 식물의 일부 뿌리가 지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죠.
그게 바로 '마른 땅에서 나오는 뿌리'입니다. 

아무도 가꾸지 않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나무의 뿌리가, 
'마른 땅에서 나오는 뿌리'입니다. 

누군가가 관심을 가졌다면, 그 나무에 물을 줬을 겁니다.
그러면 뿌리가 지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겠죠.

그러나 아무도 경작하지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도 물을 주지 않은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 장차 오실 메시아를, 그 뿌리를 빗대어 예언합니다. 

이것도 그분이 불필요하고, 쓸모없고, 인상적이지 않다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실제로 나다나엘은, 그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1:46절인데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3) 이어서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예수님의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외모보다는 외적인 조건을 가리킵니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인 거죠. 

그분은 메시아로 인정받을 만한 외적인 조건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외적인 조건을 참 중요시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사울을 첫 번째 왕으로 뽑은 이유이지 않습니까. 

사울은 이스라엘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도 더 컸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사람들은, 외적인 모습을 가지고 누군가를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실 가문도 아니었고, 왕답지도 않았으며, 지위가 높지도 않았습니다. 

4)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가 3절인데요.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1)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He is despised and rejected of men, 그분은 경멸받았고, 사람들에게 거절받았다..

2)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간고'는 아픔들, 고통들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은 'a man of sorrows, 슬픔의 사람'으로 번역하죠.

3) '질고를 아는 자라'
질고는 질병, 연약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그분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세상이 기대하던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3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4)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얼굴을 가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을 보기도 싫을 만큼, 그분을 듣기도 싫을 만큼, 고개를 돌여버렸다는 거죠. 
그분을 멸시했다는 뜻입니다.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했다는 거죠.

그러나 그 무리들 가운데 우리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3절의 마지막 고발입니다. 

 

5)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우리도 오늘 본문 안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1절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나느냐?' 
누가 그분을 믿겠느냐? 

그래서 3절에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도 그분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그분을 귀히 여기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믿음의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당시 이스라엘이, 아니 오늘도 세상이 메시아를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사야 선지자는 1절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 질문은 '여호와의 구원의 권능이 누구에게 나타났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은, 반어법적인 표현이죠. 
즉 '구원에 있어서 여호와의 권능을 볼 자가 누구인가?'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 육신의 눈으로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보지 못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자기 눈으로 쳐다본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분이 자기들을 구원할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육신의 눈으로는 알아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 이사야 선지자의 1절의 예언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남의 땅이 아닙니다.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 그 누구도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요1:11
자기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연한 순 같으셨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았으며,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분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분을 메시야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1
우리도 그를 역시나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3

그렇다면 누가 그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고난받는 종 그분을, 메시아라고 누가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서만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그분을 믿게 되는 것은, 육신의 안목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세상의 안목으로는 알 수도 없고, 믿을 수 없는 주님을, 
오직 믿음의 눈은 보게 합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오는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그분을, 메시아 구세주로 고백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유일한 소망이, 바로 그분 앞에 무릎 꿇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과거에)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를 향하여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분을 멸시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의 눈도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분을 귀히 여기는 자리에 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후4:6절의 말씀대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눈뜨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겨진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사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 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눈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그분을 버리며 살았던 우리가 
이제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분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눈으로, 우리는 그분이 바로 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 구주라는 사실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보기 때문입니다. 

◑적용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더욱더 믿음의 눈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육신을 따라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대면하는 영적인 생활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대면하지 않으면, 세상에 대한 집착도 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였어도 
또 넘치도록 그분의 사랑이 부어졌어도, 단회적인 경험만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구원받는 순간, 단 한 번이면 족한 일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애3:23)' 십자가의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바르게 보고,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깨닫는 일이 매일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였던 우리의 죄와 불순종을 미워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마를 때 
우리는 죄를 가까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언제나 공허와 불행으로 끝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다시 그분께 나아갑시다. 

특별히 고난 주간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이사야 53장 전체를 묵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아니면 복음서에 나오는 그분의 이야기를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 어디를 펼치든지, 그리스도 그분을 우리는 성경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 말씀 속에 젖게 하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어주사 그 말씀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날마다 뵐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래서 고난 주간을 맞이하는 우리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가득 차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더욱 기여기고 그분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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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사53:2절의 '연한 순'은 '잔 가지'라는 뜻입니다. 

 

1) 포도나무 농사할 때도, '잔 가지'를 쳐 주죠. 그 외에도 자잘한 잎사귀들은 따 버리죠.

좋은 결실을 거두기 위함인데, 어이없게 예수님을 그런 하찮은 '잔 가지'에 비유합니다.
'연한 순 a tender plant'은 좋은 말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부정적인 표현이군요.

2) '연한 순'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인데, 
일반적인 메시아 상이 강하고, 능력있는 모습인데 반해, 
그리스도-메시아는 아주 연약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며,

특별히 '연한 순'은, 새로 돋아나는 순으로써, 
메시아의 나라가, 즉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시작될 것을 의미합니다.

전통적으로 2)의 해석을 하는데, 
이 설교는 1)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연한 순'은 히브리어로 한 단어 '요네크'인데, 사53:2절에만 한 번 나옵니다.
-빨아들이는 것 sucker (잡초가 주위의 영양분을 빨아들이죠)
-어린 묘목 .. 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1)의 해석이 더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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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너무 늦게 알아본 비극
1950년대 초반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에 상수라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상수는, 큰아버지로부터 노랑 고무신 한 켤레를 선물 받았습니다. 
난생 처음 받아본 새 고무신이 너무 아까웠던 상수는 
그 신발을 신지 않고 손에 들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상수는 개울에서 노란 고무신을 씻다가 그만 한 짝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고무신은 물살을 타고 아래로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상수는 고무신 한 짝을 건지려고, 무작정 개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무신은 계속 떠내려갔고, 큰 강에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무신을 따라갔는지, 어린 상수는 결국 길을 잃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상수는, 온갖 고생을 다하며 한 많은 세월을 살았습니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초로의 노인이 된 상수는 
TV 이산가족 찾기 프로에 나와, 굵은 눈물을 흘리며 그 때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마침 그 시간에 그의 형이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동생을 알아보고 
방송국에 연락했고, 그렇게 해서 다시 가족과 만나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치매를 앓아, 
50년 만에 다시 나타난 자식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초로의 노인이 된 상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나는 그 TV 프로를 보면서, ‘우리 인생도 저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낱 노랑 고무신 한 짝처럼 별것 아닌 것을 붙잡으려고 내달리다가 
정말 소중한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허탄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삶이 끝날 때, 죽음 앞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여태까지 자기가 쫓아온 노랑 고무신 한짝 때문에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 명예, 권력, 건강, 직업 등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지 알지만, 
그것들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것들은 아닙니다. 

진짜 절대적인 것은, 우리가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못 알아봐도, 주님은 우리를 알아보고 계신다!

어느 미국 간호사가 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침 8시 30분쯤 되었을까? 80대의 노신사가 엄지 손가락의 봉합사를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9시에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고 하며 나를 다그쳤다. 

나는 노신사를 체크하고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아직 의사들이 출근하기 전이어서, 그를 돌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계를 연신 들여다 보며 초조해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내가 직접 돌봐 드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나는 노신사의 상처를 치료하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시 다른 병원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신가 보죠?“
라고 물으니, 

노신사는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인의 건강상태를 물으니, "아내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부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며, "어르신이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시면, 
부인께서 언짢아하시나 보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신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아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지 5년이나 됐는걸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부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시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요양원에 가신단 말입니까?" 

노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몰라보지만, 난 아직 그녀를 알아본다오."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내 인생을 걸고 찾아 왔던 "사랑의 모델"을 드디어 발견했다는 기쁨에, 
내 팔뚝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진정한 사랑은 육체적인 것도 로맨틱한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는 위 글의 노신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을 몰라보는 그 아내의 모습은, 마치 저 자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이미 곁에 오셔서 나와 늘 동행하고 계셨지만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채, 오래도록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