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6장 예수 다시 사셨네! 그를 믿는가?
예수 다시 사셨네! 그를 믿는가? | 2025-0420 - YouTube
◈예수 다시 사셨네! 그를 믿는가? 막16:1~20 2025.04.20.
◑도입
여러분, ‘selective hearing 선택적 듣기’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세상에 많은 말들이 들리지만,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은 잘 들리고,
자기가 관심 없는 말은, 같은 데시벨의 말인데도,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래에 ‘선택적 청취, 선택적 듣기’에 대해 연구가 활발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선택해서 듣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이런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못 듣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그런 근거가 있어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 뇌가 너무나 많은 소리가 들리니, 뇌가 선별적으로 선택해서 듣고
그래서 자기 청력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선택적 청취’ ... 내가 듣고 싶은 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작은 소리라도, 내 귀에 잘 들린다’는 말입니다.
‘나는 예배 시간에 졸려.. 난 무슨 말을 들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나...’
왜 그런 줄 아세요? 선택적 듣기 selective hearing 이기 때문입니다.
selective auditory attention 이라고도 한답니다.
오늘 제 설교도, 관심이 있으신 분은... 아주 잘 들릴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은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문제 하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막16:9~20절까지 성경에 괄호로 표시되어 있고,
또 각주에 보면 “이 본문은 어떤 사본에는 없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에 대해서 ‘정말 성경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의문을 표시해 왔습니다.
‘이 본문은 본래는 없었는데, 나중에 후대 사람들이 써서 거기에다 붙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에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말씀은, 본래 마가복음이 기록될 때
저자가 16:20절까지 기록했음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본에 없다’고 말하는 그 근거는,
4세기경에 기록된 시내산 사본(가장 오래된 사본)에, 그 본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본이 많습니다. 여러 사본들이 있습니다.
그 사본들 중에 4세기경에, 가장 빨리 기록되었다고 하는 시내산 사본에,
막16:9~20절이 없다는 거죠.
그리고 또 바티칸 사본에도 그 본문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본래 성경에 없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이 합당하지 않은 것은, 그 사본 말고, 다른 여러 사본에는
막16:9~20절까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문제가 되는 시내산 사본에는, 이 부분이 들어갈 만큼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애초에 없던 것이 아니죠. 후대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누락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4세기 시내산 사본보다 앞서는
AD 150년경부터, 이레니우스(요한의 제자)를 비롯해서
타티아누스, 유스티누스 등의 초대교회 교부들이 AD 150년~200년 사이에
그때 많은 문서를 남긴 이 교부들이 인용한 글 가운데
마가복음 16:9~20절 사이에 있는 말씀이 많이 인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4세기에 그 부분이 빠진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인
AD 150~200년 사이에
이 마가복음 16:9~20절 사이에 있는 말씀을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고
글로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분명히 마가복음이 기록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것이 분명합니다.
또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만일 8절에서 끝났다면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가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막16:8
만약 이렇게 마가복음이 끝난다면, 도대체 마가복음서의 마지막이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이렇게 시작을 해놓고
‘겁이 나서 아무도 전하지 못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은, 문맥이 맞지 않죠.
이 마가복음은 자체적으로 그렇게 끝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16:9~20절은, 원래 성경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마가복음 11장부터 16장까지 여섯 장이
많은 비중을 할애해서,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을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중하고 있고,
예수님의 고난에 집중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마음에 두고
‘선택적 청취’가 아닌 이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부활절날 흔히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외치면서 부활하신 그 사건에 집중하는 그것이
가장 잘못된 실수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믿고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세상에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않아요.
부활하셨다는 분명한 사실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는 구원받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예수 다시 사셨네! 그를 믿는가?”
‘당신은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을 믿는가요?’
‘예 믿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대답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부활했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부활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막16장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를 살펴봅니다.
◑1. 한 청년(천사)의 선언 : 그가 살아나셨다. 가서 말하라!
막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여기 나오는 이 여성들의 이름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기며,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해가 돋을 때, 그 무덤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모했고, 사랑했고,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그들이 왜 아침 일찍이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바로 그날 오후에, 해질 때가 가까워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까지 옮기는 일에도,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 지면 곧장 안식일이 시작되지요.
그래서 예수님 시신에 향유를 바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안식일(금요일 저녁)이 다가오자, 서둘러서 예수님을 무덤에 안치한 후에
그것을 본 이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난 후에 내가 향품을 바르리라’ 생각하며
오늘 주일 새벽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누이신 무덤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서 ‘큰 돌이 막혀 있는데 이 돌을 어떻게 굴릴까?’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2톤이 넘는 어마어마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에 대해서 너무너무 아름답고 본받아야 할 그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무덤에 간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넣기 위해서 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어요. 기대하지 않았던 거죠.
이제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또는 이 여인들에게 직접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같죠.
여기에서 우리는 큰 교훈을 발견하게 되는데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5
그 청년이 말합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6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천사를 통해서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사실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천사는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1.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 와서)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6b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메시지,
부활을 와서 보고, 그 부활의 증거를 알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빈 무덤이 었어요. ‘예수님 몸을 감쌌던 세마포는 한쪽에 있었고,
수건은 다른 곳에 쌌던 대로 (개어져) 있었더라.‘ 요한복음은 그렇게 증거합니다. 요20:6~7
'자 봐라. 세마포는 다 그대로 있는데, 예수님의 몸만 다 스르르 빠져 나가셨는지,
머리를 쌌던 수건은 개어져 있고, 무덤은 비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증거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증거를 알고 부활하셨음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이 한 청년, 한 천사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에 안치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갔더니 예수님이 없어졌습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이것이 증거입니다.
행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2. 가서 말하라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말)하라 하는지라’
이 천사는 여인들이 해야 할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나셨다!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라’
그런데 왜 특별히 베드로의 이름을 언급하셨을까요?
그냥 ‘제자들에게 말하라’라고만 해도, 베드로도 제자에 포함되잖아요.
지금 베드로가 어떤 상태일 것 같습니까?
베드로는 며칠 전에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고 맹세했습니다.
그토록 장담했던 베드로, 그러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어요.
그러다가 그 예수님 고난받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눈물이 터져 나왔고
울음이 터져 나왔어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베드로는 항상 울면서 다녔답니다.
지금, 이 베드로는 어떤 상태일까요? 절망에 빠져있습니다.
바로 그 베드로, 천사는 그 베드로에게 가서 꼭 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이지요,
오늘 여러분들이 부활 주를 맞이하면서 절망과 좌절에 빠져서
‘나는 끝났어,’ 이렇게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다면,
오늘 성령님께서는 분명히 이 말씀을
‘그 사람에게 꼭 전해, 지금 그가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에게 꼭 전하라’ 이 말씀을 듣는 우리가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8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 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는 것이 요21장에 기록되어 있어요.
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어요.
주님을 만난 마리아가 돌아와서 ‘내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 살아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살아났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제자들 : 믿지 않았다.
두 번째,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와서 얘기해도 믿지 않았고
무덤이 비었다고 말해도 믿지 않았어요.
막16:12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2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 부활하신 바로 그날 아침에
일찍 예루살렘을 떠나서 자기 고향인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서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랐던 자기들의 선생이요
구주라고 믿었던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부활하셨다는) 이상한 소문이 막 들리는데, 그들은 아직 뵙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저 소문으로만 여겼던 거죠.
그래서 절망하고 좌절해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슬그머니 가고 있는 두 사람의 여정에 동행하시고
‘무슨 얘기를 나눕니까?’ 라고 물을 때,
‘당신 요새 일어난 일을 모르세요?’ 이렇게 그들이 오히려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눅24:17
노정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서 말씀해 주셨어요.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합쳐서 요약하면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그리스도가 예언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한 12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식탁에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 집 안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손님인데 그 집 안에서 예수님은 주인이 되어버립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눅24:30
예수님께서 그 식탁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에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마치 손님처럼 초청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순간 눈이 떠졌어요. 예수님인 줄 깨달았어요.
그 순간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가 주님을 봤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당장 돌아가야 돼.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 돼!’
터덜터덜 절망에 빠져서 근심의 걸음이었던 그들의 엠마오로 가는 걸음.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갈 때는 아마 너무너무 기뻐서 뛰어갔을 겁니다.
가서 거기 제자들에게 ‘우리가 예수님 만났다, 우리가 예수님 봤단 말이야’,
이렇게 제자들에게 막 말을 했는데, 제자들은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랬어요.
눅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래도 안 믿었어요.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1)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무덤이 있는 동산에서 예수님을 만났죠. 마28:9~10, 눅24:10
2)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와서 빈 무덤을 확인했죠. 눅24:12, 요20:3~7
3) 엠마로 길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즉시 돌아와서 말했죠. 본문
그래도 주류의 제자들은, 부활을 못 믿는 겁니다.
막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음이 없는 것과 완악한 것, 무엇에 완악했습니까?
부활을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 거예요.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어요.
▲부활의 최고의 증거는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도마 같은 사람은 내가 예수님 그 못 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으면 안 믿겠다고 말했죠.
도마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요20:28
결국 도마,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앞에 굴복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걸고 죽을 때까지 남은 생애 동안,
예수님의 부활을 땅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빈 무덤이 아닙니다. 이들은 빈 무덤을 봤어도 믿지 않았고,
또 다른 사람의 간증이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믿지 않았어요.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 빈 무덤이나 또 다른 아무리 많은 증거가 있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과 접촉했을 때, 예수님과 부딪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많은 그 증거들, 빈 무덤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친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도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임을,
내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임을 믿으십시오.
‘내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사도 바울이 그랬어요.
그는 본래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람이었어요.
예수님을 너무 싫어했고, 예수 믿는 사람조차 싫어해서
그 사람들을 체포해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때려 죽이는데 선동했고, 앞장서고 증인이 되었던 그 사람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믿었어요. 다메섹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되심에 대해서 의심이 있다면
‘주님, 나를 만나주세요!’ 하고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분명히 우리를 만나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8절에서, 자기가 어떻게 예수님을 경험했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15:5~8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내가 생생히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빈 무덤 찾아가서 보면, 참 좋겠습니다. 가능하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갈 필요가 없는 것은, 그래서 그것 때문에 예수를 믿을 그 이유가 아닌 것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고, 그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론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알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서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는 것입니다.
부활한 증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 : 우리들에게 할 일을 주셨다.
▲1.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나에 대하여) 전하라
막16:15~16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거예요.
할 수 있으면 하고 못 하겠으면 하지 말라고
선택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새 생명 얻은 우리, 부활을 믿는 우리는 반드시 순종해야 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선교라고도 말하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위 사이트에 들어가시면 세계 선교의 현재 세계 선교의 상황을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영어 사이트인데요. 마28:18절에 ‘모든 민족’은,
실제로는 민족(나라)이 아니라, 종족 people group을 뜻합니다.
한 나라 안에는, 수많은 종족이 있죠.
세계에 있는 모든 종족 그룹은 17,351 그룹입니다.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못한 그룹이 그 중 7,244개, 41.7%가 됩니다.
아직 40% 정도 되는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했어요.
그들을 Unreached Peaple Group (미전도종족 UPG)이라고 부르는데,
복음이 도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기준은,
-그냥 아주 신실한 복음주의가 되지 않은,
그냥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미지근한 신자가) 5%가 이하일 때,
-또 ‘나는 정말 신실한 그리스도인 복음주의자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2% 이하일 때,
Unreached People이라고 하는데, 그곳을 향해서 지금 사람들은 갑니다.
인구로 본다면 지금 세계가 80억 8천만인데,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34억이나 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세광교회는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가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힘써야 합니다.
땅끝까지 갈 수 없는 사람들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것이 선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나라에 Unreached People의 한 그룹이 있다는 사실 여러분 아십니까?
5%가 안 되는 그룹이 있어요. 우리들의 다음 세대의 그룹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통계를 보니 3% ~ 4%밖에 안 돼요.
100명 중에 3명, 4명만 교회를 가고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
그곳은 강력한 너무나도 절실한 우리에게 있어 선교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내가 능력을 주겠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 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둘째,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능력을 주겠다는 것과
내가 끝까지 너희를 지킬 것이다. 두 가지 강력한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능력이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고 크리스천으로 살며 그런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능력이 필요한데, 주님께서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위로부터 그 능력이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는 그 순간 그들에게서 방언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으라 말씀하셨어요.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명령을 듣고, 그날 당장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상으로 나갔다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또 위대한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10일쯤 지난 후에 성령님께서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능력을 얻고 복음을 전할 사람으로 준비가 돼서 세상을 향해서 나갑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성령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서 수없이 많은 역사들을 일으키며
세상을 다 뒤집어엎었어요.
그 몇 안 되는 제자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세계를 다 뒤집어서 오늘 이 세광교회 은평구 갈현동까지
그 복음이 전해지는 그런 역사가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능력으로도 되지 않고 힘으로도 되지 않는다.
오직 나의 영 성령으로 되느니라’ 스가랴서4:6에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3. 끝까지 너희를 지킬 것이다.
사43:1~3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그리고 내가 끝까지 너희를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네가 어디로 가든지 이런 표적이 따를 것인데
네가 뱀을 집어 올려도 해를 받지 않을 것이고,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16:17~18
‘뱀을 집을지라도 또는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이 성경에 유일하게 여기에 나타나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사람들을 또 힘들게 만들어요.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을 이 말씀을 듣고,
손으로 집을지라도 해를 받지 않고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능력을 주시고
이런 기적을 우리에게 일으키시는 것은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복음을 들고 나가라고 말씀하셨어요. 복음을 들고 나가서 그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독이 우리에게 침투되고 뱀이 와서 우리를 막 물고 할 그때
하나님께서 뱀이 너를 해치 못 하게 하고 독이 너를 해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말씀의 전제는 복음을 들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소에, 이 말씀을 시험해 본다고, 독을 마시면...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겁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것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뱀이 무는 것처럼
독이 우리에게 침투되는 것처럼 그런 해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사도 바울은 난파되어 멜리데 섬에 상륙, 모닥불을 피웠다가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저 사람 죽었구나 했는데 살아났습니다.
세상은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저 사람은 죽었다. 어떻게 망하는가 보자’ 하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죽지 않게 우리를 지키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네가 뱀을 잡을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약속의 말씀이에요.
독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는 그 예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초대교회에 남아 있는 그 문서 가운데 파피아스라는 초대 교부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 때문에 제자의 수가 하나 모자라서 두 사람을 두고 제비 뽑는
그 기사가 나옵니다. 유스도라 하는 요셉 이야기입니다.
이 요셉이 이야기가 젊은 사도인데 그는 핍박을 받으면서 독을 먹었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에 있어서 우리들을
이렇게 기적적으로 살려주시고 독을 먹어도 해를 받지 않게 하시고
이렇게 하면서 강력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는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
아니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선교 역사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어요.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1727년도에 모라비안들이 선교를 나갔습니다.
자마이카의 노예들을 선교하기 위해서 그들이 스스로 자신이 팔려서 노예가 되어서
그들은 그들의 장례식을 살아 있는 그 상태에서 장례식을 미리 치르고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마르타 마이어스(Martha Myers, 1945-2002) 이야기 https://www.awhf.org/myers.htm
마르타 마이어스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너무너무 유명한 예멘 선교사였습니다.
미국에서 유력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고
예멘으로 선교를 위해서 갔습니다.
22년 동안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아이들과 그리고 여성들을 잘 보살펴주었습니다.
2002년 한 남자가 담요로 무엇인가를 싸서 병원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들 아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총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의사들 4명의 선교사들을 쐈는데, 그중에 그녀를 포함한 3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총에 맞아서 죽었어요. 그녀는 평소에도
‘내가 죽으면 예멘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말을 자주 했기 때문에
예멘에서 그녀의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장례식 날 4만 명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 장례가 지나가는 그 행렬을 따르면서
수백 명이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라고 말하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노래하면서 그 행렬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 나라의 기독교가 용인되지 않아서 예수 믿는 것이 발각되면 감옥에도 가고,
죽을 수도 있는 그 정말 긴급한 상황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라고 선포하면서 외치면서 그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역사가 그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사실이에요.
지금도 예멘의 신자들은 그 영향을 받고 그 영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이 부활절이 끝난 후에 이 부활절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요? 내가 부활절을 지난 후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요?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이 부활은 능력입니다. 이 부활의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 좌절과 절망에 빠졌다가
예수님의 그 부활하심으로 다시 일어났던 이 베드로가
베드로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산 소망을 주는 게 Living Hope예요.
세상의 소망은 산 소망이 아닙니다.
세상의 소망은 어떤 능력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소망하죠. ‘나는 그걸 소망해. 나는 그걸 원해.
내가 부자가 됐으면 좋겠어.’
영어로 말하면 I Hope 나는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그냥 소망이 아니라 그냥 바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소망을 이룰 어떤 능력도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가졌던 산 소망, 우리가 가지는 산 이 소망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어떤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소망이 있는데,
그 소망은 능력이 있습니다.
롬15:13 ‘...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엡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산 소망이 있는 사람은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기에 그 소망은 산 소망입니다.
그 능력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의 능력 따라서 나에게 산 소망이 있고,
나에게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은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살리는 능력입니다.
이제 부활의 능력, 산 소망이 우리들의 삶에 작동되고 역사할 때,
그 모든 것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감동입니다.
바울은 빌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다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문장 부호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고,
물음표(?), 마침표(.), 느낌표(!)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의 이 부호들을 잘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명령하신 것은 마침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진리는 마침표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자꾸 의문 부호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마침표를 찍으셨는데
사탄은 진짜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냐? 라고 의심을 하게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감옥의 간수가 사도 바울에게 묻습니다.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까?’ 그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마침표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마침표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의문 부호가 붙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이 마침표에 대한 삶도 중요하지만, 이 마침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영어로 말하면 Exclamation mark 감탄 부호(!)입니다.
오늘 우리는 느낌표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는 마침표지만
우리들의 삶이 그것을 표현할 때는 탄성(!)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다 들어가 있는 환호성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리아가 예수님을 무덤에서 봤을 때,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내가 예수님을 봤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탄성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봤습니다! 예수님 다시 사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께 탄성이 소리가 있습니까?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에게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