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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3장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

LNCK 2025. 5. 5. 04:4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리더쉽        <다음 세대>    <교사>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Xt-ZFZOaH4s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         출33:7~11           2025.05.04.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에서 '절친한 친구'를 뜻하는 말은    *꼼빠니아
'빵을 같이 나누어 먹다'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companion
*companion 동행, 삶의 동반자 : com (함께) + panis (빵)

이건 우리나라 정서와도 아주 비슷하게 통하는데, 
'식구'라는 말이 우리는 있지 않습니까? '한솥밥을 먹다' 라는 뜻이 식구인데.  食口
사실 혈연관계에서 '식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함께 식탁 공동체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빵을 나누는 사이가, 가장 가까운 사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과거에는 그랬는데, 요즘은 이런 시절이 사뭇 지나간 것 같습니다. 
'혼밥'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각 가정에서도, 식구들이 다 제각각 식사 시간이 다릅니다. 

식당을 살펴보면 그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마다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데,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렇게 식사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세월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UN에서는 해마다 140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혼밥 실태'를 연구해서 조사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 일주일을 단위로 해서 
'저녁 식사를 누군가와 함께 먹는다'고 답한 사람을 조사해 보니 
7일 기준에 그 횟수가 1.6회에 불과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1.8회 정도 됩니다. 

그러면 일주일 동안 저녁 식사를,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나누는 사람은 
2회 미만이라는 뜻입니다. 이건 사실 심각하지 않습니까? 

점심 식사로 범위를 좀 확대해 보면 조금 낫습니다. 
점심과 저녁을 같이 통틀어서 '일주일에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라고 
대답한 한국인은 4.6회 정도 됩니다. 중남미는 약 9회 정도 됩니다. 

우리가 알기에 개인주의적 성향이 아주 심하다고 하는 유럽 사람들도 8회나 됩니다. 
거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두 배 이상입니다. 

이제 우리가 함께 식탁에서, 밥상머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얼굴을 보고 밥을 먹는 풍경은 
'전원일기'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되고 말았습니다.  *40년 전 연속극 드라마 

이제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가 함께 밥을 먹는 식탁 공동체 교제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럼 이게 의미하는 바가 뭐겠습니까? 대화가 사라졌다는 말 아닙니까? 

대화가 사라졌다는 말은, 서로의 삶을 나눌 수가 없게 되었고, 
부모는 자녀를 밥상머리에서 교육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책상에 앉아서 진지하게 학업을 가르치는 것만 교육이 아닙니다. 
서로 밥 먹으면서 삶을 나누고, 자녀는 부모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밥을 먹기만 해도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배울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밥상머리 교육에서 굉장히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인간은 절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홀로 설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길러져야 됩니다.

사람을 길러 가고 키워 가는 데는 교육이 필요한데, 
교육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대화입니다. 

'말이 단절되고 대화가 사라졌다,  식탁에서 혼자 밥 먹는다' 
이건 이미 교육적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어린이 주일, 
우리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 청년까지 대상을 조금 넓혀 보면, 
하나님께서 '어린이들을 그리스도 앞에 다가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무릎에 올려놓고, 대화하고, 키워 가고, 
길러 가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세를 어떻게 기억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고, 
광야 40년 여정을 이끌어간 출애굽의 영웅으로 기억합니다. 
맞습니다. 틀린 평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우고, 이끌어 간 모세! 
그가 한 또 하나의 위대한 일이 '사람을 키운 일'입니다.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통해서, 모세가 여호수아를 어떻게 기르고 키워 갔는지? 
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출33:7~9절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내산 아래로 우선 인도하셨죠.
시내산에 여장을 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요. 
-또 하나는 성막이었습니다. 

-먼저는 율법인데, 곧 십계명입니다. 
'지금까지 너희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살지 못했지 않느냐?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고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된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10가지는 행하고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 주신 것이 성막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지으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인간이 지은 천막, 즉 회막이라고 불리는 성막 안에 거하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너희가 이곳에 나와서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찾으면, 
그럼 내가 여기서 너희를 만나 주겠다' 그 곳이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출33:7~9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회막이라고 하는 성막에서 
모세와 어떻게 만나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우리가 머릿속에 한번 그려 보십시오. 
백성들이 모여 있는 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한 회막은 진 밖에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그 회막에 모세가 나아갑니다.                   주1)

모세와 하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대화하듯이, 깊고 은밀한 교제를 나눕니다. 

그 영광이 너무 찬란하고 놀라워서, 
백성들은 감히 그 회막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장막에서 나와서, 그 회막 근처를 빙 둘러서서, 하나님의 임재를 그냥 보고 있습니다. 
그게 곧 그들에게는 예배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는 그 만남의 시간이 끝나고 나서, 
백성들은 다 각자 자기 장막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구나. 우리 지도자 모세를 만나 주시는구나' 하는 벅찬 감격을 
가지고 백성들은 자기 진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모세도 장막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거기에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출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 camp 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지금 하나님의 임재가, 구름 기둥으로 회막에 임하는 그때, 
두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도 있었고, 그 자리에 여호수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숙소로 돌아왔는데, 여호수아는 여전히 회막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1 

그럼 여호수아가 그 남은 자리에서 뭘 했겠습니까? 여전히 기도한 겁니다. 
여전히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이 자리에, 왜 모세는 여호수아만 데리고 갔느냐?' 
하는 점입니다. 천부장과 백부장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자는 한 사람도 함께 모세와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백성들의 장로들도, 그 자리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회막 안에 들어간 사람은, 모세와 여호수아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레위지파 자손들은, 성막을 이끌고 성막을 돌보는 섬기는 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레위 자손도 한 사람도 그 곳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자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모세만 그 자리 (회막)에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라는 차세대 지도자를 기르기 위해서 였죠!

그런데 백성들은 이걸 가지고, 아무도 누구도 어떤 문제도 삼지 않습니다. 
'나는 천부장인데, 나는 백부장인데, 나는 장로인데, 왜 나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습니까? 
모세여, 왜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누군데, 왜 저 젊은 여호수아만 저기(회막)에 데리고 가는 겁니까?'
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걸 보면, 이미 공동체가 합의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한번 거슬러 올라가 봐야 됩니다. 

▲여호수아가 역사의 전면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장면, 
성경에 자기 모습을 가장 먼저 드러낸 장면이, 출17장 아말렉과 전쟁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길을 걸어올 때, 남자만 출애굽한 것이 아니죠.
여자, 노인, 어린아이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출애굽해서 광야 여정을 걸어갑니다. 
그들은 진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 난민처럼 걸어갔습니다. 

모두가 다 헐벗은 모습으로 걸어갑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아말렉이 딱 등장합니다. 

아말렉의 별명이 있습니다. '사막의 해적'입니다. 무서운 별명입니다. 
사막에서 아말렉을 만났다... 그러면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털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생명 또한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딱 나타났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냥 다 죽고, 뺏겨야 됩니까? 목숨까지 잃어야 됩니까? 
그렇지 않으려면 싸워야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싸웁니까? 노인들도 동행했고, 어린아이들, 여자들이 많습니다.
전쟁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될 뿐더러, 오히려 짐만 되는 이들입니다.

약 200만명이 출애굽 했다고 추정하는데, 남자만 60만명이고, 
나머지는 140만은 다 노약자들이고, 여자들입니다. 

▲이때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출17: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사실 여호수아는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정신이 아뜩했을 겁니다. 
여호수아 역시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지 않습니까? 

파라오는 노예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이 날이 갈수록 왕성해가고 늘어나는 것이 두려워서, 
그들에게 칼을 쥐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킨 적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여호수아는, 이때 모세의 말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대로 순종합니다. 

출17:10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홀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이렇게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지점에서 여호수아도 훌륭하고, 
모세도 훌륭하다는 것을 봅니다. 

여호수아는 왜 훌륭한가요?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에 훌륭합니다. 
그의 상황이, 지금 순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저는 못 합니다' 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는 '모세의 말대로 행했다'고 했습니다. 출17:10
그는 누구를 믿은 겁니까? 모세를 믿은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10가지 재앙을 행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경험했습니다. 

홍해 앞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니,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는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넜습니다. 
자기가 직접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도 그는 경험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여호수아는 다 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나는 군사훈련은 받은 적이 없지만, 
나는 칼을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또 한 가지, 여호수아가 훌륭한 점은, 그는 기도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모세가 말하지 않습니까? '너는 사람들을 택하여 전쟁해 나가라. 
내일 나는 아론과 훌과 함께 산꼭대기에서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하는 모세의 기도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내 기도 제목이 이러이러 합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기도 부탁을 하면서,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까? 
'나는 이렇게 기도 부탁을 했는데, 중보 기도를 부탁했는데... 정말 응답이 될까?'

여러분,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기도에 역사하시고,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걸 믿어야 되는데, 
기도 부탁은 실컷 하는데, 기도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그게 이율배반 아닙니까? 

그런데 여호수아는 기도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모세를 믿은게 아닙니다. 
모세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는... 기도의 능력을 믿은 겁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훌륭한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더 훌륭합니다. 여러분이라면 과연 그 상황에서, 
검증되지 않은 젊은 여호수아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넘길 수 있겠습니까
(아마 당시 40세 이하로 추정, 모세는 80세 이상)

 

저라면 그렇게 못 할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출17장에, 여호수아가 제일 먼저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이 친구를 언제 봤습니까? 사실 모세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바로 앞에 가서, 
10가지 재앙을 행하느라, 여호수아가 어떤 사람인지 사귀어 볼 시간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깊이 알아볼 시간도 별로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듣기는 했을 겁니다. 이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 
그런데도 믿고 맡깁니다. 그리고 그에게 부탁합니다. 
아마 모세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나 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우리를 위하여 사람을 택하여 내일 싸움터에 나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여러분, 모세는 여호수아를 믿은 겁니까, 하나님을 믿은 겁니까? 
하나님을 믿은 겁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넘길 수 있었던 까닭은, 
여호수아가 믿음직해서가 아닙니다. 

모세도 여호수아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 칼 한번 제대로 써본 적 없습니다. 
매일같이 그도 노동 현장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믿을 구석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것도 믿을 구석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한 겁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도 쓰시는데, 나는 80 먹은 노인인데, 나는 살인자인데... 
나는 마른 막대기보다 못한 인간인데...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도 쓰시는데...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순종하는 자를 들어 쓰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것이라'는, 하나님깨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하는 자를 찾아다닌 겁니다. 

만약에 여호수아가 '저는 못 합니다'라고 순종을 거부했다면, 
그 다음, 또 그 다음, 또 그 다음 사람에게 차례로 기회가 넘어갔을 겁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신뢰한게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젊은 사람을 택한 겁니다. 
그게 모세가 훌륭한 점입니다.

두 번째로, 모세의 훌륭한 점이 뭡니까? 
그는 민족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 백성을 계속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80세가 넘었습니다. 언제 하나님 앞에 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입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가면, 이 민족을 누가 이끌어야 되는가?' 
그는 이미 출애굽하는 그때부터, 그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준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이 지휘권을 맡겼으니, 나는 마르고 닳도록 죽을 때까지 
내가 절대로 내려놓지 않으리라'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세워서, 그를 훈련시켜 나갑니다.
순종 잘하는 사람을 택해서,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고 길러갑니다. 
그래서 모세가 40년 동안, 그 사람(여호수아)을 데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이게 모세의 대단히 훌륭한 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음 세대를 걱정합니다. 
'우리 다음 세대... 다음 세대...' 입에 항상 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음 세대들에게, 지금 무엇을 위임합니까? 
그들에게 지휘권을 위탁합니까? 
'이것 마음대로 한번 해보라'고 던져 줍니까? 

우리 장로님들, 우리 당회원들이 산 위에 올라가서 기도해야 되는데, 
(그건 하지 않고) 청년들 뒤를 좇아다니면서, 잔소리하고, 지적하고, 손가락질 하고... 
그렇게 해서 이 다음 세대들이 어떻게 성장하겠습니까? 

나 같은 인간도 장로로 세우시고, 나 같은 인간도 목사로 만드시고, 
나 같은 인간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어 쓰신다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어린 여호수아, 젊은 여호수아들을 반드시 쓰실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리더십을 위임하고 지휘권을 넘겨줘 봐야 됩니다. 
일해보라고... 마음껏 해보라고... 
그리고 우리는 산 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면 됩니다. 

좇아다니면서, 손가락질하고, 간섭하고, 훈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기도로 엎드리고, 맡겨 주면 됩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암흑의 시대라고 염려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걱정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없다고, 지도자가 없다고, 이 민족을 이끌 지도자가 없다'고 걱정합니다. 

지도자가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기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젊은 여호수아, 어린 여호수아'들을 길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다.해먹어 버렸기 때문에, 사람을 키워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로지 내가, 나만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시대에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람을 길러내야 됩니다. 
교회가 사람을 키워야 됩니다. 세상은 사람을 키워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정글 같습니다. 좀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지 쳐내듯 쳐 버립입니다. 
짓밟아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을 길러낼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젊은 여호수아들을 길러내야 됩니다. 
일을 맡기고, 기도해 주고, 신뢰해 주고, 도와주고, 힘을 실어 줘야 됩니다. 
그래야 젊은 여호수아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여호수아를 기르시고, 
그 이스라엘 민족을, 살아있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민족으로 세워 가셨습니다. 

▲모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출24:13~ 1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 지니라 하고' 

어떤 장면입니까?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장면입니다. 
누구와 같이 갑니까? 여호수아와 함께 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기 있으라'고 말합니다. 
장로는 한 사람도 데려가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그의 오른팔과 왼팔을 들고 있었던 
아론과 훌조차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여기서 백성들을 돌보라고 말합니다. 
40일 동안 시내산 꼭대기에서, 여호수아와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봅니다.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나눕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두 돌판에,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쓰신 십계명의 두 돌판을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 자리에서 함께 봤습니다.
이 놀라운 영적 체험의 자리에, 그는 그 다음 지도자가 될 여호수아를 데리고 갔습니다.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랍지 않습니까? 
장로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론과 훌도 '나도 한번 시내산 정상에 가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은 사회적 합의가 끝난 상황입니다. '다음 세대 지도자를 세워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세워 가실 그 사람을, 우리가 함께 세워 가야 된다' 하는 
공동체적 합의가 이미 끝난 상황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거기에 토를 달지 않습니다. 

말씀 받는 자리, 은혜의 자리에서... 
우리 어린 여호수아들, 젊은 여호수아들을 세워 가야 됩니다. 

우리가 매 주일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시내산 꼭대기에 가서 말씀 받는 자리가 아닙니까? 

그러면 거기서 은혜받을 수 있도록,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은 
생명을 걸고 말씀을 준비해야 됩니다. 

우리 교육부서 전도사님들부터 담임목사까지 
매주일 이 자리에서 선포되고 전해지는 말씀이, 능력이 되고 은혜가 되도록 
열심히 말씀을 선포하고 준비해야 됩니다. 

교사 선생님들은 사랑으로 어린 아이들을 품어 안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준비하고, 기다려야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들이 마음껏 시내산 꼭대기, 즉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환경을 준비해 줘야 됩니다. 
그게 교회가 해야 될 일 아닙니까? 

겨울과 여름, 두 번의 수련회는,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는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후원해 줘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그 자리에서 십계명에 두 돌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라고, 
그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기도로 지원해 줘야 됩니다. 그게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들을 끌어내리는 일이 교회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 환경은 만들어 주는 겁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은 여호수아가, 그 후부터 흔들림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의 경험이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넙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립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을 섬멸합니다. 

태양을 향하여, 달을 향하여 담대하게 외칩니다. 
아얄론 골짜기에서 '태양아 멈추어라, 달아 멈추어라!' 외치지 않습니까?  수10:12

승리의 경험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경험이 있으니까 
그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이 여호수아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갑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모세가 자기가 다 해 먹었다면, 
여호수아를 세우지 않았다면, 그리고 죽어버렸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됐을까요? 

모세 사후에 사분오열 되었을 겁니다. 
서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서로 나서서 서로 리더가 되겠다고... 
그들은 가나안 땅 정복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훌륭한 점은, 백성들을 이끌고 나온 것도 훌륭하지만, 
40년 동안 그들과 함께한 것도 훌륭하지만, 
가장 잘한 일은 여호수아를 세운 겁니다.
믿음의 후세대 지도자를, 40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세운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그 일을 해야 됩니다. 
사람이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나라를 비방할 것이 아니고, 
교회가 사람을 세워야 됩니다. 
그 일에 우리가 동참하고, 기도하고, 세워 가고, 위임하고...

뜨겁게 우리는 기도해주는 그런 어른들이 되시고, 
그런 부모님들이 되시고, 그런 교회 학교 선생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어린이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40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길렀습니다. 
그에게 전권도 위임했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한번 해보라고 하셨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여호수아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으며, 
그를 데리고 십계명 받는 자리에 40일 동안 함께 올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여호수아는 훈련받고 세워졌습니다. 
회막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이스라엘 공동체 모두가 여호수아를 40년 동안 키우고 길러냈습니다. 

그 지도자가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의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나님 사람을 키우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여, 저희 교회가 사람을 키우겠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산꼭대기에 올라가게 하시고, 
우리 다음 세대들을 위하여,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우리 교회 학교 어린 생명들, 내가 붙들고 있는 아이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손들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청년 젊은 세대들, 젊은 여호수아로 세우기 위하여 
그들을 믿고, 그 배후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일을 위임하는 능력과 지혜와 넓은 마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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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성막, 회막
성막은 하나님이 백성들과 만나시기 위해 세운 이동식 성소로, 
제사 의식을 통해 죄를 씻는 곳이며, 
회막은 성막이 세워지기 전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막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tent of meeting 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회막은 진 밖에 위치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성막이 세워지기 전, 모세는 진 바깥에 회막을 치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경배했습니다.

 

  • 처음엔 성막이 세워지기 전, 진영 밖에 세워진 장막을 의미 (출33:7).
  • 후에 성막이 세워진 이후에는 성막과 같은 장소를 지칭하기도 함.